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삶 자체다

먼저 첫 번째 초의 불꽃을 그 자체로서만 다시 살펴보자. 그것은 우리가 알고 촛불이라고 부르는 어떤 종류의 것, 말하자면 ‘자아’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실은 훨씬 이해하기 어렵다. 불타는 초는 실제로는 변화와 변형의 과정이다. 매 순간 새로운 밀랍 분자가 연소한다. 매 순간 새로운 산소가 사용된다. 매 순간 불꽃은 죽었다 살아난다.
오랫동안 숙고해야겠지만,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면 죽음과 삶이 항상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숨어 있던 괴물은 이제 친근한 애완 고양이가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를 지금도 아무개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고정되고, 실체가 있으며, 변화하지 않는 존재로 식별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괴물이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생명 과정, 즉 시작이나 끝이 없는 과정임을 깨닫고 저것과 같다고 볼 때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무엇과 동일시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신이 분리된 존재, 고립된 자아라는 생각을 버리고 이런 관점에서 식별을 멈출 때, 우리의 두려움과 싸움은 끝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끝없고 무한한 삶이며, 우주 만물과 분리될 수 없고 신비롭고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한꺼번에 모여 나를 만드는 요소들은 다시 각각으로 떨어지고 수없이 많은 형태들과 유형들로 다시 합쳐진다. 사후에는 다른 사람으로 “다시 올 것이다” 하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일은 꽃, 구름, 또는 산꼭대기에서 두려움 없이 바람을 맞으며 즐거이 서 있는 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더욱이 지금도 우리는 다양한 형태들을 취하고 있다. 따뜻한 미소를 보여주는 일에서 생명을 구해주는 일까지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의 삶이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그들의 삶 속에 있고, 그들의 삶은 우리의 삶 속에 있다. 우리는 상호 연관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아이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돈을 보낸다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심리치료사로서 나는 내가 도와주었던 사람들에게서, 나아가 그 사람들과 연결된 모든 사람에게서 다시 태어난다. 나 역시도 작가 그리고 선생으로서 많은 형태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하다. 마찬가지로 붓다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제 붓다의 연속으로 붓다는 우리 안에 살고 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감동했다면 우리는 예수의 연속이다. 이것이 충분히 마음속 깊이 와 닿았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데 그 까닭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0)
선사, 랍비, 신부, 또는 목사가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거나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보낼 때 누군가가 걱정과 사랑을 보여주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연속인 셈이다. 우리와 그 사람은 상호 연관되어 존재한다. 우리는 구름에서 막 떨어지려는 빗방울과 같다. 그 빗방울이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강으로 흘러가거나 심해에 머무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 되더라도 그것은 계속되는 변형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무엇이 되더라도 빗방울은 불평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