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워홀이 잡지사 사장이 되다
1969년 가을 워홀은 또 하나의 사업을 시작했다.
월간지 《인터뷰 Interview》(그림 158)를 발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충동질한 사람인 신문 《다른 장면들 Other Scenes》의 발행인 존 윌콕은 이렇게 회상한다.
어느 날 오후 그는 워홀의 공장에 있다가 늘 그랬듯이 워홀이 영화로 100만 달러를 벌지 못하는 것을 투덜대자 “앤디, 넌 왜 신문을 만들지 않느냐?”고 물었고 결국 두 사람은 동업해 잡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워홀이 돈을 대고 윌콕은 편집 일을 하기로 하고 지분을 반반으로 정했다.
워홀은 처음에 잡지 제목을 inter/VIEW로 했다가 나중에는 그냥 Interview로 정했다.
윌콕이 잡지가 어떠한 이미지로 보이기를 바라느냐고 묻자 워홀은 “정말 혁명적이며, 롤링 스톤즈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69년 9월 월간 영화잡지 《인터뷰》 창간호가 출판되었다.
35센트 가격이 매겨진 이 잡지의 흑백 겉표지는 비바, 제임스 라도, 제롬 라그니가 프랑스 감독이 헐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 〈사자의 사랑〉에 등장하는 누드를 풍자하여 갖가지 포즈를 취한 장면이었다.
워홀은 말랑가를 편집인으로 임명했다. 말랑가에 의하면 워홀이 잡지를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영화제에 자신의 영화를 출품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윌콕은 말이 50% 주인이었지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었고 워홀과 말랑가가 편집을 주도했다.
일 년 후 윌콕은 영국으로 이주할 계획이어서 워홀더러 자신의 지분을 사라고 했다.
《인터뷰》는 여태까지 돈을 벌어준 적이 없었지만 윌콕은 6,000달러를 요구했다.
윌콕은 “앤디가 제게 5,000달러를 주었어요.
생각해 보니 1,000달러는 평생 받지 못할 것 같아 대신 앤디의 작품을 달라고 말했지요”라고 했다.
워홀은 윌콕에게 1970년에 제작한 꽃 실크스크린 두 점을 주었다.
당시 한 점에 500달러였던 이 작품들은 1997년 현재 약 3만 2,000달러에서 3만 5,000달러 정도 나간다.
워홀은 곧 잡지 겉표지에 자신만이 주인임을 알리기 시작했다.
잡지는 조금씩 좋아졌고 구독자 수가 늘어났다.
워홀은 이 무렵에는 외출할 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휴대하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수천 점의 사진을 찍곤 했다.
그는 누구든지 공장에 오면 “자네 자지와 불알을 찍어도 되겠나?”라고 물었다.
워홀은 “누구는 그러마 하고 바지를 내렸고 누구는 안 된다고 거절했는데 그들이 누군지 알면 당신들은 놀랄 거요”라고 말했다.
이 시기에 워홀과 가장 가까웠던 여인은 브리지드 폴크였다.
폴크는 워홀이 찍은 사내들의 자지 사진들을 좋아했으며 워홀은 폴크의 상반신 나체를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즐겨 찍었다.
살이 찐 폴크는 허리를 조금만 굽혀도 뱃가죽에 주름이 생겼고 상반신은 녹아흐르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았다.
1969년 가을 폴크가 워홀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소문이 떠돌자 로스앤젤레스의 잡지 《Coast FM & Fine Arts》는 폴크의 말을 인용하며 진상을 보도했다.
제가 앤디를 위해 2년 동안 작업했어요.
그는 더 이상 작업하지 않아요.
작업하는 것이 지루해서죠.
수프 통조림 그림들은 제가 그렸어요.
《타임》 기자가 워홀에게 소문의 진위를 묻자 워홀은 사실이라고 하면서 폴크가 모든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독일 언론이 발끈해 그럼 그들이 여태까지 수집한 작품들은 워홀이 제작한 것이 아니라 폴크의 작품이란 말이냐고 항의했다.
사람들은 수십만 달러를 지불하고 실크스크린을 구입했는데 그것들이 폴크의 작품이라고 알려지자 항의전화가 빗발쳤지만 워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도 비지니스라 생각했고 ‘공장’이라고 부른 작업실에서 생산되는 대량의 제(작)품을 누가 만들었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