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모더니즘의 전도사 존 그래엄
폴록이 세계적인 예술가로 부상할 수 있도록 그를 미학적으로 도왔던 고마운 예술가가 있는데 그가 존 그래엄(John Graham 1881~1961)이다. 그래엄은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폴란드 사람으로서 1920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던 그를 뉴욕의 젊은 예술가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는 유럽을 자주 여행했는데 피카소와 우정이 두터운 사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초기에 나움 가보와 엘 리시츠키에게서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예술의 체계와 변증법 System and Dialectics of Art』에서 “잠재의식과 관계가 끊긴 것을 복구하며 … 잠재의식의 고동치는 사건들을 의식으로 끌어온다”고 적고 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문학의 관계를 설명하기를 거부하면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자동주의(automatism) 화법을 젊은 예술가들에게 적극 권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인 고키와 드 쿠닝이 그의 미학을 받아들였고, 폴록과 아돌프 고틀립도 수용했다. 러시아에서 이민 온 고키는 그래엄과 특히 우정이 두터웠다.
그래엄은 육십대에도 손을 사용하지 않고 머리를 땅에 대고 물구나무를 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다. 매일 아침 그는 머리 전체를 면도하고 눈과 눈썹만을 남겼다. 배우 율 브린너보다는 못생겼지만 개성적인 면에서는 그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었다. 화가 론 고르초브(Ron Gorchov)는 “그래엄은 연예인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고 했으며 드 쿠닝은 1930년대에 그래엄이 노동절 퍼레이드 틈에 끼어 행진하면서 “우리는 빵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1939년 폴록이 처음 만났을 때의 그래엄은 신지학(神智學, theosophy), 연금술, 점성학, 신비주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어떠한 반복되는 행위, 일상의 다리미질조차도 기도의 형태이며 전능한 신과 교감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고는 오늘날 엉터리로 인식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신의 문제가 지성인들에게 심각하게 사고되고 있었다. 이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신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은 문학과 철학에서 여전히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다음은 어느 날 파티에서 처음 소개받은 여인과 나눈 대화이다. 로저 윌콕스는 마침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했는데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래엄: 넌 피를 많이 흘리니?
여인: 당신 말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무슨 뜻이죠?
그래엄: 네가 피를 많이 흘리냐는 말이다. 너도 알다시피 여자들은 월경 때 피를 흘리지 않니. 난 네가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
여인들에 대한 그의 뻔뻔스러운 말 버르장머리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은 그를 가리켜 ‘대단히 매력적이다’ ‘우아하다’ ‘매우 지성적인 사람이다’라고 각각 소감들을 피력했는데 그러고보면 여자들이 보는 사내와 사내들이 보는 사내에 대한 견해는 아주 차이가 큼을 알 수 있다. 하긴 여자에 대한 사내들의 견해도 마찬가지일텐데, 그렇기 때문에 이성인가보다.
그래엄의 주위에는 고키, 스튜어트 데이비스, 아돌프 고틀립, 나중에는 데이비드 스미스의 아내인 조각가 도로시 데너, 드 쿠닝이 모여들었다. 특히 젊은 조각가 데이비드 스미스가 그를 잘 따랐는데 그는 “그래엄의 매년 파리 방문은 우리 모두에게 추상사건들을 통고하게 했다”고 기술했으며 평론가 그린버그는 그를 “황무지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드 쿠닝은 미국에 와서 재능있는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이 바로 고키와 스미스, 그래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33년 그래엄은 세 번째 아내 엘리노와 별거중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아주 침울했는데 이는 미국 모더니즘에 대한 거부반응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1935년에 파리로 가서 여러 화랑들을 둘러본 후 「원시주의 예술과 피카소」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는데 폴록은 그 글을 읽고 감동하였다. 1939년에 그래엄은 네번째 아내 콘스탄스(Constance)와 함께 그리니치 빌리지에 아파트를 얻고 돈을 벌려고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폴록이 그래엄을 만난 것은 1940년 가을이었다. 당시 폴록의 나이는 스물여덟으로서 뉴욕에 온 지 10년이 되어 예술가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절로 생길 때였으며 그래엄은 막 59세가 되었을 때였다. 폴록은 그래엄의 인생에 독특하게 위치하게 되었는데 그래엄은 폴록을 원시인이며 프롤레타리아라고 생각했다.
그래엄은 폴록을 처음 만난 후 집에 와서는 “잭슨은 정말 미친 놈이지만 대단한 화가”라고 말했다. 그래엄의 아내 콘스탄스는 “그래엄은 아마 폴록처럼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고 하면서 “그는 폴록처럼 경찰관 코를 납작하게 갈길 수 있는 그런 사내가 되고 싶어했다”고 부연했다. 그래엄이 폴록에게서 천재적 증거를 발견하자 드 쿠닝은 “빌어먹을 잭슨을 끄집어내다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드 쿠닝은 “다른 예술가들 눈에는 잭슨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겠지만 … 잭슨의 작품은 그들과 달랐으며 … 그래엄은 그것을 볼 수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래엄의 판단을 조금은 신뢰했다.
폴록은 그래엄이 정상에 오른 20세기의 대가들인 피카소, 마티스, 몬드리안을 비롯한 유명한 예술가들을 만난 적이 있으며 서양미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리에 비해 예술가들과의 교통이 부족했던 폴록은 그래엄을 만나자 그가 벤턴과는 달리 모더니즘에 대하여 아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의 아파트를 자주 방문하였다. 그래엄은 미술에 관하여 진지하게 오래 토론하고, 폴록이 그를 방문할 때면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대화했다. 그래엄은 화가이며 평론가였고 미술품 수집가이자 중개상이었고 또 작가이기도 했다. 폴록의 천재성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그였으며 그래엄만이 폴록의 위대한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드 쿠닝도 시인했다.
어느 날 폴록이 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책장에서 몇 권의 책을 꺼내 그에게 그림들을 보여주려 했지만 폴록은 거절하면서 “예술가는 다른 이들의 작품을 너무 많이 보아서는 안된다. 예술가는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분출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폴록은 고집이 세고 화를 잘 냈는데 그럴 때마다 그에게는 쓸 만한 아이디어가 있음을 그래엄은 알 수 있었다. 폴록은 그래엄에게 자신의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그의 의견을 청취하려 했다. 그는 그래엄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고 있었으며 2년 후에는 비로소 그래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정도로 달라지게 되었다.
폴록도 벌써부터 아프리카의 원시예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엄은 아프리카 예술이야말로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30년대 후반 그래엄의 아파트는 각종 가면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래엄은 그의 아파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아프리카의 미술은 서양미술과는 “완전히 다른 원리들에 기초하여 창조된 것들”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정신적 감성들”이라고 말했다.
그래엄은 융의 제자 헨더슨(Josep Lewis Henderson)과 마찬가지로 예술과 무의식 세계가 관련이 있다고 인식했고 “원시인들은 소위 문명인들보다 그들의 무의식 세계에 좀더 접근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는 헨더슨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937년에 쓴 글에서 “무의식적 마음은 창조적인 근저이며 자원이고 힘과 모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식의 저장소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의 체계와 변증법』에서 “기교의 완전함과 우아함이 예술품을 제작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는데 폴록은 기교면에서 여느 예술가들보다는 뒤떨어져 있었다. 그래엄은 “예술품은 사실을 재현한 것도 아니고 왜곡한 것도 아니다. … 그것은 예술가의 지성·감성적인 반발에 의해 공간 안에 꾸밈 없이 즉흥적으로 기록한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물론 이는 폴록을 설명해주는 말로 충분했다.
폴록은 그래엄을 통해 피카소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거짓말도 조금 보탰겠지만 그래엄은 피카소를 만나 함께 포도주를 마시면서 서양미술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으며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폴록에게는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엄은 삼차원에 대한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순진했던 주장은 “예술에서 대단한 데카당스(Decadence: 퇴폐주의)의 시기에 해당했다”고 말하면서 피카소의 천재성이 “모델을 사용한 회화나 삼차원적인 회화를 사이비 예술로 단정했다”고 주장했다. 몇 년 후 그래엄의 이러한 주장을 평론가 그린버그가 받아들였다. 당시 미국에서 모더니즘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은 호프만과 그래엄뿐이었는데, 호프만이 백과사전과도 같은 지식의 일인자였다면 그래엄은 이인자 내지는 삼인자쯤 되었다.
폴록은 원시주의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므로 피카소가 스물여섯 살 때 그린 <아비뇽의 여인들 Les Demoiselles d'Avignon>(26)을 보고 “내게 지독하게 중요한 그림이었다”고 토로했다. 폴록은 피카소의 그림에서 예술과 무의식 세계의 직접적인 관계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폴록은 정신분열 증세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1940년 10월 폴록은 5개월 동안 해직되었다가 다시 WPA에 복직되었다. 하지만 그는 늘 불안해 했는데 언제 또 해고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18개월 이상 주급을 받았던 예술가들을 해고시키면서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게다가 형 샌드와 폴록은 공산당에 가입했으므로 더욱 불안했는데 정부는 공산당원들이라면 무조건 해고시켰기 때문이다. 샌드는 “진짜 공산당원들은 그 빌어먹을 공산당 신청서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병신 머저리 같은 우리만 서명했으며 … 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걱정이 태산 같아 긴장하고 있다”고 편지에 적었다.
폴록에게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었다. 곧 징집 통지서가 올 테고 그렇게 되면 군대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신문에서는 연일 나치가 세계대전을 도발한 후 유럽에서는 전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리라는 소문도 무성한 상태였다.
1941년 샌드와 폴록 형제는 다시 해고되었다. 그 무렵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아파트 월세가 35달러에서 50달러로 올랐는데 두 사람이 일하고 있을 때에도 생활이 벅찬 상태였다. 샌드는 형 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잭슨은 여전히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하고 있고, 우리는 돈 때문에 아주 어려운 지경이다”라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