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다
어느 날 폴록은 만취한 채 유니온 스퀘어 36번지에 있는 고키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고키는 이미 소개했던 대로 193㎝의 거구였는데 그날 밤 그는 폴록을 지성인답게 맞아주었다. 두 사람이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 같더니 느닷없이 폴록이 그의 그림들을 가리켜 “똥같이 하잘것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고키는 그만 혈압이 올라 층계 아래로 집어던지기 전에 썩 꺼지라고 호통을 치며 폴록에게 덤벼들 듯이 했고 폴록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 재난을 면했다.
또 폴록은 고향 친구 톨레지언의 전시회에 가서는 그의 그림들을 마구 찢어버리는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또 1940년 6월 어느 날 밤에는 벤담 거리 25번지에 살고 있던 톨레지언의 아파트 앞으로 가서는 돌맹이들을 잔뜩 주워놓고 그것들을 하나씩 던지면서 그의 창들은 물론 아파트의 다른 창문들을 하나씩 깨뜨려나가기 시작했다. 놀란 톨레지언이 침대에서 내려와 창밖을 보니 폴록이 돌을 피라미드처럼 쌓아놓고 그 옆에 서 있었다. 그는 건물 전체 각층 창문들을 모조리 깨부수고 있었다. 건물에 세들었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어나오면서 “빌어먹을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고, 톨레지언은 내려가서 그를 두들겨팼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날의 사건은 폴록의 규칙적인 미치광이 짓이 발작한 것으로서 그의 정신분열이 심해진 증세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술에서 깨면 폴록은 화실에서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이 시기에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여자친구는 “잭슨이 목에 줄을 매고 자살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 드로잉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나는 잭슨이 자살에 관한 암시로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자살에 관하여 대화한다는 것이 너무 복잡한 화제라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예술가들은 곧잘 좌절할 때가 있으며,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친구가 없으면 저승사자에게 붙들릴 수도 있다. 폴록은 그래엄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는 폴록에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는 “비탄, 슬픔, 외로움, 좌절은 천재들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고 하면서 폴록을 위로해주었다.
무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드로잉
폴록의 정신세계를 탐험하려는 정신분석학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조셉 헨더슨이었다. 그는 칼 구스타프 융의 제자로 9년 동안의 유럽 유학을 마치고 1938년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1939년 1월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퇴원한 지 4개월 후 폴록이 다시 폭음을 하자 형 샌드는 그가 정신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폴록을 데리고 이스트 73번가에 있는 헨더슨 박사에게 갔다. 당시 서른다섯 살의 헨더슨은 폴록을 만나고나서 독특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이 화가를 모델로 연구하면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으리라 계산했다.
헨더슨은 융의 영향을 주로 받은 사람이었는데 예술가이기도 했던 융은 미술을 상징학(symbology)과 연계시켜 그의 미학이론을 전개했다. 융은 예술가들은 그들이 상상하는 정신세계로부터 이미지들을 창조해낸다고 인식했다. 그는 또 사람들은 직관(intution), 느낌(feeling), 감각(sensation), 사고(thingking)의 세 가지 개성 또는 기능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균형을 이룬 후 전체를 이룬다고 했다. 먼저 융의 이러한 이론을 폴록에게 적용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헨더슨의 견해에 따르면 폴록은 네 가지 개성인 직관, 느낌, 감각, 사고의 기능이 통합적 균형을 이루지 못한 상태이며, 따라서 폴록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경향들이 집합적 무의식 안에서 어떤 경향으로 나타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의 개성들의 재통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헨더슨은 폴록의 창작과정을 거꾸로 연역하여 그의 그림들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무의식 세계에서 분출하는 이미지들에 그가 어떻게 의식적으로 가치등급을 정하는가를 살펴보려 했다.
헨더슨이 학문적 업적을 기대했던 만큼 폴록이 그에게 전적으로 협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헨더슨이 원하는 대로 드로잉들을 그에게 보여주었으며, 헨더슨은 그 드로잉들에 나타난 상징주의를 분석하면서 그의 무의식 세계에 대한 탐험을 시작했다. 그는 폴록의 단순한 관념들과 기본적인 정의들로부터 시작해서 좀더 구체적이고 복잡한 내용들로 분석해 들어갔으며, 폴록의 한 드로잉에 나타난 두 가지 이미지를 그의 상반성의 충돌로 이해하기도 했다. 헨더슨은 폴록이 그리는 구부러진 선과 둥근 형태들이 여성적인 것들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헨더슨은 융의 이론을 폴록에게 적용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느껴야 했다. 폴록의 실제 세계를 그의 무의식 세계와 비교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폴록이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헨더슨은 먼저 폴록의 주벽을 치료했어야 했다. 여러분도 폭음한 사람들과 대화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을 상대로 그의 의식과 무의식 세계를 분류하려 한다면 그건 아주 황당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헨더슨은 폴록이 매주 가져오는 드로잉들에서 그의 자아의식적 요소들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본능적 경향들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런 것들은 ‘집단 무의식’을 의미했다. 헨더슨은 “잭슨의 그림들을 통해 그의 개인적인 문제들을 분석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지만 내가 왜 그때 그의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나의 의무는 그가 가지고 있는 개성적 기능들을 한껏 북돋아주는 것이었지 고통 당하고 있는 그의 이기심을 구해주거나 재정립하는 일은 아니었다”고 부연하였다.
헨더슨은 폴록이 어렸을 때 보았던 것들이 그의 무의식 세계에 남아 있음을 발견했고 그것들 가운데 인디언들에 관한 이미지들이 있음을 보았다. 폴록은 서부에서 성장하면서 인디언의 문화를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본 적이 있었고, 그들의 모래회화에 감동하여 나중에 인디언들처럼 춤을 추면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에서 들소가 여인을 공격하고 있는 장면이 아주 에로틱하게 묘사된 것을 보았으며, 들소가 사람으로 변하거나 사람이 들소로 변하는 경우도 보았다. 말은 뱀으로 둔갑했고, 뱀은 몸을 둘둘 감은 모양으로 여자의 자궁 안에 쭈그리고 있었다. 폴록은 벤턴과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멕시코 벽화예술가 오로츠코의 그림들에서 본 인상 깊었던 이미지들을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통하여 재현하면서 그것들이 그만의 고유한 이미지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폴록은 멕시코 고대의 상징들인 뱀, 도끼, 불구자 등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조지 맥닐이라는 그의 친구는 “폴록은 벤턴이나 멕시코 벽화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아주 나쁜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하였다. 그것은 아주 신비한 방법이기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폴록이 헨더슨의 치료를 받은 것은 18개월 동안이었다. 폴록은 그에게 82점의 드로잉을 주었으며, 과슈로 그린 그림 한 점은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주었다. 이 그림들은 나중에 ‘정신분석적 드로잉들’이라고 불리면서 학자들 사이에 대단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70년 헨더슨은 이 드로잉들을 샌프란시스코 화랑에 팔았고, 그해 10월과 11월에 65점이 휘트니 미술관에서 ‘잭슨 폴록 : 정신분석적 드로잉들’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헨더슨은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떠났고, 나중에 그곳에 융 연구기관을 설립했는데 이는 이후 미국 내에서 융의 이론을 연구하는 가장 큰 기관이 되었다. 이때 헨더슨과 함께 수학한 적이 있었던 융의 또 다른 제자 바이올렛 스타웁 드 라즐로가 런던에서 막 미국에 도착했다. 헨더슨은 더 이상 폴록을 치료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를 대신해서 드 라즐로가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며 폴록의 정신에 관해 연구하도록 그녀를 추천했다. 그녀는 폴록을 만난 후 아주 말없는 예술가라는 소감을 밝혔다. 그녀는 헨더슨과는 달리 융의 이론을 최소한만 적용하려고 한 학자였다. “우리는 함께 앉아 잭슨의 드로잉을 보면서 내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그의 그림에서 끄집어냈다. … 나는 잭슨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잭슨은 술에 완전히 취해 있거나 또는 반쯤 취해 있기가 보통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폴록의 치료비는 그래엄이 지불하였고, 폴록은 그녀를 만나러 갈 때 그래엄과 동행하기도 했다.
폴록은 드 라즐로에게 자신이 징집되지 않도록 진단서를 써줄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군대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그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폴록은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단서를 작성하여 1941년 5월 6일에 발송하면서 폴록이 현재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3년 전부터 뉴욕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므로 군복무를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의사로서의 견해를 피력했다. 정부는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를 징집대상에서 제외시켜주었다. 당시 폴록과 샌드는 함께 WPA로부터 해고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녀가 WPA에 두 사람을 추천했으므로 WPA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다시 하게 되어 1941년부터는 해마다 3개월 동안 벅스카운티에서 여름 태양빛을 즐기는 여유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제법 음주를 자제하는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