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독수리님에게
 

  나의 글을 꼼꼼이 읽고 계신다니 감사합니다.
질문하신 것에 관해서는 저서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에서 이미 기술해두었던 터라서 내 책의 내용을 일부 전함으로써 답변합니다.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이 하나가 아니라 둘인 이유는,
나폴레옹 실각 이후 다비드는 브뤼셀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부유층의 초상화를 그리며 살다 그곳에 뼈를 묻게 됩니다.
다비드는 1825년 12월 29일 아침에 아들 외젠의 품에 안긴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건강은 1820년대에 이미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다비드는 1822년에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브뤼셀에서 똑같은 크기로 다시 그렸습니다.
처음 그린 것은 나폴레옹 정부로부터 이미 돈을 받았지만 그의 실각 이후 그 작품은 공공장소에 걸 수 없도록 했으므로 루브르의 창고에 보관된 상태로 있었습니다.

1821년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타계하자 사람들이 이 작품에 관심이 많아졌고 심지어 미국인들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미국인 사업가는 이 작품을 미국으로 가져가서 입장료를 받고 관람시키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다비드에게 말했습니다.
다비드는 원작을 그릴 때 자신을 도운 조르주 루제에게 한 번 더 자신을 돕게 해서 1821년 이것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억에 의존해서 그리는 것이라서 정확하게 재현할 수 없을 때는 브뤼셀 고관이나 친구들의 모습들로 나폴레옹의 신하들의 모습을 대신했습니다.
헤어스타일과 의상은 현재의 유행을 따랐으며 중앙 갤러리에 있는 다비드의 아내와 딸 그리고 자신은 현재의 나이에 어울리는 모습이었으므로 세월이 지났음을 보여줍니다.
갤러리에 있던 비엥은 이미 타계했으므로, 다비드는 벨기에인 제자로서 그의 브뤼셀에서의 활동을 도와준 드니 오드바에르의 모습을 대신 삽입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윌리엄 1세의 궁정 화가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오드바에르는 1820년에 다비드의 초상을 그렸고 다비드는 그에 대한 답례로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에 그의 모습을 삽입했습니다.
따라서 20년 전의 실제 대관식과 이때 그린 그림에서의 참석자들의 모습에는 많은 차이가 생겼습니다.
다비드는 늙고 병들었으므로 많은 부분을 루제가 완성시킨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세밀한 묘사에 있어 원작에 미치지 못하는 건조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1822년 런던에서 소개되었을 때 <타임스>는 "칭찬할 만한 점이 없으며 ... 왁스를 바른 하나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혹평했으며 그 밖의 언론들도 혹평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흰독수리님,

원작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침 지난 목요일 중앙대에서 특강할 때 사용하느라고 적어둔 것이 있어 여기에 삽입한 것입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1805~07), 유화, 6.3-9.8미터

이 작품은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관식이 끝난 후 12월 18일 ‘황제의 최고 화가’의 직위에 오른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것이다. 다비드는 1774년 로마 상을 수상하여 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이탈리아로 유학 가서 고대 미술에 탐닉했다. 그는 1783년 왕립 미술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색채보다 선묘를 중시했으며 표현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거부했다. 그가 선택한 주제는 자기희생, 의무에 대한 헌신, 정직, 금욕 등 시민이 지켜야 할 덕목이었다. 이런 미덕은 역사적 사실로서 낭만적으로 해석되어 고대 로마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비드는 프랑스 대혁명에 적극 공감하여 의원이 되었고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했다. 그는 ‘혁명의 순교자’를 주제로 <르펠르티에의 죽음>, <마라의 죽음>, <바라의 죽음>을 그렸는데 초상화를 비극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작품들이다. 그는 1794년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이후 투옥되었다가 혁명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 이유로 이혼한 전부인의 탄원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다비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불리울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나폴레옹의 실각과 함께 브뤼셀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타계했다.

다비드가 대관식을 세로 가로 6.3-9.8미터의 크기로 그린 것은 나폴레옹의 주문에 응한 것으로 나폴레옹은 크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다비드는 소르본 광장의 클루니 교회 내부의 큰 공간을 노트르담 내부처럼 꾸미고 인형들을 배치하여 전체적 구성을 고안했다. 내부 디자인을 파리 오페라의 무대 디자이너 이그나스 외젠 마리 드고티가 맡았다. 이 작품은 그 날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은 것과는 다르다. 사실이 왜곡된 장면이다.

대관식이 있은 후 1년 동안 드로잉으로 준비를 마친 다비드는 1805년 12월 21일 커다란 캔버스를 걸고 작업에 들어갔다. 작품이 완성된 것은 1807년 11월이었지만 다비드는 이듬해 1월 부분적으로 수정을 가했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을 정교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리허설 때 합창단석에 앉아 드로잉으로 준비했기 때문이다. 대관식에는 약 2백 명이 동원되었으며 다비드가 묘사한 70명 가량의 얼굴이 실재와 닮았는데 그들이 작업장으로 와서 모델이 되어 주었고 대관식 때 입었던 의상을 보내줘 다비드는 정확하게 실제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위한 습작에서 보듯 다비드가 처음 의도한 것은 나폴레옹이 조제핀의 관을 자신의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리고 검을 쥔 왼팔은 자신의 가슴 부위에까지 올리고 있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었다.(다비드 231) 화가 제라르는 그런 제스처는 기품이 없고 웃긴다면서 다른 포즈로 그리라고 충고했다.(다비드 228-1) 또한 다비드는 습작에서 보듯 교황이 손을 무릎에 얹고 앉은 모습으로 그리려고 했는데 나폴레옹이 반대하면서 먼 길을 와서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세로 있어서는 안 되고 교황이 한 손을 들어 축복하는 제스처로 그리라고 명했다.(다비드 228-3) 교황은 꼭두각시로 대관식에 동원되었지만 그림에서 가톨릭을 대표해 프랑스 황제의 등극을 인정하는 제스처를 취하기를 원한 것이다.

대관식에는 참석했지만 그림에 빠진 사람도 있는데 이슬람교도이자 터키 대사인 모하메드 에펜디는 자신이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이슬람의 경전 <코란>에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므로 그림에서 삭제해달라고 다비드에게 청했다. 에펜디와는 반대로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참석한 것으로 삽입된 인물이 있는데 교황 바로 옆에 서 있는 추기경 카프라라이다. 그는 병중이어서 참석하지 못했지만 다비드가 삽입했다. 마담 메레로 불리운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지아도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다비드는 그녀를 갤러리 중앙, 조제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삽입했다.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아들 루시앵과 제롬이 나폴레옹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는 바람에 눈 밖에 나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한 데 대한 반발로 로마로 추방된 루시앵을 만나러 갔기 때문이다. 마담 메레가 앉아 있는 윗층 갤러리에 늙은 상원의원 비엥이 있고 그 옆에 목탄과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다비드 자신과 그의 가족이 있다.

조제핀의 무겁고 기다란 옷자락을 잡아주는 두 여인은 로베의 애인 마담 에밀 루이즈 드 라 발레트와 그녀를 섬기는 마담 샤스툴레 드 라 로세푸콜드이다.(다비드 228-2) 그녀는 작은 키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키도 크고 우아하게 생긴 여인이다. 다비는 마흔한 살의 조제핀을 젊은 신부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조제핀은 나폴레옹보다 여섯 살이 많다. 나폴레옹의 얼굴은 고대 동전이나 메달에 새겨진 모습처럼 보이는데 다분히 다비드의 의도대로 묘사된 것이다.

그림 왼편 가장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나폴레옹의 형제들로 조제프와 루이이다. 나폴레옹의 두 형제에 대한 구성은 전체적인 미적 관점에서 변경되었는데 두 형제가 나폴레옹 가까이 있게 될 경우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장면이 모호해지므로 두 사람을 조제핀 뒤로 있도록 변경해 구성했다. 나폴레옹은 1806년 두 사람에게 왕국을 주었는데 조제프는 나폴리의 왕이 되었고 루이는 네덜란드 왕이 되었다. 형제 옆에 다섯 여인이 있는데 누이들로 캐롤린 뮈라, 폴린 보르게제, 앨리자 바치오키오이고, 그 옆에 왕자 샤를의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은 루이와 결혼한 조제핀의 딸 오르탕스이며, 그녀 옆이 조제프의 아내 줄리이다.(다비드 228-4)

화면 오른편 관람자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과거 나폴레옹이 총애하던 집정관으로 회계국 장관이 된 샤를 프랑수아 레브룬이고 다른 한 명은 대법관 캉바세레스로 두 사람 모두 의식에 사용되는 왕위의 표상인 왕권의 홀과 정의의 손을 들고 있다.(다비드 228-5) 왕권을 상징하는 보주를 벨벳 쿠션 위에 받쳐든 사람은 그랑드 헌츠만이며, 그 옆에 의전 장관 탈레랑이 서 있다. 오른쪽 합창단 단원 소년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검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폴레옹의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이자 조제핀의 아들인 왕자 외젠이다.

다비드는 이 그림을 그릴 때 피터 폴 루벤스의 1622~25년 작품 <마리 드 메디치의 대관식>을 참조했다. (다비드 234)

나폴레옹은 이 작품이 그려지는 과정을 직접 보지 못했는데 1807년 대부분을 파리 밖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다비드의 작업실에서 이 작품을 처음 본 것은 1808년 1월 4일이었다. 샤를-에티엔 모트가 그 날의 장면을 묘사했다.(다비드 235) 나폴레옹은 한 시간가량 이 작품을 바라보다 말했다.

“이건 작품이 아닙니다. 사람이 작품 속으로 걸어들어 갈 수 있습니다. 어디에나 생생함이 있고 ... 훌륭합니다. 다비드, 선생이 내 생각을 알고 있었고 나를 프랑스의 기사로 만들었습니다. ... 다비드 선생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나폴레옹은 1808년 10월 22일 이 작품이 살롱전에 전시된 날 다비드에게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그 날의 장면을 다비드의 제자 앙투안-장 그로(1771~1835)가 캔버스에 담았다.(다비드 236) 훈장을 받음으로써 다비드는 궁정의 멤버가 되었으며 대물림할 수 있는 문장에 그에게 주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