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예술가를 먹여살린 예술가 고용정책 WPA(The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1934~35년 겨울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New Deal) 정책을 발표하면서 경제공황으로 인한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 4백만 가족들과 7백만 독신들을 정부가 재정적으로 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폴록은 형과 함께 정부에 일자리를 신청했다. 당시에는 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훔쳤으며, 학생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음식물들을 주워먹기도 했다.
1935년 8월 1일 아침, 정부는 예술가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소식을 발표했다. 정부가 예술가들을 고용하여 그들에게 매주 20달러 이상의 주급을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이 발표되자 예술가들은 ‘동물원에서 흥분한 아이처럼’ 환호했다. 경제공황이 시작된 지 여섯 해 동안 예술가들의 작품수는 절반으로 줄었는데도 그 가격은 삼분의 일쯤 올라 있었다. 예술가들은 적당한 가격을 준다면 작품들을 팔고자 했는데 정부가 예술가들에게 계속 주급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은 마치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처럼 그들을 들뜨게 했다. 그들은 작품을 들고 정부기관에 줄을 서서 채용되기를 기다렸다. 8월 1일 처음 취직되었던 예술가들은 일 주일 후에 주급 23.86달러를 받았다. 그들은 대부분 은행구좌가 없었으므로 수표를 현찰로 바꾸어야 했다. 로젠버그의 아내 메이는 이렇게 전한다.
14번가의 헌스(Hearns) 백화점에 있는 술집에서 고객들을 위해 수표를 현찰로 바꾸어주고 있었다. 예술가들은 서로 몸싸움을 하며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들은 술을 마시면서 즐거워했으며 내일 해직되어도 그만이라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느 누구도 정부시책이 한 달 이상 계속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그 돈으로 충치를 치료받았으며, 극장이나 음악회 입장권을 구입하였고, 물감과 붓을 샀으며, 술을 여러 병 사기도 했다. 당시 울워스(Woolworth) 백화점에서 일 주일에 50시간 근무하던 세일즈맨의 주급이 겨우 10.80달러였고, 근로자 대부분의 주급이 7달러에 불과했다. 박사학위 소지자가 실직하여 공원에서 잠을 잤고, 전문직업인이 지하철에서 잠을 자기 예사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한 달에 100달러에 해당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정부의 대우는 아주 융숭한 것이었다.
뉴욕의 거의 모든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이 WPA에 고용되어 일했다. 드 쿠닝은 그때 벡(A.S. Beck) 구두가게의 진열장을 장식해주고 한 달에 250달러를 받고 있었는데 그는 그 일을 포기하면서 “그 돈으로 그림을 그리고나면 나는 가난해진다”고 말했다. 그도 정부로부터 매주 23달러를 받는 것이 더욱 안정적이라고 판단하여 그 일을 선택했지만 그는 미국시민이 아니었으므로 일 년 후에 프로그램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WPA의 미술을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한 미술”이라고 말했던 고키도 뉴욕에서 개최되는 세계 박람회를 위한 벽화작업에 고용되었다. 필립 구스턴과 폴록도 벽화부에 소속되었지만 폴록은 여러 사람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 싫어서 이젤부로 바꾸었다. 아돌프 고틀립, 마크 로드코, 애드 라인하트도 이젤부 소속이었다. 그들이 한 달에 한 점씩 제출했던 그림들은 학교, 우체국, 정부기관 건물들에 장식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미술품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윌리엄 바지오츠는 당시 퀸즈(Queens)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있었고 바넷 뉴먼은 시티 칼리지를 졸업한 후 아버지가 경영하는 의류제조업으로 불황을 타계하느라 고전하고 있었다. 뉴먼은 “WPA에서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근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단단히 대가를 치렀다. 그들은 나를 화가가 아닌 사람처럼 취급했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뉴욕의 예술가들은 WPA에서 근무하면서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자주 만나면서 작가들의 공동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젤부에 속했던 예술가들은 집에서 그림을 그리더라도 매일 아침 8시까지 39번가에 있는 WPA 사무실에 가서 출근부에 도장을 찍어야 했다. 늦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던 폴록은 매일 아침 허둥지둥해야 했으며 어느 날은 파자마 차림으로 달려간 적도 있었다. 이런 출근부 제도에 대한 작가들의 불평이 거세지자 정부는 일 년도 채 안되어 그 제도를 없애버렸다. 화가들은 4주 안에 16~20인치 크기의 그림 한 점을 제출해야 했다. 6주가 걸릴 경우에는 24~36인치 크기의 캔버스를 제출해야 했으며, 3주 안에는 수채화 한 점을 제출할 수도 있었다. 정부는 화가들에게 그림에 서명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교량건축 노동자와 벽돌을 쌓는 미장이들이 그들의 작업에 서명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들의 작업에도 서명이 필요없다는 것이 정부의 태도였다.
1935년에 결성된 WPA는 향후 6년 동안 평균 210만 명을 고용하여 모두 20억 달러를 지불했고 무려 25만 가지 프로그램들을 달성했다. 작품들이 양적으로 많아지자 1941년 3월에 창고에 있던 650점 이상의 수채화들을 없애버렸는데 기록에 의하면 거기에는 폴록과 샌드의 그림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폴록의 수채화 열두 점이 이때에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정부는 1943년 12월 대대적으로 수천 점의 유화를 대중들에게 팔았는데 값이 너무 쌌으므로 배관공들이 그것들을 사서 파이프를 감는 데 사용해서 파이프가 과열될 때는 유화물감이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캐널 가(Canal Street)에 있는 로버트 북 회사(Robert Book Company)는 배관공들을 통해 유화들을 한 점에 3달러씩 사모았다. 그렇게 모은 그림들 중에는 마크 로드코, 폴록의 그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폴록의 그림 두 점이 현재까지 남아 있게 되었고 그 회사가 나중에 큰 돈을 벌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