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인생의 강요에서 벗어나고 싶다

1909년 어느 일요일, 거리를 걷던 마르셀은 부르주아 부부 한 쌍을 보았다.
신사복 차림의 남자는 유모차를 밀면서 걸어가고, 임산부 아내는 남산만한 배를 앞으로 쑥 내밀고 남편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40년이 지난 후 그는 그날의 장면을 상기하면서 “아내와 세 아이, 교외의 집, 자동차 세 대! 난 이 같은 인생의 강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날 부부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22살의 마르셀은 미술에 헌신하기 위해서라면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잔이 타계한 이듬해에 열린 1907년의 가을전은 그를 기념하는 회고전이었다.
브라크와 피카소를 포함한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대가의 그림을 관람하기 위해서 전시장으로 왔으며, 마르셀도 관람했다.
여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마르셀도 그때 세잔의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 방법을 실험했다.
브라크는 세잔을 자신의 영웅으로 숭배했고, 피카소는 “세잔이 우리 모두의 아버지다”라고 말하면서 세잔의 입체주의 실험을 고마워했다.
마르셀의 정신세계는 약간 혼란스러웠는지 어떤 때는 마네가 최고의 예술가라고 하더니 세잔이 자기에게 영향을 주었다고도 하고, 마티스가 더욱 더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르셀은 1910년에 <예술가 아버지의 초상>을 그리면서 세잔으로부터 2년 혹은 그 이상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에 관해 “그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세잔의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예로 그린 것이다”라고 했다.
누가 봐도 세잔의 화법으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는 이 그림은 여태까지 그가 그린 그림 중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가부장적인 외젠느의 심리를 시각적으로 묘사한 이 그림에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걸친 채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마르셀의 아버지가 오른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관람자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그해 그는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
<의사 두무세의 초상>은 독특한 그림으로 젊은 의사 두무세를 서 있는 모습으로 그리면서 배경은 야수주의 방법으로 밝게 했고, 몸에 비해 머리를 크게 부각시켰으며, 여백을 넉넉하게 두었다.
그림 뒤에는 “적절한 너의 얼굴, 사랑하는 친구 두무세”라고 적었다.
만화가 기질이 있는 마르셀은 초상화에 익살스러운 요소를 삽입했으며, 이런 요소는 장차 나타날 그의 모든 그림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순수미술에 익살을 보탰다.
두무세의 쫙 편 왼손 주위를 여백으로 구성했는데 X레이에 관한 관심과 관련 있어 보인다.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이 1895년에 X레이를 발견했는데 마르셀은 X레이에 관심이 많았다.
마르셀의 친구이자 후원자가 된 미국인 부자 월터 아렌스버그가 훗날 이 점을 묻자 그는 “두무세의 손이 그렇게 표현되도록 내게 아이디어를 준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설명할 만하거나 의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다만 요구되는 경이로움을 충족시키고자 그렇게 그린 것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가 말한 “요구되는 경이로움”은 1910년과 1911년 사이에 그린 여러 점에서도 나타났는데 지성적 회의주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마르셀은 1910년 여름 지금까지 그린 그림들 중 가장 커다란 그림인 <체스 게임>을 그렸다.
그는 형들이 테이블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체스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 주위로 무료한 모습으로 있는 형수들을 배치하여 대조가 되게 했다.
자크의 아내 가비는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레이몽의 아내 이본느는 풀밭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그들의 심리적 요소들은 그림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불분명한 모습들로 보이며, 남편과 아내들의 소외된 모습들만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을 포함하여 전부 다섯 점을 그해 10월에 열린 가을전에 출품했는데, 3년째 가을전에 참여한 것이었다.
심사규칙에 따라 마르셀은 이제 심사를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출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평론가들이 침묵함으로써 소외되었는데, 이 시기를 그는 “수영강습”이란 말로 표현했다.

그는 열심히 그림에 몰두하여 후기인상주의 풍경화로부터 야수주의 화가들의 누드로 나아갔고, 세잔의 초상화와 사람들을 모델로 습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의 그림에서 회화에 대한 재능이 발견되었지만 훌륭한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으며, 1911년 이전까지는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것을 그리지 못했다.
미학적으로 언급할 만한 작품은 1911년 이후 4년 동안에 그린 것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술집에서 예술을 키워가다

언젠가 벤턴은 폴록에게 “너는 예술가 그룹을 형성해야 한다”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이제 폴록도 홀로 작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을 알게 되었다. 1939년 그래엄을 시작으로 그는 예술가들과 교통하기 시작했다. 사실 미국 미술이 프랑스 미술에 비해 뒤졌던 것 가운데 하나가 작가들이 교통할 수 있는 술집이 부족했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 파리에는 술집이 많았고 보통 새벽 세 시까지 영업했으며, 예술가들이 단골로 가는 술집들이 있었으므로 어느 술집에 가면 누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막스 에른스트는 뉴욕에 도착한 지 한 달 후에 “이 곳에 와서 보니 파리의 화가들이 많이 있었다. 첫째 초현실주의 예술가들 그룹이 가장 힘있어 보였다. 나는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나기 어려웠는데 카페들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먼저 전화를 걸어 약속시간을 정한 후 만나야 하기 때문에 친구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만나기도 전에 사라지곤 했다”고 말했다. 이브 탕기도 에른스트의 말에 동감하면서 “카페가 없는 생활은 무료하다. 유럽에서의 카페 생활은 대단히 재미있으며, 특히 파리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해서 여가를 즐기며 친구들을 비공식으로 만나기 십상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에른스트는 “뉴욕에는 예술가들은 있지만 예술이 없다. 예술은 한 예술가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서로의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파리의 카페에서는 술도 팔았고 더러는 식사를 할 수도 있었으므로 우리에게는 술집이라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파리에서의 카페 생활을 뉴욕에서 즐길 수는 없었지만 1943년부터 그리니치 빌리지에도 술집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더 클럽(The Club)이라는 그룹이 형성되어 화가, 시인, 평론가가 함께 술을 마시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특히 술집 시다(Cedar)에는 고키, 데이비드 헤어,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로버트 마더웰, 래리 리버스와 평론가 로젠버그, 그린버그 등의 출입이 잦았다. 클라인이 술을 많이 마셨고 폴록은 누구보다도 과음했는데 두 사람이 취하면 논쟁은 곧잘 욕설로 변했다. ‘시팔놈’이라는 말은 폴록의 말끝마다 붙어다니면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돈 많은 거만한 부르주아들, 돼먹지 않은 평론가와 화랑 주인들, 아직도 사실주의 회화를 추구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화가들, 그리고 자신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고 간섭하는 사람들을 으례 그런 부류에 집어넣었다.

이제 뉴욕의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만나기 시작했으므로 좀더 빠른 속도로 각자의 고유한 회화방법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침체한 미술사에 새 통로를 열 수 있는 자질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만나서 술을 마시고 카드 놀이를 했으며 파티를 열고 싸우기도 했지만, 미처 인식하지는 않았더라도 각자의 작품에는 서로가 주고받은 영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모더니즘의 전도사 존 그래엄

폴록이 세계적인 예술가로 부상할 수 있도록 그를 미학적으로 도왔던 고마운 예술가가 있는데 그가 존 그래엄(John Graham 1881~1961)이다. 그래엄은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폴란드 사람으로서 1920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던 그를 뉴욕의 젊은 예술가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는 유럽을 자주 여행했는데 피카소와 우정이 두터운 사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초기에 나움 가보와 엘 리시츠키에게서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예술의 체계와 변증법 System and Dialectics of Art』에서 “잠재의식과 관계가 끊긴 것을 복구하며 … 잠재의식의 고동치는 사건들을 의식으로 끌어온다”고 적고 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문학의 관계를 설명하기를 거부하면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자동주의(automatism) 화법을 젊은 예술가들에게 적극 권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인 고키와 드 쿠닝이 그의 미학을 받아들였고, 폴록과 아돌프 고틀립도 수용했다. 러시아에서 이민 온 고키는 그래엄과 특히 우정이 두터웠다.

그래엄은 육십대에도 손을 사용하지 않고 머리를 땅에 대고 물구나무를 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 매일 아침 그는 머리 전체를 면도하고 눈과 눈썹만을 남겼다. 배우 율 브린너보다는 못생겼지만 개성적인 면에서는 그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었다. 화가 론 고르초브(Ron Gorchov)는 “그래엄은 연예인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고 했으며 드 쿠닝은 1930년대에 그래엄이 노동절 퍼레이드 틈에 끼어 행진하면서 “우리는 빵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1939년 폴록이 처음 만났을 때의 그래엄은 신지학(神智學, theosophy), 연금술, 점성학, 신비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어떠한 반복되는 행위, 일상의 다리미질조차도 기도의 형태이며 전능한 신과 교감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고는 오늘날 엉터리로 인식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신의 문제가 지성인들에게 심각하게 사고되고 있었다. 이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신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은  문학과 철학에서 여전히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다음은 어느 날 파티에서 처음 소개받은 여인과 나눈 대화이다. 로저 윌콕스는 마침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했는데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엄: 넌 피를 많이 흘리니?

여인: 당신 말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무슨 뜻이죠?

그래엄: 네가 피를 많이 흘리냐는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여자들은 월경 때 피를 흘리지 않니. 난 네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

여인들에 대한 그의 뻔뻔스러운 말 버르장머리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은 그를 가리켜 ‘대단히 매력적이다’ ‘우아하다’ ‘매우 지성적인 사람이다’라고 각각 소감들을 피력했는데 그러고보면 여자들이 보는 사내와 사내들이 보는 사내에 대한 견해는 아주 차이가 큼을 알 수 있다. 하긴 여자에 대한 사내들의 견해도 마찬가지일텐데, 그렇기 때문에 이성인가보다.

그래엄의 주위에는 고키, 스튜어트 데이비스, 아돌프 고틀립, 나중에는 데이비드 스미스의 아내인 조각가 도로시 데너, 드 쿠닝이 모여들었다. 특히 젊은 조각가 데이비드 스미스가 그를 잘 따랐는데 그는 “그래엄의 매년 파리 방문은 우리 모두에게 추상사건들을 통고하게 했다”고 기술했으며 평론가 그린버그는 그를 “황무지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드 쿠닝은 미국에 와서 재능있는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이 바로 고키와 스미스, 그래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33년 그래엄은 세 번째 아내 엘리노와 별거중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아주 침울했는데 이는 미국 모더니즘에 대한 거부반응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1935년에 파리로 가서 여러 화랑들을 둘러본 후 「원시주의 예술과 피카소」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는데 폴록은 그 글을 읽고 감동하였다. 1939년에 그래엄은 네번째 아내 콘스탄스(Constance)와 함께 그리니치 빌리지에 아파트를 얻고 돈을 벌려고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폴록이 그래엄을 만난 것은 1940년 가을이었다. 당시 폴록의 나이는 스물여덟으로서 뉴욕에 온 지 10년이 되어 예술가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절로 생길 때였으며 그래엄은 막 59세가 되었을 때였다. 폴록은 그래엄의 인생에 독특하게 위치하게 되었는데 그래엄은 폴록을 원시인이며 프롤레타리아라고 생각했다.

그래엄은 폴록을 처음 만난 후 집에 와서는 “잭슨은 정말 미친 놈이지만 대단한 화가”라고 말했다. 그래엄의 아내 콘스탄스는 “그래엄은 아마 폴록처럼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고 하면서 “그는 폴록처럼 경찰관 코를 납작하게 갈길 수 있는 그런 사내가 되고 싶어했다”고 부연했다. 그래엄이 폴록에게서 천재적 증거를 발견하자 드 쿠닝은 “빌어먹을 잭슨을 끄집어내다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드 쿠닝은 “다른 예술가들 눈에는 잭슨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겠지만 … 잭슨의 작품은 그들과 달랐으며 … 그래엄은 그것을 볼 수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래엄의 판단을 조금은 신뢰했다.

폴록은 그래엄이 정상에 오른 20세기의 대가들인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을 비롯한 유명한 예술가들을 만난 적이 있으며 서양미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리에 비해 예술가들과의 교통이 부족했던 폴록은 그래엄을 만나자 그가 벤턴과는 달리 모더니즘에 대하여 아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의 아파트를 자주 방문하였다. 그래엄은 미술에 관하여 진지하게 오래 토론하고, 폴록이 그를 방문할 때면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대화했다. 그래엄은 화가이며 평론가였고 미술품 수집가이자 중개상이었고 또 작가이기도 했다. 폴록의 천재성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그였으며 그래엄만이 폴록의 위대한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드 쿠닝도 시인했다.

어느 날 폴록이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책장에서 몇 권의 책을 꺼내 그에게 그림들을 보여주려 했지만 폴록은 거절하면서 “예술가는 다른 이들의 작품을 너무 많이 보아서는 안된다. 예술가는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분출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폴록은 고집이 세고 화를 잘 냈는데 그럴 때마다 그에게는 쓸 만한 아이디어가 있음을 그래엄은 알 수 있었다. 폴록은 그래엄에게 자신의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그의 의견을 청취하려 했다. 그는 그래엄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고 있었으며 2년 후에는 비로소 그래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정도로 달라지게 되었다.

폴록도 벌써부터 아프리카의 원시예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엄은 아프리카 예술이야말로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30년대 후반 그래엄의 아파트는 각종 가면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래엄은 그의 아파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아프리카의 미술은 서양미술과는 “완전히 다른 원리들에 기초하여 창조된 것들”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정신적 감성들”이라고 말했다.

그래엄은 융의 제자 헨더슨(Josep Lewis Henderson)과 마찬가지로 예술과 무의식 세계가 관련이 있다고 인식했고 “원시인들은 소위 문명인들보다 그들의 무의식 세계에 좀더 접근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는 헨더슨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937년에 쓴 글에서 “무의식적 마음은 창조적인 근저이며 자원이고 힘과 모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식의 저장소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의 체계와 변증법』에서 “기교의 완전함과 우아함이 예술품을 제작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는데 폴록은 기교면에서 여느 예술가들보다는 뒤떨어져 있었다. 그래엄은 “예술품은 사실을 재현한 것도 아니고 왜곡한 것도 아니다. … 그것은 예술가의 지성·감성적인 반발에 의해 공간 안에 꾸밈 없이 즉흥적으로 기록한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물론 이는 폴록을 설명해주는 말로 충분했다.

폴록은 그래엄을 통해 피카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거짓말도 조금 보탰겠지만 그래엄은 피카소를 만나 함께 포도주를 마시면서 서양미술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으며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폴록에게는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엄은 삼차원에 대한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순진했던 주장은 “예술에서 대단한 데카당스(Decadence: 퇴폐주의)의 시기에 해당했다”고 말하면서 피카소의 천재성이 “모델을 사용한 회화나 삼차원적인 회화를 사이비 예술로 단정했다”고 주장했다. 몇 년 후 그래엄의 이러한 주장을 평론가 그린버그가 받아들였다. 당시 미국에서 모더니즘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은 호프만과 그래엄뿐이었는데, 호프만이 백과사전과도 같은 지식의 일인자였다면 그래엄은 이인자 내지는 삼인자쯤 되었다.

폴록은 원시주의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므로 피카소가 스물여섯 살 때 그린 <아비뇽의 여인들 Les Demoiselles d'Avignon>(26)을 보고 “내게 지독하게 중요한 그림이었다”고 토로했다. 폴록은 피카소의 그림에서 예술과 무의식 세계의 직접적인 관계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폴록은 정신분열 증세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1940년 10월 폴록은 5개월 동안 해직되었다가 다시 WPA에 복직되었다. 하지만 그는 늘 불안해 했는데 언제 또 해고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18개월 이상 주급을 받았던 예술가들을 해고시키면서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게다가 형 샌드와 폴록은 공산당에 가입했으므로 더욱 불안했는데 정부는 공산당원들이라면 무조건 해고시켰기 때문이다. 샌드는 “진짜 공산당원들은 그 빌어먹을 공산당 신청서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병신 머저리 같은 우리만 서명했으며 … 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걱정이 태산 같아 긴장하고 있다”고 편지에 적었다.

폴록에게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었다. 곧 징집 통지서가 올 테고 그렇게 되면 군대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신문에서는 연일 나치가 세계대전을 도발한 후 유럽에서는 전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리라는 소문도 무성한 상태였다.

1941년 샌드와 폴록 형제는 다시 해고되었다. 그 무렵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아파트 월세가 35달러에서 50달러로 올랐는데 두 사람이 일하고 있을 때에도 생활이 벅찬 상태였다. 샌드는 형 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잭슨은 여전히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고 있고, 우리는 돈 때문에 아주 어려운 지경이다”라고 적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장느 세레와의 짧은 사랑

마르셀은 1908년의 가을전에 <초상>, <꽃핀 벚나무>, <오래된 공동묘지>를 출품했다.
이런 그림들은 그가 만화가의 직업에서 손을 떼고 순수예술가로 데뷔하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의 그림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잊혀졌는데 칭찬하는 평론가도 비난하는 평론가도 없었다.
<꽃핀 벚나무>는 현존하는 <사과나무숲 한가운데 있는 붉은 집>의 또 다른 제목이 아니었나 짐작되며, 나머지 두 그림은 현존하지 않아 어떤 그림들이었는지 알 수 없다.

마르셀은 이듬해 봄에도 앙데팡당전에 두 점을 출품했지만 평론가들의 침묵은 여전했다.
전시회가 끝날 무렵 그의 풍경화 한 점이 100프랑에 팔렸다.
마르셀이 1909년의 가을전에도 세 점을 출품한 것을 보면 1908년 중반부터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가을전에서는 여인의 누드 그림이 팔렸다.
예술가에게는 평론가의 호평도 중요하지만 그림이 팔려 돈이 생기는 것이야말로 경제적으로 절실한 것이었다.
그때 팔린 누드가 현존하지 않아 어떤 그림이었는지 알 수 없다.

마르셀은 1910년 수개월 동안 여인의 누드를 주로 그렸는데, 밝은 색을 사용하여 야수주의 방법으로 그리고 검정색으로 몸의 유연한 선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런 방법은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마티스와 세잔이 이미 사용한 것이었다.
마르셀은 이런 그림들을 1910년 봄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여 처음으로 평론가의 관심을 유발시켰다.
입체주의 평론으로 유명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그의 누드 두 점을 “대단히 추한 그림이다”라고 적었다.
아폴리네르의 비평은 마르셀에게 충격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열리는 중요한 전시회들 대부분을 관람하면서 자신만의 회화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 시기 그는 독일 뮌헨에서 온 젊은 예술가 막스 베르그만을 자주 만났는데 베르그만의 일기에는 3월과 4월에 걸쳐서 마르셀과 십수 차례나 만난 것으로 적혀 있고, 레스토랑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는 기록도 있다.
마르셀은 베르그만에게 장느 세레라는 젊은 여인을 소개했다.
그녀는 얼마 전 뉠리Neuilly에 있는 마르셀의 집 건너편으로 이주해온 여인이었다.
스무 살에 결혼한 세레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자 예술가들의 모델이 되고자 하였으며 그런 그녀를 도우려고 마르셀이 베르그만에게 소개한 것이다.
베르그만은 세레에게 눈독을 들였지만 그녀는 이미 마르셀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마르셀이 그녀와 나눈 사랑의 기간은 매우 짧았고, 이내 그녀와 헤어졌다.
훗날 전철역 계단에서 여덟 살 난 소녀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그녀를 우연히 만났을 때야 마르셀은 자신의 딸을 알아보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의 충격

리는 호프만이 마티스와 피카소 사이를 시계 불알처럼 왔다갔다했다고 말했는데 리 또한 호프만의 영향으로 인해 두 대가들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피카소의 <게르니카 Guernica>(19)를 보고부터는 그녀의 오락가락도 멈추었다. 리는 그 그림이 자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고 회고하였다. <게르니카>는 피가소가 조국 스페인 동란의 비극을 사회적으로 기소했던 그림으로 독재자 프랑코가 독일 폭격기를 불러들여 조그만 동네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한 데 대한 항거를 표현한 것으로 뉴욕 예술가들에게 추상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그림으로 받아들여졌다. 독일 군대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피카소는 독일군의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독일군이 <게르니카>를 가리키며 “네가 했냐?”고 묻자 피카소는 “아니, 네가 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뉴욕이 세계적인 수준의 도시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예술가들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많은 예술품 중개상들과 평론가들도 뉴욕으로 왔는데 그들이 미국화단에 끼친 영향도 괄목할 만했다. 피에르 마티스, 발렌타인 두덴싱, 줄리앙 레비, 레오 카스텔리, 기타 중개상들이 뉴욕으로 와서 화랑을 열었는데 그들은 입체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대가들의 작품들을 주로 소개했다. 또한 시인 앙드레 브르통의 날카로운 평론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폴록은 57번가에 있는 발렌타인(Valentine) 화랑에 가서 처음으로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를 본 후 자극을 받아 추상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동안 그는 벤턴만 추종하느라고 입체파 혁명의 위대함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게르니카>를 보고서야 왜 사람들이 피카소를 “20세기 미술의 아버지”라고 칭송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입체파 화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피카소의 그림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린 것들 가운데 황소 그림이 있다. 황소는 조국 스페인에서 투우를 관람하기를 즐겼던 피카소가 선호했던, 그의 특허와도 같은 주제였다. 자전거 손잡이를 위로 세우고 자전거 안장을 거꾸로 하향시켜 제작한 <황소 대가리 Bull's Head>(18)는 유명하다.

유럽에서 정상에 오른 예술가는 단연 피카소였다. “그는 모든 것을 그렸고, 회화의 모든 주제들을 남김없이 사용했으며 … 피카소는 항거하기 어려운 예술가였다”고 술회하는 사람이 있다. 한 평론가는 피카소 이후 미술이 남아 있을까를 의심하기도 했다. 라이오넬 아벨(Lionel Abel)은 “피카소 이후 어떻게 사람들이 혁명적일 수 있겠느냐? 피카소 이후 네가 어떻게 다른 것들이라도 창조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고키는 몇 점만이라도  피카소와 같은 수준으로 그릴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뉴욕의 예술가들에게는 피카소의 화법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들이 뚫고 나가야 할 회화의 통로가 캄캄하고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춤의 명수 몬드리안과의 부기우기
리와 이고 사이에서 불화가 심화되더니 1939년 어느 날 이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리는 놀라 경찰서에 이고가 실종됐다고 신고하고 이미 접수된 실종자들의 명단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녀는 그것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끝장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일 주일이 지난 후 이고는 그의 가족들이 있는 플로리다 주에서 리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그렸던 리의 초상화를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리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일 년 후였다. 리는 이 일로 마음의 상처가 컸고, 몇 년 후에 그녀가 그린 그림에서도 그러한 점이 발견된다.

그녀는 이 시기에 추상미술가 연합(AAA: American Abstract Artists)에 소속되어 있었다. 1937년에 결성된 이 그룹은 젊은 작가들에게 우상과도 같았던 몬드리안이 주도하고 있었다. AAA의 작가들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의 유토피아 미학을 지지하면서 모든 사물들의 묘사가 배제된 완전추상을 가장 이상적인 회화라고 인식했다.

어느 날 리는 이스트 58번가에 있는 카페 소사이어티 업타운(Society Uptown)에서 몬드리안을 위해 마련된 파티에 갔다. 몬드리안은 당시 건강이 나빴지만 그날은 조금 나은 듯이 보였다. 춤을 추기 위해서 그녀는 몬드리안과 함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기우기가 막 연주되자 몬드리안은 리의 귀에 대고 “자!”라고 말했다. 몬드리안은 유럽에서 여가가 생기면 유명한 댄스 교사에게 춤을 배우곤 했으므로 그의 춤은 수준급이었다. 리는 사람들이 이 68세의 대가와 자신이 춤추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흥분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리는 몬드리안을 만난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재즈를 사랑하고 그도 재즈를 사랑했으므로 그를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다. 난 그와 함께 춤을 춘 적도 있는데 우리는 미치도록 춤을 추었다”고 술회했는데 이는 아무래도 그녀의 감상적인 회상인 것 같다. 리는 몬드리안을 안내하여 AAA 연례전에 간 적도 있었는데 그러한 만남조차도 그녀는 소중하게 기억했다. 리가 입체주의 화법으로 그린 정물화를 보고 몬드리안이 “힘찬 리듬이 내재한다”고 칭찬하면서 계속 그런 방법으로 그리라고 격려하자 리는 흥분했다.

이고가 달아난 후 리는 더욱 회화에 몰두하면서 AAA그룹 작가들과 어울리며 완전추상화를 그렸다. AAA그룹 작가들은 대부분 호프만의 제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외에도 초현실주의에 공통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리는 이 시기에 모자이크 콜라주를 창조했는데 이는 그녀가 호프만에게 수학할 때 호프만이 그녀의 그림을 찢어버린 것에서 부분적으로 받았던 영감에 의한 것이었다.

호프만은 직접 목탄을 들고 제자들의 그림들 위에 덧그리면서 수정해주곤 했다. 리는 어느 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렇고 친구들도 잘 그렸다고 칭찬했던 그림을 책상 위에 놓고 호프만이 그 그림에 관하여 무어라고 말할까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호프만은 리의 그림을 네 조각으로 찢은 후 이젤 위에 다시 가지런히 배열하고는 “이것이 긴장감이다”라고 말하고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50년이 지난 후의 인터뷰에서도 리는 그때의 일에 화를 내긴 했지만 이때의 경험이 그녀로 하여금 모자이크 콜라주를 창조하게 하였다. 그러나 호프만은 리의 모자이크 콜라주(23)를 보고 아주 만족해 하였으며, 강의 때 리의 그림을 칭찬하면서 “이러한 방법은 아주 훌륭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것이 여자가 한 작품인 줄 몰랐을 거다. 여자들은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남자들보다 더욱 재능을 발휘하지만 그후에는 남자들이 재능을 나타낸다”고도 말했다.

이 시기에 리는 드 쿠닝이 단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러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 쿠닝은 실제 모델 크기로 그린 스케치를 리에게 주기도 했으며 이따금 리의 화실도 방문했지만 리가 은근히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에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녀의 변죽만 울리면서 그저 친절했을 뿐이었다. 드 쿠닝은 미술사의 모든 대가들의 화법들을 탐험하면서 그것들을 부분적으로 자신의 그림에 응용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입체주의 예술가 페르낭 레제의 기계주의 드로잉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리는 로젠버그의 아파트에서 열렸던 파티에 갔다가 곧 미국평론의 별로 떠오를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를 만났다. 리는 그린버그를 존경하는 호프만의 강의에 초대하기도 했지만 1940년부터 리는 더 이상 호프만의 학교에서 수학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