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저격당한 워홀 

 

1968년 6월 3일 월요일 오후. 워홀의 영화 〈나는 남자〉(1968)에 출연했던 발레리 솔라니스는 두 시간 동안 공장 길목에 서서 워홀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시 15분경 워홀은 공장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택시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하면서 제드 존슨이 철물점에서 물건을 담은 종이 백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본 워홀은 존슨이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던 솔라니스는 워홀이 자신을 보고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자 그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워홀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힐끔 보니 그녀는 눈 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발랐는데 그런 그녀의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6층에 당도하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공장 안에는 모리세이와 휴즈가 있었으며 잡지 《런던》의 편집자 마리오 아마야가 워홀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려 수화기를 든 모리세이가 워홀을 향해 “비바의 전화다!”라고 소리쳐 워홀이 수화기를 들었고 아마야는 담배를 찾고 있었다.

그때 총성이 울렸다. 워홀이 몸을 돌려 바라보니 솔라니스가 권총을 들고 서 있는데 아마 총알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아냐! 발레리, 쏘면 안돼!”라고 워홀이 소리쳤지만 그녀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바닥으로 넘어진 워홀이 책상 안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하는데 솔라니스는 워홀을 향해 다시 총을 쏘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심한 통증을 느낀 워홀은 고함소리와 함께 또 한 발의 총성을 들었다.
워홀과 통화를 하고 있던 비바는 수화기를 통해 총소리를 들었는데 사내들이 공장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총소리를 듣는 순간 잽싸게 바닥에 엎드렸던 아마야는 고개를 들어 약 1m 거리에 서 있는 솔라니스가 워홀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총알 한 방이 아마야의 왼쪽 엉덩이를 스쳤는데 하마터면 등골로 향할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아마야는 피를 흘리며 스크린방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방문을 꼭 닫았다.
모리세이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백주에 총질을 한 솔라니스는 창문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열리지 않았다.
솔라니스는 책상 아래 쭈그리고 있는 휴즈를 발견했다.
“발레리, 제발 쏘지마! 난 죄가 없어!” 휴즈가 소리쳤다.
솔라니스는 엘리베이터로 가서 스위치를 누르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휴즈에게로 와서 총을 겨누었다.
“널 쏘아야겠어!” 하며 막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휴즈는 “발레리, 여길 떠나는 게 상책이야! 저기 엘리베이터가 왔어. 빨리 가!” 하고 소리쳤고 그녀는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솔라니스가 떠나자마자 휴즈는 워홀에게 달려갔다.
워홀은 신음하고 있었다.
모리세이가 경찰관과 구급차를 불렀다.
셔츠가 온통 피에 젖은 아마야는 구급원에게 구멍이 몇 개나 났느냐고 물었다.
워홀과 아마야는 컬럼버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간호원이 워홀이 살 가망이 없다고 말하자 아마야는 “그는 유명한 예술가로 돈이 아주 많다.
그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운 좋게도 아마야는 많이 다치지 않았다.
경찰이 도착한 것은 솔라니스가 떠나고 30분 후였다.

한 시간 후 라디오를 통해 워홀의 저격사건이 보도되었다.
경찰은 사건현장에 있었던 휴즈와 존슨이 연루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두 사람을 경찰서로 연행하여 밤 9시까지 구금했다.
수십 명이 병원으로 몰려들었으며 그 가운데는 비바, 레오 카스텔리, 이반 캅, 울트라 바이올렛, 브리지드 폴크, 테일러 메드, 니코, 그리고 루이스 왈든도 있었다.
워홀은 수술실로 옮겨져 총탄제거 수술을 받았다.
성급한 기자들은 간호원의 말만 듣고 아예 워홀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천하고 광폭한 악몽

 
로댕 뮤지엄에는 마네와 반 고흐의 그림도 있다.
로댕이 소장했던 것들로 자심의 작품들과 함께 정부에 기증한 것들이다.
반 고흐의 자화상이 한 점 있는데 믿기 어려울 정도로 못그린 그림이다.
반 고흐와 고갱은 한쌍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데 두 사람 모두 아마추어 화가로서 모더니즘의 새 시대를 연 화가들이다.
아마추어 화가들이 전통 미술교육을 받은 화가들을 제치고 현대미술의 시대를 열었다는 건 여간 통쾌한 일이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초기에 그림을 못그렸지만 정신만큼은 현대성을 지닌 위대한 혼이다.

입구에 따로 지은 작은 건물에는 로댕의 드로잉과 대리석으로 제작한 조각들이 있다.
로댕의 명성에 비해 뮤지엄의 규모가 과분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밖으로 나와 쉴 곳을 찾다가 벤치 뒤에 <발자크의 기념비 Monument to Balzac>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로댕이 7년이나 걸려 완성한 작품으로 실재 사람의 크기보다 커서 발자크가 거인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아마 거인처럼 보이게 하려는 것이 로댕의 의도였을 것이다.
마치 인상주의 화가가 형상을 분명하지 않게 대충 그리듯 그는 형상을 분명하지 않게 제작했다.

이 작품은 작가연합의 대표 에밀 졸라Emile Zola가 1891년에 로댕에게 의뢰한 것인데 1898년 살롱전으로 통해 처음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때 졸라는 작가연합의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였다.
작가연합측은 이 작품이 조야하고 괴물같으며 알아볼 수 없고 "천하고 광폭한 악몽" 같아 위대한 문호의 이미지를 로댕이 손상시켰다고 배척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성인들이라서 이내 조각이 천재의 모습을 활기 있고 영웅주의의 상징으로 웅대한 모습으로 표현했음을 알았다.
평론가 로살린 프랭켈 쟈미송Rosalyn Frankel Jamison은 이 작품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로댕은 발자크의 창조적 열정을 비극적 흔적으로 얼굴에 남겼으며, 발자크의 몸을 극적으로 뒤로 제치게 했고, 커다란 겉옷을 그로 하여금 감싸도록 했는데 수도승이 입는 이 옷은 사실 발자크가 평소에 가운처럼 사용한 적이 있으며, 가운 안에서 기운이 퍙창하는 은유로 그의 열정을 상징했다.
어떤 학설에 의하면 가운 안의 팽창하는 기운을 뻣뻣해진 성기를 쥐고 있는 머리 없는 남자의 이미지로 탐험하며 타고난 창조적 긴장을 성적 기운으로 암시한다고 말한다. 이런 주제를 로댕은 이미 시적 영감의 이야기적 정황으로 격발시킨 적이 있고 그는 최종적으로 동상에 은밀한 몸짓을 더불어 사용했다.
로댕의 이미지는 점차 그의 개성적인 영감의 형상으로 밖으로는 마음에 내재한 창조적 동력주의로 나타났다."

언론으로부터 이 작품이 공격을 받았을 때 로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진실이 영원하다면 이 작품은 어느날 스스로 우뚝 서게 될 것이라고 난 예언할 수 있다.
... 이 조각은 내 인생의 총결산이다.
... 사람들은 발자크의 동상에서 잘못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술가는 늘 꿈을 완성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진실한 원리를 믿는다.
발자크가 배척을 받든 안 받든 이 작품은 유럽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예술과 상업예술 사이의 한계선상에 놓여 있다.
나의 원리란 형태만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까지도 모방되어야 한다.
나는 자연 안에서 그의 인생을 찾으며 그의 인생을 덩어리진 것과 움푹들어간 것들로 과장하면서 확대하여 전체의 합성을 찾은 후 좀더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 나는 이제 예술을 변명하기에는 늙었으며 성실함 자체가 변명이 될 줄 안다."

로댕은 1917년 11월 17일에 폐의 충혈로 67해의 인생을 마감했다.

P.S.
이건 조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효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에밀 졸라입니다.
그는 에미를 조른 사람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부르르 2010-09-1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조크 넘 귀여우세요~~~근데 로댕은 참 말을 잘하는데여. 꿈보다 해명이라고 후대사람들이 잘 표현해 준 것인줄은 몰라도...예술가가 저 정도 언어로 자신의 의사나 행위를 잘 표현한다면 대단한 플러스겠어여...
 

사치, 적요와 풍요

 
현대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는 4층으로 먼저 갔다.
1905년부터 현재까지의 작품이 4층과 3층에 있다.
책에서 많이 보아온 작품들을 그곳에서 대하니 한 마디로 황홀감을 맞볼 수 있었다.
실재 작품 앞에 서 있는다는 건 감격이다.
미술품을 감상한다는 말 appreciation은 영어로 고마움을 표시한다는 뜻이다.
작가의 노력에 감사하다는 뜻이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의 대표작들 중 한 점인 <사치, 적요와 풍요 Luxe, Calme et Volupte>가 우선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기 위해 그린 커다란 드로잉이 있다.
얼마나 책에서 많이 보았던가!
20세기의 대표적인 화가를 꼽으라면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할 수 없어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 두 사람을 가리켜서 쌍둥이 아버지라고 한다.
마티스는 과연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다.
피카소보다 12살이나 많다.

이 작품은 그가 1904년 폴 시냑과 함께 생 트로페Saint Tropez에서 여른 휴가를 보낼 때 시냑으로부터 점묘주의(붓질을 점으로 찍듯이 그리는 방법) 회화방법을 배워 밝은 색상으로 그린 것이다.
그는 이 그림을 포함해서 그때에 그린 그림들을 앙데팡당전Independants에 출품했다.
사람들은 앙데팡당전을 "추하고 아름다우며 위대한" 전시회라고 부르곤 했다.
35살 때 그린 것인데
법대출신 마티스는 늦게 화가로 데뷔했다.

마티스는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파리로 와서 상징주의의 대가 모로의 도움으로 에콜 데 보자르에 비공식으로 입학했다.
그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모로로부터 수학했는데 모로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
"자연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연은 단지 예술적 표현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은 상기하는 내면의 느낌에 대한 표현의 표적을 단순하고 조형적으로 하는 것이다."

얼마나 멋진 강의인가!
마티스는 훗날 모로의 가르침에 자신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흔들렸다고 술회했다.
그는 루브르 뮤지엄으로 가서 샤르댕Chardin의 그림을 모방했으며 툴루즈 로트렉의 관람자의 눈을 속이는 회화적 기교에 매료되었다.
현재에도 루브르에서 대가들의 그림을 모방하는 화가 지망생들이 많지만 그때에도 대가의 그림을 모방하는 것은 실질적인 훈련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은 창조할 수 있다고 했다.
기교를 중시하던 때의 말이다.
그러나 대가의 그림을 모방하다보면 단지 기교만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가 어떤 심상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그 장착의 과정을 또한 배우게 된다.

이 시기에 마티스의 그림에서 히도니즘적 성향을 발견하는데 그는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그림을 그리기를 선호했고 이런 성향은 평생 지속되었다.
그는 1905년 성격이 괄괄하고 장사에 수완이 있는 아내 아멜리 파라이르Amelie Parayre의 초상을 그리면서 아내의 모습을 이그러뜨렸으며 마치 어린 아이가 그리듯 사변적인 서투른 기교를 사용했다.
언론은 지나친 그의 자유분방함을 나무래기도 했다.

마티스는 조화를 모색하는 색의 새로운 창조는 자연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비롯해야 한다면서 색의 새로운 창조가 좀더 격렬한 독립된 회화의 실체를 강조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자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가는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떠나려고 할 때도 자신이 자연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껴야 하며, 예술가 자신은 자연을 오직 잘 설명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그래야 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 자신과 피카소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는 스페인 사람이고 난 프랑스 사람이다.
네가 다른 점을 묻는 것은 마치 사과와 배가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 것이다.
그것들은 자연의 것들이다."

과연 마티스는 그림을 단순화하듯 질문에 대한 답을 단순 명쾌하게 그러나 가장 설득력있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은 마지막 영화 〈나쁜〉을 제작했다


1970년 1월 모리세이가 〈쓰레기〉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내용이 그야말로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이 무렵부터 워홀의 영화는 대부분 모리세이가 감독을 맡았고 워홀은 다시 그림에 전념했다.
10월 〈쓰레기〉가 맨해튼 이스트사이드에 있는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쓰레기〉에서 연인 역을 맡은 홀리 우들론은 사고를 쳐서 개봉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다.
사기와 가짜신분증을 소지한 죄목으로 유치장에 갇힌 것이다.
우들론은 UN 대사의 부인으로 분장한 후 가짜수표를 제시하고 은행에서 6~7천 달러를 인출한 것이 발각나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여자교도소로 끌려갔다.
우들론은 “커다란 몸집의 여자간수가 내게로 와서는 ‘자, 드레스를 걷어올리고 팬티를 내려!’라고 말하길래 ‘마약을 소지했을까 봐 그러는 거에요?’라고 물으면서 우물쭈물하니 ‘입 닥치지 못해? 팬티를 내려!’라고 고함을 쳤다”고 전했다.
우들론이 할 수 없이 팬티를 내리자 여간수는 우들론의 자지를 보고 대경실색하면서 “저 놈을 당장 여기서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우들론은 커다란 차에 실려서 다른 곳으로 보내져 30일 동안 구류되었다.
〈쓰레기〉에서 나온 이익은 우들론의 보석금으로 사용되어 모리세이와 워홀은 돈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1975년 1월 뮤지컬 영화 〈달에 있는 남자〉가 맨해튼 웨스트 44번가에 있는 ‘작은 극장(Little Theater)’에서 소개됨으로써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고 싶어 했던 워홀의 소망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존 필립스가 음악을 작곡하고 각본도 썼으며 모리세이가 감독을 맡았다.
작은 극장에서 그 영화가 상영된 후 평론가들은 역시 웃기는 뮤지컬이라고 혹평했다.
영화에 대한 워홀의 열정은 대단해서 얼마 전에는 입체영화까지 제작했지만 평론가들로부터 호평 받는 영화를 제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1976년 여름 워홀은 마지막 영화 〈나쁜〉을 제작했다.
시나리오는 공장에 늘 오던 팻 해케트와 조지 아바그날로가 썼으며, 감독은 제드 존슨이 맡았는데 존슨은 〈외로운 카우보이들〉을 비롯해 그 후 제작된 영화의 편집 일을 했던 사람이다.
〈나쁜〉을 제작하는 데 100만 달러가 들었는데 돈을 투자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로 워홀과 프레드 휴즈가 담보물를 잡히고 은행으로부터 돈을 꾸어 충당했다.
주연은 익히 알려진 캐롤 베이커가 맡았다.
유럽에서 많은 영화에 출연했고 이탈리아에서는 성의 우상처럼 인기가 있던 그녀는 워홀의 영화 〈매춘부〉를 보고 감명 받았는데 미국영화에 출연하기는 이번이 10년 만이었다.
마흔여섯 살이지만 금발머리의 캐롤은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나쁜〉은 X등급으로 분류되었다.
아이가 울자 젊은 엄마가 인형을 창밖으로 집어던지면서 “계속 울면 너도 이렇게 될 줄 알아!”라고 말하는 등 과격한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평론가 존 시몬은 “영화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모두 냉혈동물들로 살인자들이고 정신병자들이다”라고 적었다.
뉴욕과 캘리포니아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워홀은 어디를 가나 〈나쁜〉은 아주 성공적인 영화라고 선전하면서 잭슨 폴록에 관한 영화를 제작하려고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페르낭 레제의 공산당행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의 그림은 복도에 걸려있다.
유물론 미학을 가진 레제는 늘 기계와 대량생산품에 관심이 많았으며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와 피카소의 공산당 가입은 세계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레제는 회화에서 유물론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그렇다손치더라도 피카소의 공산당행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피카소와 동갑내기 레제는 "난 고전주의자이며 나의 출발점은 순수 물질이다"라고 하면서 낭만주의를 추구한 피카소와의 상이한 점을 지적했다.

억척스런 소고기 매매상의 아들로 태어난 레제는 가족의 희망에 부응하여 건축을 전공했지만 제대한 후 장 레옹 제롬Jean Leon Gerome의 아틀리에에서 그로부터 수학했다.
그는 1907년 입체주의가 막 시작될 무렵 가난한 예술가들이 대거 거주하던 '꿀벌통'이란 별명을 가진 라 루세La Ruche에 묵었는데 당시를 회상하며 레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4명의 허무주의자 러시아인 예술가들 가운데 세 사람이 기억나는데 그들이 3미터의 조그만 방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또 어떻게 늘 보드카를 마셔댔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보드카는 비쌌으며 물론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것으로 ..."

1912년에 개최된 앙데팡당전은 앙데팡당전 사상 가장 규모가 컸는데 입체주의가 두드러진 전시회였다.
레제는 <숲속의 누드 Nudes in the Forest>를 출품하여 시인 아폴르네르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당시 입체주의 이론으로 아폴르네르가 두드러졌으며 그는 피카소의 미학적 갱단의 단원이었다.
레제는 이 그림을 1909-10년에 그렸는데 피카소가 1908년에 그린 <숲속의 누드>와 동일한 제목으로 그가 피카소에 대해 경쟁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레제는 징집되었다가 전선에서 개스로 인한 화상을 입고 1916년 9월에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말했다.
"전쟁은 내 인생에 커다란 사건이었다.
전선은 시를 초월한 분위기였으며 날 흥분시켰다.
...
전쟁은 날 땅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나는 갑자기 프랑스 국민과 하나가 되었다."

1917년 말에 제대한 레제는 대포, 포탄, 그리고 기계 부품의 형상들을 자신의 그림에 사용했으며 부엌의 주전자로부터 시작해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쇠부치와 기계를 회화적인 요소들로 사용했다.
그가 화상으로 군병원에 입원했을 때인 1917년에 그린 <카드놀이 The Game of Cards>는 전쟁이 그에게 보상해준 주제로서 상이군인들이 카드놀이를 하는 장면이다.

레제는 커다란 캔버스에 프로레타리아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으며
1948-49년에 그린 <공간-시간 행위 Space-Time Activities>는 그런 그림들 중 한 점이었가. 그는 그 그림을 파리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군립한 적이 있는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바친다고 적었는데 레제는 앙리 루소와 함께 다비드의 회고전을 관람한 적이 있다.

난 처음에는 레제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파이프모양으로 그렸고 아폴리네르는 그러한 그를 가리켜서 '튜브쟁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사람을 그런 식으로 그린 이유가 공간에서의 인체의 모습이라고 말했을 때 난 그의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유물론.
이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과학이다.
나는 미국에 가서 얼마 안 되어 TV에서 미국 석학의 말씀을 들었는데 제목이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있다'였다.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은 성서에 기록된 말로 미국을 포함한 기독교 신자가 많은 나라들에서는 잘 알려진 말이다.
헌데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있다'는 명제로 그 석학은 매우 논리적으로 이론을 전개했는데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정신적인 것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나머지 유물론은 물질주의의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만 엄밀히 따지고 본다면 유물론은 부인할 수 없는 과학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