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삽화를 계속 그렸다
야수주의는 한 마디로 조직적으로 나타난 프랑스의 첫 표현주의라 할 수 있으며, 그해 독일 다리그룹 예술가들이 표방한 독일의 표현주의와 비교되었다.
느낌과 감성에 대한 라틴족과 튜튼족의 표현은 표현주의 양식을 통해서 매우 상이하게 나타났는데 다리그룹 예술가들도 밝은 색을 사용했지만 라틴족과는 달리 원시적인 요소가 물씬 풍기는 그림을 그렸다.
표현주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각, 음악, 댄스, 영화 등 모든 시각예술에서 주류를 이루었고, 20세기의 대표적인 주의가 되었다.
‘표현’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마티스였다.
그는 1908년 선언문manifesto 형식의 에세이 『화가의 노트Notes of a Painter』에서 회화를 궁극적으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마티스를 비롯하여 드랭과 블라맹크는 자연주의에 바탕을 둔 인생과 느낌에 대한 재발견에 심취했는데, 이 같은 경향은 자연주의 회화에서, 그리고 많은 작가의 문학작품에서 20세기 전부터 이미 나타난 적이 있었다.
모리스 드 블롱드는 1895년에 발표한 『자연주의에 관한 에세이Essay on Naturalism』에서 상징주의와 낭만적 퇴폐주의에 반발하면서 “우리의 선조들은 비실제의 문화, 꿈의 예술, 새 떨림의 탐구 등을 가르쳤다.
선조들은 맥이 있는 꽃, 암흑, 그리고 유령을 좋아했고, 그들은 논리에 맞지 않는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우리에게 그들의 거대한 범신론적 예술은 아무런 추진력을 주지 못 한다”고 했다.
소설가 찰스 루이 필립은 1897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야만적이며 … 사람들은 자연적 인생의 영상을 가져야만 한다. … 오늘날은 열정의 시대이다”라고 적었다.
마르셀은 야수주의 예술가들의 무지개 색으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지만 그 영향은 잠시였을 뿐 그는 삽화를 계속 그렸다.
1908년 3월에 만화가협회가 주최한 제2회 전시회에 드로잉 4점을 출품했으며, 11월에 그의 드로잉이 처음으로 신문 『르 쿠리에르 프랑스』에 소개되었다.
이 무렵 그는 자크의 화실 가까이로 거처를 옮겼다.
퓌토로 이사한 이유는 지난 해 몽마르트의 아파트에서 친구들과 이틀 동안 왁자지껄하게 크리스마스 파티를 벌였다가 이웃의 탄원으로 법에 따라 6개월 이내에 그곳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몽마르트의 다른 곳에 거처를 구하지 않고 퓌토로 간 것은 형과 마찬가지로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새 보금자리에서 5년 동안 형과 더욱 가깝게 지냈다.
자크는 1908년의 가을전 심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가을전은 봄에 열리는 앙데팡당전과 쌍벽을 이루는 예술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전시회로, 1903년에 창설된 이래 매년 열렸다.
레이몽은 조각부문의 심사위원이었다.
1908년의 가을전 심사위원들 가운데는 마티스, 알베르 마르케, 그리고 조르주 루오가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마르셀의 그림 세 점을 통과시켰지만 브라크의 그림은 배척하는 해프닝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