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이론적 후원자 그린버그를 만나다

몇 달 후 리의 권유로 두 사람은 세관에 근무하던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를 만나러 갔다. 1941년 그린버그는 세관에 근무하면서 이따금 글을 쓰고 있었는데 아직 그가 등단할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가 그린버그에게 “이 사람은 잭슨 폴록이에요. 그는 위대한 화가가 될 거예요”라고 소개하자 “사람을 측정할 방법은 없는 거지”라고 대꾸했다. 그린버그는 나중에 미국에서 가장 재능있는 평론가로 알려졌으며 그래엄과 마찬가지로 폴록이 위대한 예술가로 부상할 수 있도록 도왔던 고마운 사람이다. 폴록은 사람들에게 말을 함부로 했지만 그래엄과 그린버그만은 형처럼 따르면서 공손히 대했다. 폴록이 그린버그의 말을 그저 경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너무 유식해서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는 리투니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 브루클린에 정착했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가정에서 엄격하게 자신들의 언어를 구사했으므로 그는 이디시(Yiddish: 유태어)와 영어를 함께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네 살 때부터 드로잉을 시작했으나 시라큐스(Syracuse) 대학에서는 문학을 전공하고 문학 평론가를 지망하기도 했다. 졸업 후 그는 가족이 경영하는 도매사업에 2년 반 동안 종사했는데 그 무렵이 가장 무료하던 시기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독학으로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를 익혔다고 한다.

1936년 이혼한 후 그는 순진하고 젊은 여자들과 데이트하기를 즐겼다. 필리스 플라이스(Phyllis Fleiss)라는 여인은 “그린버그는 늘 나를 소름끼치게 했다”고 말하면서 어느 날 데이트 중에 “그가 파크 애비뉴에서 반쯤 죽어 있는 쥐를 보더니 그 꼬리를 잡고서는 내 얼굴 앞에서 흔들어댔다. 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는데 그는 여전히 쥐를 손에 든 채 나를 쫓아왔다”고 말했다. 플라이스는 “그는 어떠한 것들도 대중적인 것들은 좋아하지 않았으며, 대중들이 놀랄 만한 것, 또 대중들이 반감을 가지는 것들을 좋아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네이션 Nation』을 통해 미술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주로 썼으며 『파티잔 리뷰 Partisan Review』를 통해서는 미학적인 글들을 발표했다. 그는 노력하는 평론가, 자신만만한 평론가였다. 물론 더러 형편없는 글을 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가 주장하려는 것은 우선 귀를 기울일 만한 것이었다. 그의 풍부한 지식과 예리한 관찰력은 미술에 관한 이해를 배가시켜주었고, 사람들은 그가 가장 재능있는 평론가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폴록의 그림에서 심상치 않은 재능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폴록의 화실을 자주 방문하면서 어떻게 작업이 진전되는지를 관찰하려고 했다. 그는 폴록의 화실에 와서 그림 앞에 서서는 “아주 좋아!”라고 감탄하곤 했다. 그가 입을 열면 폴록은 듣기만 했다. 프리츠 불트먼이 어느 날 폴록과 함께 신비주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폴록은 그에게 “나와 이야기한 것들을 크렘(그린버그)에게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더라고 불트먼이 전했다. 폴록은 그린버그에게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알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폴록에게 그린버그는 보통 유식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말을 순순히 듣는 편이 나았으며 때로는 이해조차 못하기도 했다. 그린버그의 아이디어들은 폴록에게 늘 신비스러웠으며 그림 표면, 입체주의적 공간, 그리고 사물의 모든 것들에 관한 그린버그의 말을 폴록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폴록과 그린버그 두 사람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날 그린버그와 폴록의 만남은 장차 두 사람 모두에게 유익했다. 리는 어느 날 폴록에게 그녀의 화실로 와서 그림들에 관해 의견을 말해달라고 부탁했고, 폴록은 그녀의 화실로 가서 그림들을 둘러본 후 그것들에 서명해도 되겠다고 말해주었다. 리는 일부러 반대하면서 몬드리안이 그림에 서명하지 않았던 이유는 서명이 그림의 기하학적 균형을 망칠까봐 그랬던 거라고 말했다. 폴록은 말없이 일어서더니 붓에 검정 물감을 묻힌 후 그림들 하나하나에 L. Krasner라고 서명했다.

맥밀런 화랑에서의 전람회는 1942년 1월 20일에 ‘미국 사람과 프랑스 사람들의 회화 American and French Painting’라는 명제 아래 그래엄을 비롯한 화가, 미술품 중개상, 평론가들 공동주최로 열렸다. 리는 자신에게 이런 영광이 주어진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폴록 또한 그의 그림 <탄생 Birth>이 대가들의 그림들과 나란히 걸리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그 전람회에서는 앞서 언급한 예술가들 외에도 앙리 마티스, 조르주 루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피에르 보나르, 키리코의 그림들도 소개되었다. 전람회가 시작된 지 일 주일 후에 폴록은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았다. 전람회가 끝난 후 폴록은 그의 그림을 리에게 주었다.

리는 폴록을 그녀의 친구 매터 부부에게 소개했는데 잘생긴 머세즈 매터(Mercedes Matter)는 리와 함께 호프만에게 수학한 적이 있었고, 그녀의 남편 허버트 매터(Herbert Matter)는 스위스 사람으로서 그래픽 디자이너이면서 사진작가였다. 유럽에서 실존주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레제와 우정을 나누었던 매터의 집은 예술가들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레제가 30년대 후반에 미국에 와서 허버트의 집 3층에 거주했다. 레제는 튜브처럼 사람들을 그리면서 기계주의를 찬양했고 평생 입체주의 회화를 추구했는데 그가 미국미술에 준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는 뉴욕에 체재하면서 대표작 가운데 한 점인 <위대한 줄리 La Grande Julie>(31)를 그렸다. 줄리는 반(反) 모나리자였는데 이는 레제가 뒤샹과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가 주는 감성적인 요소를 혐오하였기 때문이었다.

리는 폴록을 호프만에게 정식으로 소개했으며 호프만은 폴록의 화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허버트 매터는 평론가 제임스 존슨 스위니를 폴록에게 소개하면서 그의 그림들을 유심히 보라고 권했는데 스위니는 나중에 폴록의 화실에서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기도 했다. 이처럼 폴록은 리를 통해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42년 가을 리는 그리니치 빌리지 8번가에 있는 폴록의 아파트로 가서 그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같이 지내던 폴록의 형 샌드는 미래의 아내와 함께 코네티컷 주로 이사갔기 때문에 방이 넉넉하였다. 동거시기에 폴록이 자신의 천성은 무의식이라고 선언하자 이미 초현실주의 회화를 통해 무의식 세계를 탐험한 적이 있었던 리는 그의 천성을 받아들였다. 리는 폴록이 그린, 최면술에 걸린 듯한 모습의 동물 그림들을 좋아했다. 이 시기에 리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그녀가 과격하게 달라지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폴록의 영향이 뚜렷하였다. 리는 호프만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받아들였으며 그의 가르침대로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대작을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1942년부터 폴록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래엄은 그를 “거친 다이아몬드 광석”이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전쟁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고 많은 유럽 사람들은 나치가 세계를 통일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미국이 세계대전에 직접 참여하면서 1942년 군수품 제조공장들은 일 주일 내내 매일 24시간 가동되었다. 12만 5천 대의 비행기, 7만 5천 대의 탱크, 그리고 천만 톤의 군수품들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운송되었다. 세계대전으로 이처럼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도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평온한 도시로서 예술의 꽃이 만개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예술가들이 전쟁으로 인한 물리적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뉴욕의 예술가들은 한가롭게도 정신적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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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르 다비트


네덜란드 태생 플랑드르 화가 제라르 다비트Gerard David(1460년경~1523)는 고우다 근교 오우데바테르Oudewater에서 태어났고
하를렘에서 게르트겐으로부터 회화를 수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브루게에 정착한 건 1484년이었다.
한스 멤링이 1494년에 타계하자 그가 브루게의 대표적인 화가로 인정을 받았다.
위대한 화가들의 시대였던 15세기가 종료되자 브루게의 경제적 중요성도 점차 사라졌다.
그러나 1500~25년경 브루게는 여전히 미술 중심지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약간 작품성이 떨어지기는 했으나 많은 회화 작품이 스페인에 수출되었다.
다비트의 구도는 다른 화가들에게 모사의 대상이 되었으며 <아기 그리스도에게 음식을 먹이는 동정녀 The Virgin Feeding the Christ Child with Porridge>의 경우 모사품이 네 점이나 된다.
이런 인기는 그가 그리스도 생애의 각 장면을 가정적이면서 친근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다비트의 초기작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1498년에 제작한 두쪽 패널화 <캄비세스의 심판 The Judgement of Cambyses>이다.
이 작품은 잔혹한 소재를 천진난만하게 묘사한 것으로 화면 가득 배치된 인물들의 모습은 정밀하게 묘사된 배경의 건축물과 더불어 조화를 이룬다.
르네상스풍의 세부 묘사가 두드러진 1507년에 제작한 세쪽 제단화 <그리스도의 세례 The Baptism of Christ>는 세 폭의 패널로 된 전체 구도를 통일감 있게 처리해 다비트의 역랑을 시위한다.
이 작품은 나무와 바위가 흩어진 풍경을 중경에 배치하고 세례장면에 입회한 기증자들과 그들의 수호성인을 전경에 배치함으로써 완벽한 조화를 꾀했다.
그는 동시대 화가인 안트베르펜의 퀸텐 메치즈와 마찬가지로 반 에이크 그리고 반 데르 베이덴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구했다.
그렇지만 다비트는 메치즈에 비하면 독창적이지 못했으며,
구도에서도 그에 비해 자유롭지 못했고,
인물들은 거칠고 경직되었으며,
색채는 말년으로 갈수록 온화함을 잃어 갔다.
그러나 풍경 묘사에는 뛰어나 구도는 전통 형식을 따랐더라도 빛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창작을 부여했다.
그의 양식은 추종자 아드리앤 이센브란트Adriaen Ysenbrandt와 벤손에 의해 16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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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입체주의 영향


마르셀은 1911년 새해를 루엥에 있는 아버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맞았다.
입체주의의 영향이 다분히 나타난 <소나타>는 그때 그린 것으로, 여동생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가족이 모이면 형들은 으레 체스를 두었고, 동생들은 음악을 연주했다.
<체스 게임>과 마찬가지로 그는 각 인물들을 상호 무관하게 존재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이본느는 피아노를 치고, 막들렌느는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수잔느는 동생들 앞에 앉아 있고, 귀가 먼 어머니는 연주를 들을 수는 없지만 딸들 중앙에 장승처럼 우뚝 서 있다.
반 세기가 지난 1964년 마르셀은 이 그림에 관해 “각진 형태 안에 나타난 창백하고 부드러운 색조들은 일시적인 분위기를 나타낸 것이었으며, 나의 회화의 진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입체주의 효과에 경이를 느낀 것은 자크의 그림을 보고난 이후였다.
형이 입체주의 방법으로 투명한 색을 사용해서 서정적인 분위기를 나타낸 것을 보고 우아하게 나타나는 효과에 감동했으며, 좌우대칭의 구성에 호감이 생겼다.

마르셀은 술회했다.
“입체주의 이론은 지성적인 점에서 나를 매료시켰다.
… 나는 입체주의 이론을 단지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나의 독특한 회화를 찾거나 창조하려고 시도했다.”

입체주의는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 예술가와 파리에 있는 외국인 예술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서양미술은 입체주의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입체주의의 창시자 브라크와 피카소는 1908년과 1914년 사이 이틀에 한 번꼴로 만나 함께 작업했는데 브라크는 두 사람의 관계를 “두 몸을 한데 묶고 정상에 오르는 등반가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두 사람이 계속해서 등반하지는 못했다.
1914년 전쟁이 일어나자 징집통지서를 받고 아비뇽 기차역으로 허겁지겁 달려가는 브라크를 피카소는 창문을 통해 바라볼 뿐이었다.
피카소는 스페인 국적을 가졌으므로 징집에서 제외되었고, 마티스는 징집 적령기를 넘긴 나이였으므로 파리에 남을 수 있었다.

징집되기 전까지만 해도 브라크와 피카소가 어찌나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던지 그림에 제작연대를 적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 시기에는 그것을 적는 것조차 게을리 했으므로 누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가늠할 수 없다.
같은 라틴족이지만 프랑스인과 스페인인의 기질은 달랐고, 이런 이유로 해서 두 사람의 그림은 상이하게 나타났다.
브라크의 그림은 좀 더 조직적인 구성으로 명상적인 분위기로 나타난 데 비해, 피카소의 그림은 조형적이지만 상상에 의한 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관람자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했으며 영웅적으로 화려하게 보였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브라크의 고전적인 정숙한 그림에 비해 피카소의 것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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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사랑에 빠진 리

1941년 11월 초 추운 아침 그래엄은 리의 화실을 방문했다. 그때(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전쟁준비를 은밀히 끝낸 미국은 세계대전에 직접 참여할 명분을 찾고 있을 때였다. 그래엄은 리를 보자마자 “당신은 화가로군요!”라고 말했다. 리가 “어떻게 알았어요?”하고 묻자 그는 리의 다리를 가리켰는데 그녀의 다리에는 물감이 묻어 있었다. 그후 리는 그래엄으로부터 엽서 한 장을 받았다.

나는 프랑스와 미국 작가들을 위한 전람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내가 준비하고 있는 예술가들은 브라크, 피카소, 앙드레 드랭, 데이비드 스미스… 등입니다. 나는 당신이 근래에 그린 그림을 원합니다.

리는 유럽의 대가들과 나란히 참여하는 미국 작가들의 명단에 자신이 끼어 있음을 놀라워했다. 리는 그래엄이 적은 명단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단 한 사람 낯선 이름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잭슨 폴록이었다. “나는 뉴욕에 있는 모든 추상화가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이름은 낯설었다”고 리가 말했다. 그녀는 “도대체 잭슨 폴록이 누구야?”라고 자문하면서 드 쿠닝이 명단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리는 폴록이 그녀의 아파트 근처에 살고 있음을 알고는 그를 직접 찾아가서 그의 화실 문을 두드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폴록은 화실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리는 운이 좋게도 단번에 그의 영접을 받을 수 있었다. 리는 함께 전람회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자신을 그에게 소개했다. 폴록의 화실에서 리는 1936년 예술가 연합 파티에서 두 사람이 만났던 것에 관해 말하고 하지만 모두 잊고 있었다고 폴록에게 말했다. 폴록도 그때의 일을 잊고 있었노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날 폴록의 화실에서 처음으로 그의 그림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그림들에서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그녀는 그날 마루바닥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고 말하면서 그저 “오, 여기에 이런 것들이 있었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했다. 폴록이 그 그림들을 가리키면서 “난 아직 모르겠어요. 저것들을 완성한 것인지”라고 말하자 리는 작품에 더 이상 손대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리는 그날 사랑에 빠지고 말았는데 그녀는 폴록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이 아니라 그의 그림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리가 1941년 11월 5층에 있는 폴록을 방문하기 위해 층계를 올랐던 것은 그녀가 이미 폴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폴록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막 서른 살이 된 리는 예쁘지도 않았고 과격한 성격이었으므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강한 사내를 찾고 있었다. 또 그녀는 나이도 들었기 때문에 혼기를 놓칠 것만 같아 내심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오히려 리가 많은 사내들 중에서 폴록을 선택한 것이었으며, 그녀는 폴록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는데 그래엄이 주최하는 맥밀런(McMillen)에서의 전람회가 그녀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며칠 후 폴록이 리의 화실을 방문했다. 리가 커피를 마시겠느냐고 묻자 폴록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리가 복도로 걸어가 코트를 입고서는 “나가요!”하고 말하자 폴록은 어리둥절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커피샵으로 가야 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내가 여기서 커피를 끓일 줄 알았나요?” 리의 말에 폴록은 대단히 놀랐다. 사실 그녀는 부엌에 가스 레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었고 부엌 찬장은 온전히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후 리는 폴록의 화실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폴록은 리에게 진지하지 않았다. 리는 “만일 사내가 내게 정말로 관심을 가진다면 난 그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잘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도덕관념이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폴록은 영화배우 마론 브란도처럼 멋졌다. 리는 염소처럼 생겼으나 몸매가 날씬했고 가슴이 탐스러웠으므로 사내들이 성적 충동을 느낄 만했다. 리는 일단 말을 하게 되면 아주 수다스러웠고 극적이었다. 폴록은 리가 여자로서 괜찮은 화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폴록과 리는 자주 만났다. 폴록은 리에게 자신이 융의 정신분석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융의 제자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그러하다는 시사였다. 리는 “나도 융의 글을 읽었는데 우리는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있군요”라고 대답했다. 폴록이 피카소의 <게르니카>(19)를 보고 감동했다고 말하자 리는 반가워하면서 자신도 그 그림을 보고 화랑을 나와서 한 블럭을 다섯 번이나 걷다가 다시 그 그림을 보았다며 그 그림이 자신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경험을 털어놓았다. 리는 폴록을 만나기 전에 입체주의 화가라 불릴 정도로 피카소의 화법으로 그리고 있었다.

폴록은 말을 조리있게 할 줄 몰랐지만 리는 입을 열면 따발총처럼 수다스러웠다. 또 폴록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았던 반면 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리는 곧잘 정의를 주장하면서 인생은 불공정한 것이라고 흥분하기도 했다. 그녀는 “나는 잭슨에게 푹 빠져버렸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를 사랑했다. 대단히 사랑했다. 그를 알고부터 그의 말은 내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나의 그림들은 하찮았고 오직 그가 중요했다”고 신앙고백하듯 말했다. 호프만이 “여자는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 회화에 재능을 나타내지만 그후에는 그렇지 못하다”고 한 말을 새삼 실감나게 할 정도였다. 실제로 리는 폴록을 후원하느라고 자신의 작업을 소홀히 했음을 여러분도 곧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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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다

어느 날 폴록은 만취한 채 유니온 스퀘어 36번지에 있는 고키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고키는 이미 소개했던 대로 193㎝의 거구였는데 그날 밤 그는 폴록을 지성인답게 맞아주었다. 두 사람이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 같더니 느닷없이 폴록이 그의 그림들을 가리켜 “똥같이 하잘것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고키는 그만 혈압이 올라 층계 아래로 집어던지기 전에 썩 꺼지라고 호통을 치며 폴록에게 덤벼들 듯이 했고 폴록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 재난을 면했다.

또 폴록은 고향 친구 톨레지언의 전시회에 가서는 그의 그림들을 마구 찢어버리는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또 1940년 6월 어느 날 밤에는 벤담 거리 25번지에 살고 있던 톨레지언의 아파트 앞으로 가서는 돌맹이들을 잔뜩 주워놓고 그것들을 하나씩 던지면서 그의 창들은 물론 아파트의 다른 창문들을 하나씩 깨뜨려나가기 시작했다. 놀란 톨레지언이 침대에서 내려와 창밖을 보니 폴록이 돌을 피라미드처럼 쌓아놓고 그 옆에 서 있었다. 그는 건물 전체 각층 창문들을 모조리 깨부수고 있었다. 건물에 세들었던 사람들이 밖으로 뛰어나오면서 “빌어먹을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고, 톨레지언은 내려가서 그를 두들겨팼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날의 사건은 폴록의 규칙적인 미치광이 짓이 발작한 것으로서 그의 정신분열이 심해진 증세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술에서 깨면 폴록은 화실에서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이 시기에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여자친구는 “잭슨이 목에 줄을 매고 자살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 드로잉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나는 잭슨이 자살에 관한 암시로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자살에 관하여 대화한다는 것이 너무 복잡한 화제라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예술가들은 곧잘 좌절할 때가 있으며,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친구가 없으면 저승사자에게 붙들릴 수도 있다. 폴록은 그래엄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는 폴록에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는 “비탄, 슬픔, 외로움, 좌절은 천재들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고 하면서 폴록을 위로해주었다.

무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드로잉
폴록의 정신세계를 탐험하려는 정신분석학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조셉 헨더슨이었다. 그는 칼 구스타프 융의 제자로 9년 동안의 유럽 유학을 마치고 1938년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1939년 1월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퇴원한 지 4개월 후 폴록이 다시 폭음을 하자 형 샌드는 그가 정신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폴록을 데리고 이스트 73번가에 있는 헨더슨 박사에게 갔다. 당시 서른다섯 살의 헨더슨은 폴록을 만나고나서 독특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이 화가를 모델로 연구하면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으리라 계산했다.

헨더슨은 융의 영향을 주로 받은 사람이었는데 예술가이기도 했던 융은 미술을 상징학(symbology)과 연계시켜 그의 미학이론을 전개했다. 융은 예술가들은 그들이 상상하는 정신세계로부터 이미지들을 창조해낸다고 인식했다. 그는 또 사람들은 직관(intution), 느낌(feeling), 감각(sensation), 사고(thingking)의 세 가지 개성 또는 기능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균형을 이룬 후 전체를 이룬다고 했다. 먼저 융의 이러한 이론을 폴록에게 적용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헨더슨의 견해에 따르면 폴록은 네 가지 개성인 직관, 느낌, 감각, 사고의 기능이 통합적 균형을 이루지 못한 상태이며, 따라서 폴록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경향들이 집합적 무의식 안에서 어떤 경향으로 나타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의 개성들의 재통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헨더슨은 폴록의 창작과정을 거꾸로 연역하여 그의 그림들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무의식 세계에서 분출하는 이미지들에 그가 어떻게 의식적으로 가치등급을 정하는가를 살펴보려 했다.

헨더슨이 학문적 업적을 기대했던 만큼 폴록이 그에게 전적으로 협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헨더슨이 원하는 대로 드로잉들을 그에게 보여주었으며, 헨더슨은 그 드로잉들에 나타난 상징주의를 분석하면서 그의 무의식 세계에 대한 탐험을 시작했다. 그는 폴록의 단순한 관념들과 기본적인 정의들로부터 시작해서 좀더 구체적이고 복잡한 내용들로 분석해 들어갔으며, 폴록의 한 드로잉에 나타난 두 가지 이미지를 그의 상반성의 충돌로 이해하기도 했다. 헨더슨은 폴록이 그리는 구부러진 선과 둥근 형태들이 여성적인 것들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헨더슨은 융의 이론을 폴록에게 적용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느껴야 했다. 폴록의 실제 세계를 그의 무의식 세계와 비교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폴록이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헨더슨은 먼저 폴록의 주벽을 치료했어야 했다. 여러분도 폭음한 사람들과 대화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을 상대로 그의 의식과 무의식 세계를 분류하려 한다면 그건 아주 황당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헨더슨은 폴록이 매주 가져오는 드로잉들에서 그의 자아의식적 요소들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본능적 경향들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런 것들은 ‘집단 무의식’을 의미했다. 헨더슨은 “잭슨의 그림들을 통해 그의 개인적인 문제들을 분석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지만 내가 왜 그때 그의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나의 의무는 그가 가지고 있는 개성적 기능들을 한껏 북돋아주는 것이었지 고통 당하고 있는 그의 이기심을 구해주거나 재정립하는 일은 아니었다”고 부연하였다.

헨더슨은 폴록이 어렸을 때 보았던 것들이 그의 무의식 세계에 남아 있음을 발견했고 그것들 가운데 인디언들에 관한 이미지들이 있음을 보았다. 폴록은 서부에서 성장하면서 인디언의 문화를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본 적이 있었고, 그들의 모래회화에 감동하여 나중에 인디언들처럼 춤을 추면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헨더슨은 폴록의 드로잉에서 들소가 여인을 공격하고 있는 장면이 아주 에로틱하게 묘사된 것을 보았으며, 들소가 사람으로 변하거나 사람이 들소로 변하는 경우도 보았다. 말은 뱀으로 둔갑했고, 뱀은 몸을 둘둘 감은 모양으로 여자의 자궁 안에 쭈그리고 있었다. 폴록은 벤턴과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멕시코 벽화예술가 오로츠코의 그림들에서 본 인상 깊었던 이미지들을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통하여 재현하면서 그것들이 그만의 고유한 이미지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폴록은 멕시코 고대의 상징들인 뱀, 도끼, 불구자 등등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조지 맥닐이라는 그의 친구는 “폴록은 벤턴이나 멕시코 벽화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아주 나쁜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창조하였다. 그것은 아주 신비한 방법이기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폴록이 헨더슨의 치료를 받은 것은 18개월 동안이었다. 폴록은 그에게 82점의 드로잉을 주었으며, 과슈로 그린 그림 한 점은 치료에 대한 보답으로 주었다. 이 그림들은 나중에 ‘정신분석적 드로잉들’이라고 불리면서 학자들 사이에 대단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70년 헨더슨은 이 드로잉들을 샌프란시스코 화랑에 팔았고, 그해 10월과 11월에 65점이 휘트니 미술관에서 ‘잭슨 폴록 : 정신분석적 드로잉들’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

헨더슨은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떠났고, 나중에 그곳에 융 연구기관을 설립했는데 이는 이후 미국 내에서 융의 이론을 연구하는 가장 큰 기관이 되었다. 이때 헨더슨과 함께 수학한 적이 있었던 융의 또 다른 제자 바이올렛 스타웁 드 라즐로가 런던에서 막 미국에 도착했다. 헨더슨은 더 이상 폴록을 치료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를 대신해서 드 라즐로가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며 폴록의 정신에 관해 연구하도록 그녀를 추천했다. 그녀는 폴록을 만난 후 아주 말없는 예술가라는 소감을 밝혔다. 그녀는 헨더슨과는 달리 융의 이론을 최소한만 적용하려고 한 학자였다. “우리는 함께 앉아 잭슨의 드로잉을 보면서 내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그의 그림에서 끄집어냈다. … 나는 잭슨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잭슨은 술에 완전히 취해 있거나 또는 반쯤 취해 있기가 보통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폴록의 치료비는 그래엄이 지불하였고, 폴록은 그녀를 만나러 갈 때 그래엄과 동행하기도 했다.

폴록은 드 라즐로에게 자신이 징집되지 않도록 진단서를 써줄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군대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그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폴록은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단서를 작성하여 1941년 5월 6일에 발송하면서 폴록이 현재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3년 전부터 뉴욕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므로 군복무를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의사로서의 견해를 피력했다. 정부는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를 징집대상에서 제외시켜주었다. 당시 폴록과 샌드는 함께 WPA로부터 해고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녀가 WPA에 두 사람을 추천했으므로 WPA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다시 하게 되어 1941년부터는 해마다 3개월 동안 벅스카운티에서 여름 태양빛을 즐기는 여유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제법 음주를 자제하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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