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 뮌헨으로 가다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법학도로서 장래가 촉망되던 칸딘스키는 1896년 에스토니아의 도르파르트 대학에서 제의한 강사직을 거절하고 회화를 배우기 위해 뮌헨으로 향했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고 아내 안냐가 동행했다.
당시 독일에서의 가장 진보적 미술 운동은 자연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서정적 자연주의 나투어리리스무스Naturlyrismus였다.
그 중심지가 뮌헨 근교의 데사우, 브레멘 근교의 보르프스베데였으며 그곳 출신 화가들은 색채와 선의 표현적 힘을 활용함으로써 1905년에 체계적으로 출현할 독일 표현주의를 예고했다.
나투어리리스무스는 전통적인 독일 감상주의, 프랑스 화가 밀레Jean-Francois Millet(1814~75)와 바르비종 화파Barbizon school, 스위스 화가 아놀트 뵈클린Arnold Bocklin(1827~1901)의 양식적 영향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결합된 것이다.

농부의 아들 밀레가 처음 농촌생활을 주제로 삼은 것은 1848년이었다.  

1849년 바르비종에 정착한 후 농부들의 소박하고 서정적인 삶을 묘사하는 작업에 전념했으며 그런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밀레는 대지에 대한 낭만적 감정, 땅을 경작하는 노동과 그런 노역의 슬프기까지 한 엄숙함, 농촌생활의 진지하고 애수어린 면을 감성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
그를 포함해 바르비종 화파는 19세기 중반에 활동한 프랑스 화가들의 집단으로 화파의 명칭은 퐁텐블로 숲 외곽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에서 유래했다.
1840년대 후반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1812~67)와 그의 추종자들이 그곳에 정착했다.
풍경 속에 신화의 인물, 상징적 인물을 삽입한 뵈클린은 뛰어난 유채 사용의 기교를 구사하며 감상주의 작품에 해학적 요소를 가미시켰다.
이런 서정적 자연주의가 칸딘스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1904~07년에 제작한 작품들에 발견된다.

빛의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칸딘스키가 선택한 것은 모네의 양식이다.
모네는 1865년부터 빛과 대기에 의해 점차 변모하는 오브제의 외양을 포착하기 위해 한 주제를 정한 후 집중적으로 작업했는데, 조토 이래 서양화에 기본이 된 명암을 따뜻한 색채와 차가운 색채의 조화로 바꾸면서 원색을 색점으로 사용했다.
모네의 작품은 수많은 색점들로 구성되었으며 각 색점은 자율성을 지녔다.
색채를 통해 빛의 분해현상을 재현하면서 색채를 강조한 회화를 하나의 실재realite로 제시했다.
인상주의가 독일에 유입된 것은 1900년경이며 베를린 분리파에 의해 확산되었다.
인상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두드러졌으며 베를린 태생의 화가, 판화가 막스 리베르만, 바이에른의 란츠후트 태생의 화가, 삽화가 막스 슬레포크느Max Slevogt(1868~1932), 동프로이센의 타피아우 태생의 화가 로비스 코린트Lovis Corinth(1858~1925) 등이 운동의 축을 이루었다.

칸딘스키는 장식적 요소를 강조하는 아르 누보Art Nouveau의 영향도 받았다.
당시에 ‘모던 양식 modern style’으로 불린 아르 누보는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대규모의 만국박람회에서 화려하게 등장한 이래 100여 년 동안 여성적인 곡선과 식물의 덩굴무늬 그리고 선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이미지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산업미술에 대한 독일인의 새로운 관심과 일치한 아르 누보는 유겐트슈틸Jugendstil이란 명칭으로 19세기 말 독일에 들어와 뮌헨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그곳에서 아방가르드 양식으로 간주된 후 빈에서 화가, 판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에 의해 확립되었다.
19세기 후반 아카데믹한 역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이 운동은 과거 양식들을 모방하고 변화시키는 대신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려고 한 신중한 시도였다.
본래 영국의 미술공예Arts and Crafts 양식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가구, 판화작품, 삽화 등의 실용, 응용미술에서 가장 전형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새로운 회화와 조각 운동이 파리에서 시작된 데 반해 아르 누보는 런던에서 발생해 유럽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아르 누보는 독일에서 1896년에 창간된 잡지 <유겐트 Die Jugend>에서 유래한 명칭인 유겐트슈틸, 오스트리아에서는 제체시온슈틸Secessionstil, 이탈리아에서는 아르 누보 디자인 보급에 크게 기여한 런던 리전트 스트리트의 리버티 상회 이름을 딴 스틸레 리베르티La Stile Liberty, 스페인에서는 모데르니스타Modernista로 불리었다.
파리에서는 189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점을 반영하여 모던 스타일로 통했다.

칸딘스키는 뮌헨에서 유고슬라비아 화가 안톤 아츠베Anton Azbe와 후에 뮌헨 아카데미 교수이자 뮌헨 분리파Munich Sezession의 창립회원이 되는 독일 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의 지도를 받았다.
1890년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여러 도시에 거주하던 진보적 성향의 예술가들은 더 이상 기성 권위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기존의 단체들과는 자유롭게 작품을 전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자신들만의 단체를 창설하여 기성 단체들과 분리함으로서 분리파로 불리었다.
이런 분리 집단에 붙여진 명칭이 제체시온Secession이다.
이런 단체들 가운데 1892년 뮌헨에서 결성된 뮌헨 분리파가 최초이며 이 분리파의 지도자가 폰 슈투크와 빌헬름 트뤼브너Wilhelm Trubner(1851~1917)였다.
뮌헨 분리파에는 다양한 양식을 구사한 화가들이 있었으며 아카데믹한 역사주의와 자연주의로부터 인상주의와 상징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칸딘스키는 아츠베의 회화반에서 실제 모델을 보고 누드화를 그리는 훈련을 받았다.
그는 “냄새 나고, 무관심하며, 표정이 없고, 특징 없는” 모델에게 혐오감이 생겼다고 훗날 말했지만 아츠베의 반에서 2년 동안 수학했다.
아츠베는 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리면서 색을 섞지 않고 병렬시키는 기법을 사용했는데 칸딘스키가 영향을 받았다.
칸딘스키는 시간이 나면 야외로 나가 활력 있는 색을 사용하여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훗날 말했다.
“같은 반 동료 학생들이 내 숙제물을 보고서는 내게 ‘색채주의자 colourist’라는 딱지를 붙였고 더러는 악의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를 ‘풍경화 화가 landscape painter’라고 불렀다.”

그는 드로잉보다는 색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훗날 자신은 “자연에 취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아츠베의 회화반에서 같은 나라 사람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와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를 만나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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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미술문화) 중에서  

 <제임스 티소>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 티소Tissot(1836~1902)의 본명은 자크 조제프Jacque Joseph입니다.
그는 벨기에의 화가 알프레드 스티븐스Alfred Stevens(1818~75)의 기법으로 화려한 사교계, 특히 부인들을 그린 화가로 파리에서 순조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 뒤 티소는 파리 코뮌에 가담했다가 1871~72년 런던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영어 이ㅡㅁ 제임스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화류계의 그림을 그려 다시 높은 인기를 얻었고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을 그려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주로 영국에 영주한 화가, 판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1834~1903)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탬스 강변의 풍경을 담은 그림도 많이 그렸습니다.
프랑스로 돌아온 뒤 그의 삶의 후반은 매우 종교적이 되었고 성서의 삽화를 그리는 데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티소는 영국에서 초상화로 많은 돈을 벌러 귀족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마네의 베니스 풍경 한 점을 2천 5백 프랑을 주고 구입했는데,
마네의 모델이자 마네의 남동생 외젠과 결혼한 여자 화가 베르테의 말로는 그 가격은 티소에게 코끼리 비스켓 정도라면서 티소는 단번에 30만 프랑어치의 그림도 판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1천 5백 프랑이 오늘날 약 960달러에 해당하므로 그림값을 대충 어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르테가 런던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티소가 왕자처럼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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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이 잡지사 사장이 되다

1969년 가을 워홀은 또 하나의 사업을 시작했다.
월간지 《인터뷰 Interview》(그림 158)를 발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충동질한 사람인 신문 《다른 장면들 Other Scenes》의 발행인 존 윌콕은 이렇게 회상한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워홀의 공장에 있다가 늘 그랬듯이 워홀이 영화로 100만 달러를 벌지 못하는 것을 투덜대자 “앤디, 넌 왜 신문을 만들지 않느냐?”고 물었고 결국 두 사람은 동업해 잡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워홀이 돈을 대고 윌콕은 편집 일을 하기로 하고 지분을 반반으로 정했다.
워홀은 처음에 잡지 제목을 inter/VIEW로 했다가 나중에는 그냥 Interview로 정했다.
윌콕이 잡지가 어떠한 이미지로 보이기를 바라느냐고 묻자 워홀은 “정말 혁명적이며, 롤링 스톤즈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69년 9월 월간 영화잡지 《인터뷰》 창간호가 출판되었다.
35센트 가격이 매겨진 이 잡지의 흑백 겉표지는 비바, 제임스 라도, 제롬 라그니가 프랑스 감독이 헐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 〈사자의 사랑〉에 등장하는 누드를 풍자하여 갖가지 포즈를 취한 장면이었다.
워홀은 말랑가를 편집인으로 임명했다. 말랑가에 의하면 워홀이 잡지를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영화제에 자신의 영화를 출품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윌콕은 말이 50% 주인이었지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었고 워홀과 말랑가가 편집을 주도했다.
일 년 후 윌콕은 영국으로 이주할 계획이어서 워홀더러 자신의 지분을 사라고 했다.
《인터뷰》는 여태까지 돈을 벌어준 적이 없었지만 윌콕은 6,000달러를 요구했다.
윌콕은 “앤디가 제게 5,000달러를 주었어요.
생각해 보니 1,000달러는 평생 받지 못할 것 같아 대신 앤디의 작품을 달라고 말했지요”라고 했다.
워홀은 윌콕에게 1970년에 제작한 꽃 실크스크린 두 점을 주었다.
당시 한 점에 500달러였던 이 작품들은 1997년 현재 약 3만 2,000달러에서 3만 5,000달러 정도 나간다.
워홀은 곧 잡지 겉표지에 자신만이 주인임을 알리기 시작했다.
잡지는 조금씩 좋아졌고 구독자 수가 늘어났다.

워홀은 이 무렵에는 외출할 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휴대하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수천 점의 사진을 찍곤 했다.
그는 누구든지 공장에 오면 “자네 자지와 불알을 찍어도 되겠나?”라고 물었다.
워홀은 “누구는 그러마 하고 바지를 내렸고 누구는 안 된다고 거절했는데 그들이 누군지 알면 당신들은 놀랄 거요”라고 말했다.

이 시기에 워홀과 가장 가까웠던 여인은 브리지드 폴크였다.
폴크는 워홀이 찍은 사내들의 자지 사진들을 좋아했으며 워홀은 폴크의 상반신 나체를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즐겨 찍었다.
살이 찐 폴크는 허리를 조금만 굽혀도 뱃가죽에 주름이 생겼고 상반신은 녹아흐르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았다.
1969년 가을 폴크가 워홀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소문이 떠돌자 로스앤젤레스의 잡지 《Coast FM & Fine Arts》는 폴크의 말을 인용하며 진상을 보도했다.

제가 앤디를 위해 2년 동안 작업했어요.
그는 더 이상 작업하지 않아요.
작업하는 것이 지루해서죠.
수프 통조림 그림들은 제가 그렸어요.

《타임》 기자가 워홀에게 소문의 진위를 묻자 워홀은 사실이라고 하면서 폴크가 모든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독일 언론이 발끈해 그럼 그들이 여태까지 수집한 작품들은 워홀이 제작한 것이 아니라 폴크의 작품이란 말이냐고 항의했다.
사람들은 수십만 달러를 지불하고 실크스크린을 구입했는데 그것들이 폴크의 작품이라고 알려지자 항의전화가 빗발쳤지만 워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도 비지니스라 생각했고 ‘공장’이라고 부른 작업실에서 생산되는 대량의 제(작)품을 누가 만들었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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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나의 매혹적인 모스크바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칸딘스키는 1889년에 파리를 여행했다.
1892년 26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법률고시 시험에 통과했으며 곧 사촌인 안냐 치미아킨Anya Chimikian과 결혼한 뒤 두 번째 파리를 여행했다.
1893년에 모스크바 대학 경제 통계학과에 조교로 근무했고 학위 논문으로 <노동 임금의 적법성에 관하여 The Legality of Labourers' Wages>를 썼다.
1895년에는 모스크바의 쿠쉬베레브 인쇄소의 예술담당 책임자로 일했다.
1896년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린 모스크바의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회에 가서 특히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훗날 인상주의 전시회에서의 감동을 <회고록>(1913)에 적었다.
"모네의 <건초더미>를 카탈로그 목록을 보고 알았다.
그 작품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팔레트의 위력이었다.
그 작품이 나의 감추어졌던 부분에까지, 내 모든 꿈속에까지 파고들었다. 굉장한 빛과 힘을 전달했다. ...
내가 인상 깊게 받아들인 것은 나의 ‘매혹적인 모스크바’가 화면 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상자
‘건초더미 Haystacks’ 연작
모네가 ‘건초더미’ 연작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90년 늦여름 지베르니에서였다. 1884~85년에 그린 적이 있는 건초더미를 1890~91년에 계속해서 그렸다.
그가 그린 6점은 햇빛이 건초더미의 측면을 비춘 모습이고 7점은 해가 중천에 떠 있어 그림자가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18점은 해가 관람자를 향한 실루엣이다.
모두 겨울에 그린 이 연작에 나타난 색조가 따뜻한 느낌을 준다.
금빛 나는 지푸라기는 비와 서리를 맞아 엷은 회색으로 변했으며 땅은 붉은 갈색이다.
몇 점의 작품에서 눈과 서리가 발견된다.

모네는 이 연작을 시작으로 곧 이어서 ‘포플러’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1892년 2월에는 루앙 대성당 건너편 2층에 방을 세 얻고 대성당을 주제로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말년에는 ‘수련’ 연작을 그렸으므로 그가 연작으로 그린 주제는 모두 네 가지이다.

칸딘스키가 말한 ‘매혹적인 모스크바’는 1904~07년의 작품에 나타나게 될 서정성과 중세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상징적 표현을 말한다.
<풍경 속의 러시아의 아름다움>(1904년경)은 제목이 시사하듯 중세 러시아 건축물에 대한 애착을 배경에 담은 작품으로 색점을 모자이크처럼 사용했으며, <러시아 장면>(1904), <볼가 노래>(1906), <말 탄 한 쌍> 등에서도 러시아 건축물이 배경으로 사용되었으며 러시아인의 소박하고 정겨운 삶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표현했다.
채색에 있어 붓질을 짧게 한 인상주의 양식과 밝은 색을 점으로 찍어 색을 분할시키는 신인상주의의 점묘주의Divisionnisme를 혼용했음을 보며,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색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삶의 리듬 혹은 율동을 표현함으로써 활력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1907년 이후에는 반 고흐처럼 붓을 구불구불 사용하여 색채에 더욱 생기를 불어넣었다.

<말 탄 한 쌍>은 1906~07년 겨울 파리 근처 세브르에 머물 때 그린 것이다.
시적인 세계를 묘사한 이 작품은 어렸을 적 이모에게서 들은 동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옛날 옛적의 신비한 세계 속에 말 탄 한 쌍이 포옹하는 장면이다.
고대 독일의 거리에서 벌어졌을 법한 중세 기사의 러브스토리이지만 배경이 19세기의 러시아이며 말 탄 한 쌍도 러시아 의상을 하고 있다.
두 사람 머리 위의 나뭇가지에는 금빛 잎이 달려 있다.
그들 뒤로 강이 흐르고 강물은 다양한 색의 모자이크로 처리되었다.
뒤로 멀리에 둥근 모자를 쓴 러시아 건축물들이 보인다.
여기에는 아르 누보와 상징주의 그리고 실제 세계를 비물질화하는 추상까지 다양한 양식이 혼재되어 있으며 색을 쪼개고 분할하는 데서 신인상주의의 점묘주의 양식도 사용되었음을 본다.
색을 그림의 내용을 감추는 수단으로 사용했으며 이는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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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추킨과 모로조프의 콜렉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는 두 사람의 모스크바 태생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시추킨Sergei Ivanovich Shchukin(1854~1937)과 이반 아브라모비치 모로조프Ivan Abramovich Morozov(1871~1921)의 소장품이 있다.
다양한 사업을 한 모스크바 대상 가문 출신의 시추킨은 자신의 취향대로 미술품을 수집했으며 특히 프랑스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수집했다.
고갱과 마티스의 작품은 그의 소장품 중 귀중한 품목이다.
그의 소장품이 1918년에 국유화되었고, 후에 모로조프의 소장품과 합쳐졌으며, 두 사람의 소장품은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모스크바의 푸슈킨 미술관에 분할 소장되었다.
시추킨은 1903년부터 보나르, 드니, 마티스, 모네를 비롯해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수집했고 1917년에 대가들의 작품만 250점에 달했다.
그는 러시아의 모더니즘, 특히 푸른 장미Golubaya Roza 그룹과 신원시주의Neo-primitivism 작품들도 수집했다.

푸른 장미 그룹은 1910년대에 활발히 활동한 러시아 화가들의 모임으로 그룹 명칭은 190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비롯했다.
하늘, 정신과 관련이 있는 푸른색은 상징주의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색이며 장미에는 많은 상징적 연상이 담겨 있다.
푸른 장미 그룹 예술가들은 야수주의와 원시주의에 관심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상징주의 양식을 고수했다.
신원시주의도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발생한 회화 운동으로 이 운동을 전개한 화가들은 농촌 미술, 밝게 채색된 민속 판화인 루보크lubok, 러시아의 예술적 유산으로부터 유래한 특징과 서구 아방가르드의 영향을 의도적으로 조야하게 결합시켰다.
루보크에는 보통 민속 우화와 이와 유사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신원시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는 나탈리아 세르게예브나 곤차로바Natalia Sergeevna Goncharova(1881~1962)와 미하일 페도로비치 라리오노프Mikhail Fedorovich Larionov(1882~1964) 부부이며 시기적으로 신원시주의는 독일 표현주의와 일치하고 1906~07년에 태동하여 1910년과 1913년 사이 절정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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