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인생의 강요에서 벗어나고 싶다
1909년 어느 일요일, 거리를 걷던 마르셀은 부르주아 부부 한 쌍을 보았다.
신사복 차림의 남자는 유모차를 밀면서 걸어가고, 임산부 아내는 남산만한 배를 앞으로 쑥 내밀고 남편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40년이 지난 후 그는 그날의 장면을 상기하면서 “아내와 세 아이, 교외의 집, 자동차 세 대! 난 이 같은 인생의 강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날 부부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22살의 마르셀은 미술에 헌신하기 위해서라면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잔이 타계한 이듬해에 열린 1907년의 가을전은 그를 기념하는 회고전이었다.
브라크와 피카소를 포함한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대가의 그림을 관람하기 위해서 전시장으로 왔으며, 마르셀도 관람했다.
여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마르셀도 그때 세잔의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 방법을 실험했다.
브라크는 세잔을 자신의 영웅으로 숭배했고, 피카소는 “세잔이 우리 모두의 아버지다”라고 말하면서 세잔의 입체주의 실험을 고마워했다.
마르셀의 정신세계는 약간 혼란스러웠는지 어떤 때는 마네가 최고의 예술가라고 하더니 세잔이 자기에게 영향을 주었다고도 하고, 마티스가 더욱 더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르셀은 1910년에 <예술가 아버지의 초상>을 그리면서 세잔으로부터 2년 혹은 그 이상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작품에 관해 “그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세잔의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예로 그린 것이다”라고 했다.
누가 봐도 세잔의 화법으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는 이 그림은 여태까지 그가 그린 그림 중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가부장적인 외젠느의 심리를 시각적으로 묘사한 이 그림에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에 걸친 채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마르셀의 아버지가 오른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관람자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그해 그는 초상화를 여러 점 그렸다.
<의사 두무세의 초상>은 독특한 그림으로 젊은 의사 두무세를 서 있는 모습으로 그리면서 배경은 야수주의 방법으로 밝게 했고, 몸에 비해 머리를 크게 부각시켰으며, 여백을 넉넉하게 두었다.
그림 뒤에는 “적절한 너의 얼굴, 사랑하는 친구 두무세”라고 적었다.
만화가 기질이 있는 마르셀은 초상화에 익살스러운 요소를 삽입했으며, 이런 요소는 장차 나타날 그의 모든 그림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순수미술에 익살을 보탰다.
두무세의 쫙 편 왼손 주위를 여백으로 구성했는데 X레이에 관한 관심과 관련 있어 보인다.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이 1895년에 X레이를 발견했는데 마르셀은 X레이에 관심이 많았다.
마르셀의 친구이자 후원자가 된 미국인 부자 월터 아렌스버그가 훗날 이 점을 묻자 그는 “두무세의 손이 그렇게 표현되도록 내게 아이디어를 준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설명할 만하거나 의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다만 요구되는 경이로움을 충족시키고자 그렇게 그린 것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가 말한 “요구되는 경이로움”은 1910년과 1911년 사이에 그린 여러 점에서도 나타났는데 지성적 회의주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마르셀은 1910년 여름 지금까지 그린 그림들 중 가장 커다란 그림인 <체스 게임>을 그렸다.
그는 형들이 테이블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체스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 주위로 무료한 모습으로 있는 형수들을 배치하여 대조가 되게 했다.
자크의 아내 가비는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레이몽의 아내 이본느는 풀밭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그들의 심리적 요소들은 그림에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불분명한 모습들로 보이며, 남편과 아내들의 소외된 모습들만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을 포함하여 전부 다섯 점을 그해 10월에 열린 가을전에 출품했는데, 3년째 가을전에 참여한 것이었다.
심사규칙에 따라 마르셀은 이제 심사를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출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평론가들이 침묵함으로써 소외되었는데, 이 시기를 그는 “수영강습”이란 말로 표현했다.
그는 열심히 그림에 몰두하여 후기인상주의 풍경화로부터 야수주의 화가들의 누드로 나아갔고, 세잔의 초상화와 사람들을 모델로 습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의 그림에서 회화에 대한 재능이 발견되었지만 훌륭한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으며, 1911년 이전까지는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것을 그리지 못했다.
미학적으로 언급할 만한 작품은 1911년 이후 4년 동안에 그린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