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신세계에 기고한 글입니다.
들로네와 쿠프카의 오르피즘
색을 사용하여 색의 면을 만들고 색의 톤으로 공간을 암시하는 양식으로서의 오르피즘Orphism은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와 구 체코슬로바키아 화가 프란티셰크 쿠프카Frantisek Kupka(1871~1957)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오르피즘은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들로네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칭으로 시인은 이를 입체주의 범주에 속하는 운동으로 간주했다.
시인이 오르피즘을 입체주의의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것으로 본 시각은 당연했는데,
당시 입체주의가 매우 성행하고 있었고, 그는 입체주의 외의 회화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며, 들로네가 입체주의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컬러 챠트와 같은 들로네의 작품은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에 의해서 이미 예견되었다.
쇠라와 시냐크의 회화는 붓을 세워 점을 찍듯이 그리는 점묘법을 사용한 색의 분할로서 순색의 색점으로 그리는 것이었으며 작품의 규모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점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쇠라 작품에서 이런 접근 방식은 강렬한 빛의 효과를 주는 동시에 형태를 견고하고 명확하게 한다.
쇠라의 분할주의는 20세기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앙리 마티스가 주로 영향을 받았다.
들로네는 쇠라의 분할주의 기법을 채택하는 대신 대조되는 인접한 색채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했으며, 특히 색채 공간의 분할을 위한 빛의 효과, 색채와 움직임의 상호 연결에 관심을 기울였다.
색과 색의 대비는 역동성과 공간의 깊이감 외에도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추상화로 나타났으며 신지학 또는 절대 정신에 대한 화가의 사고를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지만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회화에 몇몇 화가들이 전념했다.
특히 쿠프카가 음악과 영적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회화에 심취했으며 그 밖에 바실리 칸딘스키, 피트 몬드리안, 파울 클레 등이 이런 동일한 동기에서 색면 대비의 회화를 추구했다.
쿠프카를 포함하여 이들 네 사람 모두의 공통점은 개인적인 영적 체험과 음악을 모티프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 영매의 능력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나타나는 체험을 한 쿠프카는 자연히 종교와도 같은 신지학에 관심을 쏟게 되었으며 이런 신비주의의 경향은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다수의 작품으로 나타났다.
신지학은 오늘 날 병적 이성주의로 간주되지만 당시에는 가장 지성적인 신비주의였다.
쿠프카는 유럽에서 최초로 추상적 색채와 형태 속에 내재된 정신적 상징주의를 탐구하고 이를 과감히 작품에 사용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음악에서 유추한 시각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쿠프카는 야수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무지개색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들로네보다 먼저 거의 완전 추상에 도달했지만 들로네는 알려진 예술가였고 쿠프카의 이름은 낯설었기 때문에 파리 사람들은 들로네가 먼저 완전 추상에 도달한 화가라고 생각했다.
피카소에 대해 유난히 경쟁심이 많았던 들로네에게는 쿠프카와 같은 영적 동기는 없었다.
그는 색채를 풍부하게 하고 추상적 형태의 표현적 특성을 강화시킴으로써 입체주의의 엄격한 구성에 시적 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입체주의를 어떤 식으로든 전환시켜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야 파리 화단에 자신의 입지를 마련할 수 있다고 믿은 들로네는 쿠프카와는 달리 내적 요구로부터 이런 회화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외적 대상을 단순화하고 그 대상을 입체주의의 장점을 살려 다각도에서 바라보듯 다양한 색면들로 묘사하여 리드미컬한 효과가 나도록 했다.
색면들 사이의 리드미컬한 상호작용을 미적으로 적용한 들로네의 작품은 추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화를 이룬 색채는 느린 움직임을, 조화되지 않는 색채는 급격한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을 비롯해 색채 대조를 통한 움직임의 표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또한 이후 등장하게 되는 키네틱 아트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오르피즘 회화는 아폴리네르에 의해 ‘칼리그람 Calligramme’의 토대가 되었다.
시인은 오르피즘의 원리를 시에 적용하여 시어를 배열하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의 원리에 의하면 서로 무관하거나 대비되는 부분들이 임의적이고 부적절하게 병치되었을 때 구성의 각 요소들은 논리적 혹은 관습적 방식보다는 오히려 충돌과 대비를 통해 상호 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르피즘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문학, 음악, 조형 예술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개념 중 하나였다.
그것은 다양한 인식의 표현,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즉각적인 직관, 혹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연속된 사건들에 대한 순간적이며 집중된 직관을 의미했다.
그것은 ‘계속되는 현재’라는 심리적인 개념을 미술과 문학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로베르 들로네, <커튼 사이의 에펠탑>, 1910
입체주의의 효과가 아니라면 들로네는 980피드나 되는 높은 에펠탑을 캔버스에 모두 그려 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각도에서 바라본 장면을 한 캔버스에 묘사함으로써 높은 탑을 부서뜨려 나타낼 수 있었다.
들로네는 에펠탑 맞은편에 위치한 호텔 방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에펠탑을 여러 점 그렸다.
로베르 들로네, <동시 대조: 해와 달>, 1913
그림에는 제작연대가 1912년으로 적혀 있지만 미술사학자들은 1913년에 그린 것으로 본다.
당시 들로네뿐 아니라 몇몇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제작연대를 앞당겨 적었는데 자신들이 먼저 성취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
색채의 동시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을 더욱 심화시킨 것들로 구체적인 시각 인상에 근거를 두지 않은 순수추상이다.
그는 자율적인 색채 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순수 색면들이 서로 침투하고 회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로베르 들로네, <창문>, 1912~13
들로네는 색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색채의 동시 대조를 통해 색채는 역동성을 찾게 되며 그림에서 색채의 구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이는 현실 표현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
로베르 들로네,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 1914
들로네가 이 그림을 그리기 5년 전인 1909년 7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35분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루이 블레리오가 자신의 단발비행기 블레리오 11호를 타고 프랑스 칼레 근처 초원을 이륙하여 도버 해협을 날라 32분 후에 착륙한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를 타고 하늘을 나른 것이다.
5년 전의 이 사건을 모티프로 29살의 들로네가 가로 세로 각각 2.5미터의 큰 정사각형으로 <블레리오에게 경의를 표하며>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그려 역사상 처음 비행한 그를 치하했다.
그는 그림 하단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최초로 하늘에 동시에 떠오른 태양 원반들을 위대한 비행기 제작자 블레리오에게 바침, 1914”
들로네는 선명한 색채로 몇 덩어리의 크고 작은 원반들을 컬러차트처럼 그렸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반들의 얽힘 속에 블레리오 11호의 프로펠러와 바퀴, 그 밖에도 조그맣게 그려진 바삐 일하는 기술자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항공역사를 장식하는 또 다른 영웅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이중 날개의 비행기도 보인다.
이 작품에서 모든 색채가 서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원반의 수를 대폭 증가함으로써 그는 관란자로 하여금 힘찬 시각적 운동감을 맛보게 해주며 빙빙 도는 듯한 느낌, 흘러가는 느낌, 또한 움직이는 기계에 의해 우주의 개발이 이루어진다는 암시를 준다.
들로네는 태양이 펼치는 불꽃놀이로 하늘을 정복한 블레리오의 위업을 찬양했다.
1909년 10월 14일 블레리오의 단발비행기는 날개를 접어 동체에 붙인 채 공화국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 북부역에서부터 공예 학교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은 블레리오를 열렬한 환호로 환영했다.
프란티셰크 쿠프카, <첫 단계>, 1910~13?
이 작품은 퍽 개인적인 양식으로 그려진 것으로 정신적 상징주의에 속한다.
쿠프카는 회화에는 주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깨달음에 도달하여 선의 리듬과 색채 구성을 통해 음악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회화의 창조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프란티셰크 쿠프카, <대각선의 면>, 1925
이 작품은 쿠프카가 실재 세계를 어떻게 지성적으로 추상화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색과 구조의 조화를 통해서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추상으로 표현했다.
다양한 초록색이 있고, 얼룩의 파란색 가장자리에는 노란색이 있으며, 흰색과 검정색은 매우 강렬한 느낌을 준다.
미묘하고 복잡한 색들의 대비에서 음악적 느낌이 발생하는데 실제로 쿠프카는 음악을 시각화하는 데 주력했으며 수직으로 뻗은 기다란 것들은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킨다.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그렸을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