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사랑에 빠진 리
1941년 11월 초 추운 아침 그래엄은 리의 화실을 방문했다. 그때(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전쟁준비를 은밀히 끝낸 미국은 세계대전에 직접 참여할 명분을 찾고 있을 때였다. 그래엄은 리를 보자마자 “당신은 화가로군요!”라고 말했다. 리가 “어떻게 알았어요?”하고 묻자 그는 리의 다리를 가리켰는데 그녀의 다리에는 물감이 묻어 있었다. 그후 리는 그래엄으로부터 엽서 한 장을 받았다.
나는 프랑스와 미국 작가들을 위한 전람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내가 준비하고 있는 예술가들은 브라크, 피카소, 앙드레 드랭, 데이비드 스미스… 등입니다. 나는 당신이 근래에 그린 그림을 원합니다.
리는 유럽의 대가들과 나란히 참여하는 미국 작가들의 명단에 자신이 끼어 있음을 놀라워했다. 리는 그래엄이 적은 명단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단 한 사람 낯선 이름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잭슨 폴록이었다. “나는 뉴욕에 있는 모든 추상화가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이름은 낯설었다”고 리가 말했다. 그녀는 “도대체 잭슨 폴록이 누구야?”라고 자문하면서 드 쿠닝이 명단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리는 폴록이 그녀의 아파트 근처에 살고 있음을 알고는 그를 직접 찾아가서 그의 화실 문을 두드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폴록은 화실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리는 운이 좋게도 단번에 그의 영접을 받을 수 있었다. 리는 함께 전람회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자신을 그에게 소개했다. 폴록의 화실에서 리는 1936년 예술가 연합 파티에서 두 사람이 만났던 것에 관해 말하고 하지만 모두 잊고 있었다고 폴록에게 말했다. 폴록도 그때의 일을 잊고 있었노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날 폴록의 화실에서 처음으로 그의 그림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 그림들에서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그녀는 그날 마루바닥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고 말하면서 그저 “오, 여기에 이런 것들이 있었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했다. 폴록이 그 그림들을 가리키면서 “난 아직 모르겠어요. 저것들을 완성한 것인지”라고 말하자 리는 작품에 더 이상 손대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리는 그날 사랑에 빠지고 말았는데 그녀는 폴록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이 아니라 그의 그림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리가 1941년 11월 5층에 있는 폴록을 방문하기 위해 층계를 올랐던 것은 그녀가 이미 폴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폴록을 사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막 서른 살이 된 리는 예쁘지도 않았고 과격한 성격이었으므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강한 사내를 찾고 있었다. 또 그녀는 나이도 들었기 때문에 혼기를 놓칠 것만 같아 내심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오히려 리가 많은 사내들 중에서 폴록을 선택한 것이었으며, 그녀는 폴록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는데 그래엄이 주최하는 맥밀런(McMillen)에서의 전람회가 그녀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며칠 후 폴록이 리의 화실을 방문했다. 리가 커피를 마시겠느냐고 묻자 폴록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리가 복도로 걸어가 코트를 입고서는 “나가요!”하고 말하자 폴록은 어리둥절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커피샵으로 가야 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내가 여기서 커피를 끓일 줄 알았나요?” 리의 말에 폴록은 대단히 놀랐다. 사실 그녀는 부엌에 가스 레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었고 부엌 찬장은 온전히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후 리는 폴록의 화실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폴록은 리에게 진지하지 않았다. 리는 “만일 사내가 내게 정말로 관심을 가진다면 난 그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잘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도덕관념이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폴록은 영화배우 마론 브란도처럼 멋졌다. 리는 염소처럼 생겼으나 몸매가 날씬했고 가슴이 탐스러웠으므로 사내들이 성적 충동을 느낄 만했다. 리는 일단 말을 하게 되면 아주 수다스러웠고 극적이었다. 폴록은 리가 여자로서 괜찮은 화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폴록과 리는 자주 만났다. 폴록은 리에게 자신이 융의 정신분석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융의 제자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그러하다는 시사였다. 리는 “나도 융의 글을 읽었는데 우리는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있군요”라고 대답했다. 폴록이 피카소의 <게르니카>(19)를 보고 감동했다고 말하자 리는 반가워하면서 자신도 그 그림을 보고 화랑을 나와서 한 블럭을 다섯 번이나 걷다가 다시 그 그림을 보았다며 그 그림이 자신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경험을 털어놓았다. 리는 폴록을 만나기 전에 입체주의 화가라 불릴 정도로 피카소의 화법으로 그리고 있었다.
폴록은 말을 조리있게 할 줄 몰랐지만 리는 입을 열면 따발총처럼 수다스러웠다. 또 폴록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았던 반면 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리는 곧잘 정의를 주장하면서 인생은 불공정한 것이라고 흥분하기도 했다. 그녀는 “나는 잭슨에게 푹 빠져버렸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를 사랑했다. 대단히 사랑했다. 그를 알고부터 그의 말은 내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으며, 나의 그림들은 하찮았고 오직 그가 중요했다”고 신앙고백하듯 말했다. 호프만이 “여자는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 회화에 재능을 나타내지만 그후에는 그렇지 못하다”고 한 말을 새삼 실감나게 할 정도였다. 실제로 리는 폴록을 후원하느라고 자신의 작업을 소홀히 했음을 여러분도 곧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