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낭 레제의 공산당행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의 그림은 복도에 걸려있다.
유물론 미학을 가진 레제는 늘 기계와 대량생산품에 관심이 많았으며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와 피카소의 공산당 가입은 세계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레제는 회화에서 유물론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그렇다손치더라도 피카소의 공산당행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피카소와 동갑내기 레제는 "난 고전주의자이며 나의 출발점은 순수 물질이다"라고 하면서 낭만주의를 추구한 피카소와의 상이한 점을 지적했다.
억척스런 소고기 매매상의 아들로 태어난 레제는 가족의 희망에 부응하여 건축을 전공했지만 제대한 후 장 레옹 제롬Jean Leon Gerome의 아틀리에에서 그로부터 수학했다.
그는 1907년 입체주의가 막 시작될 무렵 가난한 예술가들이 대거 거주하던 '꿀벌통'이란 별명을 가진 라 루세La Ruche에 묵었는데 당시를 회상하며 레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나는 4명의 허무주의자 러시아인 예술가들 가운데 세 사람이 기억나는데 그들이 3미터의 조그만 방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또 어떻게 늘 보드카를 마셔댔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보드카는 비쌌으며 물론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것으로 ..."
1912년에 개최된 앙데팡당전은 앙데팡당전 사상 가장 규모가 컸는데 입체주의가 두드러진 전시회였다.
레제는 <숲속의 누드 Nudes in the Forest>를 출품하여 시인 아폴르네르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당시 입체주의 이론으로 아폴르네르가 두드러졌으며 그는 피카소의 미학적 갱단의 단원이었다.
레제는 이 그림을 1909-10년에 그렸는데 피카소가 1908년에 그린 <숲속의 누드>와 동일한 제목으로 그가 피카소에 대해 경쟁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레제는 징집되었다가 전선에서 개스로 인한 화상을 입고 1916년 9월에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말했다.
"전쟁은 내 인생에 커다란 사건이었다.
전선은 시를 초월한 분위기였으며 날 흥분시켰다.
...
전쟁은 날 땅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나는 갑자기 프랑스 국민과 하나가 되었다."
1917년 말에 제대한 레제는 대포, 포탄, 그리고 기계 부품의 형상들을 자신의 그림에 사용했으며 부엌의 주전자로부터 시작해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쇠부치와 기계를 회화적인 요소들로 사용했다.
그가 화상으로 군병원에 입원했을 때인 1917년에 그린 <카드놀이 The Game of Cards>는 전쟁이 그에게 보상해준 주제로서 상이군인들이 카드놀이를 하는 장면이다.
레제는 커다란 캔버스에 프로레타리아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으며
1948-49년에 그린 <공간-시간 행위 Space-Time Activities>는 그런 그림들 중 한 점이었가. 그는 그 그림을 파리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군립한 적이 있는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바친다고 적었는데 레제는 앙리 루소와 함께 다비드의 회고전을 관람한 적이 있다.
난 처음에는 레제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파이프모양으로 그렸고 아폴리네르는 그러한 그를 가리켜서 '튜브쟁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사람을 그런 식으로 그린 이유가 공간에서의 인체의 모습이라고 말했을 때 난 그의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유물론.
이는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과학이다.
나는 미국에 가서 얼마 안 되어 TV에서 미국 석학의 말씀을 들었는데 제목이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있다'였다.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은 성서에 기록된 말로 미국을 포함한 기독교 신자가 많은 나라들에서는 잘 알려진 말이다.
헌데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있다'는 명제로 그 석학은 매우 논리적으로 이론을 전개했는데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정신적인 것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나머지 유물론은 물질주의의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만 엄밀히 따지고 본다면 유물론은 부인할 수 없는 과학임을 알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