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평론가 피에르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커피 분쇄기>는 훗날 제작하게 될 <큰 유리>의 자료가 되었다.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린 뒤 곧 기계적인 드로잉을 예고하는 <커피 분쇄기>를 그린 것이지요?

뒤샹: 내게는 <커피 분쇄기>가 더 중요했지.
동기는 아주 간단했네.

카반느: 특별히 상징적인 것은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뒤샹: 전혀 없었네.
약간 새로운 방법을 소개한 것밖에는.
일종의 도망칠 구멍이었지.
자네도 알다시피 난 늘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네.

카반느: 이런 실험에 관해 주변의 당신을 아는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뒤샹: 별로 관심도 없었어.

카반느: 그들이 당신을 화가라고 생각했습니까?

뒤샹: 형들은 물론 그렇게 생각했지.
다른 예술가들은 그런 것에 관해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어.
자네도 알지 않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가 1913년 앙데팡당전에서 배척당한 것을.
글레이즈가 주동자였네.
전시회가 열리기 전에 그것이 스캔들을 야기하자 글레이즈가 형들더러 내게 말해서 치우게 했지.

카반느: 그런 것이 다른 이유와 더불어 당신으로 하여금 반미술적인 태도를 취하게 한 것입니까?

뒤샹: 그것이 나로 하여금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었네.
난 그때 “좋아요. 그렇다면 그룹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요. 누구도 상관치 않고 나 혼자 가겠어요”라고 했네.
얼마 후 누드 그림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달마우 화랑에서 소개되었지.
그곳에 가지는 않고 전시회에 관한 글만 읽었는데, 특별한 작품으로 소개는 되었지만 별로 물의를 일으키지는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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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새로운 도전자 필립 구스턴

폴록에게 도전한 예술가가 드 쿠닝 한 사람뿐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뉴욕파의 모든 예술가들이 그에게 도전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폴록보다 한 살 어린 필립 구스턴(Philp Guston 1913~80)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캐나다에서 출생하여 미국으로 이주해 아이오와 주에서 4년 동안 교편을 잡다가 1945년에 뉴욕으로 온 화가로서 본명은 필 구스턴이다.
그는 눈이 커다란 아이의 이미지로 그린다든가 유령같이 그려 만화처럼 웃음을 자아내는 해괴망칙한 은유의 그림들을 그리곤 했다.
그가 그린 <만일 이것이 내가 될 수 없다면 If This Be Not I>은 독특한 주제였다.
또 그는 ‘어미 거위 Mother Goose’ 이야기에 나오는, 나이든 여인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는 내용을 주제로 선택하면서 그렇게 제목을 부쳤다.

구스턴의 전람회가 1945년 1월에 미드타운(Midtown) 화랑에서 열렸다.
그는 그때 <할로윈 파티 Halloween Party>와 <감상적인 순간 Sentimental Moment> 외에 여러 점을 소개했는데 일반 관람자들뿐 아니라 동료 화가들도 그의 만화 같은 이미지들에 놀라워했다.
언론에서 휘트니 미술관과 평론가 그리고 작가들을 대상으로 현존하는 예술가들 가운데 누가 대가가 되리라고 생각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주장한 대가들의 명단에는 구스턴의 이름이 먼저 적혀 있었다.
1973년 구스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식하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의 드로잉을 좋아한다.
드로잉하는 행위는 발견하고 시사하며 지적하는 것이다.
드로잉에는 색과 부피들의 산만함이 없다. …
나는 대개 내가 그릴 그림을 위해서 드로잉한다.
운이 좋은 날은 형태와 공간들이 균형을 잘 이룬 드로잉을 하게 되고, 드로잉 자체가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드로잉한 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물감과 빛들의 실제를 같은 곳에 가하게 된다.”

구스턴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드로잉했지만 드로잉 자체를 이미지로 남긴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88년 어떤 평론가는 그에게 드로잉은 자신의 회화적 문제들을 푸는 방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구스턴은 원래 추상표현주의 화가였고 40년대에 만화 같은 그림들을 그려서 더욱 알려졌지만 그의 깊이있는 미학은 그의 완전추상화들에서 나타났다.
1950년과 54년 사이에 그는 하얀 종이 위에 검정색으로 주로 드로잉했다.
그는 유연한 선을 사용한 형태들을 기본적인 표적들로서 탐구하고자 했다.

1978년 구스턴은 자신의 중국적 서예 드로잉 방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송나라 시대에는 예술가들이 수천, 수만 번의 드로잉을 한 후 대나무 순이나 새들을 그렸는데 그들의 그림에 나타나는 리듬이 여러분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것을 선불교 중들이 ‘사토리(Satori)’라고 불렀고, 나는 그것을 취한 것 같다.
그것은 두 가지 행위들을 함유하고 있다.
네가 알면서도 모르는 것이며, 그것에 관해서는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경지를 지향한다.”

여러분은 구스턴이 동양회화에 관해서 제법 알 만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뭔가 제대로 알지는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미국 예술가가 이만큼이라도 동양회화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는 점을 가상하게 생각해주어야 할 것이다.

구스턴은 1940년부터 1950년까지 뉴욕에 거주하면서 아돌프 고틀립, 드 쿠닝, 마크 로드코와 잘 어울렸고 폴록과는 벌써부터 우정이 두터웠다.
두 사람은 1927년부터 29년까지 고등학교에서 동문수학했던 동창생들이었기 때문이다.
구스턴이 혜성처럼 뉴욕에 나타나 폴록의 명성에 그늘을 만들면서 가장 훌륭한 예술가로 평론가들에게 부상되자 폴록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
물론 시기심이 대부분이었지만 거기에는 그가 완전추상을 추구하지 않는 데 대한 반발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먼 체리는 “구스턴은 모든 사람들과 경쟁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예술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구스턴은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부연했다.
<만일 이것이 내가 될 수 없다면>이 성공하자 구스턴은 폴록이 누려야 할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1945년 5월 7일 폴록의 형 샌드가 자신의 아파트에 한 무리의 예술가들을 초대했고, 구스턴도 옛 친구들을 만날 겸 그곳에 왔다.
그들이 어지간히 술을 마시고 떠들썩해 있을 때 갑자기 폴록이 벌떡 일어서서 구스턴에게 소리쳤다.
“저주받을 놈, 난 네가 그런 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구스턴의 얼굴이 경색되었다.
증인들의 말이 다 같지는 않지만 폴록은 구스턴을 창 밖으로 내던지려 했고, 어찌나 심하게 격투를 벌였는지 서로를 죽일 것만 같았으며 결국 두 사람은 기진하여 싸움을 중단했는데 구스턴은 너무 아파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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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에 도전하는  윌렘 드 쿠닝

이 시기에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  )은 여러 가지 회화 기교들을 실험하면서 입체주의 회화방법도 응용하고 있었다.
그는 인물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는데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후기 이미지들을 고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코메티와는 다르게, 그러나 더욱 과격한 방법으로 이그러진 사람의 모습들을 그렸으며 특히 여인을 기분 내키는 대로 이그러뜨렸다.
폴록이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술이나 마시면서 마누라에게 근심을 주며 희비극을 연출하고 있을 때 그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자동주의 기교를 조심스럽게 분석하면서 그러한 방법에 손질을 가한 후 자신의 그림에 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피카소가 30년대 말에 환상적인 분위기로 그렸던 그림들과 유사한 점이 있었다.
그는 초현실주의와 입체주의 화법을 개인적인 의도로 합성하면서 분석입체주의 방법으로 색들을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오로지 검정색과 흰색을 사용하여 사람의 모습을 그리면서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나타내려 했다.
물론 폴록도 검정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그러한 방법은 두 사람뿐 아니라 몇몇 예술가들에게 회화의 새로운 통로를 여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성행하고 있었다.
예술가들의 교통이 잦아지면서 어떤 때는 누가 먼저 언제 시작했는지를 알기가 이처럼 어려운 경우가 많아졌다.

평론가들이 드 쿠닝의 그림들을 반기기 시작했고, 특히 로젠버그가 그를 호평하면서부터 사람들은 그에게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엄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은 캔버스와 물감의 논쟁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고 말했는데, 드 쿠닝의 그림을 보면 그의 말이 실감이 난다.
폴록은 드 쿠닝을 자주 만났다. 동갑내기 고키로부터 자극을 받아 더 이상 아마추어 화가가 아니라 직업화가로 데뷔한 드 쿠닝은 한 친구에게 “나는 물감을 캔버스에 그대로 바르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는 이 시기에 재료들과의 싸움을 그림에 남기곤 했다.
그는 “유화가 발명된 것은 살(색조) 때문이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모든 회화 경향들 중에서 입체주의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은 불확실한 재현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시적인 구조 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고, 작가는 직관을 나타낼 수가 있다.
과거의 미술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보태려 하는 것이다.
다른 회화에서 내가 받아들이는 요소들은 입체로부터 온 것이다.
입체주의는 흐름이었으나, 하나의 흐름으로 고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폴록보다 여덟 살 많은 드 쿠닝은 1904년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세 살 때 부모는 이혼했다.
1916년 그는 지방에 있는 상업미술가의 장식조수로 일하면서 밤에는 로테르담 아카데미에서 1924년까지 수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같은 나라 사람 피에 몬드리안의 영향을 주로 받고 있었으며 1926년 스물두 살 때 미국행 배에 승선했다.
“나는 그곳에 예술가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네덜란드에서 미국에 예술가들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미국에 가서 열심히 일한다면 편한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고, 예술을 위해서라면 자연히 유럽으로 …”라고 그는 나중에 말했다.

1929년 드 쿠닝은 친구 화가의 소개로 고키를 만났다.
드 쿠닝은 “나는 네덜란드 아카데미에서 완전히 훈련을 받고 이곳으로 왔지만 고키는 그러한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여섯 살 때 조지아에 있는 티플리스에서 여기로 온 후 미국 사람처럼 성장했다.
그리고 신비스러운 이유로 그는 회화와 예술을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알았던 것이다.
내가 더 잘 알고 느끼고 이해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그가 더 잘 알고 느끼고 이해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드 쿠닝이 고키를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회화 기교들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드 쿠닝은 노력하는 예술가였다.
“나는 절충적인 화가로서 미술사 책 어느 페이지를 열어도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라고 평론가 로젠버그에게 고백한 적도 있었다.
드 쿠닝의 친구들은 그가 늘 그림들을 미완성으로 남긴다고 말했지만 그는 인터뷰에서 “스타일(회화방법)이라는 것은 속임수이다.
그것은 반 되스부르그와 몬드리안의 지독한 아이디어들로서 그들은 스타일을 강요했다.
힘의 반사적 저항력은 스타일을 유지하고 그림의 내용들을 진행하는 것이다 … 나는 몬드리안에게 반했다. 나는 항상 그의 주문에 반해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자꾸만 고치는 습관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실존주의 조각가 자코메티가 사물들을 그리고서 자꾸만 고치는 습관으로 인해 결국 실제보다 작게 그리게 되었다고 하던 말을 상기시킨다.
어쨌든 자꾸만 고치는 드 쿠닝의 습관은 자코메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고유한 회화방법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작품에 관해 확고하게 단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의 인생에서 확고한 형태들은 적다. 난 밤새 바꿀 수가 있다. …
나는 커다란 그림을 몇 주 동안 그리며 물감들은 항상 젖어 있게 하는데 그래야 내가 그것을 바꾸고 또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은 같은 것을 고치고 또 고친다는 말이다."

그는 무(無)에서부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에서 출발점을 찾았다.
대가들의 그림들에서 그리고 상업용 포스터에서조차도 이미지를 빌려올 수 있었고 담배광고에 나오는 여인의 립스틱 바른 입술도 빌려왔는데, 그는 그런 이미지들을 고치고 또 고쳐서 그가 바라는 이미지가 될 때까지 바꾸었다.
그리고 모호함은 그가 일부러 남기는 중요한 회화적 요소이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어느 한 가지만을 지적하지만 모호함은 객관적으로 전체를 포용한다는 것을 대가들의 그림에서 발견했다.
친구들은 그가 그림을 미완성으로 남겼다고 말했지만 지금 남아 있는 그의 그림들을 보면 그러한 판단은 그의 미학에 대한 무지의 소치임을 알게 된다.
그는 “나는 우연히 취사선택하는 화가이다”고 말하였다.

리는 온화한 성격의 드 쿠닝을 사랑했으므로 어느 날 파티에서 드 쿠닝의 무릎 위에 앉는 데까지 성공한 후 그와 거의 키스를 할 뻔했는데 드 쿠닝이 다리를 벌리는 바람에 그녀는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무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부끄러워진 그녀는 그때부터 그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기 시작했다.

드 쿠닝은 1938년에 일레인 프리드(Elain Fried 1918~1989)를 만났고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다.
일레인은 1918년에 뉴욕 시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했던 뉴요커였다.
열아홉 살 때인 1937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술학교(The Leonardo da Vinci Art School)에 입학했으며, 이듬해에는 아메리칸 미술학교(The American Artists School)에서 수학했는데 그해에 드 쿠닝을 만났다.
그때 그녀는 스무 살이었으며 드 쿠닝은 그녀보다 열네 살 위였다.
두 사람이 동거를 하다가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1943년이었다.

일레인은 리보다 훨씬 젊었고 가냘픈 몸매가 리보다는 덜 성적으로 보였지만 리와는 달리 섬세한 면이 있었다.
또한 지성적인 면에서는 비슷했지만 리에 비해 온순해서 사내를 간섭하지 않았으므로 드 쿠닝에게는 편한 여자였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나중에 별거한 것을 보면 부부란 겉보기와 속보기가 같지는 않은가보다.
그녀는 드 쿠닝에게 평론가의 역할을 했으며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과 어울렸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를 예술가라고 인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타계하기 한 해 전인 1988년 그녀가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던, 1948년에 그린 자신의 작품 열일곱 점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달리 인식하게 되었다.
그녀의 그림들은 물론 드 쿠닝이나 폴록과 같은 대가의 수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할 만한 수준에 올라 있기는 하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타계하기 전에 그림들을 인정받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일레인은 초기에 주로 정물화와 도시 풍경을 그렸고 40년대 초에는 자화상과 사람들이 있는 실내장면들을 그렸는데 그녀의 주제는 같은 시기에 드 쿠닝이 사용했던 주제들과 관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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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한 영상이 떠오르자

뒤샹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한 영상이 떠오르자 그것이 자연주의의 사슬을 영원히 끊는 것이 되리라 예견할 수 있었다고 1945년에 캐서린 드라이어에게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날아가는 비행기를 그린다면서 그것을 정물화로 그릴 수는 없다.
시간 안에서 움직이는 형태를 나타내는 데 기하와 수학은 불가피하다.
이는 기계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뒤샹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1913년 3월 20일에 열릴 앙데팡당전에 출품하려 했다.
퓌토 그룹의 예술가들 가운데 선두주자인 글레이즈와 메쳉제는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입체주의 그림으로 전시회를 성공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뒤샹의 누드를 보자 그만 놀라고 말았다.
그의 그림은 입체주의 미학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고, 또 지난 달 베른하임 준 화랑에서 소개된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그림과 유사한 데가 있어 신선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한 그의 그림을 포함시켰다가는 사람들이 입체주의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여길 것 같아 저으기 염려도 되었으며, 게다가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누가 보아도 입체주의 방법으로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입체주의를 학문주의 미술이라고 격하하는 말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퓌토 그룹의 예술가들은 그들의 방자한 언행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글레이즈와 메쳉제는 퓌토 그룹의 예술가들에게 뒤샹의 누드를 전시회에 포함시키는 것은 입체주의 그림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자크와 레이몽 형제에게 동생의 그림을 전시회에서 제외시킨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앙데팡당전이 열리기 하루 전 자크와 레이몽은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처럼 검정색 양복으로 정장하고 마르셀을 불러 “입체주의 예술가들이 생각하기에는 네가 궤도를 조금 벗어난 것 같다”고 했다.
뒤샹이 그날을 회상했다.
“형들이 “최소한 제목이라도 바꿀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형들은 제목이 나쁜 의미로 지나치게 문학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만화 같은 방법으로 그렸다고도 했다.
… 아무튼 형들은 내 그림이 배척당하는 것이 싫어서 그림을 정정해서 출품하기를 바랐지만 …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난 “좋아요. 좋아요”라고 말한 후 택시를 타고 전시장으로 가서 누드 그림을 집으로 가져왔다.”

반세기가 지난 후 뒤샹은 “그때가 내게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난 그룹의 예술가들에게 흥미를 잃고 말았다”고 했다.

뒤샹은 한 달 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화랑 달마우에서 열린 첫 입체주의 전시회에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2>를 출품했다.
이 그림은 언론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19살의 예술가 지망생 호앙 미로의 마음을 크게 휘저었다.
미로는 뒤샹의 그림에 인상이 깊었던지 12년 후에 자신의 드로잉에 같은 제목을 붙였다.

뒤샹의 누드는 반발 없이 그해 가을 퓌토 그룹의 예술가들이 주최한 황금 섹션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뒤샹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지만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이전 뒤샹이 1911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1>을 그릴 무렵 레이몽은 그에게 퓌토에 있는 집 부엌을 장식할 조그만 크기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뒤샹은 훗날 회상했다.
“형은 글레이즈, 메쳉제, 라 프레나에, 그리고 레제에게도 그림을 부탁한 것 같았다.
형은 설거지하는 곳 위에 그림을 걸기 원했고, 모두에게 같은 크기로 그리도록 했다.
나는 <커피 분쇄기>를 그렸다. 나는 커피 가는 기계의 형태를 그린 것이 아니라 기계가 작동하는 형태를 묘사했다.
톱니바퀴와 그 위에 있는 기계를 회전시키는 핸들 그리고 회전을 표시한 화살표를 보듯이 나는 운동에 관한 개념을 나타내면서 기계를 두 부분으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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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새로울 게 없는 폴록의 전람회

1944년 온 겨울을 폴록이 술만 마시고 지낼 수 없었던 것은 이듬해 봄에 화랑 ‘금세기 예술’에서 두 번째 개인전이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붓을 들었고 먼저 다섯 점을 완성했는데 주제는 ‘말’이었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말은 상처를 입고도 스스로 몸을 일으키려는 모습으로서 그는 그러한 말들에 과격한 색들을 사용했다.
당시 그는 보라색, 붉은색, 금색을 무감각할 정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폴록의 그림에서는 피카소의 회화기교가 엿보였으며 특히 피카소가 그렸던 투우 그림들을 연상시켰다.
피카소는 창조를 위해서는 반드시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물론 예술가들이 피카소 자신을 파괴하라는 뜻으로 했던 말은 아니었지만 폴록은 피카소의 그림을 파괴해야만 자신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린버그는 폴록이 입체주의 화가라면서 입체주의 그림을 공간에서 흐트러뜨린다면 폴록의 그림처럼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러한 견해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폴록이 그린 <토템 레슨 I Totem Lesson I>은 1943년에 그렸던 <파시패>의 부분적 이미지였고 다만 색들이 달랐을 뿐이기 때문이다.
가을 내내 그렇게 술만 퍼마시더니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전람회를 준비하지 않았음을 그의 그림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토템 레슨 II Totem Lesson II>(58)와 <둘 Two>은 토템적 형태와 <비밀의 수호자들>, <남성과 여성>의 혼돈된 개인적 신화들이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난 그림들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전람회는 그가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음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었다.

1945년 3월 9일에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그날은 이십칠 도로 유난히 더웠지만 관람객들은 15개월 전에 비해 부쩍 늘어 있었다.
그날 페기는 그녀의 아파트에 폴록이 그린 벽화도 동시에 공개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녀의 아파트를 방문하여 벽화를 관람했으나 다들 같은 견해는 아니었다.

이미 그 벽화를 본 적이 있는 그린버그는 『네이션』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폴록을 칭찬하면서 “사람들은 잭슨의 그림이 미화시킨 벽지처럼 계속해서 연결되었다고 말했다”고 알렸으며 “난 잭슨의 벽화가 대단하다고 여겼다”고 적었다.
그린버그는 폴록이 그저 재능있는 화가가 아니라 미국의 생존하는 작가들 가운데 그만이 홀로 복잡한 유럽 예술가들의 창조들을 혼용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미국적 그림으로 승화시켰다고 인식했다.
그는 “나는 프랑스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만한 누군가가 나타나서 이곳의 예술가들이 더 이상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 누군가가 폴록이라고 생각했다.
그린버그는 미국 화가들 중 폴록만이 감히 피카소에게 도전할 만하다고 할 정도로 폴록을 신뢰하고 있었다.

폴록은 그린버그의 말에 우쭐해졌고 자연히 그를 형처럼 모시게 되었다.
그린버그는 8번가 이스트 46번지에 있는 폴록의 화실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의 그림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눈여겨보았으며, 폴록을 칭찬함으로써 평론에서의 자신의 위상을 은근히 높이려고 했다.
평론가로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별처럼 반짝이는 예술가를 부추겨야지 자칫 맹꽁이 같은 예술가를 칭찬했다가는 그 평론가도 맹꽁이와 함께 몰락하고 만다.
그린버그는 폴록이 떠오르는 별임을 알고 있었다.

두 번째 개인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첫번째의 것에 비해 미약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그의 전람회가 신통치 않았다고 말했다.
그들 역시 폴록이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음을 알아챘던 것이다.
마우드 릴리는 『아트 다이제스트』에서 “난 정말로 잭슨의 그림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으며, 파커 타일러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잡지 『뷰』에서 그의 그림들이 “구운 마카로니 같다”며 빈정거렸다.
로버트 코우츠는 『뉴요커』에서 폴록의 첫 전람회를 호평했으나 이번에는 침묵함으로써 무관심을 시위했고, 『뉴욕 타임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전람회에서 폴록의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폴록이 지지를 받지 못한 만큼 평론가로서의 그린버그의 지지율도 낮아지고 말았다.
그린버그는 한동안 평론에서 홀로 독주하면서 유식한 또 한 사람 해롤드 로젠버그가 곧 그의 위대한 적으로 부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로젠버그가 어느 날 드 쿠닝을 지적하여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추켜세우기 시작하면서 그린버그의 위상에 도전했고 동시에 폴록의 정상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뉴욕 화단 평론부문에서는 로젠버그와 그린버그의 이름이 번갈아 오르내리게 되었고 회화에서는 폴록과 드 쿠닝이 나란히 거명되었다.
그럴 때마다 그린버그와 폴록의 심기는 아주 불편했다. 그것이 그린버그와 폴록이 받은 첫 번째 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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