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한 영상이 떠오르자

뒤샹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에 관한 영상이 떠오르자 그것이 자연주의의 사슬을 영원히 끊는 것이 되리라 예견할 수 있었다고 1945년에 캐서린 드라이어에게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날아가는 비행기를 그린다면서 그것을 정물화로 그릴 수는 없다.
시간 안에서 움직이는 형태를 나타내는 데 기하와 수학은 불가피하다.
이는 기계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뒤샹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1913년 3월 20일에 열릴 앙데팡당전에 출품하려 했다.
퓌토 그룹의 예술가들 가운데 선두주자인 글레이즈와 메쳉제는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입체주의 그림으로 전시회를 성공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뒤샹의 누드를 보자 그만 놀라고 말았다.
그의 그림은 입체주의 미학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고, 또 지난 달 베른하임 준 화랑에서 소개된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그림과 유사한 데가 있어 신선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한 그의 그림을 포함시켰다가는 사람들이 입체주의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여길 것 같아 저으기 염려도 되었으며, 게다가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누가 보아도 입체주의 방법으로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입체주의를 학문주의 미술이라고 격하하는 말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퓌토 그룹의 예술가들은 그들의 방자한 언행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글레이즈와 메쳉제는 퓌토 그룹의 예술가들에게 뒤샹의 누드를 전시회에 포함시키는 것은 입체주의 그림 전체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자크와 레이몽 형제에게 동생의 그림을 전시회에서 제외시킨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앙데팡당전이 열리기 하루 전 자크와 레이몽은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처럼 검정색 양복으로 정장하고 마르셀을 불러 “입체주의 예술가들이 생각하기에는 네가 궤도를 조금 벗어난 것 같다”고 했다.
뒤샹이 그날을 회상했다.
“형들이 “최소한 제목이라도 바꿀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형들은 제목이 나쁜 의미로 지나치게 문학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만화 같은 방법으로 그렸다고도 했다.
… 아무튼 형들은 내 그림이 배척당하는 것이 싫어서 그림을 정정해서 출품하기를 바랐지만 …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난 “좋아요. 좋아요”라고 말한 후 택시를 타고 전시장으로 가서 누드 그림을 집으로 가져왔다.”

반세기가 지난 후 뒤샹은 “그때가 내게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난 그룹의 예술가들에게 흥미를 잃고 말았다”고 했다.

뒤샹은 한 달 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화랑 달마우에서 열린 첫 입체주의 전시회에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2>를 출품했다.
이 그림은 언론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19살의 예술가 지망생 호앙 미로의 마음을 크게 휘저었다.
미로는 뒤샹의 그림에 인상이 깊었던지 12년 후에 자신의 드로잉에 같은 제목을 붙였다.

뒤샹의 누드는 반발 없이 그해 가을 퓌토 그룹의 예술가들이 주최한 황금 섹션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뒤샹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지만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이전 뒤샹이 1911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1>을 그릴 무렵 레이몽은 그에게 퓌토에 있는 집 부엌을 장식할 조그만 크기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뒤샹은 훗날 회상했다.
“형은 글레이즈, 메쳉제, 라 프레나에, 그리고 레제에게도 그림을 부탁한 것 같았다.
형은 설거지하는 곳 위에 그림을 걸기 원했고, 모두에게 같은 크기로 그리도록 했다.
나는 <커피 분쇄기>를 그렸다. 나는 커피 가는 기계의 형태를 그린 것이 아니라 기계가 작동하는 형태를 묘사했다.
톱니바퀴와 그 위에 있는 기계를 회전시키는 핸들 그리고 회전을 표시한 화살표를 보듯이 나는 운동에 관한 개념을 나타내면서 기계를 두 부분으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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