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의 충격
리는 호프만이 마티스와 피카소 사이를 시계 불알처럼 왔다갔다했다고 말했는데 리 또한 호프만의 영향으로 인해 두 대가들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피카소의 <게르니카 Guernica>(19)를 보고부터는 그녀의 오락가락도 멈추었다. 리는 그 그림이 자신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고 회고하였다. <게르니카>는 피가소가 조국 스페인 동란의 비극을 사회적으로 기소했던 그림으로 독재자 프랑코가 독일 폭격기를 불러들여 조그만 동네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한 데 대한 항거를 표현한 것으로 뉴욕 예술가들에게 추상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그림으로 받아들여졌다. 독일 군대가 파리를 점령했을 때 피카소는 독일군의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독일군이 <게르니카>를 가리키며 “네가 했냐?”고 묻자 피카소는 “아니, 네가 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뉴욕이 세계적인 수준의 도시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예술가들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많은 예술품 중개상들과 평론가들도 뉴욕으로 왔는데 그들이 미국화단에 끼친 영향도 괄목할 만했다. 피에르 마티스, 발렌타인 두덴싱, 줄리앙 레비, 레오 카스텔리, 기타 중개상들이 뉴욕으로 와서 화랑을 열었는데 그들은 입체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대가들의 작품들을 주로 소개했다. 또한 시인 앙드레 브르통의 날카로운 평론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폴록은 57번가에 있는 발렌타인(Valentine) 화랑에 가서 처음으로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를 본 후 자극을 받아 추상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동안 그는 벤턴만 추종하느라고 입체파 혁명의 위대함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게르니카>를 보고서야 왜 사람들이 피카소를 “20세기 미술의 아버지”라고 칭송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입체파 화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피카소의 그림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린 것들 가운데 황소 그림이 있다. 황소는 조국 스페인에서 투우를 관람하기를 즐겼던 피카소가 선호했던, 그의 특허와도 같은 주제였다. 자전거 손잡이를 위로 세우고 자전거 안장을 거꾸로 하향시켜 제작한 <황소 대가리 Bull's Head>(18)는 유명하다.
유럽에서 정상에 오른 예술가는 단연 피카소였다. “그는 모든 것을 그렸고, 회화의 모든 주제들을 남김없이 사용했으며 … 피카소는 항거하기 어려운 예술가였다”고 술회하는 사람이 있다. 한 평론가는 피카소 이후 미술이 남아 있을까를 의심하기도 했다. 라이오넬 아벨(Lionel Abel)은 “피카소 이후 어떻게 사람들이 혁명적일 수 있겠느냐? 피카소 이후 네가 어떻게 다른 것들이라도 창조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고키는 몇 점만이라도 피카소와 같은 수준으로 그릴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뉴욕의 예술가들에게는 피카소의 화법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들이 뚫고 나가야 할 회화의 통로가 캄캄하고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춤의 명수 몬드리안과의 부기우기
리와 이고 사이에서 불화가 심화되더니 1939년 어느 날 이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리는 놀라 경찰서에 이고가 실종됐다고 신고하고 이미 접수된 실종자들의 명단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녀는 그것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끝장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일 주일이 지난 후 이고는 그의 가족들이 있는 플로리다 주에서 리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그렸던 리의 초상화를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리가 그를 다시 만난 것은 일 년 후였다. 리는 이 일로 마음의 상처가 컸고, 몇 년 후에 그녀가 그린 그림에서도 그러한 점이 발견된다.
그녀는 이 시기에 추상미술가 연합(AAA: American Abstract Artists)에 소속되어 있었다. 1937년에 결성된 이 그룹은 젊은 작가들에게 우상과도 같았던 몬드리안이 주도하고 있었다. AAA의 작가들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의 유토피아 미학을 지지하면서 모든 사물들의 묘사가 배제된 완전추상을 가장 이상적인 회화라고 인식했다.
어느 날 리는 이스트 58번가에 있는 카페 소사이어티 업타운(Society Uptown)에서 몬드리안을 위해 마련된 파티에 갔다. 몬드리안은 당시 건강이 나빴지만 그날은 조금 나은 듯이 보였다. 춤을 추기 위해서 그녀는 몬드리안과 함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기우기가 막 연주되자 몬드리안은 리의 귀에 대고 “자!”라고 말했다. 몬드리안은 유럽에서 여가가 생기면 유명한 댄스 교사에게 춤을 배우곤 했으므로 그의 춤은 수준급이었다. 리는 사람들이 이 68세의 대가와 자신이 춤추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흥분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리는 몬드리안을 만난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재즈를 사랑하고 그도 재즈를 사랑했으므로 그를 여러 번 만날 수 있었다. 난 그와 함께 춤을 춘 적도 있는데 우리는 미치도록 춤을 추었다”고 술회했는데 이는 아무래도 그녀의 감상적인 회상인 것 같다. 리는 몬드리안을 안내하여 AAA 연례전에 간 적도 있었는데 그러한 만남조차도 그녀는 소중하게 기억했다. 리가 입체주의 화법으로 그린 정물화를 보고 몬드리안이 “힘찬 리듬이 내재한다”고 칭찬하면서 계속 그런 방법으로 그리라고 격려하자 리는 흥분했다.
이고가 달아난 후 리는 더욱 회화에 몰두하면서 AAA그룹 작가들과 어울리며 완전추상화를 그렸다. AAA그룹 작가들은 대부분 호프만의 제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 외에도 초현실주의에 공통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리는 이 시기에 모자이크 콜라주를 창조했는데 이는 그녀가 호프만에게 수학할 때 호프만이 그녀의 그림을 찢어버린 것에서 부분적으로 받았던 영감에 의한 것이었다.
호프만은 직접 목탄을 들고 제자들의 그림들 위에 덧그리면서 수정해주곤 했다. 리는 어느 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렇고 친구들도 잘 그렸다고 칭찬했던 그림을 책상 위에 놓고 호프만이 그 그림에 관하여 무어라고 말할까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호프만은 리의 그림을 네 조각으로 찢은 후 이젤 위에 다시 가지런히 배열하고는 “이것이 긴장감이다”라고 말하고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50년이 지난 후의 인터뷰에서도 리는 그때의 일에 화를 내긴 했지만 이때의 경험이 그녀로 하여금 모자이크 콜라주를 창조하게 하였다. 그러나 호프만은 리의 모자이크 콜라주(23)를 보고 아주 만족해 하였으며, 강의 때 리의 그림을 칭찬하면서 “이러한 방법은 아주 훌륭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것이 여자가 한 작품인 줄 몰랐을 거다. 여자들은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남자들보다 더욱 재능을 발휘하지만 그후에는 남자들이 재능을 나타낸다”고도 말했다.
이 시기에 리는 드 쿠닝이 단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러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 쿠닝은 실제 모델 크기로 그린 스케치를 리에게 주기도 했으며 이따금 리의 화실도 방문했지만 리가 은근히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에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녀의 변죽만 울리면서 그저 친절했을 뿐이었다. 드 쿠닝은 미술사의 모든 대가들의 화법들을 탐험하면서 그것들을 부분적으로 자신의 그림에 응용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입체주의 예술가 페르낭 레제의 기계주의 드로잉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리는 로젠버그의 아파트에서 열렸던 파티에 갔다가 곧 미국평론의 별로 떠오를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를 만났다. 리는 그린버그를 존경하는 호프만의 강의에 초대하기도 했지만 1940년부터 리는 더 이상 호프만의 학교에서 수학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