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유산

 
루브르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산이 많이 있다.
수메르인Sumerian의 왕이며 제사장을 도로 조각한 것은 기원전 3,300년경의 것이고 왕자 지나크Ginak라고 명시한 것은 기원전 2,700년경의 것으로 모두 25cm 가량 된다.
옛날 왕은 위엄을 과시하고 유별난 의상을 한 권력의 상징이 아니었다.
보통 늙은이로 제사장이며 현인이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추장을 생각하면 된다.
세상을 오래 산 삶의 증인이자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판단을 잘 한다.
왕의 모습을 조각한 미술품들을 살펴보면 나라가 커지면서 왕의 의상이 거창해지고 권력자의 모습으로 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메소포타미 왕과 왕자의 모습은 양팔을 직각이 되게 배에 얹은 모습인데 오래된 왕의 석상에서는 샤만과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나중에 제작된 왕자의 모습에서는 위엄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는데 불과 600년 사이에 지배계급이 권력의 상징으로 나타남을 본다.
왕자의 석상과 이후 제작된 지배계급의 사내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치마를 입었음을 본다.
남자도 치마를 입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남자들도 치마를 입는 복고풍 유행을 알으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버스나 전철을 탈 때 양무릎을 붙이고 다소곳이 앉을 필요가 있다.

기원전 2,230년 아케이드Akkad 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조각이 그곳에 있어 반가웠는데 2m 높이에 1m 폭의 부분적으로 파손된 것이다.
거의 모든 미술사책에 소개되고 있는 가장 사랑받는 미술품이다.

아케이드의 왕 사르곤Sargon이 기원전 2,400년과 2,350년에 수메르를 점령했으며 그의 군대가 이집트와 에디오피아를 침략했다.
나라가 커지자 영토에 욕심을 냈음을 알 수 있다.
국가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는 전쟁으로 시작된다.
사르곤의 궁전은 어마어마하게 컸는데 5,400명의 군인이 궁전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고 한다.
물론 왕은 신격화된 존재였으며 왕이 쓰던 투구에 달린 황소뿔은 자신이 신과 동등한 존재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권력이 신성을 좇은 예이다.

이 시기는 바빌론이란 이름으로 나라가 통일되기 전이다.
도시국가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던 때였다.
수메르인이 아케이드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성취한 것은 기원전 2,200년경이었다.
그들의 수도는 우르Ur였는데 성서에 나오는 지명이기도 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고향이다.
아브라함이 바로 수메르인이었다.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것은 권력의 싸움에서 밀려났기 때문일 것이다.
우르에는 하무라비가 정의를 상징하는 태양의 신 샤마스Shamash를 만나는 장면을 조각한 높이 2.25m의 탑이 있다.
이 탑 역시 거의 모든 미술사책에 등장한다.
탑에는 법령들이 잔뜩 쓰여져있어 인류 최초의 성문법이 되었다.
인류 최초의 법치국가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긴 것이다.
하무라비는 최초의 왕국 바빌론의 여섯 번째 왕이다.
그가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것은 기원전 1,792년경이었다.
바빌론 왕국이 멸망한 것은 기원전 1,600년 이후였다.
그가 제정한 법령은 모두 282개였는데 임금, 이혼, 의료비에 관한 법도 포함되었다.
인류 최초의 법에는 그래도 평등이 있었고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국민을 탄압하는 법은 훗날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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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바보들의 배>


보스는 죄를 주제로 상징적으로 어리석은 행위로 묘사했는데 그에게는 무지가 죄였다.
성서에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가 곧 죄라고 적혀 있다.
그가 갖고 있던 계몽적·사회적 이념은 육욕적 성적 충동, 방탕함, 게으름, 낭비벽, 지나친 욕심, 분별 없는 성급한 행동, 욕구불만에 기인한 공격, 불안정, 변덕 등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가 찬양한 이상의 것들과 반대되는 덕은 욕심을 다스리는 자제력, 욕구불만을 다스리는 훈련, 겸손, 검약, 비축, 성급한 행동을 억제하는 조심성 등이었다.
가장 혐오한 것은 섹스에 대한 갈망으로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고 보았으며 종교적으로 말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만든다고 보았다.
육욕적 열정을 보스는 가장 위험한 요소로 보았으며 이에 비하면 그 밖의 죄들은 상황에 따른 것이라서 비교적 덜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어리석은 행위에 의해 비롯되는 죄는 자신의 영혼을 망칠 뿐만 아니라 사회질서를 파괴하여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우려했는데, 이는 새로운 사고는 아니었고 후기 중세 문학에서 이미 반영되고 있었다.
쾌와 색욕에 대한 비난은 <폭음폭식의 우화 Allegory of Gluttony>와 <바보들의 배 Ship of Fools>에 잘 나타나 있으며 두 작품은 원래 하나의 패널로 구성되었다.

성직자 계급에 대한 보스의 비난은 <마술사>와 <돌 제거 수술(바보 치료)>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났지만 더욱 심하게 비난한 작품은 중기인 1480년과 1516년 사이의 창작으로 추정되는 <바보들의 배>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와 두 수녀가 배 안에서 농부들과 더불어 떠들석한 주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배 안의 구조는 기이하며 돛대는 잎이 무성한 나무이다.
부러진 나무가지가 배 뒤에 부착되어 있고 그 위에 광대가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이는 당시의 세태를 반영한 작품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세에 바보들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다.
1399년 프랑크푸르트 시는 밤에 벌거벗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미친 남자를 붙잡아 마인 강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기록에 의하면 1406년 밤 어부들이 미치광이를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마인츠로 운반했으며 1418년 프랑크푸르트 시민은 미친 여자들을 배에 태워 아샤펜부르크로 보냈다.
1427년 정신 나간 대장장이의 애인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예는 유럽 전역에서 예사로운 일이었다.
각 도시는 바보들만 사회로부터 추방한 것이 아니라 걸인, 날품팔이, 해직된 군인, 앉은뱅이, 병자들도 추방했다.
보스가 펜과 브라운 잉크로 스케치한 드로잉에서 이런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습작했음을 본다.
이런 사람들은 육지로도 추방되었지만 배에 실어 멀리에까지 보내는 건 보통이었다.
그래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아주 많았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인구의 30퍼센트나 되는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배회하며 먹을거리를 찾아 다녔다.
중세의 성벽과 성문은 적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데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방랑자들 그룹이 성내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마을에 미치광이가 생길 때 마을사람들은 그 사람을 가두고 격리시켰다.
이들을 격리시킨 곳을 ‘바보들의 궤 Fool’s Chest’ 혹은 ‘정신병원 Madhouse’이라고 불렀으며 작은 오두막집이 보통이었다.
이들을 치료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치유되지 못한 채 여생을 구박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바보나 미치광이들만 격리된 것이 아니라 심한 병에 걸린 사람들도 격리되었으며 이들은 오로지 신과 성인의 가호가 있기만 바랄 뿐이었다.
격리정책은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지만 종교적인 이유가 컸다.
바보, 미치광이 , 심한 병을 앓는 사람들을 신의 저주를 받은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 예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 중에서 병자나 미치광이가 생기면 집에 가둬놓고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가족이 없는 사람은 마을사람들에 의해 ‘바보들의 궤’로 보내지거나 동네 밖으로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보스가 생존하던 때는 중세 말과 종교개혁이 막 시작되려던 때였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교회 문에 신학적 반박문을 내건 때는 1517년이었다.
중세의 사고가 급격히 달라지고 있을 때라서 바보와 미치광이 그리고 병자들을 신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믿는 경향이 퍽 줄어들고 있을 때였으며 이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줄 알던 때였다.
공장의 수가 늘어 도둑놈, 걸인, 게으른 자들에게 강제로 일을 시켰고 일을 맡길 수 없는 바보와 미치광이들만 격리시켰다.
바보들을 배에 실어 먼 곳에다 버렸다는 증거는 없지만 보스의 <바보들의 배>를 보면 격리시킨 건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보스는 단순히 이런 사회적 현상을 그린 것이 아니다.
배에는 수도사와 두 수녀도 타고 있으며 생소하게도 주연이 벌어지고 있다.
당시 수도사와 수녀는 각기 따로 살고 있었으므로 함께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른다면 이는 본분을 잃은 행각이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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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의 음란영화 〈외로운 카우보이들〉


1967년 1월 워홀은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열서너 명의 식구들을 이끌고 애리조나 주 오라클로 갔다.
그들은 5일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35분짜리 16mm 컬러 필름 10개를 찍는 작업을 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촬영하기는 처음이었다.
하루에 필름 두 개를 촬영한 후 그것들을 35mm로 만들었다.
영화의 내용은 〈로미오와 줄리엣〉인데 제목을 〈라모나와 줄리앙〉이라고 붙였다가 나중에 〈외로운 카우보이들〉(그림 150, 151)이라고 고쳤다.
이 영화는 워홀이 가장 애써 제작한 것이지만 실패하고 말았고 워홀의 제작기교가 충분치 못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즈음 허드슨 극장은 워홀의 영화들을 상영해 매달 1만 달러에서 1만 5,000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워홀의 친구 비바가 아버지 친구로부터 꾼 30만 달러로 10여 명의 비행기표 값과 컬러 필름 값 그리고 그 밖의 제작비를 충당했다.
비바와 카우보이 형제들이 만나는 첫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워홀은 장소, 의상, 말 등을 빌리는 값으로 약 700달러를 지불했다.
기자가 모리세이에게 언제 영화가 상영될 예정이냐고 묻자 모리세이는 “약국에서 필름이 돌아오는 대로 상영될 예정이다”고 말해 기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이 워홀에게 “당신은 뭘 보여주려고 그 영화를 제작하고 있습니까?” 하고 묻자 “음, 우리들은 열심히 작업하고 있습니다”라고 동문서답을 했다.

〈외로운 카우보이들〉은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문제작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F.B.I.는 내용의 음란성 때문에 독수리 같은 눈을 한 요원을 영화제에 보내 워홀의 영화를 관찰하도록 지시했다.
F.B.I. 요원은 본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워홀의 영화에 출연한 모든 남자들은 동성애자들로 보였다.
… 많은 장면들은 마리화나, 마약을 복용하거나 술을 마신 후 연기한 것처럼 보였으며… .
영화는 여인과 남자간호사가 동네 거리에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때 오륙 명의 카우보이들이 동네에 들어왔고 두 그룹의 카우보이들은 서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카우보이 하나가 발레를 추면서 다른 카우보이가 마스카라를 잘못 사용한 것에 관해 대화하기 시작했다.
… 나중에 카우보이들은 여인의 집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여인의 옷을 벗기고 성적으로 희롱하기 시작했다.
이때 여인의 성기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났다.
남자와 여인의 행위가 아주 교묘하게 나타났는데 카메라가 행위를 전부 노출시킨 것은 아니었다.


요원은 여인의 부끄러운 부분이 노출되었으며 남자들은 옷을 모두 벗었다고 지적했다.
남자들은 함께 춤을 추었는데 젖꼭지가 노출되었으며 남자들 사이의 사랑행위도 있었고 음란한 대사가 많았다고 적었다.
〈외로운 카우보이들〉은 영화제에서 비주류로 취급받았지만 ‘에로틱 르네상스’라는 평을 들었다.

이 영화는 샌프란시스코에서 6개월 동안 상영된 후 뉴욕 맨해튼 55번가에 있는 앤디 워홀 가릭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299명 객석의 이 극장은 원래 가릭 극장이었는데, 워홀의 저격사건이 있은 뒤 1968년 7월 15일 극장의 이름을 새 앤디 워홀 가릭 극장(The New Andy Warhol Garrick Theater)으로 고쳤다.
모리세이의 말로는 가릭 극장만이 유일하게 그 영화의 상영을 제의했다고 한다.
영화가 상영되자 곧 평론이 나왔는데 《빌리지 보이스》의 앤드류 사리스가 쓴 것으로 다음과 같았다.

지루하고 숙명적으로 열정적인 워홀의 동성애 세계에는 무사고적이며 야비한 방법으로 조작된 반(反)양성애가 있다.

사리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카우보이들〉은 미국 여러 도시에서 상영하기로 되었으며 각 도시의 검찰은 영화에 주목했다.
애틀랜타에서 영화가 상영되자 TV에서는 그 영화를 ‘성범죄’라고 단정했고 미국 인권위원회는 그 영화가 법에 위반된다며 필름을 없앨 것을 요구했다.
워홀은 다른 음란영화들은 여기저기서 상영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에 대한 비난에 개의치 않았다.
〈외로운 카우보이들〉뿐 아니라 〈블루 무비〉(1968, 90분)도 7월에 가릭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평론가들은 워홀의 영화가 음란영화이며 침대에서 뒹구는 장면이 많고 말을 많이 하면서 성행위하는 장면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음란영화의 스타로 비바와 루이스 왈든을 꼽았다.
〈블루 무비〉가 상영되고 한 주가 지난 7월 31일 경찰은 극장 관리인을 체포했다.
검찰은 영화를 기소했으며 9월 17일 세 명의 판사는 영화가 음란하고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며 위법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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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의 조각들

 
계단을 내려와 커다랗게 열려 있는 전시실로 들어서니 프랑스 조각 일색인데 주로 로마, 고딕, 그리고 르네상스 양식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 전시실에는 17세기, 18세기, 19세기의 조각들도 있고
한쪽에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의 조각들도 있어 자연히 비교가 된다.
프랑스 조각은 인접한 나라들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한눈 상이한 점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18세기에 들어와서야 프랑스인 특유의 조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주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모습이다.
조각가들은 공간, 부피, 볼륨, 선, 질, 빛, 그리고 운동을 사람의 모습에서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관해 궁리했지만 외형적으로는 고전주의를 뛰어넘지 못했는데 나폴레옹의 고전주의에 대한 취향과 정치적 목적으로 미술이 고전주의를 받아들인 데 그 주요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장 앙톼느 우동Jean Antoine Houdon(1741-1828)의 조각이 두드러졌는데 그가 1777년에 테라코타로 제작한 5살난 여아의 흉상이 그곳에 있었다.
사람의 얼굴을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게 묘사할 줄 안 우동은 사실주의 묘사로 유명했다.
그의 유명한 <마담 빅톼르 Madame Victoire>는 익히 알려졌는데 루브르에 없다.

우동은 많은 유명인사의 흉상을 제작했는데 볼테르Voltaire, 루소Rousseau, 디드로Diderot, 부퐁Buffon, 그리고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와싱턴Washington, 프랭클린Franklin 등의 흉상을 제작했다.
볼테르는 전신을 대리석으로 제작했다.
우동이 1790년 청동으로 제작한 <사냥꾼 다이아나 Diana the Huntress>도 구곳에 있었는데 왼발을 바닥에 딛고 오른발은 바닥으로부터 떨어져있으며 여신을 상징하는 다이아나는 여인의 이상적인 몸매를 자랑했다.
프랑스에서 조각을 수학한 우동은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인체에 관해 해부학적으로 공부하면서 고전주의적 조각을 수학했다.
다이아나는 그가 선호한 주제로 그는 1776년에 플래스터로 제작했다가 1780년에는 대리석으로 그리고 1790년에야 청동을 떴다.
다이아나에 나타난 단순함과 유연한 선은 여인의 몸을 매끄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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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은 진동이다

 반 고흐는 아를에서 폴 고갱과 함께 생활한 적이 있다.
반 고흐가 자신의 귓불을 자른 건 이때 일어난 일이다.
고갱은 반 고흐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겉으로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존경심을 감춰 반 고흐를 화나게 만들었고
반 고흐는 고갱을 존경하면서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성을 냈다.
귓불을 자른 건 성을 못이긴 자해공갈이었다.
효과는 반대로 나타나 고갱은 학을 띠고 반 고흐로부터 멀리 달아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두 사람을 미술사에서 한쌍의 콤비로 기억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아마추어 화가들에 의해서 진정한 현대회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단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일념을 가진 이 두 성질 고약한 사람들에 의해서 서양회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충분히 회화 교육을 받은 화가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째서 원근법도 제대로 못맞추고 색도 제대로 내지 못했으며 남의 그림만 모방하던 이 두 사람이 떠오르는 별이 되었을까?
두 사람의 수준낮은 그림들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초창기의 거의 모든 그림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말년에서야 자신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렸고 이런 그림들이 두 사람을 현대회화의 선구자들로 만들었다.

고갱은 가난으로 지치고 마누라한테서도 멸시를 받을 때 친구 슈페네케에게 편지를 썼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말은 훗날 고갱과 반 고흐의 그림을 말해주는 함축된 미학이 된다.

"색은 음악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동이고
자연 안에서 일반적인 것들과 가장 모호한 것들을
나타내는 내면의 힘일세.
순수색!
모든 건 이것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네."

고갱과 반 고흐의 성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고갱은 인습타파주의자였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곧잘 했고
유럽의 현대문명을 냉소했으며
무심한 구석이 있었다.

이에 반해 반 고흐는
북유럽 특유의 기질대로 야성적이었고
천성이 열심히 하는 성격이었으며
동료 예술가들에게 곧잘 격정적인 우정을 표시했다.

반 고흐에게 격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런 격정이 야성적인 기질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적었다.

"난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기분내키는대로 사용한단다.
난 나 자신을 힘있게 표현하고 싶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보면 이 두 마디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아까운 건 그가 3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37살로 세상을 떠난 화가들로 반 고흐 외에도
라파엘로, 와토, 툴루즈 로트렉이 있다.
유명해지는 데 37살이면 충분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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