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에서

로스코와 스틸


러시아 라트비아의 드빈스크(현재 다우가프필스)에서 1903년에 태어난 마크 로스코(1903~70)는 1913년에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와서 오레곤 주의 포틀랜드에 정착했다.
그해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은 백만 명이 넘었는데 동유럽에서 많은 난민이 왔으며 그 가운데는 유대인이 많았다.
약사인 아버지는 위장병으로 수년 동안 고생하다가 미국에 도착한 지 7개월 후인 1914년 3월에 타계했다.
때문에 어린 로스코는 신문을 배달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학교성적이 우수했으므로 1921년에 명문대학 예일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여가가 생기면 피아노와 만돌린을 연주하고 시를 썼으며 시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내가 화가가 된 이유는 뒤떨어진 회화를 음악과 시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고 훗날 말했는데 클레의 말을 상기시킨다.

당시 아이비 리그 대학에서 일어난 반유대인 감정으로 인해 로스코는 학교 측으로부터 더 이상 장학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통지를 받았다.
로스코는 1923년 자퇴하고 “여기저기 서성거리는 거지”가 되어버렸다.
그는 뉴욕으로 가 봉제공장에서 천을 자르기도 했으며 1925년 10월에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하여 막스 베버의 정물화반에서 6개월 동안 수학했다.

로스코는 1933년 뉴욕의 현대미술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35년 표현주의 그룹 텐The Ten의 창립에 참여했다.
로스코, 애돌프 고틀리브(1903~74) 등이 참여한 이 그룹은 1935년에 창설되어 1940년까지 전시회를 개최했다.
텐 그룹의 화가들은 추상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표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고틀리브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한 지성인이었으므로 로스코와 수준 높은 미학을 논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
1930년 중반부터 로스코는 많은 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드 쿠닝, 고르키, 폴록도 있었다.
클리퍼드 스틸과는 평생 우정을 나누면서 만나면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고 헤어져 있을 때는 서신을 교환했다.

1940년대 초 로스코는 고틀리브와 거의 매일 만나면서 신화에 관해 대화했으며, 신화를 주제로 생물 형태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들을 결합시키면서 추상적인 초현실주의와 유사한 방법으로 그렸다.
1943년 방송에서 로스코는 말했다.

“우리 작품들의 제목은 잘 알려진 고대 신화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것이 기본적인 심리학적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영원한 상징들이기 때문에 다시 사용했다.
그것은 지역이나 시대에 상관없이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과 동기를 상징한다. ...
현대 심리학은 그것이 외부 생활조건의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꿈과 일상어와 예술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1940년대 중반부터 로스코의 작품에서 초현실주의적 취향은 점차 사라졌고 1947년 무렵부터는 자신의 성숙한 양식을 진전시켜나가기 시작했다.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로스코는 캔버스를 두 개 혹은 세 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고 강렬한 색채를 엷게 칠한 뒤 그 위에는 좀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명료한 모서리를 지닌 직사각형의 색채 덩어리들을 그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구름 같은 형태는 점차 단순해졌으며 분리된 색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좀더 큰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졌다.
로스코와 스틸의 작품은 당시 가장 유력한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에 의해 컬러필드 회화란 명칭으로 불려졌다.
물감을 물에 엷게 적신 듯이 다양한 색조를 지닌 로스코의 형태들은 구름처럼 시각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듯했다.
그는 관람자들을 완전히 총체적 색채 경험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거대한 규모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친밀한 상태를 창조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대형 그림을 그린다.
대형 그림은 관람자에게 즉각적으로 그 느낌을 전달한다.
대형 그림은 너를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색채는 심리적 우울을 반영하는 듯 흐려지고 변화나 활발한 상호작용이 감소되었다.
그는 말년에 폭음했고, 아내는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요양소로 보내졌다.
동맥류로 고생하던 그는 1970년 초에 동맥을 끊어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말년에 그가 정신적으로 고독해지면서 빛의 시인이라고 불렸던 그의 그림은 자꾸만 어두워졌으며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밤의 풍경화와도 같았다.

미국 노스다코타 주의 그랜딘에서 1904년에 태어난 클리퍼드 스틸(1904~80)은 스물한 살 때 뉴욕을 처음 방문하고 11월 6일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지만,
첫날 강의 45분 만에 학교를 떠나면서 “학교공부는 내가 수 년 전에 이미 실습한 것들로 그걸 다시 배운다는 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으며,
“어떤 바보라도 캔버스에 색을 칠할 수 있다”면서 “진정한 회화는 양심의 문제이다”라고 했다.
그는 1935년에 말했다.

“나는 고전 유럽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 나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익살스러운 주장과 풍자적인 프란시스 피카비아, 마르셀 뒤샹, 그리고 이론가 앙드레 브르통 또는 1910년대와 1920년대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색다른 외국문화인 피카소와 모딜리아니를 거부했다.”

1935~41년 워싱턴 주립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회화를 연구하면서 플라톤, 롱기누스, 베네데토 크로체를 연구했다.
그는 1941년에 말했다.

“나는 캔버스에서 공간과 사물의 모습을 온전하게 정신적인 본체로 분석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나를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으며, 오로지 나의 에너지와 직관의 한계에 의해 융합하는 도구가 되었다.
자유에 대한 나의 느낌은 이제 절대적이며 무한히 쾌활해졌다.
1930년대 중반부터 나는 이 문제들을 자유롭게 친구와 예술가들 그리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스틸이 로스코를 만난 것은 1943년 친구의 집에서였는데, 그때 두 사람은 서로 유사한 미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미학이란 고도의 이성주의에 근거한 컬러필드였다.
스틸은 여러 양식들을 실험한 후, 1946년 금세기의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참가하면서 확고한 추상표현주의자가 되었다.
이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에 나타나는 초현실주의적인 모호한 형태로부터 출발하여 거의 모노크롬에 가까운 대형 그림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로스코와 뉴먼이 얇고 조절되지 않은 물감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스틸은 두텁고 표현적인 임파스토 기법을 보여주었다.
캔버스를 가로질러 뻗어나가는 날카롭고 불꽃같은 추상 형태를 그렸다.
그의 작품은 로스코의 것과 유사한 미학을 지녔는데, 신경질적인 이성적 요소가 있고 고도로 문명화된 감성이 있었다.
두 사람의 작품은 한눈에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아야 이해가 가능한 그런 그림이었다.
스틸은 말했다.

“내가 그림을 드러낼 때 나는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나의 현존이며 느낌이고 나 자신이다.
나는 색이 색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질이 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이미지들이 형태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 모두가 살아 있는 정신 안으로 융합되기를 바란다.”

그에게 회화는 어떤 것을 묘사하거나 암시하거나 또는 상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회화는 자체의 권리를 가지며 전체처럼 존재했다.
그래서 그는 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었다.
그는 “검정색은 죽음의 색이지만 공포의 색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검정색은 자신에게 “따뜻하고 생산력이 있게 느껴졌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로젠버그의 평론에 반발하는 글을 쓰면서 폴록과 자신의 작품을 동시에 변명하기도 했다.
로젠버그는 스틸을 “살롱 재담가”라고 부르면서 “지성적으로 촌놈”이라고 빈정거렸다.

1957년 그는 모마로부터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했으며, 그후 세 차례나 더 참가를 거절하면서 비엔날레의 정치성을 비난했다.
1950년대 중반에 케네스 렉스로스는 스틸의 작품에 관해 적었다.

“사람들은 그의 거대한 작품 앞으로 조용히 걸어가서는 불평 없이 그 안에 넘어진 후 아무 말 없이 그곳으로부터 걸어나온다.”

스틸은 1972년에 미국 아카데미로부터 메릿 메달을 수여받았고 1978년에는 아카데미 회원에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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