서른 살에 결혼하다
 

  시문서에 의하면 보스에게는 두 형제와 한 명의 누이가 있었다.
그는 1481년 6월 서른 살가량 되었을 때 알레이트 고이아르츠 반 덴 메르베네Aleid Goyarts van den Meervenne를 아내로 맞았는데,
부자 상인의 딸인 알레이트는 많은 재산을 자신의 몫으로 갖고 있었다.
알레이트가 보스보다 몇 살 더 많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무려 25살이나 많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그때나 오늘날에도 네덜란드에서 남자가 연하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 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나이 차이가 아주 많았던 것 같지는 않다.
두 사람은 고향이 같으므로 어려서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결혼생활이 36년 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더라도 나이 차이가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초혼이고 보스가 세상을 떠난 후 수년 후 알레이트가 타계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보스 부부는 시장 북쪽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서 살았으며
아버지의 집에서 몇 집 떨어진 곳이었고 아버지의 집보다 더 컸다.
보스 부부의 집은 폭이 5.5미터가량 되었다.
그 지역에는 커다란 집들이 많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했으므로 보스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알레이트는 집 외에도 재산이 있었고 정기적인 수입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보스가 타계한 후 6년을 더 살다가 죽었으며 그녀의 재산은 친정의 몫이 되었다.
보스가 타계한 지 넉 달 후 12월 1일 보스의 누이 헤르베르테Herberte와 화가이면서 조각가인 두 조카는 결혼 후 보스가 이룩한 재산을 자신들이 유산으로 상속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이렇게 주장한 것으로 미루어 보스가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가족의 작업장에서 작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법적 서류에 보스의 재산으로 등록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수입이 생길 때마다 아내에게 주었으며 자신의 몫으로 따로 갖고 있었던 돈은 없었다.

보스 부부는 적십자't Root Cruys(the Red Cross) 건물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 후기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형제회가 여럿 있었고 이 도시의 형제회는 그중 하나였다.
형제회가 추구한 것은 일곱 가지 자비를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마태복음 25:35~46의 말씀을 받들어
굶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제공하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아 주고,
헐벗은 자에게는 입을 것을 주며,
병든 자를 돌봐주고,
감옥에 갇힌 자를 방문하며,
죽은 자의 시신을 묻어주는 것이었다.
형제회 소속 회원들은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곱 가지 의무를 이행하려고 노력했다.
형제회는 네덜란드 북부와 베스트팔리아Westphalia 사람들에게까지도 폭넓게 알려졌으며
규모가 크고 경제적으로 넉넉한 이 단체는 스헤르토겐보스 시민의 종교와 문화에 크게 공헌했다.
1318년 이전에 결성된 형제회는 평신도와 신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이 재정을 담당한 성 요한 교회 내 기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한 성모 마리아상Zoete Lieve Vrouw 앞에서 예배를 올렸다.
형제회는 성가대, 오르간 연주자, 작곡가들을 고용하여 매일 미사를 올렸으며 축일을 성대하게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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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로스코와 스틸


러시아 라트비아의 드빈스크(현재 다우가프필스)에서 1903년에 태어난 마크 로스코(1903~70)는 1913년에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와서 오레곤 주의 포틀랜드에 정착했다.
그해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은 백만 명이 넘었는데 동유럽에서 많은 난민이 왔으며 그 가운데는 유대인이 많았다.
약사인 아버지는 위장병으로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미국에 도착한 지 7개월 후인 1914년 3월에 타계했다.
때문에 어린 로스코는 신문을 배달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학교성적이 우수했으므로 1921년에 명문대학 예일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여가가 생기면 피아노와 만돌린을 연주하고 시를 썼으며 시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내가 화가가 된 이유는 뒤떨어진 회화를 음악과 시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고 훗날 말했는데 클레의 말을 상기시킨다.

당시 아이비 리그 대학에서 일어난 반유대인 감정으로 인해 로스코는 학교 측으로부터 더 이상 장학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통지를 받았다.
로스코는 1923년 자퇴하고 “여기저기 서성거리는 거지”가 되어버렸다.
그는 뉴욕으로 가 봉제공장에서 천을 자르기도 했으며 1925년 10월에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하여 막스 베버의 정물화반에서 6개월 동안 수학했다.

로스코는 1933년 뉴욕의 현대미술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35년 표현주의 그룹 텐The Ten의 창립에 참여했다.
로스코, 애돌프 고틀리브(1903~74) 등이 참여한 이 그룹은 1935년에 창설되어 1940년까지 전시회를 개최했다.
텐 그룹의 화가들은 추상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표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고틀리브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한 지성인이었으므로 로스코와 수준 높은 미학을 논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
1930년 중반부터 로스코는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드 쿠닝, 고르키, 폴록도 있었다.
클리퍼드 스틸과는 평생 우정을 나누면서 만나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고 헤어져 있을 때는 서신을 교환했다.

1940년대 초 로스코는 고틀리브와 거의 매일 만나면서 신화에 관해 대화했으며, 신화를 주제로 생물 형태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들을 결합시키면서 추상적인 초현실주의와 유사한 방법으로 그렸다.
1943년 방송에서 로스코는 말했다.

“우리 작품들의 제목은 잘 알려진 고대 신화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것이 기본적인 심리학적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영원한 상징들이기 때문에 다시 사용했다.
그것은 지역이나 시대에 상관없이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과 동기를 상징한다. ...
현대 심리학은 그것이 외부 생활조건의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꿈과 일상어와 예술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1940년대 중반부터 로스코의 작품에서 초현실주의적 취향은 점차 사라졌고 1947년 무렵부터는 자신의 성숙한 양식을 진전시켜나가기 시작했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로스코는 캔버스를 두 개 혹은 세 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고 강렬한 색채를 엷게 칠한 뒤 그 위에는 좀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명료한 모서리를 지닌 직사각형의 색채 덩어리들을 그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구름 같은 형태는 점차 단순해졌으며 분리된 색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좀더 큰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졌다.
로스코와 스틸의 작품은 당시 가장 유력한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에 의해 컬러필드 회화란 명칭으로 불려졌다.
물감을 물에 엷게 적신 듯이 다양한 색조를 지닌 로스코의 형태들은 구름처럼 시각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듯했다.
그는 관람자들을 완전히 총체적 색채 경험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거대한 규모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친밀한 상태를 창조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대형 그림을 그린다.
대형 그림은 관람자에게 즉각적으로 그 느낌을 전달한다.
대형 그림은 너를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색채는 심리적 우울을 반영하는 듯 흐려지고 변화나 활발한 상호작용이 감소되었다.
그는 말년에 폭음했고, 아내는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요양소로 보내졌다.
동맥류로 고생하던 그는 1970년 초에 동맥을 끊어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말년에 그가 정신적으로 고독해지면서 빛의 시인이라고 불렸던 그의 그림은 자꾸만 어두워졌으며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밤의 풍경화와도 같았다.

미국 노스다코타 주의 그랜딘에서 1904년에 태어난 클리퍼드 스틸(1904~80)은 스물한 살 때 뉴욕을 처음 방문하고 11월 6일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지만,
첫날 강의 45분 만에 학교를 떠나면서 “학교공부는 내가 수 년 전에 이미 실습한 것들로 그걸 다시 배운다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으며,
“어떤 바보라도 캔버스에 색을 칠할 수 있다”면서 “진정한 회화는 양심의 문제이다”라고 했다.
그는 1935년에 말했다.

“나는 고전 유럽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 나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익살스러운 주장과 풍자적인 프란시스 피카비아, 마르셀 뒤샹, 그리고 이론가 앙드레 브르통 또는 1910년대와 1920년대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색다른 외국문화인 피카소와 모딜리아니를 거부했다.”

1935~41년 워싱턴 주립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회화를 연구하면서 플라톤, 롱기누스, 베네데토 크로체를 연구했다.
그는 1941년에 말했다.

“나는 캔버스에서 공간과 사물의 모습을 온전하게 정신적인 본체로 분석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나를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으며, 오로지 나의 에너지와 직관의 한계에 의해 융합하는 도구가 되었다.
자유에 대한 나의 느낌은 이제 절대적이며 무한히 쾌활해졌다.
1930년대 중반부터 나는 이 문제들을 자유롭게 친구와 예술가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스틸이 로스코를 만난 것은 1943년 친구의 집에서였는데, 그때 두 사람은 서로 유사한 미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미학이란 고도의 이성주의에 근거한 컬러필드였다.
스틸은 여러 양식들을 실험한 후, 1946년 금세기의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하면서 확고한 추상표현주의자가 되었다.
이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에 나타나는 초현실주의적인 모호한 형태로부터 출발하여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대형 그림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로스코와 뉴먼이 얇고 조절되지 않은 물감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스틸은 두텁고 표현적인 임파스토 기법을 보여주었다.
캔버스를 가로질러 뻗어나가는 날카롭고 불꽃같은 추상 형태를 그렸다.
그의 작품은 로스코의 것과 유사한 미학을 지녔는데, 신경질적인 이성적 요소가 있고 고도로 문명화된 감성이 있었다.
두 사람의 작품은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아야 이해가 가능한 그런 그림이었다.
스틸은 말했다.

“내가 그림을 드러낼 때 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나의 현존이며 느낌이고 나 자신이다.
나는 색이 색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질이 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이미지들이 형태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 모두가 살아 있는 정신 안으로 융합되기를 바란다.”

그에게 회화는 어떤 것을 묘사하거나 암시하거나 또는 상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회화는 자체의 권리를 가지며 전체처럼 존재했다.
그래서 그는 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었다.
그는 “검정색은 죽음의 색이지만 공포의 색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검정색은 자신에게 “따뜻하고 생산력이 있게 느껴졌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로젠버그의 평론에 반발하는 글을 쓰면서 폴록과 자신의 작품을 동시에 변명하기도 했다.
로젠버그는 스틸을 “살롱 재담가”라고 부르면서 “지성적으로 촌놈”이라고 빈정거렸다.

1957년 그는 모마로부터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으며, 그후 세 차례나 더 참가를 거절하면서 비엔날레의 정치성을 비난했다.
1950년대 중반에 케네스 렉스로스는 스틸의 작품에 관해 적었다.

“사람들은 그의 거대한 작품 앞으로 조용히 걸어가서는 불평 없이 그 안에 넘어진 후 아무 말 없이 그곳으로부터 걸어나온다.”

스틸은 1972년에 미국 아카데미로부터 메릿 메달을 수여받았고 1978년에는 아카데미 회원에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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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해프닝은 조립예술과 환경예술에 가깝지만 

 

예술과 인생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해프닝은 조립예술과 환경예술에 가깝지만 조립예술과 환경예술은 고정되고 정지된 반면, 해프닝은 예술가가 움직임으로써 주위의 사물들에 의해서 조절당하면서 사물들을 눈여겨보게 된다.
케이지는 창작과정에서 우연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하면서 해프닝의 의미는 “자연발생적이며 줄거리가 없는 극적인 이벤트이고,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참여나 반응을 어느 누구에게도 바라지 않으며, 관람자나 해프닝의 행위자 모두 의식이 바뀌기를 목적으로 할 뿐”이라고 말했다.
해프닝에는 대화가 없고 연기가 없으며 상상적 분위기의 연출 또한 없고, 해프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단지 물리적으로 지루함을 보여줄 뿐이다.
해프닝은 넓은 의미에서 머스 커닝햄의 춤과도 관련이 있고 케이지의 음악과도 관련이 있다.
미학의 발전과 함께 해프닝은 완전히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캐프로의 아이디어들은 유럽에까지 알려졌고 이브 클랭(그림 64)과 현대판 무당이라고 불리우는 요셉 보이스의 정치적인 행위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브 클랭의 누드를 이용한 해프닝은 영화 〈몬도가네〉를 통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그림 65).

1962년 잡지 《플럭서스 Fluxus》의 창간자이자 대지예술가 조지 매시우나스는 독일 코롱에서 50명의 음악애호가들이 보는 앞에서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음악적 이벤트를 벌였다(그림 63).
그들은 피아노를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매시우나스는 음악이란 소리를 내는 물질과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예를 들면 망치로 쳐서 나는 소리가 피아노 소리라고 했다.
또한 “똑같은 이유로 인간의 언어나 음식을 씹어 먹는 소리가 예술적 노래 부르기보다 더 확실한 소리다”라고 주장했다.
플럭서스 그룹 예술가들은 주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지만 케이지는 음악의 전문분야에 대한 개념을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한 반면, 매시우나스와 동료 예술가들은 뒤샹을 비롯한 다다이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예술을 거꾸로 뒤집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은 그림을 그린다든가 물체를 제작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했다.

플럭서스 선언문에서 반(反)음악, 반시, 그리고 반예술을 주장하는 문구가 나타났는데 이는 곧 다다의 정신이었다.
플럭서스 그룹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요셉 보이스가 그룹에 가세하면서부터였고 백남준은 보이스를 만난 후 그룹에 동조했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신사실주의라고 불렀는데 팝아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를 네오다다로 이해했다.
팝아트는 세계적인 주류로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에 편승했으며 워홀과 리히텐슈타인 그리고 친구 예술가들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행위를 한 행운의 예술가들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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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와 눈이 달린 숲의 도시 스헤르토겐보스
 

  불가사의한 개성을 지닌 인물로 알려진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는 네덜란드의 스헤르토겐보스 's-Hertogenbosch에서 1450년경에 태어났고
그곳에서 주로 활약하다 1516년에 세상을 떠났다.
보스란 성은 '공작의 숲 the forest(bos) of the duke(hertog)'이란 뜻을 지닌 도시의 명칭 스헤르토겐보스에서 유래했으며
도시명에 겐gen이란 말은 '눈 eyes(ogen)'이란 뜻이다.

보스의 작품 중에 <숲에 귀가 있고 들에는 눈이 있다 The Forests Have Ears and the Fields Have Eyes>라는 제목이 있는데,
일곱 그루의 나무에 두 개의 커다란 귀가 달려 있으며 들에는 일곱 개의 눈이 있는 그림이다.
네덜란드 풍속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매우 낯설게 보여진다.
네덜란드인은 아무도 없는 숲에서 하는 말이라도 누군가가 듣고 인적 없는 들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누군가가 지켜보기 때문에
항상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에서 이런 속담이 유행했으며 보스가 이를 시각화한 것이다.
속담은 앞으로 살펴볼 보스의 작품뿐 아니라 특히 브뢰겔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도시명에 눈이란 뜻이 담겨 있듯이 스헤르토겐보스는 속담과 관련이 있고,
보스는 자신의 고향 도시가 "귀와 눈이 달린 숲 oor-ogen-bos"임을 그림으로 상징했다.

반 세기가량 후인 1546년, 네덜란드의 무명작가가 제작한 목판화 <숲에 귀가 있고/들에는 눈이 있어/모든 걸 듣고, 모든 걸 보지만 아무 말 하지 않는다 The Wood Has Ears/The Field Has Eyes/Hear All, See All, Say Nowt>에서도 숲에 귀와 눈이 널려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왼편 남자의 머리 위 상자에는 교훈이 네덜란드어로 적혀 있다.

"Dat Velt heft ogen Wolt heft oren/Ick wil sien, swijghen ende hooren
숲에 귀가 있고/들에는 눈이 있어/모든 걸 듣고, 모든 걸 보지만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이 말을 영어로 바꾸면 "The field has eyes, the wood has ears/I want to hear all, see all, say nowt"가 된다.
이 목판화는 보스의 그림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아 그린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귀와 눈이 그려져 있어 속담이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스헤르토겐보스 시악대 음악가들이 1530년경에 두른 것으로 추정되는 완장에 "하트-눈-숲 s-hart-ogen-bossche"이라고 적혀 있다.
초록색 벨벳에 은색의 글이 부착되었고 붉은색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했다.
16세기 중반 스헤르토겐보스에서 제작된 방패에도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오겐ogen은 눈이란 뜻이며 보스bos는 숲이란 뜻이므로 스헤르토겐보스는 "하트-눈-숲"이란 뜻이 된다.
구이도 디 사비노Guido di Savino가 안트베르펜에서 1535~40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타일에도 눈이 그려져 있어 매사에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이 널리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얀 반 암스테르담Jan van Amsterdam이 1534~35년에 은으로 제작한 스헤르토겐보스의 봉인을 보면
공작이 숲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이 도시가 당시 숲으로 우거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스의 드로잉에는 들과 숲을 배경으로 중앙에 죽은 나무가 있고 나무 속에 올빼미와 여우가 각기 둥지를 튼 장면이 보인다.
소생이 불가능한 고목에는 잎이 모두 떨어졌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으며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드로잉 맨 위에는 보스가 적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글이 적혀 있다.

“현존하는 진부한 표현inventis을 늘 사용하는 협소한 생각을 가진 자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못함numquam inveniendis을 충고한다.”

보스의 충고는 자신을 비평하는 자들에게 일침을 가하기 위해 적은 것으로 짐작된다.
보스란 성에는 "숲에 귀가 있고 들에는 눈이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으므로
'잘 보고 들어라'
혹은 '침묵을 지켜라'라는 의미를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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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인물을 그린 추상표현주의자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빌렘 드 쿠닝(1904~97)은 뉴욕에서 발흥한 추상표현주의 1세대에 속한다.
추상표현주의는 뉴욕화파 예술가들의 작품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뉴욕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이 1940년대 말에 이르러 성숙한 양식을 구사하게 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뉴욕으로 피신한 유럽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도움이 컸다.
그때부터 1950년대 중반 사이 이루어진 작품들이 가장 뛰어난다.
추상은 사물을 덜 모방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 형태와 색채가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 묘사하려는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고유의 표현적 목적을 갖는 미술을 일컬어 추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장식미술도 추상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자연의 모방으로서의 미술이라는 서구의 전통적인 미술 개념을 탈피한 20세기 회화와 조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추상표현주의는 동일한 양식을 취한 예술가들 그룹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기에 뉴욕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을 지칭하며, 이들 가운데는 추상적이거나 표현적인 작품을 제작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 하나로 묶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1965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뉴욕화파 - 1940년대와 1950년대의 1세대 회화전’에는 뉴욕화파로 알려진 예술가 15명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양식적인 일관성은 전혀 없었다.
활동 시기와 장소가 우연히 일치한 사실을 제외하면, 바넷 뉴먼, 라인하트, 로스코의 모노크롬과 클라인과 머더웰의 충동적이며 거의 서체에 가까운 작품, 잭슨 폴록의 물감뿌리기 작품, 드 쿠닝의 인물화, 상형문자와 같은 고틀립의 작품과 한스 호프만의 추상화를 하나의 화파로 묶은 것은 억지였다.
특히 드 쿠닝은 줄곧 형상을 추구했다.

드 쿠닝은 1904년 로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916~20년 상업장식회사에서 견습생활을 하면서 암스테르담에 있는 조형예술 및 기술과학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갔을 당시에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작품을 제작했지만 아슐리 고르키 및 추상표현주의 운동에서 활발히 활동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그룹에 가세했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아 칸딘스키와 피카소의 말기 입체주의로부터 유래한 보다 진전된 추상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드 쿠닝은 여러 기법으로 그렸다.
그의 초상화와 인물 스케치는 알베르트 자코메티의 후기 이미지를 고대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는 1970년대까지 작품의 주조를 이룬 인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자코메티와는 다르게 그리고 더욱 과격한 방법으로 일그러진 사람의 모습을 그렸고 특히 여인의 이미지를 기분 내키는 대로 일그러뜨렸다.
그는 동시대 화가들 중 유일하게 인물을 작품의 주제로 삼으며 처음에는 남성을 나중에는 여성을 그렸다.

또한 고르키와 다른 화가들처럼 초현실주의의 환상적인 측면에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유기적이고 생물 형태적인 형태를 들쭉날쭉한 선으로 표현한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1948년까지 전시회를 열지는 못했지만 드 쿠닝의 곡선 형태를 담은 차분한 회색 색조의 추상과 모호하게 암시된 생물 형상적 형태는 1940년대 초 뉴욕화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뉴욕의 화가들은 계획되지 않은 자발성을 통해 무의식 상태의 보편적인 창조력을 끌어내어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 하에 초현실주의로부터 즉흥적으로 마음속에 내재하는 것을 끌어내는 원리와 자동주의 기법을 주로 이어받았다.
뉴욕 화가들이 점차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작품의 크기가 거대해진 반면 초현실주의적 주제에 부여했던 중요성은 감소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내용이라고 주장했으며, 회화 재료의 감각적 성질과 그것을 다루는 기법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1940년대 말경 뉴욕화파는 두 그룹으로 분류되기에 이른다.
하나는 드 쿠닝과 폴록을 주축으로 한 그룹으로, 여기에 속한 예술가들은 유럽의 제스처 회화에 해당하는 태도를 표명하면서 회화작품을 완성작이라기보다 점차 드러나는 과정의 기록, 즉 창조과정 중에 있는 예술가의 내적 정신상태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것으로 여겼다.
뉴먼과 라인하트를 주축으로 한 또 다른 그룹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는 표현적이지 않았다.

드 쿠닝의 작품에는 피카소가 1930년대 말에 환상적인 분위기로 그린 작품들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입체주의 기법을 개인적인 의도로 합성하면서 분석입체주의 방법으로 색들을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오로지 검정색과 흰색을 사용하여 사람의 모습을 그리면서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검정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을 당시 잭슨 폴록과 몇몇 화가들이 실험하고 있었다.
친구화가 존 그래엄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은 캔버스와 물감의 논쟁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드 쿠닝의 작품을 보면 그의 말이 실감난다.
드 쿠닝은 입체주의의 영향에 관해 말했다.

“나는 모든 회화 경향 중에서 입체주의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은 불확실한 재현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시적 구조 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작가는 직관을 나타낼 수가 있다.
과거의 미술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보태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회화에서 내가 받아들이는 요소들은 입체로부터 온 것이다.
입체주의는 흐름이었으나 하나의 흐름으로 고정되지 않았다.”

드 쿠닝에게는 그림을 그릴 때 계속해서 고치는 습관이 있었다.
이는 실존주의 조각가 자코메티가 사물을 그리고서 자꾸만 고치는 습관으로 인해 결국 실재보다 작게 그리게 되었다고 한 말을 상기시킨다.
계속해서 고치는 드 쿠닝의 습관은 자코메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고유한 방법이 되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작품에 관해 확고하게 단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의 인생에서 확고한 형태는 적다. 난 밤새 바꿀 수가 있다. ...
나는 커다란 그림을 몇 주 동안 그리며 물감을 늘 젖어 있게 하는데 그래야 그림을 바꾸고 또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은 같은 것을 고치고 또 고친다는 뜻이다.”

그는 대가들의 작품에서 그리고 상업용 포스터에서조차도 이미지를 빌려왔으며 담배광고에 나오는 여인의 립스틱 바른 입술도 빌려왔고, 그런 이미지들을 고치고 또 고쳐서 자신이 바라는 이미지가 될 때까지 바꾸었다.
그리고 모호함은 그가 일부러 남기는 중요한 회화적 요소이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가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겼다고 말했지만 그의 작품을 보면 그런 판단은 그의 작품에 깔린 미학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임을 알게 된다.
그는 “나는 우연히 취사선택하는 화가이다”라고 했다.

드 쿠닝은 사람을 주제로 그렸다.
그는 “한때 나는 사람의 모습을 붉은색이나 파란색으로 그리면서 그런 그림들이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사람을 살색으로 칠할 때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1950년부터 <여인 I>을 출발로 여인의 이미지를 연속해서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1950년 6월부터 <여인 I>을 최소한 50번이나 고치고 또 고쳤다.
그가 더 이상 고칠 수 없었던 것은 그 작품이 트럭에 실려 화랑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여인에 대한 주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는 유화물감보다는 잘 흐르는 아크릴릭을 선호했으며, 유화물감에 물이나 솔벤트를 섞어 사용함으로써 마르는 시간을 더디게 하여 고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드 쿠닝의 아내 일레인은 <여인>에 관해 “그가 그린 흉포한 여인은 그와 동거중인 내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 살 때부터 그에게 생긴 이미지였다”면서 드 쿠닝이 어머니를 그림에서 사나운 여인으로 묘사했음을 시사했다.
일레인의 말이 사실이라 하도라도 드 쿠닝의 여인들은 네덜란드인이기보다는 미국인처럼 보였다.
여인이 신고 있는 구두, 드레스, 립스틱, 그리고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 이 점을 암시했다.
평론가 토마스 헤스는 <여인>에 관해 적었다.
“시끄러운 파티에서의 소녀처럼 ... 그저 앉아 있거나 그냥 그곳에 있거나 또는 웃는 모습인데 이는 미국에서 흔한 일이다.”
여인은 드 쿠닝의 잠재의식 속에 있던 이미지가 돌출한 것이다.

그는 다양한 색을 사용했는데 색채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긴 것은 아이스크림을 제조하는 하워드 존슨즈 레스토랑에서였다.
그는 스물여덟 가지나 되는 아이스크림이 물감처럼 보이더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사람들이 자신의 미학을 쉽게 납득할 있도록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화가들이 특별히 대단한 아이디어를 가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몬드리안은 대단한 예술가이다. 그의 신조형주의적 착상을 보면서 너는 순수조형성을 보겠지만 난 그것들이 웃긴다고 생각한다. ...
나는 마음속에 미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그리지는 않는다.
나는 나를 매료시키는 어떠한 것들을 보게 된다.
그것들은 그림에서 나의 내용이 된다.”

드 쿠닝은 뛰어난 독창성으로 인해 추상표현주의 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으며, 비록 순수추상만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전 생애를 통해 표현주의에서 한 번도 이탈한 적이 없었다.
1980년 에두아르도 치이다와 함께 피츠버그 국제전에서 앤드류 W. 멜론 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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