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이론적 후원자 그린버그를 만나다

몇 달 후 리의 권유로 두 사람은 세관에 근무하던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를 만나러 갔다. 1941년 그린버그는 세관에 근무하면서 이따금 글을 쓰고 있었는데 아직 그가 등단할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가 그린버그에게 “이 사람은 잭슨 폴록이에요. 그는 위대한 화가가 될 거예요”라고 소개하자 “사람을 측정할 방법은 없는 거지”라고 대꾸했다. 그린버그는 나중에 미국에서 가장 재능있는 평론가로 알려졌으며 그래엄과 마찬가지로 폴록이 위대한 예술가로 부상할 수 있도록 도왔던 고마운 사람이다. 폴록은 사람들에게 말을 함부로 했지만 그래엄과 그린버그만은 형처럼 따르면서 공손히 대했다. 폴록이 그린버그의 말을 그저 경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너무 유식해서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는 리투니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 브루클린에 정착했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가정에서 엄격하게 자신들의 언어를 구사했으므로 그는 이디시(Yiddish: 유태어)와 영어를 함께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네 살 때부터 드로잉을 시작했으나 시라큐스(Syracuse) 대학에서는 문학을 전공하고 문학 평론가를 지망하기도 했다. 졸업 후 그는 가족이 경영하는 도매사업에 2년 반 동안 종사했는데 그 무렵이 가장 무료하던 시기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독학으로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를 익혔다고 한다.

1936년 이혼한 후 그는 순진하고 젊은 여자들과 데이트하기를 즐겼다. 필리스 플라이스(Phyllis Fleiss)라는 여인은 “그린버그는 늘 나를 소름끼치게 했다”고 말하면서 어느 날 데이트 중에 “그가 파크 애비뉴에서 반쯤 죽어 있는 쥐를 보더니 그 꼬리를 잡고서는 내 얼굴 앞에서 흔들어댔다. 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는데 그는 여전히 쥐를 손에 든 채 나를 쫓아왔다”고 말했다. 플라이스는 “그는 어떠한 것들도 대중적인 것들은 좋아하지 않았으며, 대중들이 놀랄 만한 것, 또 대중들이 반감을 가지는 것들을 좋아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네이션 Nation』을 통해 미술작품을 소개하는 글을 주로 썼으며 『파티잔 리뷰 Partisan Review』를 통해서는 미학적인 글들을 발표했다. 그는 노력하는 평론가, 자신만만한 평론가였다. 물론 더러 형편없는 글을 쓸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가 주장하려는 것은 우선 귀를 기울일 만한 것이었다. 그의 풍부한 지식과 예리한 관찰력은 미술에 관한 이해를 배가시켜주었고, 사람들은 그가 가장 재능있는 평론가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폴록의 그림에서 심상치 않은 재능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폴록의 화실을 자주 방문하면서 어떻게 작업이 진전되는지를 관찰하려고 했다. 그는 폴록의 화실에 와서 그림 앞에 서서는 “아주 좋아!”라고 감탄하곤 했다. 그가 입을 열면 폴록은 듣기만 했다. 프리츠 불트먼이 어느 날 폴록과 함께 신비주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폴록은 그에게 “나와 이야기한 것들을 크렘(그린버그)에게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더라고 불트먼이 전했다. 폴록은 그린버그에게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알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폴록에게 그린버그는 보통 유식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말을 순순히 듣는 편이 나았으며 때로는 이해조차 못하기도 했다. 그린버그의 아이디어들은 폴록에게 늘 신비스러웠으며 그림 표면, 입체주의적 공간, 그리고 사물의 모든 것들에 관한 그린버그의 말을 폴록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폴록과 그린버그 두 사람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날 그린버그와 폴록의 만남은 장차 두 사람 모두에게 유익했다. 리는 어느 날 폴록에게 그녀의 화실로 와서 그림들에 관해 의견을 말해달라고 부탁했고, 폴록은 그녀의 화실로 가서 그림들을 둘러본 후 그것들에 서명해도 되겠다고 말해주었다. 리는 일부러 반대하면서 몬드리안이 그림에 서명하지 않았던 이유는 서명이 그림의 기하학적 균형을 망칠까봐 그랬던 거라고 말했다. 폴록은 말없이 일어서더니 붓에 검정 물감을 묻힌 후 그림들 하나하나에 L. Krasner라고 서명했다.

맥밀런 화랑에서의 전람회는 1942년 1월 20일에 ‘미국 사람과 프랑스 사람들의 회화 American and French Painting’라는 명제 아래 그래엄을 비롯한 화가, 미술품 중개상, 평론가들 공동주최로 열렸다. 리는 자신에게 이런 영광이 주어진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폴록 또한 그의 그림 <탄생 Birth>이 대가들의 그림들과 나란히 걸리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그 전람회에서는 앞서 언급한 예술가들 외에도 앙리 마티스, 조르주 루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피에르 보나르, 키리코의 그림들도 소개되었다. 전람회가 시작된 지 일 주일 후에 폴록은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았다. 전람회가 끝난 후 폴록은 그의 그림을 리에게 주었다.

리는 폴록을 그녀의 친구 매터 부부에게 소개했는데 잘생긴 머세즈 매터(Mercedes Matter)는 리와 함께 호프만에게 수학한 적이 있었고, 그녀의 남편 허버트 매터(Herbert Matter)는 스위스 사람으로서 그래픽 디자이너이면서 사진작가였다. 유럽에서 실존주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레제와 우정을 나누었던 매터의 집은 예술가들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레제가 30년대 후반에 미국에 와서 허버트의 집 3층에 거주했다. 레제는 튜브처럼 사람들을 그리면서 기계주의를 찬양했고 평생 입체주의 회화를 추구했는데 그가 미국미술에 준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는 뉴욕에 체재하면서 대표작 가운데 한 점인 <위대한 줄리 La Grande Julie>(31)를 그렸다. 줄리는 반(反) 모나리자였는데 이는 레제가 뒤샹과 마찬가지로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가 주는 감성적인 요소를 혐오하였기 때문이었다.

리는 폴록을 호프만에게 정식으로 소개했으며 호프만은 폴록의 화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허버트 매터는 평론가 제임스 존슨 스위니를 폴록에게 소개하면서 그의 그림들을 유심히 보라고 권했는데 스위니는 나중에 폴록의 화실에서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기도 했다. 이처럼 폴록은 리를 통해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42년 가을 리는 그리니치 빌리지 8번가에 있는 폴록의 아파트로 가서 그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같이 지내던 폴록의 형 샌드는 미래의 아내와 함께 코네티컷 주로 이사갔기 때문에 방이 넉넉하였다. 동거시기에 폴록이 자신의 천성은 무의식이라고 선언하자 이미 초현실주의 회화를 통해 무의식 세계를 탐험한 적이 있었던 리는 그의 천성을 받아들였다. 리는 폴록이 그린, 최면술에 걸린 듯한 모습의 동물 그림들을 좋아했다. 이 시기에 리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그녀가 과격하게 달라지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폴록의 영향이 뚜렷하였다. 리는 호프만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받아들였으며 그의 가르침대로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대작을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1942년부터 폴록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래엄은 그를 “거친 다이아몬드 광석”이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전쟁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고 많은 유럽 사람들은 나치가 세계를 통일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미국이 세계대전에 직접 참여하면서 1942년 군수품 제조공장들은 일 주일 내내 매일 24시간 가동되었다. 12만 5천 대의 비행기, 7만 5천 대의 탱크, 그리고 천만 톤의 군수품들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운송되었다. 세계대전으로 이처럼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도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평온한 도시로서 예술의 꽃이 만개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예술가들이 전쟁으로 인한 물리적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뉴욕의 예술가들은 한가롭게도 정신적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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