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제임스 로젠퀴스트도 워홀과 마찬가지로

 

제임스 로젠퀴스트도 워홀과 마찬가지로 상업미술에서 순수미술로 들어간 예술가였다.
1960년부터 주로 잡지에서 주제를 구하여 커다란 그림을 그린 그는 “우리는 라디오와 TV 그리고 시각 매체로부터 공격받고 있다 …… 그것들은 힘 있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그것들을 바라볼 때 나는 놀라고 흥분하며 그것들에 매료된다 ”고 말했다.
“나는 그림에서 낭만적인 요소를 피하려고 한다”고 말한 그의 그림에는 자전적인 개인 상징이 있다.

1961년 앨런 스톤이 로젠퀴스트의 화실을 방문했고 곧이어 일레나 소나벤드와 이반 캅도 방문했으며 캅은 그를 워홀에게 소개했다.
스톤은 로젠퀴스와 인디애나를 묶어 두 사람의 전람회를 열어주었는데 성공적이었다.
워홀은 전람회에 가서 로젠퀴스트가 음식물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회화 주제에 대해 다시 숙고했다.

1962년에 그린 〈모세관 현상〉(그림 100)은 나무가 한 그루 있는 풍경화로 영화 포스터처럼 커다란 그림에 여러 개의 작은 캔버스를 부착했다.
〈머스 커닝햄의 무도회〉(그림 101)는 커닝햄의 구두를 신은 발을 확대한 캔버스를 따로 삽입하여 관람자들이 환각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는 이미 알려진 이미지들을 혼용하여 콜라주 방법으로 구성하기도 했다.

로젠퀴스트의 그림에 정치적인 요소가 등장했는데 특히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부통령이던 린든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가 이듬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 당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끼어든 것은 대학생들의 시위를 자초했는데 로젠퀴스트도 반전운동에 동참하여 정치적인 주제를 그림으로 시위했다.
그의 대작 〈F-111〉(그림 102)은 그런 그림들 가운데 하나다.
26m가 넘는 이 벽화는 카스텔리 화랑 벽을 꽉 채웠다.
그는 그림에 파이어스톤(Firestone) 타이어를 집어넣고 케이크를 그려 넣었으며 스파게티를 확대하여 캔버스 바닥에 깔고 비치파라솔 아래 원자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그려 넣어 전쟁이 인간의 소박한 삶을 파괴한다는 것을 상징했다.
소녀의 머리카락을 말리는 헤어드라이어는 마치 미사일의 윗부분처럼 보였다.
로젠퀴스트는 미국 전투기가 북베트남을 공격한 것을 비난하면서 벽화로 시위한 것이다.

그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사물을 재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실주의 예술가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의 그림은 옛 대가들의 그림에서 강조되었던 커다란 아라베스크와 마찬가지로 사물의 부분이다. 강조하는 곳에 감성, 색,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
… 난 가끔 예술을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소리와 동작 없이 시각적으로 직접 대화하려고 그림을 진전시킨다.
화가란 그림을 대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고 모든 사람들은 직관으로 그림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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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독수리님에게
 

  나의 글을 꼼꼼이 읽고 계신다니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것에 관해서는 저서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에서 이미 기술해두었던 터라서 내 책의 내용을 일부 전함으로써 답변합니다.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이 하나가 아니라 둘인 이유는,
나폴레옹 실각 이후 다비드는 브뤼셀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부유층의 초상화를 그리며 살다 그곳에 뼈를 묻게 됩니다.
다비드는 1825년 12월 29일 아침에 아들 외젠의 품에 안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건강은 1820년대에 이미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다비드는 1822년에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브뤼셀에서 똑같은 크기로 다시 그렸습니다.
처음 그린 것은 나폴레옹 정부로부터 이미 돈을 받았지만 그의 실각 이후 그 작품은 공공장소에 걸 수 없도록 했으므로 루브르의 창고에 보관된 상태로 있었습니다.

1821년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타계하자 사람들이 이 작품에 관심이 많아졌고 심지어 미국인들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미국인 사업가는 이 작품을 미국으로 가져가서 입장료를 받고 관람시키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다비드에게 말했습니다.
다비드는 원작을 그릴 때 자신을 도운 조르주 루제에게 한 번 더 자신을 돕게 해서 1821년 이것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억에 의존해서 그리는 것이라서 정확하게 재현할 수 없을 때는 브뤼셀 고관이나 친구들의 모습들로 나폴레옹의 신하들의 모습을 대신했습니다.
헤어스타일과 의상은 현재의 유행을 따랐으며 중앙 갤러리에 있는 다비드의 아내와 딸 그리고 자신은 현재의 나이에 어울리는 모습이었으므로 세월이 지났음을 보여줍니다.
갤러리에 있던 비엥은 이미 타계했으므로, 다비드는 벨기에인 제자로서 그의 브뤼셀에서의 활동을 도와준 드니 오드바에르의 모습을 대신 삽입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윌리엄 1세의 궁정 화가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오드바에르는 1820년에 다비드의 초상을 그렸고 다비드는 그에 대한 답례로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에 그의 모습을 삽입했습니다.
따라서 20년 전의 실제 대관식과 이때 그린 그림에서의 참석자들의 모습에는 많은 차이가 생겼습니다.
다비드는 늙고 병들었으므로 많은 부분을 루제가 완성시킨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세밀한 묘사에 있어 원작에 미치지 못하는 건조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1822년 런던에서 소개되었을 때 <타임스>는 "칭찬할 만한 점이 없으며 ... 왁스를 바른 하나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혹평했으며 그 밖의 언론들도 혹평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흰독수리님,

원작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침 지난 목요일 중앙대에서 특강할 때 사용하느라고 적어둔 것이 있어 여기에 삽입한 것입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1805~07), 유화, 6.3-9.8미터

이 작품은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관식이 끝난 후 12월 18일 ‘황제의 최고 화가’의 직위에 오른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것이다. 다비드는 1774년 로마 상을 수상하여 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이탈리아로 유학 가서 고대 미술에 탐닉했다. 그는 1783년 왕립 미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색채보다 선묘를 중시했으며 표현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거부했다. 그가 선택한 주제는 자기희생, 의무에 대한 헌신, 정직, 금욕 등 시민이 지켜야 할 덕목이었다. 이런 미덕은 역사적 사실로서 낭만적으로 해석되어 고대 로마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비드는 프랑스 대혁명에 적극 공감하여 의원이 되었고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했다. 그는 ‘혁명의 순교자’를 주제로 <르펠르티에의 죽음>, <마라의 죽음>, <바라의 죽음>을 그렸는데 초상화를 비극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작품들이다. 그는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이후 투옥되었다가 혁명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 이유로 이혼한 전부인의 탄원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다비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불리울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나폴레옹의 실각과 함께 브뤼셀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타계했다.

다비드가 대관식을 세로 가로 6.3-9.8미터의 크기로 그린 것은 나폴레옹의 주문에 응한 것으로 나폴레옹은 크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소르본 광장의 클루니 교회 내부의 큰 공간을 노트르담 내부처럼 꾸미고 인형들을 배치하여 전체적 구성을 고안했다. 내부 디자인을 파리 오페라의 무대 디자이너 이그나스 외젠 마리 드고티가 맡았다. 이 작품은 그 날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은 것과는 다르다. 사실이 왜곡된 장면이다.

대관식이 있은 후 1년 동안 드로잉으로 준비를 마친 다비드는 1805년 12월 21일 커다란 캔버스를 걸고 작업에 들어갔다. 작품이 완성된 것은 1807년 11월이었지만 다비드는 이듬해 1월 부분적으로 수정을 가했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을 정교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리허설 때 합창단석에 앉아 드로잉으로 준비했기 때문이다. 대관식에는 약 2백 명이 동원되었으며 다비드가 묘사한 70명 가량의 얼굴이 실재와 닮았는데 그들이 작업장으로 와서 모델이 되어 주었고 대관식 때 입었던 의상을 보내줘 다비드는 정확하게 실제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위한 습작에서 보듯 다비드가 처음 의도한 것은 나폴레옹이 조제핀의 관을 자신의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고 검을 쥔 왼팔은 자신의 가슴 부위에까지 올리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었다.(다비드 231) 화가 제라르는 그런 제스처는 기품이 없고 웃긴다면서 다른 포즈로 그리라고 충고했다.(다비드 228-1) 또한 다비드는 습작에서 보듯 교황이 손을 무릎에 얹고 앉은 모습으로 그리려고 했는데 나폴레옹이 반대하면서 먼 길을 와서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세로 있어서는 안 되고 교황이 한 손을 들어 축복하는 제스처로 그리라고 명했다.(다비드 228-3) 교황은 꼭두각시로 대관식에 동원되었지만 그림에서 가톨릭을 대표해 프랑스 황제의 등극을 인정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를 원한 것이다.

대관식에는 참석했지만 그림에 빠진 사람도 있는데 이슬람교도이자 터키 대사인 모하메드 에펜디는 자신이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이슬람의 경전 <코란>에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므로 그림에서 삭제해달라고 다비드에게 청했다. 에펜디와는 반대로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참석한 것으로 삽입된 인물이 있는데 교황 바로 옆에 서 있는 추기경 카프라라이다. 그는 병중이어서 참석하지 못했지만 다비드가 삽입했다. 마담 메레로 불리운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지아도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다비드는 그녀를 갤러리 중앙, 조제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삽입했다.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아들 루시앵과 제롬이 나폴레옹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는 바람에 눈 밖에 나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한 데 대한 반발로 로마로 추방된 루시앵을 만나러 갔기 때문이다. 마담 메레가 앉아 있는 윗층 갤러리에 늙은 상원의원 비엥이 있고 그 옆에 목탄과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다비드 자신과 그의 가족이 있다.

조제핀의 무겁고 기다란 옷자락을 잡아주는 두 여인은 로베의 애인 마담 에밀 루이즈 드 라 발레트와 그녀를 섬기는 마담 샤스툴레 드 라 로세푸콜드이다.(다비드 228-2) 그녀는 작은 키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키도 크고 우아하게 생긴 여인이다. 다비는 마흔한 살의 조제핀을 젊은 신부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조제핀은 나폴레옹보다 여섯 살이 많다. 나폴레옹의 얼굴은 고대 동전이나 메달에 새겨진 모습처럼 보이는데 다분히 다비드의 의도대로 묘사된 것이다.

그림 왼편 가장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나폴레옹의 형제들로 조제프와 루이이다. 나폴레옹의 두 형제에 대한 구성은 전체적인 미적 관점에서 변경되었는데 두 형제가 나폴레옹 가까이 있게 될 경우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장면이 모호해지므로 두 사람을 조제핀 뒤로 있도록 변경해 구성했다. 나폴레옹은 1806년 두 사람에게 왕국을 주었는데 조제프는 나폴리의 왕이 되었고 루이는 네덜란드 왕이 되었다. 형제 옆에 다섯 여인이 있는데 누이들로 캐롤린 뮈라, 폴린 보르게제, 앨리자 바치오키오이고, 그 옆에 왕자 샤를의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은 루이와 결혼한 조제핀의 딸 오르탕스이며, 그녀 옆이 조제프의 아내 줄리이다.(다비드 228-4)

화면 오른편 관람자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과거 나폴레옹이 총애하던 집정관으로 회계국 장관이 된 샤를 프랑수아 레브룬이고 다른 한 명은 대법관 캉바세레스로 두 사람 모두 의식에 사용되는 왕위의 표상인 왕권의 홀과 정의의 손을 들고 있다.(다비드 228-5) 왕권을 상징하는 보주를 벨벳 쿠션 위에 받쳐든 사람은 그랑드 헌츠만이며, 그 옆에 의전 장관 탈레랑이 서 있다. 오른쪽 합창단 단원 소년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검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폴레옹의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이자 조제핀의 아들인 왕자 외젠이다.

다비드는 이 그림을 그릴 때 피터 폴 루벤스의 1622~25년 작품 <마리 드 메디치의 대관식>을 참조했다. (다비드 234)

나폴레옹은 이 작품이 그려지는 과정을 직접 보지 못했는데 1807년 대부분을 파리 밖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다비드의 작업실에서 이 작품을 처음 본 것은 1808년 1월 4일이었다. 샤를-에티엔 모트가 그 날의 장면을 묘사했다.(다비드 235) 나폴레옹은 한 시간가량 이 작품을 바라보다 말했다.

“이건 작품이 아닙니다. 사람이 작품 속으로 걸어들어 갈 수 있습니다. 어디에나 생생함이 있고 ... 훌륭합니다. 다비드, 선생이 내 생각을 알고 있었고 나를 프랑스의 기사로 만들었습니다. ... 다비드 선생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나폴레옹은 1808년 10월 22일 이 작품이 살롱전에 전시된 날 다비드에게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그 날의 장면을 다비드의 제자 앙투안-장 그로(1771~1835)가 캔버스에 담았다.(다비드 236) 훈장을 받음으로써 다비드는 궁정의 멤버가 되었으며 대물림할 수 있는 문장에 그에게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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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시즘


보티시즘이란 명칭은 1913년 말 에즈라 파운드가 혁신적인 이론들의 혼란 속에서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새로운 종합으로 끌어내고 결집시키는, 소용돌이치는 회오리 같은 힘의 개념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는 또한 모든 예술적 창조는 감정적인 돌풍의 상태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미래주의자 보초니의 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명칭에 의해 암시되는 시각적 이미지는 거칠고 각지며 사선을 향하는 새로운 작업의 양식과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혼란스럽고 불화가 잦으며 과장된 보티시즘Vorticism의 근원은 미술 운동의 출현에 있어 그다지 특별한 것은 아니며 다다,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보티시즘의 본래 목표는 미래주의의 역동적 스피드와 입체주의의 정적인 기념비적 특성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프랑스 예술가들이 선호한 실내의 작업실 모티프를 단호히 거부하고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열정적으로 묘사한 기계 이미지를 매우 냉정하고 고전적 방식으로 다루어 독창적인 종합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보티시즘 초기에 혼란스럽게 대립되는 경향 하에서도 유지되었던 일관성과 지침은 더 이상 발전해나가지 못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 운동은 사실상 소멸되었으며, 그것을 되살리려던 이질적인 모임인 그룹 X의 시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보티시즘의 중요성은 나중에 가서야 드러났다.

1974년 리처드 코크는 적었다.
“지금에서야 보티시즘이 1930년대 영국의 두 번째 추상 운동을 자극한 선례라고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감탄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자기만족에 빠져 있고 침체된 섬나라의 진취적이지 못한 성향을 비난한 사도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보티시즘Vorticism은 격렬하고 격정적인 ‘반란자 rebel’ 그룹이 주창한 이념에 붙여진 명칭으로 이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 미술에서 최초로 추상을 지향하는 조직적인 운동이 되기를 열망했다.
이 운동은 로저 프라이의 오메가 공방에 속한 예술가들 사시의 불화로 시작된 것으로 프라이와 윈덤 루이스의 개인적인 다툼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런던 태생으로 화가이며 평론가 로저 엘리엇 프라이Roger Eliot Fry(1866~1934)는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서 이학 학위를 받은 뒤 1891년 이탈리아, 이듬해에는 파리의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프라이의 비평은 당시의 기호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면서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1901년 <디 애시니엄 The Athenaeum> 지의 평론가였고, 1905~10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관장을 역임했으며, 1910~19년 <벌링턴 매거진> 편집자로 활약했다.
1906년 폴 세잔을 발굴하면서 현대 프랑스 회화 유파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으며, 이들을 후기 인상주의라는 이름 아래 영국에 소개했다.
프라이는 프랑스 화가들 쇠라, 시냐크 등의 신인상주의자들과 구별하기 위해 후기 인상주의란 명칭을 만들어냈다.
당시 표현주의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그는 독일적 취향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기 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913년 프라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겉치레의 ‘지나치게 꾸민’ 인공물 대신 매일 사용하는 잘 디자인된 물건들을 생산하기 위해 오메가 공방을 만들었다.
그의 목적은 새로운 양식으로 디자인하는 진보적인 예술가 그룹을 주변에 모이게 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기호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프라이는 윈덤 루이스와의 개인적인 불화로 루이스 및 그의 동료들과 결별했고, 이들은 레벨 아트센터를 설립하여 보티시즘 운동을 발전시켰다.
후에 프라이는 런던 그룹이 캠던 타운 그룹에서 파생되었을 때 이 그룹에 가입했다.
화가로서 프라이는 블룸즈버리 그룹 사이에서 유행하던 일반적인 양식과 조화를 이루면서 꼼꼼하지만 평범한 자연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영국 화가, 소설가, 평론가 퍼시 윈덤 루이스Percy Wyndham Lewis(1882~1957)의 아버지는 미국인이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을 조상으로 둔 영국인이다.
1898~1901년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뮌헨, 네덜란드, 스페인, 파리를 여행했고, 그 중 6개월 동안을 뮌헨의 하이만 아카데미에서 작업했다.
1909년 영국에 정착하여 1911년 캠던 타운 그룹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회부터 3회까지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1913년 7월 연합예술가협회 살롱에 출품했으며 같은 시기에 로저 프라이의 오메가 공방에 참여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 해 10월 프라이와 의견 충돌을 빚은 뒤 프레더릭 에철스Frederick Etchells(1886~1973), 에드워드 워즈워스Edward Wadsworth(1889~1949), 커스버트,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1922~)과 함께 오메가 공방을 떠났으며 스스로를 ‘반란자’라고 부르면서 마리네티를 숭배하는 네빈슨이 그를 기념하여 주최한 공적인 저녁 만찬에서 자신들이 미래주의의 선동자 마리네티를 지지한다고 밝힘으로써 반항심을 드러냈다.
이들의 분열이 프라이의 후기 인상주의 미학과 그들이 열정적으로 추구한 추상주의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반감을 나타낸 것이 분명하다.

1913년 12월~1914년 1월 퍼시 러터의 기획으로 브라이턴에서 여러 경향의 작품들이 출품된 ‘캠던 타운 그룹과 그 외의 예술가들’ 전시회는 모든 다른 양식과 그룹이 공통적인 기반을 찾아야 한다는 의도를 지닌 포괄적인 성격의 런던 그룹의 형성과 연결되었다.
루이스는 전시회에 포함된 입체주의 전시실의 도록에 도전적인 서문을 썼고 이 글은 런던 그룹 탄생의 기원이 되었다.
반란자 그룹은 ‘입체주의 전시실’이라는 분리된 장소에서 전시했으며 루이스는 그 전시회를 위해 미래주의와 블룸즈버리 그룹의 미학에 반대하는 새로운 운동의 탄생을 주장하는 글을 썼다.
이 전시회에서 데이비드 봄버그라는 젊고 명석한 화가가 그룹에 가담했다.
그들은 1914년 3월 공식적인 제1회 런던 그룹 전시회에 참여하여 정통적인 평론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조각가 엡스타인과 저술가 에즈라 파운드, T. E. 흄이 그룹에 가담했다.
루이스는 이 그룹 전시회에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으며 같은 시기에 레벨 아트센터를 설립했는데, 여기에서 보티시즘 운동이 시작되었다.

피혁업에 종사한 폴란드계 이민자의 아들 데이비드 봄버그David Bomberg(1890~1957)는 석판화가의 도제로 일하면서 시티 앤드 길즈 인스티튜트의 야간반에서 월터 베이스에게 배웠고 1911~13년에는 유태인 교육 자선회의 도움으로 슬레이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봄버그는 루이스의 보티시즘 운동에 동조했으며 1914년 봄 화이트 채플 미술관이 기획한 ‘20세기 미술’ 전시회의 개최를 도왔고 자신도 그 전시회에 출품했다.
같은 해 런던 그룹을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봄버그는 1915년 보티시즘 전시회에 초대되어 작품을 전시했다.

미국계 영국 조각가 제이컴 엡스타인 경Sir Jacob Epstein(1880~1959)은 러시아 유태인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1년 낮에는 청동공장에서 일하면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야간 소묘 강좌를 수강한 후 조지 그레이 버너드의 조수로 일했다.
1902~05년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공부했으며, 이 기간 동안 루브르 뮤지엄을 드나들며 고대 및 원시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관심은 엡스타인의 생애 내내 계속되었으며 작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엡스타인은 1905년 런던에 정착하고 2년 후 영국 시민이 되었다.
1912년 피카소, 브란쿠시, 모딜리아니를 만났으며 이는 향후 5년 동안 그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볼티모어 뮤지엄과 예일 대학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두 점의 <비너스>는 단순한 기하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윈덤 루이스와 그의 그룹이 주장한 기계문화 개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명하고 독특한 작품 <착암기>는 보티시즘 그룹이 표방하는 바에 더욱 근접했다.
1913년 영국으로 돌아와 ‘캠던 타운 그룹과 그 외의 예술가들’ 전시회의 ‘입체주의 전시실’에 출품했다.
1914년 런던 그룹 전시회에 그룹의 창립 회원으로 참가했으며, 화이트 채플 미술관에서 열린 ‘20세기 미술’ 전시회에도 출품했다.
그는 레벨 아트센터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잠시 보티시즘 예술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1954년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1914년 3월 오메가 공방에 대항하여 레벨 아트센터가 그레이트 오먼드 가 38번지에 세워졌다.
제시카 디스모어Jessica Dismorr(1885~1939), 로렌스 앳킨스Lawrence Atkinson(1873~1931), 윌리엄 로버츠William Roberts(1895~1980), 프랑스 조각가 앙리 고디에-브제스카Henri Gaudier-Brzeska(1891~1915) 등이 반란자 그룹에 가담했다.
레벨 아트센터는 흄과 루이스 사이의 불화로 인해 곧 분열되었고, 그러는 동안 봄버그는 이런 상황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서 1914년 7월 셔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엡스타인도 이런 상황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네빈슨의 지지를 받던 마리네티파가 무분별할 정도로 강하게 밀고나와 어느 정도 단결이 회복되었다.
1913년 6월 콜리세움에서 ‘위대한 미래주의 소음 음악회’가 열렸으며, 마리네티의 연극적인 태도는 이 음악회에서 절정에 달했고, 그는 그런 태도를 통해 미래주의가 런던에서 가장 최신의 유행이며 관심의 대상임을 증명했다.
그는 네빈슨과 함께 6월 7일 <옵서버> 지에 “생명이 넘치는 영국 미술의 진보적임 힘과 위대한 미래주의 화가들 및 선구자들의 천재성을 지지하고 보호하며 찬양할 것을 영국 대중에게” 요구하고 ‘반란자들’의 이름으로 서명한 미래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것은 모두의 비난을 받았다.
7월 2일 루이스 편집한 <블라스트 Blast> 창간호에 보티시즘의 선언문이 실렸다.
1914년 6월과 1915년 7월에 발행된 두 권의 편집을 루이스가 맡았다.
<블라스트> 제2호는 이듬해에 간행되었으며, 1915년 6월 보티시즘 전시회가 도레 화랑에서 개최되었다.
1917년 1월 미국 소장가 존 퀸이 파운드의 권유로 보티시즘의 뉴욕 전시회를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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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에게 친절한 마리솔은


일레노의 스테이블 화랑에서 전람회를 가지면서 워홀은 스테이블 화랑에 소속된 마리솔과 인디애나와 함께 어울리는 일이 잦았다.
두 사람은 나중에 워홀이 제작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유난히 워홀에게 친절한 마리솔은 파티에 초대받을 때면 항상 인디애나와 워홀과 함께 가려고 했다.
당시 뉴욕 스쿨에 여전히 추상표현주의가 두드러질 때였고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은 팝아트 예술가들의 행위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어느 날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이반 토마스가 주최한 파티에 마리솔이 인디애나와 워홀을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세 사람이 막 파티 장소에 들어섰을 때 워홀은 영화 〈엑소시스트〉에서 귀신들린 소녀가 어머니가 주최한 파티에서 선 채로 오줌을 싸는 장면을 연상했는데 나중에 자서전에서 자신이 그 소녀처럼 여겨졌다고 술회했다.
마크 로드코는 마리솔에게 “넌 어떻게 저런 녀석들을 여기에 데리고 올 수 있어?” 하고 화를 냈다.
로드코는 특히 팝아트 예술가들을 싫어했으며 팝아트 예술가들이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을 살해하려 한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워홀의 친구 마리솔과 인디애나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이미지들을 주제로 예술행위를 하면서 팝아트가 대중화되도록 노력했다.
워홀보다 열 살 어린 인디애나는 사실주의 방법으로 사물을 묘사하는 기교가 아주 뛰어나 미국의 정밀주의 예술가들의 후예라는 말을 들었다.
인디애나는 스텐실로 글자나 디자인 같은 형태를 제작하여 그림이라고 주장하면서 개념에 대한 생각을 촉구한 개념미술의 선구자이다.
그는 단어를 초보적인 상징으로 사용했다.
어릴 때 기차를 타고 가다가 거리에 걸려있는‘식사’라는 간판을 본 기억을 되살려 제작한 〈식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우리 기억 속의 많은 것들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리려고 한 작품이다.
인디애나는 1960년대 뉴욕에 거주하고 있던 엘스워스 켈리와 우정을 나누었으며 켈리로부터 색을 평평하게 또 기하학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 영향을 받았다.

인디애나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던 단어들은 매우 개인적인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늘 사용하는 단어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1962년 〈푸른 다이아몬드 식사〉와 〈붉은 다이아몬드 죽음〉(그림 95)을 그렸는데 “‘식사’는 내게 가장 개인적인 단어지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했던 말이기도 하다”며 그 말이 기억 속에 오래 맴돌았다고 말했다.
‘죽음’은 ‘식이요법(Dietary)’을 줄여 사용한 말이라고 했는데 식이요법의 앞글자 Die는 ‘죽음’이란 뜻이므로 인디애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작품에서 죽음은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개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라도 누구나 사용하는 단어를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Die의 뜻은 ‘죽음‘인 것이다.

인디애나는 마름모꼴 안에 원형을 그리고 그 안에 단어를 삽입했는데 보통 마름모꼴 은 자동차 운전자에게 주의를 주는 표시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Go’와 ‘Stop’ 표시판이 그 예이다.
인디애나는 그러한 안내표시판에 개인적인 단어들을 넣었다.
개념의 중요함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킨 그의 작품은 비록 하나의 형태가 오랫동안 어떤 상징으로 사용되었더라도 하나의 상징으로만 제한하여 사용될 수 없음을 시사했다.

1963년 인디애나는 찰스 데머스가 그린 〈난 숫자 5의 모습을 금색으로 보았다〉(1928)를 보고 영감을 받아 〈데머스 미국인의 꿈 5〉(그림 97)를 십자가 형태로 그렸다.
이미 스튜어트 데이비스가 글자를 주제로 그린 적이 있지만 인디애나의 딱딱하고 단순한 형태의 글자와 숫자들은 네온사인과도 같은 빛을 발했다.
그는 숫자 5 외에도 EAT, LOVE, DEE 등 사람들에게 낯익은 글자들을 주제로 그렸다.
그의 그림은 1960년대에 성행하기 시작한 옵아트와 컬러필드 예술에 가까웠다.
나중에는 알루미늄을 사용하여 글자를 3차원으로 제작하면서 색을 칠했다.

워홀보다 세 살 어린 탐 베셀만은 워홀과 자주 만나면서 팝아트가 미국 미술의 주류가 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여인의 몸을 주제로 그리기를 선호한 그는 처음에는 워홀과 마찬가지로 만화를 그렸다.
베셀만은 신시네티 아트 아카데미에서 만화를 공부하고 1950년대 말 뉴욕으로 와서 쿠퍼 유니언으로 진학했다.
1961년부터 이미 〈위대한 미국사람들의 누드〉 연작을 그리기 시작해 애욕적인 느낌을 주면서 미국국기의 색이기도 한 빨강색과 파란색을 주로 사용했다.
베셀만은 마티스의 〈핑크 누드〉로부터 영감을 받아 〈핑크 누드〉와 비교가 되는 순진한 모델을 핑크 누드의 자세를 취하도록 한 후 에어브러시를 사용하여 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도록 그렸다.
여인의 몸 부분을 확대하여 그리거나 콜라주를 사용한 그의 그림은 초현실주의와 관련이 있으며 팝아트 예술가들에게 일반적인 환상주의의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실제 물질들을 배열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는 TV와 에어컨디셔너가 있고 사진으로 창문을 몽타주하기도 했으며 소리를 작품에 사용하기도 했다.
베셀만은 담배를 피우는 여인의 손과 입술만을 커다랗게 담배연기와 함께 그렸는데, 그가 사용한 순색들은 애욕적인 느낌을 주었으며 여인의 포즈가 그러한 요소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부분을 확대하여 그림을 그렸지만 베셀만만큼 효과를 보여준 예술가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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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신세계에 기고한 글입니다.


들로네와 쿠프카의 오르피즘


색을 사용하여 색의 면을 만들고 색의 톤으로 공간을 암시하는 양식으로서의 오르피즘Orphism은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와 구 체코슬로바키아 화가 프란티셰크 쿠프카Frantisek Kupka(1871~1957)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오르피즘은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칭으로 시인은 이를 입체주의 범주에 속하는 운동으로 간주했다.
시인이 오르피즘을 입체주의의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것으로 본 시각은 당연했는데,
당시 입체주의가 매우 성행하고 있었고, 그는 입체주의 외의 회화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며, 들로네가 입체주의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컬러 챠트와 같은 들로네의 작품은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에 의해서 이미 예견되었다.
쇠라와 시냐크의 회화는 붓을 세워 점을 찍듯이 그리는 점묘법을 사용한 색의 분할로서 순색의 색점으로 그리는 것이었으며 작품의 규모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점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쇠라 작품에서 이런 접근 방식은 강렬한 빛의 효과를 주는 동시에 형태를 견고하고 명확하게 한다.
쇠라의 분할주의는 20세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앙리 마티스가 주로 영향을 받았다.
들로네는 쇠라의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했으며,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 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색과 색의 대비는 역동성과 공간의 깊이감 외에도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추상화로 나타났으며 신지학 또는 절대 정신에 대한 화가의 사고를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지만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회화에 몇몇 화가들이 전념했다.
특히 쿠프카가 음악과 영적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회화에 심취했으며 그 밖에 바실리 칸딘스키, 피트 몬드리안, 파울 클레 등이 이런 동일한 동기에서 색면 대비의 회화를 추구했다.
쿠프카를 포함하여 이들 네 사람 모두의 공통점은 개인적인 영적 체험과 음악을 모티프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 영매의 능력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나타나는 체험을 한 쿠프카는 자연히 종교와도 같은 신지학에 관심을 쏟게 되었으며 이런 신비주의의 경향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다수의 작품으로 나타났다.
신지학은 오늘 날 병적 이성주의로 간주되지만 당시에는 가장 지성적인 신비주의였다.
쿠프카는 유럽에서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하고 이를 과감히 작품에 사용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음악에서 유추한 시각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쿠프카는 야수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무지개색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들로네보다 먼저 거의 완전 추상에 도달했지만 들로네는 알려진 예술가였고 쿠프카의 이름은 낯설었기 때문에 파리 사람들은 들로네가 먼저 완전 추상에 도달한 화가라고 생각했다.

피카소에 대해 유난히 경쟁심이 많았던 들로네에게는 쿠프카와 같은 영적 동기는 없었다.
그는 색채를 풍부하게 하고 추상적 형태의 표현적 특성을 강화시킴으로써 입체주의의 엄격한 구성에 시적 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입체주의를 어떤 식으로든 전환시켜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야 파리 화단에 자신의 입지를 마련할 수 있다고 믿은 들로네는 쿠프카와는 달리 내적 요구로부터 이런 회화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외적 대상을 단순화하고 그 대상을 입체주의의 장점을 살려 다각도에서 바라보듯 다양한 색면들로 묘사하여 리드미컬한 효과가 나도록 했다.
색면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작품은 추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화를 이룬 색채는 느린 움직임을, 조화되지 않는 색채는 급격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움직임의 표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또한 이후 등장하게 되는 키네틱 아트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오르피즘 회화는 아폴리네르에 의해 ‘칼리그람 Calligramme’의 토대가 되었다.
시인은 오르피즘의 원리를 시에 적용하여 시어를 배열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의 원리에 의하면 서로 무관하거나 대비되는 부분들이 임의적이고 부적절하게 병치되었을 때 구성의 각 요소들은 논리적 혹은 관습적 방식보다는 오히려 충돌과 대비를 통해 상호 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르피즘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문학, 음악, 조형 예술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개념 중 하나였다.
그것은 다양한 인식의 표현,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즉각적인 직관, 혹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연속된 사건들에 대한 순간적이며 집중된 직관을 의미했다.
그것은 ‘계속되는 현재’라는 심리적인 개념을 미술과 문학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로베르 들로네, <커튼 사이의 에펠탑>, 1910
입체주의의 효과가 아니라면 들로네는 980피드나 되는 높은 에펠탑을 캔버스에 모두 그려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각도에서 바라본 장면을 한 캔버스에 묘사함으로써 높은 탑을 부서뜨려 나타낼 수 있었다.
들로네는 에펠탑 맞은편에 위치한 호텔 방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에펠탑을 여러 점 그렸다.

로베르 들로네, <동시 대조: 해와 달>, 1913
그림에는 제작연대가 1912년으로 적혀 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1913년에 그린 것으로 본다.
당시 들로네뿐 아니라 몇몇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제작연대를 앞당겨 적었는데 자신들이 먼저 성취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
색채의 동시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킨 것들로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추상이다.
그는 자율적인 색채 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순수 색면들이 서로 침투하고 회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로베르 들로네, <창문>, 1912~13
들로네는 색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색채의 동시 대조를 통해 색채는 역동성을 찾게 되며 그림에서 색채의 구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이는 현실 표현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로베르 들로네,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 1914
들로네가 이 그림을 그리기 5년 전인 1909년 7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35분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루이 블레리오가 자신의 단발비행기 블레리오 11호를 타고 프랑스 칼레 근처 초원을 이륙하여 도버 해협을 날라 32분 후에 착륙한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를 타고 하늘을 나른 것이다.
5년 전의 이 사건을 모티프로 29살의 들로네가 가로 세로 각각 2.5미터의 큰 정사각형으로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려 역사상 처음 비행한 그를 치하했다.
그는 그림 하단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최초로 하늘에 동시에 떠오른 태양 원반들을 위대한 비행기 제작자 블레리오에게 바침, 1914”

들로네는 선명한 색채로 몇 덩어리의 크고 작은 원반들을 컬러차트처럼 그렸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반들의 얽힘 속에 블레리오 11호의 프로펠러와 바퀴, 그 밖에도 조그맣게 그려진 바삐 일하는 기술자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항공역사를 장식하는 또 다른 영웅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이중 날개의 비행기도 보인다.
이 작품에서 모든 색채가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원반의 수를 대폭 증가함으로써 그는 관란자로 하여금 힘찬 시각적 운동감을 맛보게 해주며 빙빙 도는 듯한 느낌, 흘러가는 느낌, 또한 움직이는 기계에 의해 우주의 개발이 이루어진다는 암시를 준다.
들로네는 태양이 펼치는 불꽃놀이로 하늘을 정복한 블레리오의 위업을 찬양했다.
1909년 10월 14일 블레리오의 단발비행기는 날개를 접어 동체에 붙인 채 공화국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 북부역에서부터 공예 학교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은 블레리오를 열렬한 환호로 환영했다.

프란티셰크 쿠프카, <첫 단계>, 1910~13?
이 작품은 퍽 개인적인 양식으로 그려진 것으로 정신적 상징주의에 속한다.
쿠프카는 회화에는 주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에 도달하여 선의 리듬과 색채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회화의 창조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프란티셰크 쿠프카, <대각선의 면>, 1925
이 작품은 쿠프카가 실재 세계를 어떻게 지성적으로 추상화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색과 구조의 조화를 통해서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추상으로 표현했다.
다양한 초록색이 있고, 얼룩의 파란색 가장자리에는 노란색이 있으며, 흰색과 검정색은 매우 강렬한 느낌을 준다.
미묘하고 복잡한 색들의 대비에서 음악적 느낌이 발생하는데 실제로 쿠프카는 음악을 시각화하는 데 주력했으며 수직으로 뻗은 기다란 것들은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킨다.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그렸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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