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표현주의의 출현, 잭슨 폴록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이제 여러분은 창밖으로 한 시골뜨기가 맨해턴 거리를 서성이는 모습을 볼 것이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두리번거리는 그 자가 바로 추상표현주의의 간판스타 잭슨 폴록이다. 그가 뉴욕에 막 도착했다.

1930년 가을, 열여덟 살의 시골뜨기가 서부에서 뉴욕으로 왔는데 그가 바로 미국이 금세기의 예술가로 자랑하는 폴록이다. 마론 브란도처럼 앞이마가 훤히 드러나고 균형잡힌 몸에 남성답게 생겼으며 아리조나 주의 넓은 광야에서는 굴레 벗은 망아지 같았던 그였지만 그 역시 맨해턴에 도착하여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완공을 서두르고 있는 102층짜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보았고 철로 된 왕관을 쓰고 도도한 모습으로 서 있는 크라이슬러 빌딩도 보았다. 그는 맨해턴 여기저기에서 크레인을 사용하여 고층건물들을 짓고 있는 뉴욕의 활기를 놀라와했다.

유명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형 찰스와 함께 뉴욕으로 왔으므로 폴록은 우선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으로 가서 대가들의 그림을 마치 카톨릭 신자가 성모상을 바라보듯이 우러러보았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그림도 훗날 대가들의 그림들과 나란히 그곳에 걸릴 날이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그는 그 영광을 못 보고 떠났지만 필자는 그곳에서 그의 그림을 보았다). 어쨌든 그때만 해도 예술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평생 가난하고 외로운 인생을 살겠다는 선택이었다.

그해 4월 14일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의 선두주자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한계에 좌절하여 권총으로 심장을 쏘아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던 추상화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자 우울증에 빠졌고, 서른일곱 살의 나이에 영원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반 고흐도 같은 나이에 권총자살했는데 그는 동생 테오(Theo)에게 보내려고 썼다가 중단했던 편지에서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역할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고백하며 좌절하고 있다. 이처럼 천재들은 위대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경고한 대로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을 체험하면서 죽음으로 뛰어들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예술에 일생을 걸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있다면 제발 좌절하지 말기 바란다. 앙드레 브르통은 마야코프스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잡지 『초현실주의자들의 혁명 Revolution Surrealiste』에 그가 세상을 버리기 전에 쓴 시 한 구절을 소개했다. “사랑의 보트는 인생에 대적하며 충돌했다.”

러시아인 칸딘스키는 1910년에 이미 수채화로 완전추상을 성취하여 미술사의 쾌거를 이루었고, 곧이어 카시미르 말레비치가 절대주의(Suprematism)로, 로베르 들로네가 음율주의(Orphism)로, 몬드리안이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로 완전추상에 도달했지만 아직 사람들은 그러한 그림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더니즘의 대가 피카소는 자신도 거의 완전추상에 다다른 그림들을 그렸으면서 “회화에 있어서 완전추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으며, 그의 위대한 적 마티스도 사물들을 단순하게 추상화하여 그렸지만 완전추상을 부인했다. 그래서 몬드리안은 추상화만 그리다가는 가난을 면치 못할 줄 알고 생계를 위해 정물화와 구상화를 그려 팔면서 가명을 사용했다.

이러한 무지의 완전추상을 추구하려고 폴록의 여인 리 크래스너가 준비를 했고, 폴록이 뉴욕으로 와서 이 길을 찾았으며,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이 길을 따라 전진하게 된다. 여러분을 그 길로 안내하는데, 폴록의 나머지 생을 함께 했던 리 크래스너를 먼저 소개한다.

미래의 아내 리 크래스너
뉴욕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홍일점인 리 크래스너(Lee Krasner 1908~84)는 드센 성격에 팔자가 세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날씬한 몸매와 큰 가슴을 가졌으므로 사내들은 그녀가 성적으로 매력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리는 미술학교 아트 스튜던츠 리그(The Art Students’ League)에서 모델로 일한 적이 있었으며, 그리니치 빌리지의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트리스 일을 할 때에는 단골손님 작가들로부터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한스 호프만의 미술학교에서 함께 수학했던 릴리언 올린시(Lillan Olinsey)는 “리는 매력이 있었지만 동시에 혐오감을 주었으며, 아주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고 …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다”고 말했다.

리는 폴록보다 4년 연상으로 1908년 10월 27일 뉴욕 브루클린의 셴크 애비뉴(Schenck Avenue, Brooklyn)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러시아에서 이민 온 전통주의 유태인들로서 어머니가 먼저 뉴욕으로 왔으며 아버지는 1908년 초에 와서 어머니와 재회했다. 그녀의 본명은 르노어 크래스너(Lenore Krassner, 크래스너에 s가 둘임)였는데 대개는 ‘레나(Lena)’라고 불렸다. 그녀의 아버지 요셉(Joseph Krassner)이 어머니 안나 와이스(Anna Weiss)를 아내로 맞이했을 때 안나는 겨우 열한 살에 불과했다. 요셉은 러시아의 오데사 근처 작은 동네에서 랍비(Rabbi : 성서학자)를 위해 일하다가 처남을 따라 뉴욕으로 왔는데 이때 그의 아내 안나의 나이  열여덟 살이었다. 요셉은 생선과 야채를 파는 상점을 경영했는데 상점 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자신은 종교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정도로 종교에 넋이 빠진 사내였다. 안나는 상점을 걷어치우고 블레익 스트릿 시장(Blake Street Market) 안에 조그만 생선 파는 장소를 임대하여 맨해턴에서 브루클린까지 마차로 생선을 실어나르면서 새벽부터 밤 늦도록 소처럼 억척스레 일했다. 경제적으로 무심한 아버지와 인내심이 부족하여 곧잘 화를 내는 어머니, 미국의 청교도 문화를 못마땅해하는 부모 아래서 리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회상했다.

리는 어려서부터 토요일이면 어머니를 따라서 유태인들의 공회당에 갔다. 두 사람은 2층에 마련된 좌석에 앉았으며, 잘난 사내들은 아래층 좌석에 앉았다. 그러나 리는 새로운 종교를 발견하고 거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술이었다. 그녀의 언니 루스(Ruth)는 리가 어릴 적에 잡지와 신문을 보고 화려한 의상을 한 여인들을 드로잉했는데 어찌나 잘 그렸던지 놀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므로 리는 열네 살 때인 1922년 쿠퍼 유니온(Cooper Union) 미술학교에 입학해서 1925년까지 그곳에 재학한 후 1928년에는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학했으며, 이듬해 다시 쿠퍼 유니온에 적을 두었다가 졸업하였다. 1929년에 다시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The National Academy of Design)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일리아 볼로토브스키와 미래의 남편 이고 팬투호프를 만났다. 리는 이 학교에 입학한 지 넉 달 만에 정학 처분을 받았다. 담임교사의 말에 의하면 “항상 말썽을 부렸다”는 것이며 그해 12월에 그녀는 아예 퇴학당했는데 “허락도 없이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는 것이 학교 기록부에 적혀 있는 이유였다.

1929년 10월 말 ‘검은 금요일(Black Friday)’이라고 불리는 그날 월 스트리트(Wall Street)의 증권시장에서 주식가격이 폭락하면서 경제공황이 시작되었다. 경제공황은 세계 전역을 휩쓸었고 이렇게 시작된 1930년대는 춥고 배고픈 세월이었으므로 여러분에게도 그 시대를 산 예술가들에게 동정심을 표하는 아량이 있기를 바란다. 어쨌든 스물두 살의 리는 공황이 시작되던 그해 여름 내내 자화상을 그리느라고 분주했는데 당시를 그녀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는 롱 아일랜드의 헌팅턴(Huntington, Long Island)에서 온여름을 보냈으며, 나무에 못을 치고 거울을 단 후 자화상을 그렸다. 그 그림을 가을에 아카데미 위원회에 제출한 후 인정받아 실제 모델을 그리는 반에 편입될 수 있었다”(2).

이 시기에 그녀는 이고 팬투호프와 자주 만났다. 이고는 리의 몸매를 사람들에게 더욱 자랑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도록 간섭했으며, 직접 화장법까지 만들어 리의 눈화장과 얼굴 치장에까지도 그의 이기심을 관철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그는 여간 좀스러운 사내가 아니었다. 이고가 1932년에 그린 리의 초상화를 보면 그가 원했던 그녀의 모습이 얼마나 글래머였던가를 알 수 있다.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제물에만 마음이 있었던 그는 정작 신앙으로 섬겨야 할 회화보다는 모델을 더 사랑했으므로 예술가로서는 턱없이 모자라는 사내였으며, 따라서 자랑스런 뉴욕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다. 게다가 그는 나중에 성(性)에 혼란이 일어나서 이성과 동성 모두를 사랑하는 괴짜 인간이 되었다.

훗날 리가 폴록의 아내가 되었을 때 이고가 두 사람의 집에서 며칠 묵은 적이 있었는데 어느 사내가 아내의 전 남편에게 친절할 수 있겠는가. 폴록은 질투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를 잡으러 다녔으며 이고는 도망쳐야 했는데 그때의 일은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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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와 성모 마리아 형제회의 정회원 

 

형제회는 1478년 교회 내 아직 공사 중이던 성가대석 북쪽에 부속예배당을 건립하기로 하고 교회 전문 건축가 알라르트 두 하멜Alart du Hamel을 책임자로 선정했는데,
훗날 두 하멜은 보스 양식의 엔그레이빙을 제작했다.
두 하멜은 성 요한 교회를 위해 많은 작업을 했으며 교회 본당 회중석과 성모 마리아 형제회 예배당을 장식하는 일을 했다.
일부 학자는 그가 교회의 창 위의 작은 박공gablet과 부축벽 날개flying buttresses에 식물 잎사귀 무늬를 장식한 것으로 본다.
시문서에 의하면 1504년 시가 그에게 선량공 필리프의 초상을 제작하라고 의뢰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가 이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가 제작한 몇 점의 판화가 보스의 작품과 유사해서 그가 보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보스 가족 대부분 형제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자연히 이 단체가 집행하는 갖가지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종종 연례행사에 사용되는 목조상을 도금하거나 채색하는 일도 했다.
형제회 장로들이 1475~76년에 예배당에 안치할 커다란 크기의 목조 제단 장식물에 관해 논의할 때
보스 아버지 안토니우스 반 아켄이 아들들과 함께 참석한 것으로 봐서
그가 예술고문직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식물은 1477년에 완성되었다.

1480~81년 형제회 문서에 보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삼대째 형제회의 정회원으로 적혀 있다.
정회원이란 형제회의 모든 규칙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하는 의식을 통해 받아들여졌으며
당시 정회원은 오십 명 남짓했고
그들에게는 성직자cleric의 직위가 주어졌다.
하지만 이 직위는 결혼을 금하거나 성직을 직업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정화원은 수요일마다 집행되는 미사에 참여하고 형제회가 주최하고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그 밖의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야 했다.

보스는 형제회로부터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
그가 1493~94년에 새 예배당의 창문을 위한 착색유리를 디자인했으며
1511~12년에 십자가 처형을 그렸고
이듬해에는 샹들리에를 디자인했으므로 예배당은 일반 전통 예배당에 비해 훨씬 더 장려해졌다.
샹들리에를 디자인한 대가로 받은 돈이 적은 것으로 봐서 거의 헌신적으로 작업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는 형제회가 1512~13년 보스에게 샹들리에를 주문하면서 돈을 지불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샹들리에가 현존하지 않아 어떻게 디자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550~51년의 기록에는 샹들리에 위에 있는 조각상이 부서져 복원하여 샹들리에에 땜으로 붙인 것으로 적혀 있어
보스가 디자인한 것을 황동 제작자가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스가 디자인한 샹들리에는 애르트 반 트리흐트Aert van Tricht가 제작한 것으로 일부 학자들은 추정한다.
부서진 조각상을 복원한 사람은 메헬렌에 작업장을 갖고 있던 황동 제작자 야스파르Jaspar였으며 형제회 기록에는 1554년 6월 그에게 지불한 것으로 적혀 있다.
야스파르는 샹들리에를 청소하고 사라진 부분을 만들어 복원시켰다.
두 번째로 샹들리에를 청소한 것은 1580~81년으로
기록에는 "아주 검게 되었고 더러워졌다"고 적혀 있다.

보스가 활동할 시기에 스헤르토겐보스에는 두 명의 재능 있는 화가가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교회 전문 건축가이기도 한 알라르트 두 하멜과 미히엘 반 게메르트Michiel van Gemert였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한 엔그레이버였지만 엔그레이빙과 회화가 그들의 주요 직업은 아니었다.
두 하멜은 조각가로도 유명했으며
20년 동안 후기 고딕 건축물인 성 요한 교회를 재건하는 데 몰두했다.
금세공가 반 게메르트는 나이프, 맥주조끼, 쇠로 제작된 오브제에 인그레이브하는 기술에 탁월했다.
두 사람 중 두 하멜이 특히 보스와 가까운 사이였다.

작품에 모노그램미스트monogrammist 'bos with a knife'라고 길게 서명한 사람으로 학자들은 그가 미히엘 반 게메르트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모노그램 작품은 내용에 있어서 스헤르토겐보스 사람이 제작한 것이 분명하고 서명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반 게메르트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타당해보인다.
스헤르토겐보스는 15세기 후반과 16세기에 나이프의 생산지로 유명했으며 나이프를 스페인에까지 수출했다.
따라서 서명자가 스헤르토겐보스 사람이라고 보기에 충분하다.

당시 나이프의 손잡이에 장식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이런 장식은 나이프 제작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엔그레이버가 했다.
기록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 형제회가 1509~10년, 1510~11년, 1516~17년에 금세공가 반 게메르트에게 모두 29자루의 나이프에 형제회의 모토를 새겨 넣는 장식 일을 맡긴 것으로 되어 있다.
형제회는 일부 나이프를 자체에서 사용했지만 더러는 선물로 더러는 팔았다.
형제회는 1510~11년 그에게 뚜껑과 손잡이가 달린 큰 맥주 조끼 45개에 엔그레이브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그가 제작한 작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는 보스가 타계한 1516년 8월 7일 그 주에 무게가 거의 2kg이나 되는 커다란 성체 현시대monstrance를 제작할 것을 주문받았는데,
두 하멜이 디자인한 것과 유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생존에 대가로 인정을 받았고 그렇게 불리었다.

보스가 생존한 시기에 활동한 착색유리 제작자들에 관해 알려진 것이 없다.
그들의 작품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이 패널화나 캔버스화를 그린 화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가늠할 수 없다.
형제회의 기록에 의하면 다양한 착색유리 제작자들이 활동한 건 사실이다.
이들이 교회와 수도원의 창문을 장식했으며,
성 요한 교회 내에 있는 성모 마리아 형제회의 예배당도 장식했는데,
예배당의 장식은 부분적으로 보스가 디자인한 것을 근거로 했다.
형제회는 예배당의 새로운 창문 장식을 위해 착색유리 제작자 빌렘 롬바르트Willem Lombart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보스가 스케치한 것을 받아 제작하라'고 했다.
예배당에 관한 17세기 기록에는 '가장 예술적인 창문들 artificiosissima vitra'이라고 적혀 있으며,
주제들이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스도의 할례>, <수태고지>,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수태>였다면서
보스가 리넨에 그린 그림들을 롬바르트가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적혀 있다.

보스는 엠브로이더리를 디자인하기도 했는데,
1511~12년에 제작한 엠브로이더리에 대해 형제회가 지불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떤 것을 디자인했는지는 현존하는 작품이 없어 알 수 없지만 기록에는 십자가를 디자인했다고 적혀 있다.
무명작가가 1460년경에 제작한 제의chasuble를 위한 엠브로이더리에 파란색이 사용되었음을 보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색이다.
제의 등에 실크 그리고 금색실과 은색실을 사용하여 십자가를 디자인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보스도 이런 재료를 사용하여 디자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에는 보스가 금색 제의에 십자가를 디자인했다고만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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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제대 후 뒤샹은 다시 파리로 가서

마르셀이 징집 연령에 이르렀을 때 징집에 관한 새로운 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에 의하면 신체 건강한 청년은 누구든지 2년간 복무해야 하지만 장차 의사와 변호사가 될 의대와 법대생 외에 정부에서 인정하는 상업미술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1년만 복무할 수 있었다.
프린트, 판화 등 이와 유사한 직업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이 이런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
마르셀은 복무기간을 줄이기 위해 줄리앙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1905년 5월에 루엥으로 가서 인쇄소에 일자리를 구했는데, 아버지가 그해 은퇴하고 루엥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인쇄소에서 다섯 달 동안 기술을 배운 마르셀은 자격시험을 쳐서 50점 만점에 49점의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는 10월 3일 병무청에 인쇄기술자로 신고하고, 루엥의 제39 보충대에서 보충병으로 복무했으며 1906년 10월에 제대했다.
그의 복무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제대 후 그는 다시 파리로 가서 형이 살던 곳에서 불과 몇 집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방을 세 얻어 처음으로 혼자 생활했다.
자크는 그때 세느강 건너 퓌토Puteaux로 이주해 있었다.
자크는 몽마르트의 생활이 싫증나서 그리로 이주한 것이라면서 “친구들이 몰려와서는 파이프를 피워대고, 게다가 여자친구들까지 데려와 난 도저히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낮에는 그들과 함께 어울려야 했고 밤에 작업했는데, 그런 식으로 지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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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 냉소주의의 태도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중에서


<나무 위에 있는 처녀 Virgin in a Tree>는 그가 1903년 7월에 그린 것으로 도상적으로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인물과 유사하지만 매우 위협적인 이미지로 처녀의 자세가 매우 불안정해보이며 기괴한 얼굴이 관람자를 섬뜩하게 한다.
이렇게 묘사한 데 대해 그는 릴리에게 보낸 편지에 “진실을 제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되게 표현했다”고 적었다.
왜곡은 추상의 한 방법으로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추상은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정의되지만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하기는 어렵다.
외적인 메시지를 강조하는 왜곡은 심리적인 시점을 제시해주며 그의 추상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무 위에 있는 처녀>에는 근육 묘사가 정확해서 해부학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물로 보인다.
처녀는 죽은 나무의 앙상한 가지 위에 불안정한 자세로 비스듬히 누운 채 오른팔로 머리를 약간 받치고 있다.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처녀를 찬양하는 전통적 관념에 회의를 제기한 비판적인 작품이다.
그의 비판과 해학은 그 해 9월에 그린 드로잉 <서로에게 허리를 굽히는 두 신사, 서로 상대편이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한다>에서 확연하게 나타난다.
비굴한 인간상을 조롱하면서 유머를 삽입해 해학적으로 비판했다. 그의 견유주의 혹은 냉소주의의 태도를 볼 수 있다.

1904년에 제작한 ‘창조’ 연작 중 하나인 에칭 <코미디언 (창조 4)>의 경우 가면 뒤의 진실이 엿보이지만 이 또한 왜곡된 얼굴이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가면 뒤에 고통스러워하는 배우의 얼굴에서 이중적 삶의 고달픔을 느끼지만 배우는 또 다른 가리개로 눈을 가리고 있어 진실은 그 이면에 보이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클레의 말대로 왜곡된 이미지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그의 특유한 방법이다.

클레는 1904년 12월에 <페르세우스 (위트가 슬픔을 누르고 승리했다) (창조 8)>를 그렸다.
그가 주제로 삼은 것을 아크리시오스 왕의 딸 다나에와 제우스 사이에 태어난 지혜로운 영웅 페르세우스Perseus이다.
아크리시오스는 사랑하는 딸이 낳게 될 손자에 의해 살해될 것이란 예언을 듣고 청동으로 탑을 만들고 딸을 그 속에 가두었다.
운명을 인간이 피할 수 없다는 그리스인의 메시지가 담긴 신화이다.
탑은 위에서만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졌고 하녀들이 음식물을 위에서 아래로 던져주었다.
어느 날 제우스가 아래를 내려다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처녀가 탑 속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황금비로 변신하여 밤사이에 잠든 다나에를 적셨으며 수태한 다나에는 페르세우스를 낳았다.
아크리시오스는 딸과 손자를 바구니에 담아 바다에 띄웠다.
하지만 제우스의 인도로 세리포스 섬에 사는 어부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곳에서 성장한 페르세우스는 그곳 왕의 계략으로 고르곤 가운데 메두사를 죽여야 했다.
고르곤 세 자매 중 스텐노와 에우리알레는 불사신이지만 메두사는 불멸의 존재가 아닌 대신 가장 젊고 아름다웠다.
메두사는 자기가 팔라스 아테나보다 더 아름답다고 떠벌리고 다녀 아테나의 미움을 샀다.
아테나는 고르곤을 지구상의 가장 흉물스러운 존재로 만들면서 메두사를 가장 흉하게 만들었는데, 머리카락은 뱀이고, 얼굴은 잔뜩 부풀어 올랐으며, 몸체는 멧돼지에 엉덩이는 말이었다.
메두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돌이 된다고 아테나가 미리 말해주었다.
페르세우스는 아테나가 준 방패에 비친 모습을 보고 헤르메스에게 받은 검으로 메두사의 머리를 잘랐다.
그는 메두사의 머리를 왕에게 갖다 주기 위해 님프에게서 받은 커다란 자루에 집어넣었다.
클레의 작품에서 페르세우스 뒤 오른편 벽에 걸려 있는 것이 메두사의 머리이다.
흉한 얼굴에 머리카락을 땋아 뒤로 늘어뜨린 것이 뱀의 형상이다.

이듬해에 그린 <늙은 피닉스 (창조 9)>는 12점의 ‘창조’ 연작 중에서 뛰어난 작품이다.
‘창조’ 연작에서 보듯 그는 작은 크기로 그리면서 매우 정교하게 작업했다.
이런 작품들은 칸딘스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유겐트슈틸의 한 형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풍자와 냉소의 시각으로 새로운 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클레는 상징주의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 이미지들을 창조해냈다.
그의 작품에서 장식적 경향이나 색면의 사용, 아라베스크 무늬 등은 발견되지 않더라도 선을 주로 사용한 데서 유겐트슈틸의 영향이 역력함을 본다.
피닉스phoenix는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불사조로 500년 또는 600년에 한 번씩 스스로 타 죽고 그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영조이다.
클레는 500년 혹은 600년이나 된 늙은 새를 기괴한 모습으로 묘사하여 신화에 회의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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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이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레이몽의 결혼식이 1903년 9월 파리에서 있었다.
그는 예술가 친구 자크 봉의 누이인 젊은 과부 이본느 레베르송 봉을 아내로 맞았다.

그해 마르셀은 리세 코네일 학교 졸업반으로 낙제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성적이 매우 나빴다.
그러나 드로잉에서는 재능을 나타내어 일등을 수상했고, 최우수상은 친구가 차지했다.
그러나 졸업할 때는 마르셀이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일등상은 그 친구가 수상했다.
1904년 6월에 있었던 졸업식에는 동네의 유일한 학교였으므로 시장이 참석하였다.
시장은 마르셀에게 최우수상을 시상하면서 장차 예술가가 될 것이라 했다.
졸업식에 참석한 사람들 중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르셀이 예술가가 되는 데 아버지의 반대는 없었다.
그는 파리로 가서 큰형 자크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냈다. 파리시 외곽 언덕에 위치한 몽마르트의 좁은 골목에는 가난한 예술가들로 넘쳐났다.
툴루즈 로트렉이 1885년에 이곳으로 이주했고, 고갱도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
19살의 스페인 청년 파블로 피카소 역시 1900년에 비탈길 옆에 있는 낡은 집에 세 들어 자크의 이웃이 되었다.
자크는 스페인 청년과 우정을 나누었다.

자크는 주로 삽화를 그리면서 상업미술가로 활약했지만 매년 앙데팡당전에 그림을 출품했다.
앙데팡당전은 국전 심사제도에 불만이 많은 예술가들이 1884년에 창설한 전시회로서 자칭 예술가라면 누구라도 전시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시회에 참가 희망자의 수가 매년 늘어 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심사 제도를 두고, 심사를 통해 세 번 전시회에 참가한 예술가들에게는 이후 심사를 받지 않고 임의로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마르셀과 자크의 목표는 달랐는데 마르셀은 “형과 나는 매우 달랐다.
형의 목표는 유명해지는 것이었지만 내 목표는 그렇지 않았다.
난 단지 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만 바랐다”고 했다.

당시 예술가가 되려는 사람들은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는 것을 수순으로 생각했다.
마르셀도 1905년 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시험을 쳤지만 낙방했다.
그는 사립학교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했는데, 줄리앙은 파리에 네 개의 아틀리에를 가지고 있었고, 전통주의 방법으로 회화를 가르쳤다.
마르셀은 몽마르트 근처에 있는 분교에 입학하여 아침반에 수학했다.
그는 “항상 스케치북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어떤 상황에서도 그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스케치북에는 형과 여동생을 그린 그림들이 있고, 자크가 기르던 개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또한 장차 그릴 대작 <큰 유리>의 일부분이 그려져 있어 대작을 일찍부터 구상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스케치북에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수채와 연필로 그려져 있는데 경찰관, 기름파는 사람, 야채상인, 청소부, 장례식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 등을 그렸다.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카페에 가서 당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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