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1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방송 작가 이윤수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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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 선생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를 읽다>>

한 작가의 이름을 떠올리면 마치 한쌍처럼 기억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마네와 모네가 그렇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또 고흐와 고갱이 그렇습니다.

때때로 인물화를 주로 그린 마네와
풍경화를 주로 그린 모네의 그림 속에선
누구의 그림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데요.
깊은 우정이 전해준 영향탓일 겁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지만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발휘해 과학으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 했구요.
반면에 제대로된 교육을 받았던 미켈란젤로는 항상 물질적
풍요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고, 과거의 지혜를 경외했죠.
이처럼 한시대속엔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크게 다른 거장들이 나란히 존재하는가 봅니다.

그런 점은 고흐와 고갱도 마찬가질 텐데요.
고갱은 고흐보다 다섯살이나 많습니다.
그리고 권총 자살한 고흐보다 13년을 더 살았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아를의 노란집에서
함께 작업한 적이 있습니다.

빚지고 생활고에 힘겨워하는 고갱을
고흐가 불러들이지요.
하지만 둘은 김광우 선생의 표현대로
물과 불을 닮은 성격차이가 심각했습니다.
그림에 관한 논쟁이 붙기만 하면, 배터리가 다 소모된 듯
그렇게 진을 빼듯 싸웠다죠.
한동안 대화를 나누는 동안은 서로 얼굴도 바라보지 않았다죠.

냉소적이고 거만하고 보스기질을 지닌 고갱,
그런 그가 어떻게 원시 문명에 끌려하고,
문명을 거부하는 삶을 동경했는지,
전 그게 내내 의문스럽습니다...

고갱이 온다는 기별을 했을때부터 오던 날까지
기쁨에 들떠 있던 고흐, 그는 참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참 정많은 인간이었습니다.
고갱이 떠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참 안타깝습니다.
등돌리고 떠나는 고갱앞에서 면도칼을 들고
끝내 귓불을 자른 빈센트...
그의 정신병보다 오히려 고갱이 냉냉하게 떠나지 않았다면,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13살 소녀와 동거에 들어갑니다.
그녀를 이브라 부르고 자신을 아담이라고 했다죠.
그런데 울부짖는 그녀와 아이를 둔채
그는 또다시 파리로 돌아오지요.
그리곤 다시 타히티를 찾았을 땐 그녀를 대신해
또다른 13살 소녀와 동거에 들어갑니다.
그의 엄청난 여성편력도 문제지만,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타히티의 가난한 여성들을
식민지를 경험한 대한민국의 여성으로서
새삼 생각하는 계기도 됐습니다.

고갱은 자신을 그토록 따르던 고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애도만 표합니다.
고흐와 함께 그토록 진심으로 그림을 팔아주고 용돈을 대주던
테오가 죽었을때도 마찬가집니다.
젊은 작가 베르나르가 빈센트 유작전을 연다고 할때
말렸던 이가 고갱입니다.
고갱의 질투심탓일 거라고 김광우 선생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고흐가 죽은 뒤 세상에 영웅이 되고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베껴그리면서 자신의 세계를 가꿔간 것 처럼
마티스, 피카소, 후앙미로를 비롯한 세계의 거장들이
그의 그림을 바탕삼아 작업한데 비해...
고흐 타계후 한동안 고갱은 욕을 먹었다고 하죠.
그 비정함때문에...

방대한 분량의 고갱 고흐의 작품들을 보는 일만으로도
흐믓한 책입니다.
평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고흐 작품조차
내가 아는 게 고작 이정도 수준이었구나를 생각하게 한 책이지요.
그럴 정도로 습작 드로잉에서부터 고갱의 다양한 조각작품에
이르기까지 전 작품 천여점이 다 담겨있습니다.
고갱박물관 고흐 박물관을 꼭 가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생전의 아뜰리에를 찾아 자취를 느끼는 일은 필요하지만,
정말로 작품때문에 네덜란드나 타히티 박물관을
가고 싶지 않을 만큼 화집 몫을 톡톡히 하고 있는 책입니다.

특히 자화상은 양쪽 페이지에 일렬로 소개되고 있어서
두사람의 작품 변화와 색감까지 정리해 읽긴 그만입니다.

김광우 선생 책을 읽을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작품과 연관지어서 비슷한 류의 작품을 대비시키거나,
그런 유형의 다른 작가 작품을 접하면서
작가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꼼꼼함은
이 책의 미덕입니다.

또한 그림마다, 고갱이나 고흐가
사람들에게 보낸 그림과 관련한 편지 사연을 싣고 있어서,
작가의 의도를 생생한 편지글로 대하는 것 또한
이 책의 미덕이지요.

또하나의 미덕은 해외의 무수한 평론가들이
쓴 미술 비평서가 아니라 이땅의 평론가가, 미학적 시각에서
고흐와 고갱에 대한 오랜 연구끝에 편안한 문체로
깊이있으면서도 친근하게 펴낸 방대한 책이라는 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고흐와 고갱을 더 많이 이해한 점도 있지만,
더 많이 생각하게 된 인물은 역시 테옵니다.
고흐의 동생, 자신의 자녀이름조차 빈센트로 지은
형의 작품을 알아보는 그 눈으로,
형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뛰어다니고,
형에게 파리의 작가와의 만남을 알선해주고,
간질을 앓는 형을 위해 요양원을 챙겨주고 없는 형편에
꾸준히 용돈을 챙겨줬던 테오...
둘은 전생에 어떤 사이였을까요...
과거의 돈독한 형제애를 지금,
이생에선 어떤 모습으로 인연지으며 살고 있을까요...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두고두고 밑줄그을 대목이 쌓여있는
그림+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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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안내자 피카비아


뒤샹이 피카비아를 만난 것은 1911년 10월 가을전에서였다.
뒤샹은 목욕하는 사람들이 있는 커다란 그림 <기계>를 출품했다.
훗날 비극적 인생을 산 피에르 두몽이 그때 그곳에 있어 그가 피카비아를 뒤샹에게 소개했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우정은 평생 지속되었다.

피카비아를 만난 후 전통주의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던 뒤샹에게 변화가 생겼다.
뒤샹은 그에 대해 “놀랄 만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회의주의자였다. 항상 ‘그래, 하지만 …’이라고 말하거나 ‘아냐, 그러나 …’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더라도 피카비아는 이의를 제기할 것이라면서 뒤샹은 그것이 그의 게임이라고 했고, 피카비아는 자신이 회의주의자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
피카비아는 1911~12년에 매일 밤 아편을 피웠는데 당시 아편은 아주 귀했다.
뒤샹은 말했다.
“그와 함께 아편을 피운 적은 없다.
그는 술을 지독히 마셨다.
그런 것들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사실이었으며 … 물론 그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내게는 모든 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큰 공부가 되었다.”

뒤샹보다 8살 많은 피카비아는 1879년 1월 22일에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1953년 세상을 떠났다.
외할아버지 다반느는 인상주의 예술가들에게 작업실을 빌려준 상업사진작가 펠릭스 나다르의 친구로, 다반느 자신도 유명한 사진작가였다.
아버지가 부자 쿠바인이었고 어머니도 부자 프랑스인이었으므로 피카비아는 매우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그가 일곱 살 때 불행히도 어머니를 잃었다.
그가 미술에 관심이 생긴 것은 외삼촌 모리스 다반느를 통해서였는데, 다반느는 열정적인 미술품 수집가로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과 희귀본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피카비아는 외삼촌 집에 소장된 미술품들을 보면서 예술가가 될 것을 결심했으며 자신만만해 했다.

성적으로 조숙한 피카비아는 18살 때 학교를 자퇴하고 파리에 익히 알려진 언론인의 애인을 데리고 스위스로 달아났다.
그는 바람둥이였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잘생긴 그가 운전석 창 밖에 왼팔을 올려놓고 상냥한 말을 건네면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의 노예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플래이보이로 허송세월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페르낭 코르몽의 화실에서 5~6년 동안 회화에 몰두하였다.
코르몽은 훌륭한 교사로 빈센트 반 고흐, 에밀 베르나르, 툴루즈 로트렉을 가르쳤으며, 브라크가 그에게서 수학했고, 자크도 한동안 그의 화실을 출입했다.
피카비아는 음악을 전공하던 가브리엘 부페를 만나 1909년에 결혼하여 첫 번째 아내를 맞이했다.

뒤샹은 인상주의로 시작해서 8년 동안 후기인상주의, 야수주의, 그리고 상징주의를 거쳐 입체주의에 도달했으며, 1911년 말 피카비아를 만날 무렵에는 입체주의를 자신의 독특한 언어로 바꿀 수 있었는데 이는 <체스 두는 사람들>에서 나타났다.
당시 뒤샹은 입체주의 방법을 응용해서 체스 게임을 주제로 여섯 점의 드로잉과 한 점의 유화를 스케치했다.
이런 습작을 거쳐 12월에 <체스 두는 사람들>을 완성했다.
그는 브라크와 피카소의 전례를 따라 부서뜨린 사람들의 모습들을 서로 겹치게 구성했으며, 입체주의의 장점을 살려서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 모습들을 병렬했으므로 관람자가 예술가의 관점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는 밤에 가스램프 불빛 아래서 그림을 그리다가 다양한 색조를 발견했다고 한다.
색조를 조절하면서 브라크와 피카소가 성취한 미묘한 색조에 관한 충분한 이해가 생겼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그림에서 체스 두는 사람들은 체스를 두는 것이 아니라 체스에 관해 생각하는 모습들이다.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인생의 흥을 돋구기 위한 변화를 필요로 했으며, 자신감은 변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제 그는 브라크와 피카소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망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자신감을 그에게 고취시킨 사람이 바로 피카비아였다. 뒤샹이 회상한 대로 피카비아는 그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했으며, 뒤샹은 그를 따라 새 세계를 탐험하면서 인생의 흥을 느낄 수 있었다.
피카비아는 슬하에 자식이 둘이나 있었지만 자녀를 둔 아비답지 않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아무 때나 그리고 어디에서든지 했다.
그는 고급 승용차를 몰고 와 뒤샹을 데리고 몽마르트에 있는 단골 카페로 가서 코가 비틀어지도록 술을 마시곤 했으며, 정신을 차릴 때는 보통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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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그룹에 속한 뒤샹


마르셀이 시도한 입체주의는 브라크와 피카소의 것들에 비해 과격하지 않았고, 기교면에서 두 사람의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자크는 피카소와 우정을 나누었지만 마르셀은 피카소를 만난 적이 없었다.
몽마르트에 있는 브라크의 화실로 그를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입체주의에 관한 지식은 오히려 메쳉제를 통해 구한 것이었다.
메쳉제는 바토 라보아 근처에 살면서 피카소와 자주 만났으며, 처음으로 입체주의에 관해 책을 썼다.
마르셀은 “피카소가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을 때 메쳉제가 입체주의에 관해 설명했다”면서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는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수년 후에 알게 되었다”고 훗날 말했다.

마르셀에게 입체주의에 관한 구체적인 이해가 생긴 것은 1911년 가을이었다.
가을전을 계기로 자크와 레이몽, 마르셀 뒤샹 삼형제는 메쳉제, 글레이즈, 레제, 그리고 들로네와 자주 만났다.
그들은 일요일 오후에 퓌토의 자크 집에서 주로 모였고, 월요일 저녁에는 교외에 있는 글레이즈의 화실에서 만났으며, 화요일 밤에는 몽마르트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만나는 등 모임의 횟수를 늘여나갔다.
예술가들이 한 사람씩 가세하면서 그룹의 규모는 자연히 커졌다.
그룹에서 마르셀의 나이가 가장 어렸는데 그는 말을 하지 않고 주로 듣는 편이었다.
잦은 모임을 통해 마르셀이 발견한 것은 미술은 마음으로 행위하는 것이란 점과 사차원에 대한 관심이었다.
퓌토의 예술가들은 사차원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당시 지성인들의 사차원에 관한 관심이 아주 컸다.

마르셀은 브라크와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궁극적으로 개념미술이란 사실을 발견했으며, 피카소가 말한 대로 사물은 “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물이 있음을 아는 것”이란 점을 깨달았다.
그는 20세기에 들어와 미술이 지성적으로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룹의 예술가들이 만나면 미학적인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거듭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사차원이란 말은 20세기의 첫 10년 동안에 자주 사용되었으며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작가들이 이 말을 즐겨 사용했다.
우주에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는 사차원의 세계가 반드시 있다고 지성인들은 믿었으며, 신문이나 잡지, 소설, 만화 등에서 사차원이란 말은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1909년에 「사차원에 관한 가장 쉬운 해설the Best Popular Explanation on the Fourth Dimension」이란 제목으로 전 세계 사람을 대상으로 논술대회를 개최했다.

사차원에 관한 관심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원리를 발견하고 부터였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400년 이상 도전을 불허했던 뉴턴의 이론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일반상대성원리는 우주환경에 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해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사용하는 공간과 시간 말고도 우주에는 시공간space-time이란 것이 있다면서 시간이란 두 사건의 관계라고 정의했다.
뒤이어 X레이가 발견되었고 무선전화와 비행기가 발명되었으며, 각종 문명의 이기들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사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르셀도 이에 관해 관심을 많이 두었다.

퓌토 그룹의 예술가들은 사차원의 세계를 수학적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했는데, 그룹에 속한 아마추어 수학자 모리스 프린스가 수학으로 사차원을 산술해서 예술가들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모리스는 수년 동안 피카소의 화실을 들락거리면서 그의 드로잉을 팔기도 했는데 그는 피카소의 모델이자 애인이었던 여자와 결혼했다.
몇 달 후 그녀는 모리스를 버리고 앙드레 드랭과 사랑에 빠졌다.
드랭의 아내는 미인으로 소문났지만 드랭의 바람은 잘 날이 없었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메쳉제는 모리스를 데리고 퓌토로 왔고, 그곳 예술가들은 모리스가 수학으로 설명하는 사차원의 세계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사차원을 삼차원보다 훨씬 수준 높은 실제의 세계이며, 가까운 장래에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폴리네르도 1912년 봄에 사차원에 관한 글을 쓰면서 예술의 새 자유는 사차원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가에게만 허용된다고 했는데 사차원에 관한 납득할 만한 설명도 없이 그렇게 주장한 것이었다.
마르셀은 “사차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도 당시 사람들은 그것에 관해 대화했다”고 회상했다.
사차원에 관한 그의 가정은 이러했다. 빛이 삼차원의 사물을 비추어 이차원의 그늘 이미지를 만드는 것처럼 사차원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삼차원의 세계를 만든 것은 아닐까?
이런 사차원에 관한 그의 끊임없는 사고가 결국 1923년에 <큰 유리>를 완성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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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금세기 예술’의 전속작가가 되다

여러분이 타고 있는 미술관광 버스는 여전히 1942년의 뉴욕을 달리고 있다. 모처럼 도약의 기회를 맞이한 폴록이 그에게 찾아온 호기를 어떻게 성공으로 이끌었는지를 관람하는 것도 유익할 듯하다. 그때 폴록은 경제적으로 궁핍했으므로 밤에는 상점에 가서 일했고 리는 직업훈련을 받고 있었다.

6월 중순 풋젤이 폴록의 화실로 찾아왔다. 그는 페기가 곧 그의 화실을 방문할 것임을 알려주면서 페기의 성격에 관하여, 그가 페기를 어떻게 접대하는 것이 효과적인가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해주고 갔다. 예정했던 대로 6월 26일 토요일 오후 페기가 8번가 46번지 5층에 있는 폴록의 아파트에 당도했다. 그녀는 문을 노크했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페기는 다시 노크를 하고 또 했지만 여전히 문이 열리지 않아 몹시 화가 나고 말았다. 그날은 마침 폴록의 친구 피터 부사의 결혼식 날이었다. 폴록은 부사의 베스트 맨(Best Man)으로서 식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폴록과 리는 아침 일찍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부사의 아파트로 갔다. 결혼식은 그의 아파트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한 폴록은 부사가 준비해둔 술을 한잔한잔 마시기 시작했는데 술을 자제할 줄 모르는 그는 그만 과음하고 말았으며 거실 소파에 얼굴을 축 늘어뜨리고 잠들어버렸다. 리는 할 수 없이 베스트 맨은 고사하고 결혼식에 방해가 될까봐 그를 끌어다 침대에 뉘였는데 그는 식이 끝날 때까지 콜콜 자고 있었다. 리가 시계를 보니 페기가 도착할 시각이 임박해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폴록을 깨웠지만 그는 정신을 못 차렸다. 그녀가 폴록의 귀에 대고 오늘은 네 일생에 가장 중요한 날로서 개인전이 열리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페기에 의해서 판가름나는 날이라고도 말해주었지만 그는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리는 그를 끌다시피 데리고가서 커피를 마시게 했고 그러느라고 두 사람이 조금 늦게 아파트에 도착했는데 이미 페기는 잔뜩 화난 얼굴로 아파트를 걸어나오고 있었다.

페기는 폴록을 보자 더욱 성이 나서 “폴록, 어디에 있었나요? 감히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라고 말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게다가 페기를 더욱 화나게 했던 것은 폴록의 화실에 들어서니 그림마다 L.K.라는 서명이 적혀 있었던 사실이었다. 페기는 “도대체 L.K.는 어떤 작자예요? 난 L.K.의 그림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화를 냈다. 그것들은 물론 리 크래스너의 그림들이었다. 페기는 폴록의 그림들을 둘러본 후에도 별말이 없었고, 그곳을 떠나면서 뒤샹더러 여기에 와 그림들을 보라고 말하겠다고만 했다. 페기가 가고난 후 리는 자기의 그림을 그년이 모독했다며 상기된 표정으로 페기를 가리켜 ‘시팔년’이라고 말하면서 다시는 그년이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라고 펄쩍 뛰었다. 7월 초에 뒤샹이 폴록의 아파트에 나타났고 그림들을 휙 둘러본 후 “나쁘지 않다”는 한마디만 하고 가버렸다. 뒤샹의 “나쁘지 않다”는 소감은 페기가 폴록의 전람회를 열기로 결심하는 데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그만큼 페기는 뒤샹의 안목을 신뢰하고 있었다.

페기는 폴록을 가리켜 “결코 와이오밍 주를 떠나지 못한 덫에 갇힌 동물”이라고 묘사하면서 “잭슨은 상대하기 어려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술을 너무 마셨고 사람을 기분 나쁘게 대했으며 악마 같은 데가 있었다”고 기술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의 그림들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렇지만 페기는 폴록이 그녀의 하룻밤 섹스 상대가 될 만하다고 생각했다. 페기의 생각은 더디더라도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페기는 스위니에게 자기가 폴록의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의 그림들이 “조금 거친 데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면서 그의 그림을 어디에 분류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스위니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폴록의 전람회를 열어주라고 말했다. 페기는 이번에는 풋젤의 의견을 물었는데 그는 당연히 폴록의 전람회를 열어주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 술 더 떠서 지금 폴록이 잡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으므로 그에게 매달 돈을 지불하여 그림 그리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에 페기는 폴록에게 11월에 있을 전람회를 위해 그림을 충분히 그려두라고 연락했다. 또한 그녀의 아파트에 벽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녀는 폴록에게 1년 동안 매달 150달러를 지불하고 전체 금액 1,800달러를 앞으로 팔릴 그의 그림값에서 제하기로 계약했다. 이러한 조건은 1년 동안 2,700달러의 그림을 이상 팔 수 있을 경우를 가정한 것으로서 만일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만한 금액에 해당하는 폴록의 그림을 그녀가 소유할 수 있고, 팔리는 그림들에 대한 수수료 1/3은 늘 그녀의 몫이라는 전제를 단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이만한 조건이란 예술가에게 유리했던 계약으로서 폴록은 계약서에 쾌히 서명했다. 그는 미래가 아주 밝게 열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형 찰스에게서, 그리고 학교에서 함께 수학한 친구 예술가들에게서 드로잉할 줄 모른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호프만은 그의 회화기교를 회의했으며,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그가 세련되지 않은 미국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폴록의 고용주 바로네스 힐라 레베이(Baroness Hilla Revay)는 감히 그의 드로잉을 두 조각으로 찢은 적도 있었다. 폴록은 1943년 7월 21일 바로네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보냈다. 이 편지는 그가 그녀에게 통보하는 사직서이기도 했다.

친애하는 바로네스 양, 내가 경제적으로 넉넉한 시기에 나의 그림을 두 조각 비평으로 만들어 내게 주었던 것에 감사를 표하오. ‘금세기 예술’은 나와 계약을 맺었고 오는 11월에 나의 개인전을 열 계획이므로 난 전람회 준비를 해야 하오. 잭슨 폴록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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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을 심사한 몬드리안

이제 유일하게 페기의 주위를 서성거리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는 마타뿐이었다. 마타는 그녀에게 ‘금세기 예술’ 화랑은 과격한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고, 그래서 그녀는 초현실주의 미학을 따르는 미국 미술가들을 찾고 있었다. 제임스 존슨 스위니는 그때 모마의 회화와 조각 부분 책임자였는데 개인적으로 페기를 도우려고 했다. 허버트 매터를 통해 이미 폴록의 그림들을 본 스위니는 1942년에 페기에게 폴록에게 관심을 가지라고 하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폴록은 흥미있는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밖에도 페기의 귀에 폴록의 이름을 자주 들먹였던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페기의 비서로 근무하고 있던 하워드 풋젤이다.

폴록이 풋젤을 만난 것은 1942년 여름이었는데, 풋젤도 폴록의 천재성을 발견했던 몇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풋젤은 폴록의 그림을 보자마자 천재라는 말을 사용했다. 화랑 ‘금세기 예술’은 35세 미만의 미국 화가들에게 작품을 제출하라고 광고하면서 그것들을 심사하여 40점이나 50점을 전시하겠다고 공고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심사위원들이 선정하기 전에 잘난 척하는 페기가 이미 그림들을 분류했다고 했다. 풋젤은 폴록의 화실로 가 그림을 제출하라고 권하면서 <속기술적 모습 Stenographic Figure>(44)을 포함시키라고 충고했다. 풋젤은 폴록을 도울 속셈으로 페기가 폴록의 그림을 보기 전에 그녀에게 술을 권했지만 페기는 사양했고 폴록의 그림을 보더니 ‘공포적’이라고 말하면서 싫어했다.

선임된 심사위원들 중 몬드리안이 먼저 화랑에 도착했다. 몬드리안이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그림들을 하나씩 심사하려고 하자 페기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서두르면서 그림들을 벽에 기대놓고는 한꺼번에 심사하라고 말했다. 몬드리안은 그림 앞을 지나다가 폴록의 그림 앞에 우뚝섰다. 그러자 페기가 그에게 다가가서 “대단한 그림이 아니지 않아요? 이건 그림도 아니지요”라고 말했다. 몬드리안은 아무 말 없이 몇 분 동안 서 있기만 하더니 “난 이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려고 합니다. 내가 미국에 온 후로 이렇게 흥미있는 그림을 본 적이 없어요. … 페기, 이 사람을 주의깊게 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에요? 당신 그림과 이 그림은 비교할 수도 없지 않아요?”라고 페기가 말하자 그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나 생각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지요”라고 대답했다. 몬드리안은 페기의 가까운 친구였고, 택시 안에서 갑자기 몬드리안이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때 그녀가 순순히 그의 키스를 받아준 적도 있었다. 몬드리안이 떠나고 다른 심사위원들이 화랑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그들을 한 사람씩 폴록의 그림 앞으로 데리고가서는 “자, 보세요. 여기에 얼마나 대단한 그림이 있는지!”라고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풋젤은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싱긋이 웃었다. 몇 년 후 페기는 “잭슨의 그림은 대단했고, 난 단번에 그것들을 좋아할 수 있었다”는 새하얀 거짓말로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전람회에서 마더웰의 콜라주는 85달러에 팔렸고 바지오츠의 그림 두 점은 각각 150달러에 팔렸지만 폴록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전람회에 참여한 예술가들 가운데에는 마크 로드코, 클리포드 스틸, 아돌프 고틀립, 그리고 데이비드 헤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로드코와 스틸은 대학교수였고, 두 사람은 폴록처럼 직관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수준 높은 지성으로 분석한 미학을 시각적으로 증명하려는 그림들을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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