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도 뮤지엄


프라도 뮤지엄Museo del Prado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다.
루브르 뮤지엄의 전신인 나폴레옹 뮤지엄의 설립과 내셔날리즘의 대두에 자극을 받아 19세기 전반 유럽 각지에서 생겨난 뮤지엄들 가운데 하나이다.
프라도 거리에 있던 자연사박물관의 건물을 새롭게 치장하여 1819년에 '왕립 회화 조각 뮤지엄'으로 설립했다.
스페인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건물로 현재도 뮤지엄의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후 왕실의 각 시설에 분산 소장되어 있던 미술품이 점차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수집도 충실히 이루어졌다.
1868년 혁명에 의해 명칭도 국립 회화 조각 뮤지엄으로 변경되었다.
1872년에는 1830년대의 자유주의 개혁 때 교회와 수도원으로부터 몰수한 미술품들을 모아놓은 마드리드의 트리니다드 뮤지엄을 흡수 합병했다.
1912년에는 정식 명칭을 프라도 뮤지엄으로 정해졌고
20세기에 들어와 부속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소장품의 수도 더욱 늘었다.
소장품 대부분은 유화로 약 3만 점에 달한다.
역대 스페인 국왕의 수집품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취향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교육적 목적에 따라 계통적으로 작품을 수집한 뮤지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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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삽화를 계속 그렸다 

 

야수주의는 한 마디로 조직적으로 나타난 프랑스의 첫 표현주의라 할 수 있으며, 그해 독일 다리그룹 예술가들이 표방한 독일의 표현주의와 비교되었다.
느낌과 감성에 대한 라틴족과 튜튼족의 표현은 표현주의 양식을 통해서 매우 상이하게 나타났는데 다리그룹 예술가들도 밝은 색을 사용했지만 라틴족과는 달리 원시적인 요소가 물씬 풍기는 그림을 그렸다.
표현주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각, 음악, 댄스, 영화 등 모든 시각예술에서 주류를 이루었고, 20세기의 대표적인 주의가 되었다.
‘표현’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마티스였다.
그는 1908년 선언문manifesto 형식의 에세이 『화가의 노트Notes of a Painter』에서 회화를 궁극적으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마티스를 비롯하여 드랭과 블라맹크는 자연주의에 바탕을 둔 인생과 느낌에 대한 재발견에 심취했는데, 이 같은 경향은 자연주의 회화에서, 그리고 많은 작가의 문학작품에서 20세기 전부터 이미 나타난 적이 있었다.
모리스 드 블롱드는 1895년에 발표한 『자연주의에 관한 에세이Essay on Naturalism』에서 상징주의와 낭만적 퇴폐주의에 반발하면서 “우리의 선조들은 비실제의 문화, 꿈의 예술, 새 떨림의 탐구 등을 가르쳤다.
선조들은 맥이 있는 꽃, 암흑, 그리고 유령을 좋아했고, 그들은 논리에 맞지 않는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우리에게 그들의 거대한 범신론적 예술은 아무런 추진력을 주지 못 한다”고 했다.
소설가 찰스 루이 필립은 1897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야만적이며 … 사람들은 자연적 인생의 영상을 가져야만 한다. … 오늘날은 열정의 시대이다”라고 적었다.

마르셀은 야수주의 예술가들의 무지개 색으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지만 그 영향은 잠시였을 뿐 그는 삽화를 계속 그렸다.
1908년 3월에 만화가협회가 주최한 제2회 전시회에 드로잉 4점을 출품했으며, 11월에 그의 드로잉이 처음으로 신문 『르 쿠리에르 프랑스』에 소개되었다.
이 무렵 그는 자크의 화실 가까이로 거처를 옮겼다.
퓌토로 이사한 이유는 지난 해 몽마르트의 아파트에서 친구들과 이틀 동안 왁자지껄하게 크리스마스 파티를 벌였다가 이웃의 탄원으로 법에 따라 6개월 이내에 그곳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몽마르트의 다른 곳에 거처를 구하지 않고 퓌토로 간 것은 형과 마찬가지로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새 보금자리에서 5년 동안 형과 더욱 가깝게 지냈다.

자크는 1908년의 가을전 심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가을전은 봄에 열리는 앙데팡당전과 쌍벽을 이루는 예술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전시회로, 1903년에 창설된 이래 매년 열렸다.
레이몽은 조각부문의 심사위원이었다.
1908년의 가을전 심사위원들 가운데는 마티스, 알베르 마르케, 그리고 조르주 루오가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마르셀의 그림 세 점을 통과시켰지만 브라크의 그림은 배척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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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예술가를 먹여살린 예술가 고용정책 WPA(The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1934~35년 겨울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New Deal) 정책을 발표하면서 경제공황으로 인한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 4백만 가족들과 7백만 독신들을 정부가 재정적으로 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폴록은 형과 함께 정부에 일자리를 신청했다. 당시에는 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훔쳤으며, 학생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음식물들을 주워먹기도 했다.

1935년 8월 1일 아침, 정부는 예술가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소식을 발표했다. 정부가 예술가들을 고용하여 그들에게 매주 20달러 이상의 주급을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이 발표되자 예술가들은 ‘동물원에서 흥분한 아이처럼’ 환호했다. 경제공황이 시작된 지 여섯 해 동안 예술가들의 작품수는 절반으로 줄었는데도 그 가격은 삼분의 일쯤 올라 있었다. 예술가들은 적당한 가격을 준다면 작품들을 팔고자 했는데 정부가 예술가들에게 계속 주급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은 마치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처럼 그들을 들뜨게 했다. 그들은 작품을 들고 정부기관에 줄을 서서 채용되기를 기다렸다. 8월 1일 처음 취직되었던 예술가들은 일 주일 후에 주급 23.86달러를 받았다. 그들은 대부분 은행구좌가 없었으므로 수표를 현찰로 바꾸어야 했다. 로젠버그의 아내 메이는 이렇게 전한다.

14번가의 헌스(Hearns) 백화점에 있는 술집에서 고객들을 위해 수표를 현찰로 바꾸어주고 있었다. 예술가들은 서로 몸싸움을 하며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들은 술을 마시면서 즐거워했으며 내일 해직되어도 그만이라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느 누구도 정부시책이 한 달 이상 계속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그 돈으로 충치를 치료받았으며, 극장이나 음악회 입장권을 구입하였고, 물감과 붓을 샀으며, 술을 여러 병 사기도 했다. 당시 울워스(Woolworth) 백화점에서 일 주일에 50시간 근무하던 세일즈맨의 주급이 겨우 10.80달러였고, 근로자 대부분의 주급이 7달러에 불과했다. 박사학위 소지자가 실직하여 공원에서 잠을 잤고, 전문직업인이 지하철에서 잠을 자기 예사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한 달에 100달러에 해당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정부의 대우는 아주 융숭한 것이었다.

뉴욕의 거의 모든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이 WPA에 고용되어 일했다. 드 쿠닝은 그때 벡(A.S. Beck) 구두가게의 진열장을 장식해주고 한 달에 250달러를 받고 있었는데 그는 그 일을 포기하면서 “그 돈으로 그림을 그리고나면 나는 가난해진다”고 말했다. 그도 정부로부터 매주 23달러를 받는 것이 더욱 안정적이라고 판단하여 그 일을 선택했지만 그는 미국시민이 아니었으므로 일 년 후에 프로그램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WPA의 미술을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한 미술”이라고 말했던 고키도 뉴욕에서 개최되는 세계 박람회를 위한 벽화작업에 고용되었다. 필립 구스턴과 폴록도 벽화부에 소속되었지만 폴록은 여러 사람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 싫어서 이젤부로 바꾸었다. 아돌프 고틀립, 마크 로드코, 애드 라인하트도 이젤부 소속이었다. 그들이 한 달에 한 점씩 제출했던 그림들은 학교, 우체국, 정부기관 건물들에 장식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미술품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윌리엄 바지오츠는 당시 퀸즈(Queens)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있었고 바넷 뉴먼은 시티 칼리지를 졸업한 후 아버지가 경영하는 의류제조업으로 불황을 타계하느라 고전하고 있었다. 뉴먼은 “WPA에서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근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단단히 대가를 치렀다. 그들은 나를 화가가 아닌 사람처럼 취급했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뉴욕의 예술가들은 WPA에서 근무하면서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자주 만나면서 작가들의 공동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젤부에 속했던 예술가들은 집에서 그림을 그리더라도 매일 아침 8시까지 39번가에 있는 WPA 사무실에 가서 출근부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늦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던 폴록은 매일 아침 허둥지둥해야 했으며 어느 날은 파자마 차림으로 달려간 적도 있었다. 이런 출근부 제도에 대한 작가들의 불평이 거세지자 정부는 일 년도 채 안되어 그 제도를 없애버렸다. 화가들은 4주 안에 16~20인치 크기의 그림 한 점을 제출해야 했다. 6주가 걸릴 경우에는 24~36인치 크기의 캔버스를 제출해야 했으며, 3주 안에는 수채화 한 점을 제출할 수도 있었다. 정부는 화가들에게 그림에 서명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교량건축 노동자와 벽돌을 쌓는 미장이들이 그들의 작업에 서명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들의 작업에도 서명이 필요없다는 것이 정부의 태도였다.

1935년에 결성된 WPA는 향후 6년 동안 평균 210만 명을 고용하여 모두 20억 달러를 지불했고 무려 25만 가지 프로그램들을 달성했다. 작품들이 양적으로 많아지자 1941년 3월에 창고에 있던 650점 이상의 수채화들을 없애버렸는데 기록에 의하면 거기에는 폴록과 샌드의 그림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폴록의 수채화 열두 점이 이때에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정부는 1943년 12월 대대적으로 수천 점의 유화를 대중들에게 팔았는데 값이 너무 쌌으므로 배관공들이 그것들을 사서 파이프를 감는 데 사용해서 파이프가 과열될 때는 유화물감이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캐널 가(Canal Street)에 있는 로버트 북 회사(Robert Book Company)는 배관공들을 통해 유화들을 한 점에 3달러씩 사모았다. 그렇게 모은 그림들 중에는 마크 로드코, 폴록의 그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폴록의 그림 두 점이 현재까지 남아 있게 되었고 그 회사가 나중에 큰 돈을 벌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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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리의 좀스런 사내 이고 팬투호프

폴록이 스승의 아내와 불륜의 밀애를 즐기던 시기에 미래의 아내 리는 이고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나가 술을 나르는 일을 했는데 당시 리는 교사가 되려고 시티 칼리지(City College)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던 지성인이었으므로 단골손님들로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술집에 단골로 오던 작가들 가운데에는 평론가 파커 타일러와 해롤드 로젠버그가 포함되어 있었다. 로젠버그는 평론가로서 나중에 ‘액션 페인팅 Action Painting’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리는 “나는 로젠버그를 기억한다. 그는 팁을 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고 회상했다. 리와 로젠버그는 그후에도 인연이 있어서 1935년에 정부의 미술 프로젝트 기관의 벽화부문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다.

리는 작가들과 어울리면서 좌익 편에 서기도 했는데 직접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는 경제공황으로 인해 사회문제들이 만연해 있었다. 예술가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비난하면서 곧잘 데모를 주동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사회주의가 이상적인 이념이라고 믿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산주의는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적 반발에 불과했다.

리는 매달 23달러를 지불하고 서쪽 14번가에 있는 로젠버그 부부의 아파트를 나누어 사용하면서 이고와 동거하고 있었다. 당시는 두 사람의 관계가 붕괴되기 직전이었고, 이고의 음주벽은 두 사람의 불화를 가중시켰다. 그는 여자에게 거친 사람으로 소문난 인물로서 리의 친구들은 리가 어떻게 그런 형편없는 사내와 살 수 있느냐고 의아해 했다. 이고가 리를 화나게 할 심사로 “나는 셈족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유태인 차별주의자이다”라고 말하면 리는 “시팔놈!”이라고 대꾸했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냉랭하게 지내야 했다. 이고의 가족들은 리를 유태인 여자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리는 이고와 정식으로 결혼할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로젠버그의 부인 메이(May)는 “리는 나날이 예술가로서 알려진 반면 이고의 그림들은 사람들이 별로 반기지 않았다”고 했으며 두 사람의 방에 로젠버그가 들리게 되면 그는 리의 그림에는 호감을 나타내면서도 이고의 그림 앞에서는 침묵했는데 “그런 경우가 허다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고는 자신이 위대한 예술가라고 착각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에게는 고급 낙타털 코트를 입고 다니는 멋쟁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백화점에 가서 “내가 위대한 예술가 이고 팬투호프다. 코트를 주면 내 그림을 한 점 주마”라고 하자 매니저는 “죄송하지만 코트를 헐값에 팔 수 있는 권한이 내게는 없다”고 대꾸했다.

리는 1935년에 정물화를 그렸는데 배경의 조금 열린 목욕탕 문을 통해 목욕하고 있는 벌거벗은 사람의 모습을 삽입했다. 정물화에 이러한 배경을 사용한 것은 그녀의 독특한 아이디어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리(Lee)로 바꾸었으며, Krassner에서 s자를 하나 뺀 Krasner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해에 그녀는 고키와 드 쿠닝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그들의 화실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들과 함께 피카소의 입체주의 회화에 관해 공통된 관심을 나누었다. 뉴욕의 예술가들이 피카소에 관해 알면 알수록 그들이 뚫고 나가야 할 회화의 통로는 어둡기만 했다. 이때 리는 은근히 드 쿠닝을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는 리에게 덤덤했다. 아마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거나 모르는 척 능청을 떨었던 것 같다.

30년대 후반에 리는 자신을 모더니즘 예술가로 자신했고, 피카소 외에도 라울 뒤피의 그림들을 연구했으며 형이상학 회화 또는 환상주의 예술가 키리코의 화법을 응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녀가 키리코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35년 말 앙리 마티스의 아들 피에르 마티스(Pierre Matisse)의 화랑에서 그의 그림 스물여섯 점을 관람하고 난 후부터였다. 그녀가 그해 그린 그림 <갠스봇 II Gansevoort II>(갠스봇은 맨해턴 남쪽에 있는 거리의 이름)은 키리코로부터 영향받은 그림들 가운데 한 점이다.

리는 부분적으로 로젠버그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로젠버그를 통해 상징주의 시인 랭보의 시를 읽었는데, 특히 그의 고백적 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Season in Hell ’(1873)을 좋아했다. 리는 랭보를 아주 좋아해서, 미국의 위대한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가 그녀의 화실에서 프랑스 시인들을 신랄하게 비난할 때 윌리엄스에게 화실을 나가달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이 시기에 폴록은 고향친구 톨레지언과 함께 존 슬론의 반에 등록했는데 한 달 후에는 자퇴하고 말았다. 슬론은 키가 크고 날씬했으며 소위 애시 캔파(Ash Can School: 도심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장면들을 그리던 예술가 그룹)의 창설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폴록은 자신이 화가로서 재능이 없음을 자각하면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한 달 후 1933년 3월의 어느  수요일 아침 어머니로부터 아버지 로이(Roy)가 타계했다는 비보를 받았다. 하지만 폴록 삼 형제는 전보를 받고도 갈 수가 없었다. 차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로이 폴록은 과격한 성미의 소유자로 항상 폭음했으며 수차례 가족을 버리고 가출하곤 했다. 그 무렵에도 가출했다 타계하기 얼마 전에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머니는 장례를 치른 후 “너희들이 집에 오지 못해 섭섭했지만 난 너희가 그럴 수밖에 없었을 줄 안다”고 편지했다.

이 시기에 폴록은 처음으로 자화상(11)을 그렸는데 마치 자학하고 있는 듯한 이미지였다. 그는 스물두 살의 자신의 모습을 마치 아홉 살이나 열 살쯤 되어보이는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가족들을 버리고 가출했을 때의 모습으로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폴록은 이때 회화를 포기하고 조각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뒤 조각가 친구 토니 스미스에게 “내가 뉴욕으로 온 것은 원래 미켈란젤로처럼 조각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폴록은 이집트계 유태인 조각가 벤 슈무엘의 조수로 일했다. 슈무엘의 화실은 제인 가 35번지에 있었는데 그는 욕을 잘하기로 소문난 조각가였다. 폴록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돌 자르는 일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회화보다 조각을 더 좋아한다”고 적었다. 봄에 그는 슈무엘의 화실에서 돌을 깎아 조각하는 일에 열중해서 처음으로 남자의 흉상을 제작했는데 그 조각은 죽은 남자의 얼굴로서 바로 아버지 로이의 흉상이었다.

그해 가을 폴록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가 페라질(Feragil) 화랑에서 알버트 핑크햄 라이더의 그림들을 관람한 후 그의 과격하고 공포스런 이미지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라이더는 개성이 강한 예술가로서 꿈의 세계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묘사할 줄 아는 화가였다. 그가 1890~1910년에 그린 <달빛 바다풍경 Moonlight Marine>은 범신론적 감각이 두드러진 그림이었다. 라이더의 환상적인 그림들은 폴록의 잠재의식 세계에 낯익은 장면들이었다. 물론 폴록의 정신세계는 그보다 더한 환상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여러분은 이제 그의 환상을 골고루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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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의 플랑드르 미술의 영향


보스가 스헤르토겐보스 밖으로 나간 적이 있다는 기록은 없지만
초기 작품을 보면 위레트흐트에서 지낸 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후에 나타난 성숙한 양식에서 보여지는 플랑드르 미술의 영향으로 미루어 볼 때
네덜란드 남쪽을 여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하는 중에 <성 율리아노의 십자가 처형 Crucifixion of St. Julia>을 그렸다는 주장이 있지만
휴고 반 데르 고스Hugo van der Goes(1440년경~82, 1467~82년에 주로 활동)의 포르티나리 세쪽 제단화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이탈리아 상인이나 외교관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이 형제회 기록에 남아 있는 건
1516년에 사망했다는 사실과 그해 8월 9일 형제회 친구들이 성 요한 교회에서 그를 추도하는 장례미사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보스에 관한 내용은 시문서와 형제회 기록이 거의 전부지만
17세기의 몇몇 자료를 통해 그의 작품 몇 점이 성 요한 교회에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지창조>가 제단 위에 있었고 <동방박사의 경배>는 성모 마리아 제단에 장식되었다.
1504년 부르고뉴의 미남 공작 필리프는 예로니무스 반 아켄Jeronimus van Aeken으로 불리운 보스에게 제단화를 주문했는데,
<최후의 심판>으로 양날개 패널에 <천국>과 <지옥>이 묘사된 세쪽짜리 커다란 그림이다.
이 작품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빈 소재 세쪽 제단화를 필리프가 주문한 작품의 축소판 복제품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원작은 1629년 프레데리크 헨리Frederick Henry 왕자의 네덜란드 군대가 스페인으로부터 스헤르토겐보스를 탈환했을 때 분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톨릭의 번영시대가 칼뱅주의자들의 금욕주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 뮤지엄 그리고 개인이 소장한 상당수의 보스 작품은 원작을 복제 또는 모방한 것들이다.
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30여 점에 불과하고 그림과 소품 드로잉들이다.
원작을 보려면 마드리드의 프라도 뮤지엄에 가야 한다.
보스와 그의 작업장에서 제작한 주요 제단화 세 점과 소품 몇 점이 그곳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 중 초기에 제작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어렵다.
작품에 제작연대를 기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상이 심하고 후세 사람들이 덧칠을 했으므로
작품에 나타난 양식과 기교의 미묘한 차이를 들어 연대순을 확정짓는 방법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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