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새로울 게 없는 폴록의 전람회

1944년 온 겨울을 폴록이 술만 마시고 지낼 수 없었던 것은 이듬해 봄에 화랑 ‘금세기 예술’에서 두 번째 개인전이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붓을 들었고 먼저 다섯 점을 완성했는데 주제는 ‘말’이었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말은 상처를 입고도 스스로 몸을 일으키려는 모습으로서 그는 그러한 말들에 과격한 색들을 사용했다.
당시 그는 보라색, 붉은색, 금색을 무감각할 정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폴록의 그림에서는 피카소의 회화기교가 엿보였으며 특히 피카소가 그렸던 투우 그림들을 연상시켰다.
피카소는 창조를 위해서는 반드시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물론 예술가들이 피카소 자신을 파괴하라는 뜻으로 했던 말은 아니었지만 폴록은 피카소의 그림을 파괴해야만 자신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린버그는 폴록이 입체주의 화가라면서 입체주의 그림을 공간에서 흐트러뜨린다면 폴록의 그림처럼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러한 견해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폴록이 그린 <토템 레슨 I Totem Lesson I>은 1943년에 그렸던 <파시패>의 부분적 이미지였고 다만 색들이 달랐을 뿐이기 때문이다.
가을 내내 그렇게 술만 퍼마시더니 충분한 시간을 갖고 전람회를 준비하지 않았음을 그의 그림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토템 레슨 II Totem Lesson II>(58)와 <둘 Two>은 토템적 형태와 <비밀의 수호자들>, <남성과 여성>의 혼돈된 개인적 신화들이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난 그림들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전람회는 그가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음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었다.

1945년 3월 9일에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그날은 이십칠 도로 유난히 더웠지만 관람객들은 15개월 전에 비해 부쩍 늘어 있었다.
그날 페기는 그녀의 아파트에 폴록이 그린 벽화도 동시에 공개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녀의 아파트를 방문하여 벽화를 관람했으나 다들 같은 견해는 아니었다.

이미 그 벽화를 본 적이 있는 그린버그는 『네이션』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폴록을 칭찬하면서 “사람들은 잭슨의 그림이 미화시킨 벽지처럼 계속해서 연결되었다고 말했다”고 알렸으며 “난 잭슨의 벽화가 대단하다고 여겼다”고 적었다.
그린버그는 폴록이 그저 재능있는 화가가 아니라 미국의 생존하는 작가들 가운데 그만이 홀로 복잡한 유럽 예술가들의 창조들을 혼용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미국적 그림으로 승화시켰다고 인식했다.
그는 “나는 프랑스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만한 누군가가 나타나서 이곳의 예술가들이 더 이상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 누군가가 폴록이라고 생각했다.
그린버그는 미국 화가들 중 폴록만이 감히 피카소에게 도전할 만하다고 할 정도로 폴록을 신뢰하고 있었다.

폴록은 그린버그의 말에 우쭐해졌고 자연히 그를 형처럼 모시게 되었다.
그린버그는 8번가 이스트 46번지에 있는 폴록의 화실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의 그림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눈여겨보았으며, 폴록을 칭찬함으로써 평론에서의 자신의 위상을 은근히 높이려고 했다.
평론가로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별처럼 반짝이는 예술가를 부추겨야지 자칫 맹꽁이 같은 예술가를 칭찬했다가는 그 평론가도 맹꽁이와 함께 몰락하고 만다.
그린버그는 폴록이 떠오르는 별임을 알고 있었다.

두 번째 개인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첫번째의 것에 비해 미약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그의 전람회가 신통치 않았다고 말했다.
그들 역시 폴록이 새로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음을 알아챘던 것이다.
마우드 릴리는 『아트 다이제스트』에서 “난 정말로 잭슨의 그림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으며, 파커 타일러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잡지 『뷰』에서 그의 그림들이 “구운 마카로니 같다”며 빈정거렸다.
로버트 코우츠는 『뉴요커』에서 폴록의 첫 전람회를 호평했으나 이번에는 침묵함으로써 무관심을 시위했고, 『뉴욕 타임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전람회에서 폴록의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폴록이 지지를 받지 못한 만큼 평론가로서의 그린버그의 지지율도 낮아지고 말았다.
그린버그는 한동안 평론에서 홀로 독주하면서 유식한 또 한 사람 해롤드 로젠버그가 곧 그의 위대한 적으로 부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로젠버그가 어느 날 드 쿠닝을 지적하여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추켜세우기 시작하면서 그린버그의 위상에 도전했고 동시에 폴록의 정상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뉴욕 화단 평론부문에서는 로젠버그와 그린버그의 이름이 번갈아 오르내리게 되었고 회화에서는 폴록과 드 쿠닝이 나란히 거명되었다.
그럴 때마다 그린버그와 폴록의 심기는 아주 불편했다. 그것이 그린버그와 폴록이 받은 첫 번째 도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