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위脾胃가 태극太極

 

 

금金원元 사대가四大家 중 하나인 이동원李東垣은 ‘비脾가 원기元氣의 뿌리’라는 관점을 제시했다. 원기의 허실은 비위脾胃의 성쇠에 의해 결정된다. 원기는 신체가 생겨나기 전의 정기精氣로서 위기胃氣가 아니면 길러주지 못한다. 원기, 곡기穀氣, 영기營氣, 위기衛氣, 위기胃氣는 명칭만 다를 뿐 같은 것이다. 비위가 허하면 원기도 허해지고 비위가 성하면 원기도 성해진다.

이동원은 또한『주역』의 양승음강陽升陰降의 원리를 빌어 비승위강脾升胃降을 설명했는데, 비승위강이 정기운동의 중추라고 했다. 그는 비위가 청기淸氣를 올리고 탁기濁氣를 내리며 양기를 올리고 음기를 내리므로 영기가 전신을 승강운행하면서 영양작용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송대宋代 소옹邵雍의 선천先天과 후천後天 역학의 영향을 받아 신腎이 선천의 근본이고 비脾가 후천의 근본이라는 관점을 제시했다.

비脾가 태극이면 이와 짝이 되는 위胃도 태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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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는 신기神氣가 드나드는 문

 

 

한의학에서는 얼굴이 모든 양陽의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곳이며, 그 중에 코가 하늘의 기를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코를 “신기神氣가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또한 코는 땅에서 나는 곡식을 받아들여 땅의 기운과 통하는 압과 짝을 이뤄 사람의 근본이 된다고 말합니다. 입과 코는 인체의 음陰과 양陽을 이루고 있습니다.

코는 하늘의 기를 받아들여 심장과 폐에 저장해둡니다. 또한 코는 비위, 대장, 방광 등 인체의 거의 모든 장부와 간련이 있어서 코의 질병을 치료하려면 어느 장기 어느 경략에 이상이 생긴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생긴 대로 병이 온다>의 저자 조성태는 콧대가 서고 바르며 약간 크고 색이 고르며 윤택한 잘생긴 코는 기가 원활히 소통되므로 건강에 문제가 없지만, 코가 비뚤어졌거나 짧거나 콧등에 기미가 끼었다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코는 기를 받아들이고 순환시키는 곳이므로 큰 코가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코를 가진 사람이 집에만 있게 되면 기가 풀리지 않고 울체되어 병이 생기기 쉬우며, 특히 코 큰 여자들이 집에만 있게 되면 얼굴에 기미가 끼고 두통으로 고생합니다.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신경을 쓰거나 자기 기분에 맞지 않으면 소화불량에 걸리고 속쓰림, 신물 넘어옴, 가슴 답답함, 목에 가래가 붙어 뭉치는 등의 증상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여자들 가운데 감상선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천식, 만성 피로, 불안초조, 무력감, 요통 등의 질병으로 고생합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못생긴 코는 콧대가 낮고 코의 길이가 짧은 것을 말합니다. 조성태는 여자가 못생긴 코를 가진 것은 별로 문제가 안 되지만, 남자의 경우 건강할 때는 아무런 증상이 없더라도 과로하든가 병에 걸려 체력이 떨어지면 못생긴 코의 약점이 서서히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조성태는 못생긴 코를 가진 사람은 대체로 소심하고 잔소리가 많으며 진취력, 성취력, 실행력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시험을 보면 긴장하는 탓에 알고 있는 문제도 실수로 틀리곤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노쇠 현상이 빨리 찾아와서 위와 장에 이상이 생기고, 허리 통증이나 만성 피로에 고생한다고 말합니다. 소심한 성격으로 인해 심장에 이상이 생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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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의 쇠퇴”는 그릇된 개념이다


 

 

이슬람주의를 테러로 비하하거나 폭력과 결부시킨다면— 언제든— “이슬람주의의 쇠퇴” 를 운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샤리아국가의 창설과 이슬람식 세계질서라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원리주의의 본질을 간과했다는 방증이다. 정치적 이슬람교의 평화와 폭력성— 쿠틉이 뒷받침한— 은 목표가 아니라 “이슬람세계의 혁명”을 일으킬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다르다. 이 이데올로기가 부상했다는 것은 이슬람문명이 근대성과 다원주의 아래 민주적 평화에 합류할지, 이슬람교식 해결책(알할 알이슬라미)을 지지해야 할지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004년 12월 쓰나미의 여파로 곤경에 처한 무슬림을 위해 서방세계가 보낸 동정 어린 관심으로 몇몇 무슬림은 포위된 이슬람교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서양을 원수가 아닌 서로 돕는 동반자로 만났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싱가포르에서 이처럼 훈훈한 감정을 직접 체험했다. 그러나 아체Aceh 특별구의 이슬람주의자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현지에 샤리아질서를 강요하기 위해 쓰나미를 역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이슬람주의가 내세운 이원성— 이슬람세계와 서방세계 중 택일해야 한다는 흑백논리— 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세계정치의 새로운 역할을 종교에 부여하는 반서양식 개발의 일환으로 이슬람주의자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세속성을 탈피한 사회” 사상은 이슬람세계에서 식을 줄 모른다.
서방세계(특히 유럽)가 대체로 보편주의 기독교에서 탈기독교사상으로, 세속적 근대성에서 포스트모던 문화의 상대주의로 이행하면서 이슬람교의 보편주의는 세력을 모으는 동시에 크게 변모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정치화는 비교적 평화적인 이슬람교의 보편주의를 세계의 혁명에 대한 요구로 바꾸어놓았으며, 질 케펠의 『이슬람주의의 종말fin de l'Islamisme』이나 올리비에 로이의 “포스트이슬람주의” 에서 내놓은 예측은 모순점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이슬람주의 운동가는 무슬림 사이에서는 소수이지만, 바로 이들이 여론을 자극하는 강력한 다국적 조직체를 구성한다. 이슬람교 원리주의자들은 유럽 소수집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소수 이슬람주의자들의 세력과 그들의 정체성 정치를 간파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유럽을 “이슬람주의의 전쟁터” 로 적절히 빗대었다.60 이슬람세계와 서방세계 그리고 유럽의 이슬람교 소수집단으로 구성된 삼자에 이슬람주의가 빠지면 곤란하다.
이슬람주의 연구는 숱한 걸림돌에 부딪쳤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그들을 비판하는 논객들에게 외국인혐오증이나 이슬람혐오증을 덮어씌우는가 하면, 그들 나름대로의 분석법을 강요하기 위해 선전수단을 적절히 활용하기도 했다. 사실, 이슬람혐오증이나 “동양주의”는 여기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이슬람주의를 다양한 종교적 원리주의로 이해하거나 이슬람주의 사상이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표상이라며 이를 비판하는 서양 학자들은 거의 없다.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유대인이자 원리주의에 정통한 어네
스트 겔너는 이슬람교의 원리주의를 분명히 비판할 용기를 발휘했다. 1994년 5월,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겔너와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가 정면충돌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최상위에 둔 겔너는 신절대주의neo-absolutism의 도전에 맞서 계몽사상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종교적 원리주의는… 다수에게 정신적 만족을 주며… 오늘날에는 이슬람교 전통 안에서 설득력과 영향력을 겸비했다” 고 밝혔다.61 암스테르담에서 그와 기어츠는 계몽사상의 보편성(이를 “계몽 원리주의” 라고 비하하는 잘못된 평도 있다)과 기어츠가 지지한 문화의 상대주의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62 “타자의 문화적 특수성” 을 존중해야 한다는, 기어츠의 주장에 겔너는 “그럼 히틀러주의도 “독일인의 특수성” 이라며 존중하겠느냐” 고 되받아쳤다. 그러자 기어츠는 적절치 않은 사례라며 이를 무시했다.
겔너-기어츠 논쟁을 짚어보려면 먼저 “다원주의의 한계” 와 문화의 상대주의에 대한 겔너의 비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주의는 절대론으로 다원주의, 근대성 중 한 가지의 입장도 수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주의는 민주정치를 이룩하려는 의욕이 없는 데다, 민간 이슬람교와도 대립하고 있다. 혹시라도 그것이 득세하는 날에는 이슬람세계와 유럽의 소수집단에 암흑기가 도래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반대론자와는 달리, 겔너는 문화의 상대주의가 이슬람주의식 신절대주의의 대응책으로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이슬람주의가 꿈꾸는 샤리아국가는 주권국가의 베스트팔렌 시스템에 연합될 수 있는 정치질서가 아니다. 물론 이슬람주의식 신절대주의에 대하여 이 시스템을 지지한다고 해서 이를 유럽중심주의라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아 펠드먼을 비롯한 법학자들은 외관상 입헌주의를 인정한다는 이유로 샤리아국가 사상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집필한 문헌에 정통하고 아랍 문헌을 읽는 전문가라면 그들이 국민 주권이나 주권국가가 채택한 근대 국제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베스트팔렌 질서 가운데, 그 어느 편에도 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슬람주의의 샤리아국가 이데올로기는 알라 신의 통치(하키미야트 알라) 원리에 중점을 두며, 기존의 베스트팔렌 질서를 대체할 이슬람교식 세계질서의 핵심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감안하고도 이슬람주의를 수용하겠는가? 혹자는 이슬람주의자들도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이 이슬람주의식 질서 개념을 버린다면 그것이 긍정적 조짐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슬람주의자일 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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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지와 사랑의 신간 <법왕 달라이 라마> 중에서

 

 

 

 

12연기

 

붓다는 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이 원인에서 발생하는 방식을 12연기의 가르침에서 더욱 상세히 설명하셨습니다.

1. 무명: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 즉 번뇌
2. 정신 구조: 과거에 있어서의 선악업善惡業
3. 의식: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나오게 하는 씨와 같은 것
4. 이름과 모양: 의식이 ‘나’ 아닌 것들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
5. 여섯 가지 감관: 눈,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촉감의 세계 혹은 이름과 모양의 세계와 접촉
6. 접촉: 단순한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상태
7. 감정: 5세부터 14세까지의 단순한 고락의 감수 작용을 일으키는 상태
8. 욕망: 재산이나 애욕에 탐착하는 14세 이후
9. 집착: 탐착이 증진되는 상태
10. 존재: 애욕과 탐착의 선과 악의 업이 습관이 되어 미래를 규정하는 상태
11. 태어남: 미래의 과가 발생한 상태
12. 늙고 죽음

 

무지를 멈춰야 합니다
의존 시초의 영향이라 함은 각 단계가 전 단계에 의존하며 전 단계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노쇠와 죽음을 멈추기 위해서 우리는 실제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을 멈추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원하지 않는 단계, 즉 카르마(업)와 착각의 오염된 힘에서 발생한 윤회적 재탄생을 멈춰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지를 멈춰야 합니다. 첫 단계를 멈춘다면 나머지 11단계는 저절로 멈춥니다.

 

고통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인도의 스승 무착Asanga은 세 가지 조건을 근거로 고통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1. 부

동성: 첫 번째 조건은 부동성입니다. 부동성은 고통이 창조주와 같은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닌 의도에 의해서 생성되며, 자체적인 원인의 결과로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2. 비영구성: 두 번째 조건은 비영구성입니다. 이는 고통이 자체적인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지만, 영구적인 현상은 결과를 만들 수 없으므로 이 원인과 조건은 비영구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3. 구체적인 잠재성: 세 번째 조건은 구체적인 잠재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원인과 조건이 영구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건 충분치 않습니다. 각 원인과 조건이 개인적인 결과를 생성하는 고유의 잠재성을 보여야 합니다. 어떤 조건은 아무런 결과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붓다는 그 원인을 무명으로 인식했습니다.

 

창조주는 우리의 마음
불자들은 창조주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창조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궁극적으로 창조주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부정적이고 원하지 않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을 정화하고 깨우치면 모든 부정적인 결과가 멈추고 긍정적인 결과가 뒤따릅니다.

 

불교는 인간의 종교
불교는 인간의 종교이며 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불교는 행동의 방식과 마음을 훈련하는 방식을 주로 다룹니다.

 

모든 신은 한 존재의 구현
그렇다고 불교 신자들이 상위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노련하거나 깨달은 상위 존재의 관점에서는 유일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신deva과 같은 수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신은 한 존재가 구현된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우리 마음이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석가모니 붓다
석가모니 붓다는 연민과 지혜로 가득 찬 가르침의 달인이었습니다. 붓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과 수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힘겨운 영적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두 가지 진실
상대적인 단계에서는 하나의 측면이 존재합니다.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또 다른 측면이 존재합니다.

 

꽃을 상상해보세요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상상해보세요. 이 꽃은 매 순간 변하며 높은 온도에서는 더욱더 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뜨거움이나 차가움 같은 조건이 꽃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잘 압니다. 누군가는 “이 장미는 아름다워요. 향기도 좋고, 색깔도 예쁘네요.” 하고 말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장미가 별로에요.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시투성이잖아요. 만지면 따가워요.” 하고 말합니다.

 

하나의 사물에 대한 다른 시각
이렇듯 우리는 하나의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봅니다. 좋거나, 나쁘거나,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요. 사물의 본성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궁극의 단계
우리는 이 모든 다른 개념을 낳는 이 대상의 기반에는 반드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개별적인 본성의 부재가 이 기반의 역할을 합니다. 탁자 위에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많은 물건들을 올려놓지만, 이미 물건들이 그 위에 있다면 더 이상 올려놓을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궁극적인 본성이 사물들을 받아들이거나 사물들이 각기 다른 기능을 하도록 기반의 역할을 합니다.

 

모든 관점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
하나의 단계에서, 이 모든 다른 관점들이 어떠한 기초들 위에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초들을 직접 볼 수 없지만, 깊이 생각하면 이 모든 관점들을 가능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것과 궁극적인 것
이러한 두 가지 진리인 상대적인 것과 궁극적인 것은 다른 현상입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사성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진리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진리는 이른바 두 가지 출처에 근거하여 설명됩니다. 두 가지 출처는 착각과 그 착각에 의해 야기되는 업보Karmic Actions입니다. 붓다는 착각은 닦이지 않은 부정적인 마음 상태의 산물이지만, 이 닦이지 않은 마음 상태는 원인과 조건에 상당히 좌우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인과 조건
마음의 여러 관점들은 또한 원인과 조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음은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여러 상태들로 변형시키는 어떠한 본성을 지닙니다. 따라서 원인과 조건의 산물인 이 착각, 즉 예상을 제거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멈출 수 있다고 규명할 수 있습니다. 사성제를 완전히 이해해서 두 가지 진리를 이해하면 고통의 멈춤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성제를 이해함으로써 삼보를 이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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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삶 자체다

 

 

 

먼저 첫 번째 초의 불꽃을 그 자체로서만 다시 살펴보자. 그것은 우리가 알고 촛불이라고 부르는 어떤 종류의 것, 말하자면 ‘자아’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실은 훨씬 이해하기 어렵다. 불타는 초는 실제로는 변화와 변형의 과정이다. 매 순간 새로운 밀랍 분자가 연소한다. 매 순간 새로운 산소가 사용된다. 매 순간 불꽃은 죽었다 살아난다.
오랫동안 숙고해야겠지만,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면 죽음과 삶이 항상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숨어 있던 괴물은 이제 친근한 애완 고양이가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를 지금도 아무개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고정되고, 실체가 있으며, 변화하지 않는 존재로 식별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괴물이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생명 과정, 즉 시작이나 끝이 없는 과정임을 깨닫고 저것과 같다고 볼 때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무엇과 동일시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이 분리된 존재, 고립된 자아라는 생각을 버리고 이런 관점에서 식별을 멈출 때, 우리의 두려움과 싸움은 끝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끝없고 무한한 삶이며, 우주 만물과 분리될 수 없고 신비롭고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한꺼번에 모여 나를 만드는 요소들은 다시 각각으로 떨어지고 수없이 많은 형태들과 유형들로 다시 합쳐진다. 사후에는 다른 사람으로 “다시 올 것이다” 하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일은 꽃, 구름, 또는 산꼭대기에서 두려움 없이 바람을 맞으며 즐거이 서 있는 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더욱이 지금도 우리는 다양한 형태들을 취하고 있다.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는 일에서 생명을 구해주는 일까지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의 삶이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그들의 삶 속에 있고, 그들의 삶은 우리의 삶 속에 있다. 우리는 상호 연관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아이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돈을 보낸다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심리치료사로서 나는 내가 도와주었던 사람들에게서, 나아가 그 사람들과 연결된 모든 사람에게서 다시 태어난다. 나 역시도 작가 그리고 선생으로서 많은 형태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붓다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제 붓다의 연속으로 붓다는 우리 안에 살고 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감동했다면 우리는 예수의 연속이다. 이것이 충분히 마음속 깊이 와 닿았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데 그 까닭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0)


선사, 랍비, 신부, 또는 목사가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거나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보낼 때 누군가가 걱정과 사랑을 보여주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연속인 셈이다. 우리와 그 사람은 상호 연관되어 존재한다. 우리는 구름에서 막 떨어지려는 빗방울과 같다. 그 빗방울이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강으로 흘러가거나 심해에 머무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 되더라도 그것은 계속되는 변형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무엇이 되더라도 빗방울은 불평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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