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리의 좀스런 사내 이고 팬투호프
폴록이 스승의 아내와 불륜의 밀애를 즐기던 시기에 미래의 아내 리는 이고와 동거하고 있었다. 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나가 술을 나르는 일을 했는데 당시 리는 교사가 되려고 시티 칼리지(City College)에서 교육학을 공부하던 지성인이었으므로 단골손님들로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술집에 단골로 오던 작가들 가운데에는 평론가 파커 타일러와 해롤드 로젠버그가 포함되어 있었다. 로젠버그는 평론가로서 나중에 ‘액션 페인팅 Action Painting’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리는 “나는 로젠버그를 기억한다. 그는 팁을 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고 회상했다. 리와 로젠버그는 그후에도 인연이 있어서 1935년에 정부의 미술 프로젝트 기관의 벽화부문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다.
리는 작가들과 어울리면서 좌익 편에 서기도 했는데 직접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는 경제공황으로 인해 사회문제들이 만연해 있었다. 예술가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비난하면서 곧잘 데모를 주동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사회주의가 이상적인 이념이라고 믿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산주의는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적 반발에 불과했다.
리는 매달 23달러를 지불하고 서쪽 14번가에 있는 로젠버그 부부의 아파트를 나누어 사용하면서 이고와 동거하고 있었다. 당시는 두 사람의 관계가 붕괴되기 직전이었고, 이고의 음주벽은 두 사람의 불화를 가중시켰다. 그는 여자에게 거친 사람으로 소문난 인물로서 리의 친구들은 리가 어떻게 그런 형편없는 사내와 살 수 있느냐고 의아해 했다. 이고가 리를 화나게 할 심사로 “나는 셈족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유태인 차별주의자이다”라고 말하면 리는 “시팔놈!”이라고 대꾸했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냉랭하게 지내야 했다. 이고의 가족들은 리를 유태인 여자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 리는 이고와 정식으로 결혼할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로젠버그의 부인 메이(May)는 “리는 나날이 예술가로서 알려진 반면 이고의 그림들은 사람들이 별로 반기지 않았다”고 했으며 두 사람의 방에 로젠버그가 들리게 되면 그는 리의 그림에는 호감을 나타내면서도 이고의 그림 앞에서는 침묵했는데 “그런 경우가 허다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고는 자신이 위대한 예술가라고 착각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에게는 고급 낙타털 코트를 입고 다니는 멋쟁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백화점에 가서 “내가 위대한 예술가 이고 팬투호프다. 코트를 주면 내 그림을 한 점 주마”라고 하자 매니저는 “죄송하지만 코트를 헐값에 팔 수 있는 권한이 내게는 없다”고 대꾸했다.
리는 1935년에 정물화를 그렸는데 배경의 조금 열린 목욕탕 문을 통해 목욕하고 있는 벌거벗은 사람의 모습을 삽입했다. 정물화에 이러한 배경을 사용한 것은 그녀의 독특한 아이디어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리(Lee)로 바꾸었으며, Krassner에서 s자를 하나 뺀 Krasner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해에 그녀는 고키와 드 쿠닝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그들의 화실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들과 함께 피카소의 입체주의 회화에 관해 공통된 관심을 나누었다. 뉴욕의 예술가들이 피카소에 관해 알면 알수록 그들이 뚫고 나가야 할 회화의 통로는 어둡기만 했다. 이때 리는 은근히 드 쿠닝을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는 리에게 덤덤했다. 아마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거나 모르는 척 능청을 떨었던 것 같다.
30년대 후반에 리는 자신을 모더니즘 예술가로 자신했고, 피카소 외에도 라울 뒤피의 그림들을 연구했으며 형이상학 회화 또는 환상주의 예술가 키리코의 화법을 응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녀가 키리코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35년 말 앙리 마티스의 아들 피에르 마티스(Pierre Matisse)의 화랑에서 그의 그림 스물여섯 점을 관람하고 난 후부터였다. 그녀가 그해 그린 그림 <갠스봇 II Gansevoort II>(갠스봇은 맨해턴 남쪽에 있는 거리의 이름)은 키리코로부터 영향받은 그림들 가운데 한 점이다.
리는 부분적으로 로젠버그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로젠버그를 통해 상징주의 시인 랭보의 시를 읽었는데, 특히 그의 고백적 시 ‘지옥에서 보낸 한 철 Season in Hell ’(1873)을 좋아했다. 리는 랭보를 아주 좋아해서, 미국의 위대한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가 그녀의 화실에서 프랑스 시인들을 신랄하게 비난할 때 윌리엄스에게 화실을 나가달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이 시기에 폴록은 고향친구 톨레지언과 함께 존 슬론의 반에 등록했는데 한 달 후에는 자퇴하고 말았다. 슬론은 키가 크고 날씬했으며 소위 애시 캔파(Ash Can School: 도심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장면들을 그리던 예술가 그룹)의 창설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폴록은 자신이 화가로서 재능이 없음을 자각하면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한 달 후 1933년 3월의 어느 수요일 아침 어머니로부터 아버지 로이(Roy)가 타계했다는 비보를 받았다. 하지만 폴록 삼 형제는 전보를 받고도 갈 수가 없었다. 차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로이 폴록은 과격한 성미의 소유자로 항상 폭음했으며 수차례 가족을 버리고 가출하곤 했다. 그 무렵에도 가출했다 타계하기 얼마 전에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머니는 장례를 치른 후 “너희들이 집에 오지 못해 섭섭했지만 난 너희가 그럴 수밖에 없었을 줄 안다”고 편지했다.
이 시기에 폴록은 처음으로 자화상(11)을 그렸는데 마치 자학하고 있는 듯한 이미지였다. 그는 스물두 살의 자신의 모습을 마치 아홉 살이나 열 살쯤 되어보이는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가족들을 버리고 가출했을 때의 모습으로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폴록은 이때 회화를 포기하고 조각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뒤 조각가 친구 토니 스미스에게 “내가 뉴욕으로 온 것은 원래 미켈란젤로처럼 조각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폴록은 이집트계 유태인 조각가 벤 슈무엘의 조수로 일했다. 슈무엘의 화실은 제인 가 35번지에 있었는데 그는 욕을 잘하기로 소문난 조각가였다. 폴록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돌 자르는 일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회화보다 조각을 더 좋아한다”고 적었다. 봄에 그는 슈무엘의 화실에서 돌을 깎아 조각하는 일에 열중해서 처음으로 남자의 흉상을 제작했는데 그 조각은 죽은 남자의 얼굴로서 바로 아버지 로이의 흉상이었다.
그해 가을 폴록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가 페라질(Feragil) 화랑에서 알버트 핑크햄 라이더의 그림들을 관람한 후 그의 과격하고 공포스런 이미지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라이더는 개성이 강한 예술가로서 꿈의 세계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묘사할 줄 아는 화가였다. 그가 1890~1910년에 그린 <달빛 바다풍경 Moonlight Marine>은 범신론적 감각이 두드러진 그림이었다. 라이더의 환상적인 그림들은 폴록의 잠재의식 세계에 낯익은 장면들이었다. 물론 폴록의 정신세계는 그보다 더한 환상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여러분은 이제 그의 환상을 골고루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