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파리를 뉴욕으로 운반해준 한스 호프만


폴록과 하룻밤을 지낸 얼마 후 리는 서쪽 9번가에 있는 한스 호프만 미술학교(Hans Hofmann School of Fine Arts)에 입학하여 그에게 입체주의 회화를 배웠다. 호프만의 강의는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금요일 강의는 그의 제자들뿐 아니라 작가들도 참석해서 듣곤 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고키, 드 쿠닝, 폴록도 들어 있었고 평론가인 그린버그와 로젠버그도 있었다.

모더니즘의 백과사전과도 같았던 호프만의 역할은 뉴욕파 첫 세대 화가들에게 아주 중요했다. 그가 역점을 두고 가르쳤던 내용은 세 가지로서 자연, 화가의 기질, 그리고 미술작품을 위한 재료들의 한계였다. 그는 이 세 가지가 그 자체의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것 하나가 다른 하나에 우선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색조들이 서로 밀고당기는 상대성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겹치는 형태들이 깊이를 나타내므로 평면과 평면 사이의 긴장감을 창조하여 캔버스의 이차원적 특징을 늘 유지하라고 가르쳤다.

호프만은 1880년에 뮌헨 근처 바바리아에 있는 바이센부르크(Weinssenburg, Bavaria)에서 다섯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과학, 수학, 음악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던 그는 뮌헨 미술학교로 진학했다. 1903년에 그의 스승이 베를린의 부자이며 예술품 수집가인 필립 프로이덴베르크(Philip Freudenberg)에게 그를 소개했다. 프로이덴베르크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파리로 유학시키면서 1914년 일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후원해주었다. 1904년 파리에 도착한 그는 야간학교 콜라로시(Colarossi)에서 스케치 과목을 배웠으며 에콜 드 라 그랑 쇼미에르(Ecole de la Grande Chaumiere)에 재학했다. 앙리 마티스도 당시 그 학교에 재학중이었으므로 그는 마티스와 우정을 나누었고 입체주의의 창시자들인 피카소와 브라크를 만나 친구가 되었으며 피카소에게서 직접 입체주의 회화 미학을 청취할 수 있었다. 파리에 거주하면서 그는 미즈 볼페그(Miz Wolfegg)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그때 들로네의 동갑나기 아내 소냐(Sonia)와 함께 의상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그는 1909년에 표현주의 예술가 에밀 놀데와 그 밖의 예술가들이 창설한 베를린 새 분리파(Neue Sezession)에 그림들을 출품했다. 이듬해 ‘야수들의 왕’ 마티스의 독려로 베를린의 예술품 중개상 파울 카시러(Paul Cassirer)는 호프만의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1914년 봄에 여동생이 위독하여 뮌헨으로 갔다가 일차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는 그대로 머물러야 했지만 심장이 약하다는 이유로 징집은 면제되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프로이덴베르크는 더 이상 그를 후원할 처지가 못되었으므로 호프만은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고, 1915년에는 뮌헨 근교에 자신의 현대미술(Modern Art) 학교를 개교했는데 백여 명의 학생들이 입학했다. 세잔느, 입체주의, 칸딘스키의 추상에 관해 가르쳤던 그의 학교는 현대미술을 가르친 최초의 학교로 미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드로잉을 계속했지만 1924년까지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1930년 캘리포니아에 있는 버클리(Berkeley) 대학의 미술과 과장으로 재직하던 그의 제자 워스 프라이더(Worth Fryder)가 스승에게 여름학기를 맡아줄 것을 부탁하며 미국으로 초청했다. 1932년 그는 두 번째로 미국을 방문하고 턴(Thurn) 미술대학 초청강사로 재직했는데 그 학교에도 제자가 재직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미국에 계속 체재하기로 결심하고 1933년 뉴욕의 이스트 57번가에 자신의 학교를 열었으며 그 학교는 1938년 그리니치 빌리지 웨스트 8번가로 이주했다. 1941년에는 미국 시민권도 취득했다.

그의 제자 한 사람은 “호프만은 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는 훌륭한 독일인의 이기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고, 다른 제자는 “그가 파리를 뉴욕으로 운반하였다. 그는 무식한 우리에게 말을 가르쳐주었다”며 그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리도 호프만의 강의에 아주 만족해 했다. 그는 예술가와 평론가들은 무엇을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하며 그러한 점을 그림들을 비교하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무엇이 마티스를 위대하게 만들었으며, 왜 그의 그림이 뒤피의 그림보다 더 훌륭한지를 설명할 줄 아는 교사였다. 그는 색과 색, 선과 선의 대비, 그리고 색을 칠하는 방법들이 그림의 표면에서 어떻게 반작용하는가를 유심히 살펴보라고 하면서 밀고 당기는 그것들의 상대성 관계에서 생겨나는 긴장감으로부터 어떠한 에너지가 분출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물론 궁극적인 화가의 성취는 그러한 긴장감들을 조절하여 완벽하게 구사함으로써 최적의 균형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호프만은 항상 “그림을 평평하게 하며 색들이 노래하게 하고 최소한의 것을 가지고 최대한의 효과를 나타내라”고 가르쳤다. 그러면서 “그림을 평평하게 만들지 말고 다만 그것이 평평하게 남아 있게 하라”고 충고했다. 리는 호프만이 항상 사용했던 말은 “그저 훌륭할 따름이다”였다고 회상했다. 호프만은 리가 만날 수 있었던 교사들 중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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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반 오우바테르와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


네덜란드 화가 알베르트 반 오우바테르Albert van Ouwater는 하를렘에서 태어났고
1440~65년에 활동했으며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의 스승으로 알려졌다.
반 만데르의 『화가의 책 Schilderboek』(1604)에는 풍경화에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것으로 확인된 유일한 작품 <라자로의 부활 The Raising of Lazarus>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앱스에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얀 반 에이크의 작품 <대성당 참사회 의원 반 데르 파엘레와 마돈나 Madonna with Canon van der Paele>를 상기하게 한다.
당시 하를렘의 회화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반 오우바테르의 작품은 그가 얀 반 에이크나 로히르 반 데르 베이덴과 같은 거장들에 관해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남부를 여행했거나 하를렘을 떠나 루뱅으로 이주한 디리크 보우츠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고향 출신의 보우츠와 반 오우바테르는 인물에 대한 표현 양식에서도 비슷하며 구도에서도 정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반 오우바테르의 그림 속 인물들은 아직 개성화되지는 않았더라도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이라고 하는 과거 그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신선함을 지니고 있다.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
네덜란드 화가 게르트겐 토트 신트 얀스Geertgen tot Sint Jans는 레이덴에서 태어나 1475~95년 하를렘에서 활동했다.
그는 알베르트 반 오우바테르의 제자로 알려졌다.
그의 이름은 그가 활동한 하를렘의 종교단체에서 따온 것으로 '성 요한 기사단의 작은 게라르트 little Gerard of Sint Jans'를 의미한다.
그는 이 교단의 수도원 교회를 위해 기록에 남아 있는 제단화 <십자가 처형 Crucifixion>을 그렸다.
그 가운데 대형 패널화 두 점은 빈 미술사 뮤지엄Vienna Kunsthist Museum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의 애도 Lamentation of Christ>와 <세례 요한 St. John the Baptist>이며 이것들은 원래 오른쪽 날개 부분의 양면이었는데 분리되었다.
두 작품 모두 깊이감이 있는 풍경 속에 강렬한 색채로 인물을 개성적으로 묘사한 게르트겐의 재능을 보여준다.
작품 전체가 조절된 빛으로 통일감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애도>의 여성 인물은 가냘프고 인형처럼 보이는데,
이는 게르트겐의 양식 중 가장 잘 알려진 특징으로 소품 <마돈나 Madonna>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그가 1490~95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베를린 소재 <광야의 세례 요한 Saint John the Baptist in the Wilderness>를 보면 화면을 단순하게 구성했고 자연에 대한 관찰로 풍경을 원근 있게 묘사했는데,
이런 점이 후기 네덜란드 회화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예와 그 밖의 몇몇 작품의 경우 정확한 기록은 없더라도 빈 미술사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십자가 처형>과의 유사한 점을 꼽아 그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열다섯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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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세잔을 완성한 조르주 브라크


브라크는 마티스를 중심으로 모이는 야수주의 예술가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상업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야수주의 영향을 받아 무지개 색을 실험해보았지만, 시각적으로 너무 현란하여 밝은 색을 사용한 그림이 관람자의 눈을 피로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의 기질에 어울리지 않는 야수주의 방법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세잔이 말년에 그린 <비베무에서 바라본 생 빅토르>, <레 로베에서 바라본 생 빅토르> 등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세잔이 성취하려고 노력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탐구했다.
그는 세잔이 발견한 것이 입체주의였다는 사실을 알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실험하다가, 세잔이 생을 마감한 곳에서부터 그의 의도를 확대·해석하여 1908년에 <에스타크의 집들>을 그렸다.
세잔은 에스타크의 장면을 여러 점 그렸는데, 브라크는 에스타크 언덕에 있는 집들을 그리면서 세잔과는 달리 집들로만 캔버스를 가득 채움으로써 세잔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입방체 형태의 구성주의 그림을 완성했다.
브라크는 이 그림을 포함하여 여섯 점을 그해 가을전을 통해 발표하려고 했는데 심사위원들이 처음에는 여섯 점 모두 배척하다가 나중에는 가까스로 두 점만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화가 나서 여섯 점 모두 들고 그곳을 나왔다.
이때 브라크는 26살이었다.

브라크의 그림이 배척당했다는 말을 들은 복셀이 마티스에게 가서 브라크가 가져온 그림이 어떤 것이었느냐고 묻자 마티스는 “그가 가져온 것은 작은 큐브 덩어리였다”고 하면서 복셀이 자신의 말을 못 알아 들었을까봐 종이 한 장을 집어 들고는 순식간에 큐브 두 개를 그렸는데 브라크가 그린 <에스타크의 집들>의 부분이었다.

미술품 딜러 다니엘 앙리 칸바일러가 당시 브라크를 후원하고 있었는데, 그의 그림이 가을전에서 배척당하자 그에 대한 자신의 투자도 보호할 겸 1년 반 전에 개업한 자신의 화랑에서 11월에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브라크의 그림을 관람한 복셀은 “브라크는 앞으로 전진하는 웅대한 젊은이다. … 그는 형태를 경멸하며 모든 것들, 풍경과 사람의 모습, 그리고 집들을 연역해서 기하모양으로 큐브처럼 만들었다”고 적었다.
복셀이 큐브cube란 말을 사용했으므로 입체주의cubism란 말이 생겼는데, 야수주의란 말을 만든 장본인인 그는 새로운 그림을 분류할 줄 아는 평론가였다.

브라크의 <에스타크의 집들>은 입체주의라고 단정해서 말할 만한 그림이었다.
그는 언덕의 집들을 주제로 수평선을 제거했으며, 집과 나무의 형태들을 단순화시켜서 기본적인 형태들로 제한했다.
입체주의에 대한 브라크의 이해는 “새로운 공간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보이는 공간”이었으며, “사물들을 서로 떼어놓는 것”이었다.
세잔과 브라크의 그림을 비교하면, 세잔은 인상주의 예술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빛이 사물에 반사하는 색들을 사용한 것인 데 비해, 브라크는 마티스의 야수주의 그림에 반발하여 단색주의에 더러 회색을 사용하였다.
브라크는 세잔이 삼차원의 사물을 이차원에 재현하면서 삼차원적으로 나타내려고 한 독특한 회화방법을 시도했음을 알아챘으며, 세잔의 의도가 좀 더 과격한 방법으로 웅대하게 나타나도록 했는데 전통주의 회화의 관점에서 보면 정도를 매우 벗어난 행위였다.
그때부터 그의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볼 수 없게 사물들을 큐브 모양으로 부수고 또 부수어서 거의 추상으로 변해 갔다.
피카소와 함께 작업하면서 그는 더욱 분석적인 방법으로 입체주의를 진전시켰지만 피카소와 함께 작업하지 않았더라도 혼자 능히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물에 대한 이 같은 분석적 시도는 마르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무미건조한 분석적 입체주의에 그 특유의 재담을 보태는 방법을 생각하게 했다.
입체주의로 해서 20세기 회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으며, 마르셀은 새로운 시기에 걸맞는 새로운 미술을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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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

1936년 10월 폴록은 한 여인을 만났다. 벡키 타워터(Becky Tarwater)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폴록보다 네 살이 많았다. 벡키는 재능있는 음악가로서 폴록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폴록이 그녀를 만난 것은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있었던 파티에서였다. 그녀는 가수로서 밴조를 연주했는데 그날 파티에서 그녀가 부른 감미로운 노래는 폴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잭슨이 내게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말했다”고 벡키는 당시를 술회하면서 “그는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청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날 밤 벡키는 전철을 타려고 역으로 가고 있었는데 뒤에서 소리가 나서 돌아보았더니 폴록이 미소를 지으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폴록에게 웃어주고 걸어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벡키는 그가 문제가 있는 가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폴록의 아파트를 자주 방문하여 밴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폴록은 그저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다보았다. “그는 정말 벡키를 사랑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했다”고 폴록의 형 샌드의 애인 알로이(Arloie)는 전한다. 벡키는 폴록이 부끄러움을 탔다고 회상하면서 “우리가 육체적으로 자제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1937년 1월 어느 날 밤 벡키는 폴록을 방문하여 누이가 병이 났기 때문에 테네시 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작별을 고했다. 폴록은 대단히 좌절했고 결혼하자고 졸랐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벡키가 뉴욕을 떠나자 폴록은 그림도 그리지 않고 번뇌하면서 술을 마셔댔다. 폴록은 근처 술집에서 만취된 후에야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알로이는 부엌의 식탁보가 갈기갈기 찢겨 있는 것을 보았다. 폴록이 칼로 난도질한 것이었다. 폴록의 정신분열 증세는 이때 처음 나타났다. 샌드와 알로이는 그를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갔고, 폴록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정신치료를 받았다. 이후 6개월 동안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았지만 치유되지는 못했는데 이는 그가 계속 술을 마셔대면서 의사를 만났기 때문인 것 같다.

미술학교 친구 루벤 카디시는 “잭슨은 항상 말과 행동에서 실수를 범했다. 그는 술에 취하지 않아야 할 때 술에 취했다. 여인들은 그에게 계속 실망했다”고 전한다. 폴록이 술에 만취하여 인생행로를 바꾸었던 사건은 여러 번 있었지만 1936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저질렀던 행위는 특기할 만하다. ‘예술가 연합(Artists Union)’ 주최로 열린 그 파티에서 폴록은 자신의 행위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여느 파티에서처럼 술을 마셔댔다. 취기가 오르자 그는 사람들이 춤추고 있는 홀 중앙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고, 춤을 추는 한 쌍의 남녀를 발견하고는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어가서 아주 서툴게 여인을 자신의 팔에 감았다. 여인은 약간 나이가 들어보였으며 두드러진 코에 눈꺼풀이 두터웠고 입이 튀어나왔으므로 입을 다물어 못생긴 그녀의 이빨을 감추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얼굴과는 달리 그녀는 팽팽하게 잘 생긴 몸매를 갖고 있었는데 커다란 가슴은 남자들에게 더욱 육감적인 느낌을 줄 수가 있었다. 그녀를 자신의 몸 가까이 끌어안은 그는 자신의 몸을 그녀의 몸에 비비기 시작했다. 맥주 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폴록은 여인에게 “너, 나하고 씹할래?”라고 속삭였다. 여인은 폴록의 뻣뻣해진 성기가 감촉되자 그를 밀어내면서 그의 뺨을 호되게 갈겼다. 폴록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곧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때 그곳에 있었던 증인의 말에 의하면 “마치 개가 사람의 다리에 매달렸던 것 같았다. 잭슨은 성기를 그녀의 몸에 비벼서 사정(orgasm)하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한데 더욱 기괴한 일은 일 년 후에 그녀가 친구에게 한 말이었다. “그가 나를 꼬시려고 했어. 나는 그가 좋아져서 그날 밤 그와 함께 나의 집으로 갔다.” 그날 밤 폴록은 만취상태였으므로 두 사람이 제대로 성관계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날 둘은 헤어졌고 그후로는 만나지 않았다. 4년 후에 그녀가 폴록의 화실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폴록의 아내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리 크래스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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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폴록은 드로잉할 줄 모른다”

30년대 초의 미국 예술가들에게는 멕시코 벽화예술가들의 영향이 대단했다. 폴록은 4년 전에 형 샌드를 통해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비드 알파로 시쿠에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1896~1974)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1936년에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서른여덟 살의 시쿠에이로스는 혁명을 추구했던 과격한 성격의 예술가로서 미국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벽화를 홍보하고 있었다. 디에고 리베라(1886~1957)와 호세 클레멘테 오로츠코(1883~1949)와 함께 멕시코를 대표하는 세 예술가들 중 막내였던 그는 1896년 12월에 치와와(Chihuahua)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0년에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이듬해 한 해 동안은 가택연금되기도 했다. 뉴욕에 체재하는 동안에 그는 ‘화가들을 위한 실험적 워크샵(Experimental Workshop for Painters)’을 조직했는데 폴록은 그 그룹에 동참했다. 당시 시쿠에이로스는 무료로 자신을 도와줄 조수가 필요했는데 폴록은 형의 권유로 자원해서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오후에 그에게로 가서 도왔다. 그는 멕시코 화가를 위해 물감을 섞거나 나무를 톱질하거나 풀로 붙이거나 석고를 개서 바르는 등 허드렛일을 주로 했다. 이때 폴록은 함께 일하는 동료로부터 “드로잉할 줄 모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폴록은 여러 친구들로부터 그러한 말을 들었으며 그럴 때마다 좌절하며 술을 마셨다.

폴록은 시쿠에이로스가 사용하는 회화기교에 감동했으며, 집으로 돌아와 그의 기교를 자신의 그림에 직접 사용해보기도 했다. <숫송아지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Steer>에서 그는 숫송아지를 석판화로 검정색과 흰색으로 그린 후 에어브러시로 붉은색, 오랜지색, 그리고 파란색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이미지를 장식하였다. 그는 다른 풍경화에서도 좀더 자유롭게 색을 칠하는 회화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멕시코 예술가에게서 받은 영향이었다.

시쿠에이로스는 과음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과격한 성격은 폴록과 상통하는 점이 많았다. 그는 화염을 뿜어내듯 말했는데 “그가 땅콩에 관해 이야기하든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든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의 모든 말들은 폭발하였다”고 폴록의 친구 루벤 카디시는 회상했다. 시쿠에이로스는 예술가들에게 ‘불의 사나이’로 인식되었다. 그림을 얼마나 크게 그렸던지 그릴 그림을  미리 구성하지 않았으며 물감을 깡통에 담아 그대로 캔버스에 쏟아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연한 이미지들을 창조’하였고 폴록은 그러한 기교에 그저 감동할 뿐이었다.

같은 해 폴록은 캔버스를 마루바닥에 놓고 그와 같은 화법으로 물감들을 뚝뚝 떨어뜨리는 기교를 실험했다.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단계에 불과했던 폴록의 물감 흘리기 기법은 나중에 평론가들이 언제, 그리고 누가 먼저 사용했느냐는 문제로 다투어 글을 발표하게 했다. 폴록이 정확하게 누구에게서 이러한 방법을 발견했는지는 그 자신만이 잘 알겠지만 부분적으로는 시쿠에이로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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