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에 도전하는 윌렘 드 쿠닝
이 시기에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 )은 여러 가지 회화 기교들을 실험하면서 입체주의 회화방법도 응용하고 있었다.
그는 인물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는데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후기 이미지들을 고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코메티와는 다르게, 그러나 더욱 과격한 방법으로 이그러진 사람의 모습들을 그렸으며 특히 여인을 기분 내키는 대로 이그러뜨렸다.
폴록이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술이나 마시면서 마누라에게 근심을 주며 희비극을 연출하고 있을 때 그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자동주의 기교를 조심스럽게 분석하면서 그러한 방법에 손질을 가한 후 자신의 그림에 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피카소가 30년대 말에 환상적인 분위기로 그렸던 그림들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입체주의 화법을 개인적인 의도로 합성하면서 분석입체주의 방법으로 색들을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오로지 검정색과 흰색을 사용하여 사람의 모습을 그리면서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나타내려 했다.
물론 폴록도 검정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그러한 방법은 두 사람뿐 아니라 몇몇 예술가들에게 회화의 새로운 통로를 여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성행하고 있었다.
예술가들의 교통이 잦아지면서 어떤 때는 누가 먼저 언제 시작했는지를 알기가 이처럼 어려운 경우가 많아졌다.
평론가들이 드 쿠닝의 그림들을 반기기 시작했고, 특히 로젠버그가 그를 호평하면서부터 사람들은 그에게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엄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은 캔버스와 물감의 논쟁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고 말했는데, 드 쿠닝의 그림을 보면 그의 말이 실감이 난다.
폴록은 드 쿠닝을 자주 만났다. 동갑내기 고키로부터 자극을 받아 더 이상 아마추어 화가가 아니라 직업화가로 데뷔한 드 쿠닝은 한 친구에게 “나는 물감을 캔버스에 그대로 바르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는 이 시기에 재료들과의 싸움을 그림에 남기곤 했다.
그는 “유화가 발명된 것은 살(색조) 때문이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모든 회화 경향들 중에서 입체주의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은 불확실한 재현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시적인 구조 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작가는 직관을 나타낼 수가 있다.
과거의 미술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보태려 하는 것이다.
다른 회화에서 내가 받아들이는 요소들은 입체로부터 온 것이다.
입체주의는 흐름이었으나, 하나의 흐름으로 고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폴록보다 여덟 살 많은 드 쿠닝은 1904년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세 살 때 부모는 이혼했다.
1916년 그는 지방에 있는 상업미술가의 장식조수로 일하면서 밤에는 로테르담 아카데미에서 1924년까지 수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같은 나라 사람 피에 몬드리안의 영향을 주로 받고 있었으며 1926년 스물두 살 때 미국행 배에 승선했다.
“나는 그곳에 예술가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네덜란드에서 미국에 예술가들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미국에 가서 열심히 일한다면 편한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고, 예술을 위해서라면 자연히 유럽으로 …”라고 그는 나중에 말했다.
1929년 드 쿠닝은 친구 화가의 소개로 고키를 만났다.
드 쿠닝은 “나는 네덜란드 아카데미에서 완전히 훈련을 받고 이곳으로 왔지만 고키는 그러한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여섯 살 때 조지아에 있는 티플리스에서 여기로 온 후 미국 사람처럼 성장했다.
그리고 신비스러운 이유로 그는 회화와 예술을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내가 더 잘 알고 느끼고 이해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그가 더 잘 알고 느끼고 이해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드 쿠닝이 고키를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회화 기교들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드 쿠닝은 노력하는 예술가였다.
“나는 절충적인 화가로서 미술사 책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라고 평론가 로젠버그에게 고백한 적도 있었다.
드 쿠닝의 친구들은 그가 늘 그림들을 미완성으로 남긴다고 말했지만 그는 인터뷰에서 “스타일(회화방법)이라는 것은 속임수이다.
그것은 반 되스부르그와 몬드리안의 지독한 아이디어들로서 그들은 스타일을 강요했다.
힘의 반사적 저항력은 스타일을 유지하고 그림의 내용들을 진행하는 것이다 … 나는 몬드리안에게 반했다. 나는 항상 그의 주문에 반해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자꾸만 고치는 습관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실존주의 조각가 자코메티가 사물들을 그리고서 자꾸만 고치는 습관으로 인해 결국 실제보다 작게 그리게 되었다고 하던 말을 상기시킨다.
어쨌든 자꾸만 고치는 드 쿠닝의 습관은 자코메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고유한 회화방법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작품에 관해 확고하게 단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의 인생에서 확고한 형태들은 적다. 난 밤새 바꿀 수가 있다. …
나는 커다란 그림을 몇 주 동안 그리며 물감들은 항상 젖어 있게 하는데 그래야 내가 그것을 바꾸고 또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은 같은 것을 고치고 또 고친다는 말이다."
그는 무(無)에서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에서 출발점을 찾았다.
대가들의 그림들에서 그리고 상업용 포스터에서조차도 이미지를 빌려올 수 있었고 담배광고에 나오는 여인의 립스틱 바른 입술도 빌려왔는데, 그는 그런 이미지들을 고치고 또 고쳐서 그가 바라는 이미지가 될 때까지 바꾸었다.
그리고 모호함은 그가 일부러 남기는 중요한 회화적 요소이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어느 한 가지만을 지적하지만 모호함은 객관적으로 전체를 포용한다는 것을 대가들의 그림에서 발견했다.
친구들은 그가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겼다고 말했지만 지금 남아 있는 그의 그림들을 보면 그러한 판단은 그의 미학에 대한 무지의 소치임을 알게 된다.
그는 “나는 우연히 취사선택하는 화가이다”고 말하였다.
리는 온화한 성격의 드 쿠닝을 사랑했으므로 어느 날 파티에서 드 쿠닝의 무릎 위에 앉는 데까지 성공한 후 그와 거의 키스를 할 뻔했는데 드 쿠닝이 다리를 벌리는 바람에 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무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부끄러워진 그녀는 그때부터 그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기 시작했다.
드 쿠닝은 1938년에 일레인 프리드(Elain Fried 1918~1989)를 만났고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다.
일레인은 1918년에 뉴욕 시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했던 뉴요커였다.
열아홉 살 때인 1937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술학교(The Leonardo da Vinci Art School)에 입학했으며, 이듬해에는 아메리칸 미술학교(The American Artists School)에서 수학했는데 그해에 드 쿠닝을 만났다.
그때 그녀는 스무 살이었으며 드 쿠닝은 그녀보다 열네 살 위였다.
두 사람이 동거를 하다가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1943년이었다.
일레인은 리보다 훨씬 젊었고 가냘픈 몸매가 리보다는 덜 성적으로 보였지만 리와는 달리 섬세한 면이 있었다.
또한 지성적인 면에서는 비슷했지만 리에 비해 온순해서 사내를 간섭하지 않았으므로 드 쿠닝에게는 편한 여자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나중에 별거한 것을 보면 부부란 겉보기와 속보기가 같지는 않은가보다.
그녀는 드 쿠닝에게 평론가의 역할을 했으며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과 어울렸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를 예술가라고 인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타계하기 한 해 전인 1988년 그녀가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던, 1948년에 그린 자신의 작품 열일곱 점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달리 인식하게 되었다.
그녀의 그림들은 물론 드 쿠닝이나 폴록과 같은 대가의 수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할 만한 수준에 올라 있기는 하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타계하기 전에 그림들을 인정받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일레인은 초기에 주로 정물화와 도시 풍경을 그렸고 40년대 초에는 자화상과 사람들이 있는 실내장면들을 그렸는데 그녀의 주제는 같은 시기에 드 쿠닝이 사용했던 주제들과 관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