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클래스 올덴버그의 조각은 잠재의식을


회화에서 라우센버그와 존스가 널리 알려질 무렵 조각에서 클래스 올덴버그의 위상은 대단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심취해 있던 올덴버그의 조각은 잠재의식을 구현한 것이었다.
그는 “자연의 형태가 기하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면 내용은 애욕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나는 마티스나 희망적인 예술을 추구한 사람들보다는 고야, 루오, 부분적으로 뒤비페, 베이컨, 그리고 인본주의적이며 실존주의적인 예술가들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그는 손목시계, 파이 한 조각, 모자, 바지, 치마, 깃발, 음료수 등을 실제처럼 단순한 형태로 제작한 후 색을 칠했다.
사람들은 그의 조각을 좋아했지만 막상 돈을 주고 사는 것은 꺼렸다.

워홀은 107 이스트 2번가에 있는 상점을 세내어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는 올덴버그를 종종 방문하곤 했다.
화실 안으로 들어서면 석고로 만든 옷, 음식, 구두, 바지, 케이크와 파이가 여기저기 널려 있어 마치 백화점에라도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1961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 올덴버그의 개인전에서 그의 팝 이미지 조각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고 평론가들은 호평했다.
그의 전람회를 관람한 워홀은 혀를 내두르면서 “대단하다! 대단하다!”고 연신 감탄했다.

워홀보다 한 살 많은 올덴버그는 우리가 매일 대하는 물질을 확대하여 새삼스럽게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한 예술가였으며 사람들은 그러한 관람을 즐거워했다.
그는 상점 같은 작업실에서 열정적으로 작업에만 몰두했고 술을 마시면 해괴한 행위를 서슴치 않는 등 에너지를 끊임없이 분출하는 그러한 사내였다.
처음에는 추상표현주의를 받아들였지만 1959년부터 새로운 품종 팝아트에 관심을 가지면서 팝 이미지를 확대 재현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캐프로 등을 만나 해프닝에 참여하기도 했고 즉흥적인 표현주의 방법으로 액션 페인팅하기도 했다.
1960년부터는 석고를 사용하여 음식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조각들은 마치 식당의 메뉴판처럼 보였다.
신문을 밀가루반죽에 개어 부서지기 쉬운 형태로 조각하는 그의 작업과정을 보면서 워홀은 그의 재능을 알 수 있었다.

올덴버그는 도시인생의 외설적이면서 공포감을 주는 〈거리〉(그림 78)를 두 점으로 제작하여 저드슨 교회의 화랑과 루벤(Reuben) 화랑에서 각각 소개했다.
〈거리〉는 루이 페르낭 셀린느의 절망적인 소설 《할부로 구입한 죽음》에서 주제를 구한 것으로 훌륭한 환경예술 작품이다.
그 후 좀 더 희망이 있는 밝은 작품 〈상점〉(그림 76)을 제작했는데 실제 상점을 환경으로 재현한 것으로 이때부터 평론가들은 그가 팝아트 조각의 대가가 될 것임을 예견했으며 그로 인해 환경예술은 더욱 신장될 수 있었다.

상점을 작업실로 사용한 후 그는 수입이 넉넉하지 않아 285달러의 적자를 보았는데 다행히도 맨해튼 57번가에 있는 그린(Green) 화랑의 책임자 리처드 벨라미가 1962년 9월에 그의 개인전을 열기로 했다.
전람회를 앞두고 올덴버그는 자동차만한 크기로 조각을 시작했다.
274cm가 넘는 대형 케이크를 만들었고 아이스크림콘의 길이는 304cm가 넘었다.
이 작품들은 비닐을 꿰맨 부드러운 형태의 조각들이었는데 바느질은 그의 첫 번째 아내 팻이 도왔다.
이처럼 일상적인 물질들을 크게 확대한 그의 작품들은 동화의 한 장면처럼 환상적으로 보였고 거대하게 확대된 낯익은 물체는 관람자들을 시각적으로 즐겁게 했다.
또한 비닐을 이용하여 전화기, 빵굽는 기계, 변기, 선풍기, 타자기 등을 부드러운 형태로 재현했는데 유머는 그의 작품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였다.

그린 화랑에서의 전람회는 경제적으로 큰 이윤을 남겼지만 평론가들은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조각들은 완전추상을 찬양하던 그린버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는데 당시 평론에서 그린버그의 위상이 대단할 때였다.
그러나 올덴버그가 그해 11월 시드니 재니스(Sidney Janis) 화랑에서 대규모로 개최된 ‘신사실주의 예술가들 The New Realists’전에 참여했을 때 팝아트는 화랑의 거리 맨해튼 57번가를 자랑스럽게 행진했다.
전람회의 주제 ‘신사실주의자들’은 프랑스말 Nouveaux Realistes의 번역이다.
과격한 전람회라는 평을 받은 이 전람회에 워홀을 비롯하여 팝아트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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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 머리 속에는 누구의 시인지도 모르는 시가 박혀 있어 이따금 떠오른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게.

이렇게 상상할 수 있는 시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는데,
어느날 남자가 징집되어 전쟁터로 떠났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여인은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남자가 전사했는지 생존해 있는지도 모른다.
여인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여인은 이웃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났을 것이다.

그가 와서 찾거든 떠났다고 전해주오.
남긴 말을 묻거든 말 없이 떠났다고 전해주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거든 그도 울며 떠났다고 전해주오.

여인은 남자에 대한 사랑 혹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진실이 있다.
진실은 엄청 소중해서
발설하기에 두려울 정도로 소중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가 없다.
진실을 발설하면 기가 막힐 것 같아서
진실을 발설하면 가슴이 뻥 뚤려 평생 허전할 것만 같아서
우리는 진실을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야 한다.

진실을 깊은 곳에 묻어두지만,
진실은 이따금 꿈속에서 에드버룬을 타고 창공을 나른다.
나는 창공을 나르다가 진실의 대상을 만난다.
진실의 대상이 내게 주는 위로는 환희이다.
진실을 아주 깊은 곳에 묻어야만 이런 환희를 맛볼 수 있다.
마음 속 깊은 곳은 꿈속이다.

꿈에 누군가를 만났다면,
그 사람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사람이 틀림 없다.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진실을 깊은 곳에 묻으면 환희를 맛볼 수 있다.
꿈은 또 다른 실재인 것이다.
꿈이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허망할까!
꿈은 진실로 가꾸어야 하는 세계이다.
진실이 없으면 꿈을 꿀 수 없다.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진실을 깊은 곳에 묻으면 환희를 맛볼 수 있다.
꿈을 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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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주의


미래주의는 이탈리아의 문화현상으로 기존의 확립된 체제에 대한 공격과 이탈리아를 유럽 문화 발전의 주류 속으로 되돌려놓으려는 독창적인 개혁안을 추구했다.
미래주의는 야수주의, 입체주의와 같은 다른 혁신적인 운동과 어느 정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것들과 달랐다.
또한 미래주의는 전적으로 미술과 관련된 것이 아니며, 진정한 미학적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미래주의는 처음에는 문학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 회화, 조각, 건축, 연극, 음악, 영화와 같은 다른 예술 분야까지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미래주의가 호전적인 민족주의 및 과도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유럽 미술에서 중요한 진보적인 운동의 하나로 평가되는 이유는 수준 높은 회화작품이 제작되었고 미래주의가 다른 예술 분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미래주의의 선동가이며 지도자는 시인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1876~1944)였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이탈리아인 마리네티는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한 후 1899년 제노바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3년 파리에 오면서 아방가르드 문학에 관심이 생겼고 상징주의에 반대하여 ‘본연주의적 naturiste’ 움직임에 동참했다.
1912년 무렵까지 거의 프랑스어로만 시를 썼다.
그는 1905년 밀라노에 거점을 둔 문학 잡지 <포에시아 Poesia>를 창간했는데, 이 문학지는 예술의 자유, 형식의 혁신, 전통의 거부를 표방했다.
마리네티는 이 잡지에 시를 발표했는데, 특히 <속도의 신>과 <자동차에 바침>(1905)에서는 자동차로 대표되는 속도에 중독되고 현대적인 것을 찬양하는 미래주의의 주요한 특징을 예고했다.
미래주의는 1909년 2월 20일 <르 피가로> 지에 마리네티가 작성한 ‘미래주의 선언문’이 게재됨으로써 출범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르 피가로> 지를 수백 장 구입하여 이탈리아에 있는 예술가들에게 일일이 발송했다.
격렬한 무정부주의적 어조의 이 선언문은 매우 선동적인 언어로 새로운 문학 및 사회운동의 탄생을 알렸으며, 젊은이들에게 미래주의의 기치 아래 모일 것을 호소했다.
폭력과 투쟁이 만연한 이 선언문의 전반적인 어조 “아름다움은 오직 투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니체의 영향을 크게 반영하고 있으며,
후에 그 영향은 단절되지만 움베르토 보초니(1882~1916)와 다른 젊은 미래주의자들은 니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리네티는 사상의 지휘자였으며, 그의 현대성에 대한 찬미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즉각적인 지지를 얻었다.

화가이며 조각가 보초니는 1910년에 미래주의 선언문에 서명했고 그 후 미래주의 그룹에서 가장 활동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2년 2월 7일자 <강경파 L'Intransigeant>에서 보초니를 미래주의 예술가 중 가장 재능 있는 화가로 평가했다.
보초니는 산업화된 밀라노와 마리네티의 사상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산업화된 우리 시대의 결실”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보초니, 발라, 카라, 루솔로, 세베리니가 서명한 화가들의 선언문은 1910년 2월 11일에 씌어진 것으로 3월 8일 토라노에 있는 키아렐라 극장에서 보초니에 의해 낭독되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동작은 더 이상 보편적 역동성의 멈춰진 어느 순간이 아닐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그 자체가 영원한 끊임없는 역동적 감각일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나타나듯이 이 선언문의 중심 주제는 ‘보편적 역동성’이었다.
그들이 1910년 4월 11일에 발표한 ‘미학 선언문’의 9개 조항에는 운동에 대한 강조가 담겨 있다.

1. 모방된 형태들은 무가치하며, 본래 형태들만이 찬양받아야 한다.
2.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렘브란트, 고야, 로댕의 도움으로부터, 그리고 지나치게 융통성 있는 표현들처럼 ‘좋은 감각’과 ‘조화’라는 말의 폭정에 근원적으로 반발해야 한다.
3. 미술평론가들은 무가치하거나 해를 입히는 사람들이다.
4. 이미 사용한 적이 있는 주제들은 우리의 무쇠, 자긍심, 열정, 그리고 속력의 소용돌이치는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 깨끗이 일소되어야 한다.
5. ‘미친 놈’이라는 말로 탄압받는 모든 발명가를 우리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우러러보아야 한다.
6. 시에서 운율이 자유롭고 음악에서 대위법이 자유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회화에서도 고유한 보충적인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7. 우주적 동력주의는 회화에서의 동력적 감각처럼 묘사되어야 한다.
8.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에서 가장 근원적인 점은 성실하고 순수해야 하는 것이다.
9. 운동과 빛이 사물의 물질적인 요소들을 파괴한다.

미래주의는 2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단계는 1909년의 발단에서부터 1916년 보초니의 사망으로 인해 사실상 그룹이 해체될 때까지이며,
두 번째 단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마리네티가 시도한 재건의 시기이다.
20세기 미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첫 번째 시기에서 예술가들은 선언문에서 제안된, 과장된 공식적 표명을 합리화할 수 있는 회화 언어를 성취하고자 했다.
그들은 가에타노 프레비아티(1852~1920)의 분할주의 기법으로 작업하면서 움직임과 변화에 대한 감각을 부여하려고 했다.
프레비아티는 쇠라나 시냐크와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색채 이론이야말로 현대 화가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며, “현대인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접합”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화가들에게 지침을 제공하기 위해 <회화 기법>(1905)과 <분할주의의 과학적 원칙>(1906)을 출간했으며, 1913년에는 <회화에 관하여: 기술과 기교>를 출간했다.

밀라노의 미래주의자들은 1911년에 8월 24일자 <라 보체> 지에 실린 소피치의 글 ‘피카소와 브라크’와 세베리니의 밀라노 방문을 통해 입체주의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소피치는 입체주의는 인상주의 혁명의 확장이며, 인지된 사실을 보다 통합적으로 평면에 투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피카소에 대해 “대상 자체의 주위를 돌면서 그것을 모든 각도에서 시적으로 고찰하고, 여기에서 받은 연속적 인상에 충실하면서 이를 묘사한다.
결국 그는 인상주의자들이 오직 한 순간의 한 측면만을 표현한 것과 같이 자유롭게, 대상의 총체성과 감정적 영속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래주의자들은 이런 면은 수용하면서도 입체주의자들이 대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순수한 회화적 가치에만 관심을 둔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입체주의를 단지 은폐된 아카데미즘으로 묘사했다.
미래주의자들은 입체주의의 정물 대신 그들 특유의 이미지와 표현을 통해 현대생활의 역동적인 에너지와, 현대성 및 기계 시대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표현했다.
또한 입체주의와는 다르게 그림의 중심으로 관람자를 끌어들이고자 했다.

루솔로는 1913년 자신의 선언문 <소음 미술 L'arte dei rumori>을 출간했는데, 여기에서 음악은 전적으로 자연의 소음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여 슈토크하우젠과 존 케이지를 예견했다.
카를로 카라도 1912년 자신의 선언문 <소리, 소음, 냄새 회화 La Pittura dei suoni, rumori, odori>에서 이전의 많은 선언문들보다 격렬한 어조로 비시각적인 여러 감각들이 색채와 형태의 추상적 조합으로 표현될 수 있는 회화를 옹호했다.
한편 발라는 색채, 움직임, 소리까지도 포함하는 다양한 재료의 조각으로 이후의 키네틱 조각의 몇몇 양상을 예고했다.

이 시기 동안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점점 더 입체주의적인 언어로 움직임의 종합적 표현을 계속해서 실험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여 점차 분열되어 갔으며, 1914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결속력 있는 미학 그룹을 구성한다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후 미래주의의 역사는 그룹의 역사라기보다는 개별적인 예술가들의 역사이며,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주된 추진력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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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캠벨 수프 통조림 그림을


워홀은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고 싶었지만 뉴욕에는 그를 반기는 화랑이 없었으므로 순수미술에서의 첫 개인전은 로스앤젤레스의 페러스(Ferus) 화랑에서 가질 수밖에 없었다.
워홀이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중개상 어빙 블럼과 아내 베티 애서를 만난 것은 구겐하임 뮤지엄에서 열린 구스턴의 전람회 기념 파티에서였다.
블럼은 그날 아침 앨런 스톤의 화랑에 갔다가 가격이 각 100달러로 붙어 있는 워홀의 캠벨 수프 통조림 그림 두 점을 보았다.
애서는 워홀의 그림을 사고 싶었지만 남편이 사줄 기미를 보이지 않아 포기했다.

뮤지엄에서 몇 블럭 떨어지지 않은 워홀의 화실에 초대받은 블럼 부부는 수십 점의 캠벨 수프 통조림 그림을 보았다.
블럼이 “어째서 만화그림은 그리지 않죠?” 하고 묻자 워홀은 “리히텐슈타인이 유사한 주제로 그리고 있는 데다 그가 만화를 거의 완성시켰기 때문에 나는 수프 통조림을 그립니다”라고 대답했다.
블럼은 화실에 오래 머물면서 그의 그림에 관심을 보였으며 워홀에게 “당신 그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나요?”라고 물었는데 이 말은 그를 대변하는 중개상이 따로 있느냐는 뜻이었다.
“마사 잭슨이 관심을 보였지만 난 아직 화랑에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자 블럼은 캘리포니아에서 전람회를 가질 생각이 없냐고 물었고 워홀은 “원더풀!”이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1962년 7월에 전람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블럼은 그날 수프 통조림 그림 두 점을 가져갔고 애서는 우표를 64번 반복하여 그린 그림을 샀다.
블럼 부부가 떠나고 며칠 후 워홀은 전람회를 위해 수프 통조림 그림들을 캘리포니아로 발송했는데 32개의 수프 통조림 그림도 포함되었다.

이 시기에 팝아트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으므로 언론은 관심을 가지고 팝아트 예술가들을 주시했다.
1962년 5월 11일자 《타임》은 〈케이크 한 조각 스쿨 The Slice of Cake School〉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일군의 화가들은 현대문명의 가장 진부하고 저속하기조차 한 장식물도 캔버스로 운반하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사를 쓴 사람은 티보드, 리히텐슈타인, 로젠퀴스트, 그리고 워홀의 작품에 관해 언급했고 워홀의 사진도 게재했다.
통조림따개로 캠벨 수프 통조림을 막 따려는 자신의 그림 앞에서 워홀이 한 손에는 통조림, 다른 손에는 숟가락을 들고 먹으려는 시늉을 한 사진이었다.
뉴욕에 아직 워홀을 받아들인 화랑이 없을 때 이러한 사진이 《타임》에 소개된 것은 워홀에게는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다.

이제 워홀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져 미술계 사람들의 화실 방문이 빈번해지자 워홀은 그들이 올 때마다 조수 나단 글럭으로 하여금 서둘러 상업미술품들을 지하실로 옮기도록 하여 자신이 순수미술에 전념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그의 화실에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레코드판이 많았는데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레코드는 모두 있었다.
워홀은 축음기를 조작하여 엘비스의 노래 〈사랑에 빠진 십대 Teenager in Love〉가 계속해서 흘러나오도록 했는데 반복되는 엘비스의 노래는 반복하여 그리는 그의 미학과 잘 어울렸다.
이처럼 워홀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부각시키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 그런 일에 지나치게 세심했다.

예정대로 1962년 7월 9일부터 8월 4일까지 로스엔젤레스 페러스 화랑에서 개인전이 열려 화랑의 세 벽에 32점의 수프 통조림 그림이 걸렸다.
페러스의 라이벌 화랑은 진열장에 80~90개의 실제 캠벨 수프 통조림을 쌓아놓고 “여기에서 통조림을 사십시오. 1달러에 다섯 개 드립니다”라고 선전하여 워홀의 전람회를 망치려고 했지만 오히려 전람회를 널리 알리는 역효과를 초래해 사람들은 워홀의 수프 통조림 그림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여섯 명의 예술품 수집가들이 블럼에게 워홀의 통조림 그림을 각 100달러씩에 모두 사겠다고 제의하더니 무슨 꾀가 생겼는지 일부만 사겠다면서 먼저의 제의를 철회했다.
블럼은 그림 모두를 사야지 예술가가 일부만은 팔지 않으려 한다고 퉁겼는데 사실 워홀은 일부라도 팔고 싶어 했다.
블럼은 딴 생각이 있었는지 자신이 32점을 모두 사겠다면서 가격을 깎아달라고 했다.
워홀은 한 점에 50달러씩 쳐서 모두 1,500달러를 요구했고 블럼은 1,000달러에 사겠다고 해서 승낙했다.
블럼은 워홀에게 매달 100달러씩 10개월 동안 송금했다.

워홀은 같은 캠벨 수프 통조림을 소재로 해서 캔버스에 통조림 하나가 가득 차게 그리기도 하고 상표가 떨어져 나간 통조림을 그리기도 했으며(그림 75) 50개, 100개, 200개의 통조림(그림 66)을 캔버스에 가득 차도록 그림으로써 같은 주제 내에서 다양한 작품을 제작했다.
뒤샹은 워홀의 수프 통조림 그림에 관심을 표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만일 캠벨 수프 통조림을 50번 반복해서 그린다면 통조림의 시각적 이미지에는 관심이 없어지고 통조림 50개를 캔버스에 그려 넣는 일에만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수프 통조림 그림을 본 사람들은 왜 슈퍼마켓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을 그리냐고 물었으며 대량생산이나 소비주의와 광고에 반발이라도 하는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이반은 수프 통조림 그림을 보고 워홀의 특허가 될 만하다고 아주 만족해했다.
워홀은 수프 통조림을 반복해서 그림으로써 리히텐슈타인과 자신의 그림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버몬트의 베닝턴 대학에 재직하고 있던 영국의 평론가 로렌스 알로웨이는 1962년 봄 학기에 학생들에게 워홀의 수프 통조림, 코카콜라 병, 하인즈 케첩 그림에 관해서 강의하면서 워홀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했다.
또한 슬라이드로 워홀의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토론을 제안했으므로 팝아트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커졌다.

그 학생들 가운데 수지 스탠턴은 아예 워홀에 관해 논문을 쓰면서 무엇이 워홀로 하여금 그러한 그림들을 그리게 했는지 연구했다.
16명의 학생들이 워홀의 화실을 방문할 때 그녀도 같이 방문했다.
스탠턴이 논문에서 인용한 워홀의 말들을 보면 그의 단순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나와 함께 수프를 나누어 먹지 않겠어요?
막 점심식사를 하려던 참인데. 아니 아침이야, 저녁이야?
아무려면 어때, 시간이 중요한 건 아니지. 난 시간에 상관하지 않고 늘 수프를 먹거든요.
난 수프를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수프를 좋아하면 난 기분이 좋아요.
… 내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항상 이런 수프를 내게 먹였지요.
이제 어머닌 돌아가셨지만 수프를 먹을 때면 이따금 어머니 생각이 나서 지금이라도 어머니가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워홀의 형 폴에 의하면 어머니는 그들 형제에게 늘 캠벨 수프를 먹였다고 한다.
워홀은 개인전이 열리던 1962년 7월과 8월 무더운, 여름 땀을 흘리며 흑백사진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하는 일에 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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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죄로 어떤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
 

  모교도소 제소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지난번 내 책을 읽고 싶다며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어와 원하는 책들 외에 더 보내주었더니 감사하다는 답장이다.
그가 무슨 죄로 어떤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곳에서 뉘우침과 더불어 새로운 생을 갈망한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십수년 여러 번에 걸쳐 몸에 벤 것이 징역살이였지만 뒤늦게 지금 찾을 수 있었던 새 삶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구요.
그동안 가까웠던 주위사람들 다 떠나버린 혼자만의 외로움을 죄로써 망각하며 살아왔던 세월이 허무함으로 남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님을 믿은 안에서 감사하겠습니다.
무엇인가라도 붙잡고 의지하고 싶었던 것이 하나님이어서 다행인 것 같습니다.
창조주이시라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요.
...

올해 한 살 더 먹어 서른아홉되었지만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마음에 새 삶 살겠다는 각오로 지금이 시작임을 생각하고 노력 또 노력 해볼랍니다.
이 세상에 혼자라는 외로움처럼 무서웠던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좌절을 하고 반복되는 죄업을 만들어 오게 되는 세월이었습니다.
이곳에서도 아무도 찾아와주는 사람 없는 몸이지만 새로움을 믿음을 갖고자 했을 때부터는 조금씩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아가야 함을 감사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또 책을 접하고 싶은 마음에 망설이고 망설이다 글을 올리는 용기도 내었구요."

이상이 그가 보낸 편지의 주 내용이다.

글씨가 반듯하고 석 장 모두 정성껏 쓴 흔적이 역력하다.
첫 눈이 내리던 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날 그도 창밖으로 눈을 바라보고 있었고 책을 받게 되어 몹시 반가웠다고 한다.

무슨 죄로 어떤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라도 바르게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사회는 죄값을 치러야 한다고 형벌을 부과하지만 죄의 값은 사회도 치러야 한다.
사회가 부정부패로 가득 차고 몰인정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게 되면 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돈 있고 권력에 빌붙은 자들은 죄를 지어도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그 밖의 사람들이 저지른 죄에 형벌을 물릴 자격이 없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그 사회는 관용을 베풀어야 마땅하다.
비리가 판을 치는 사회는 죄를 키운 책임이 있다.
그리고 첨예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죄인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비도덕적인 사회는 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져야 마땅하다.

제소자를 별난 사람으로 취급하려는 일반인들의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 충동적으로 죄를 범할 수 있다.
이성보다는 분노가 끓으면 판단을 잘못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뉘우치고 새 삶을 살기 원하면 사회는 기회를 주어야 하고 우리는 그런 사람에 대해 편견을 버려야 한다.

추운 겨울에 많은 제소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그들 모두 합당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
지나치게 부과된 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최모 씨처럼 새로운 삶을 구가하며 뉘우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

보내준 책들을 다 읽을 즈음 책을 더 보내주어야겠다.
모쪼록 새로운 마음에 맑은 정신을 갖고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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