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스프링스에 둥지를 틀다
1945년 8월 폴록 부부와 학교 친구 카디시 부부는 몇 주를 함께 보내기 위해 롱아일랜드의 이스트 햄프턴으로 갔다.
그때만 해도 그곳은 대부분의 집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수세식 변소도 없는 시골이었다.
그들은 롱아일랜드 동쪽 끝에 있는 작은 동네 아마간셋에 방이 둘 있는 집을 세냈다.
집은 비좁았고 지붕에서는 비가 샜으며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폴록에게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아리조나 주의 광활한 평야를 상기할 수 있어 즐거운 휴가였다.
카디시 부부가 그 집을 세얻었던 이유는 그 동네에서 자신들이 살 집을 장만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폴록과 리는 두 사람을 따라다니며 복덕방 사람이 보여주는 집들을 구경했다.
넓은 들판이 있는 그곳에서 지내다보니 이런 곳에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리는 이런 곳에서 살게 된다면 자동차도 술집도 없으니 폴록이 술을 덜 마실테고 마음의 여유도 생겨서 두 사람 다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리가 은근히 폴록의 의중을 물었다.
처음에는 폴록이 “미쳤냐? 뉴욕을 떠나다니!”라고 했고
리는 “나도 모르겠어.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라고 대꾸했다.
그런데 며칠 후 폴록이 리에게 이 곳에서 살자고 제의해서 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폴록은 근본적으로 시골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로부터 떠나고 싶어 했고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고 스프링스에서 상점을 경영했던 댄 밀러는 전한다.
어쨌든 폴록과 리는 두 사람이 살 만한 집을 알아보았다.
리는 그곳의 4에이커(약 4,900평)나 되는 땅에 새로 잘 지은 집에서 살고 있는 로버트 마더웰에게 연락했고, 마더웰은 복덕방 사람 에드 쿡을 소개했다.
쿡이 보여준 집은 5에이커의 땅에 이층집이 딸린 백 년 된 농장으로 앞마당에는 오래된 나무와 헛간이 있었고 뒷마당에는 창고 몇 개가 있었다.
그 집에는 전기와 수도는 공급되었지만 목욕탕과 난방시설은 없었고 변소는 집 바깥에 있었다.
쿡은 월세가 40달러이고 집을 산다면 5,000달러인데 흥정할 생각은 아예 말라고 미리 단호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돈이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우선 6개월 동안은 월세로 살고 그동안에 같은 조건으로 집을 사겠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삽입하라고 했다.
6개월 후란 1946년 4월을 의미했다.
폴록과 리는 그동안 동거하고 있었는데 이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했다.
리는 시청에 가서 선서한 후 서류상으로 혼인신고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만 폴록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다면 아예 결혼하지 않겠다고 우겼다.
리는 유태인인 자신과 세례도 받지 않은 폴록의 결혼식을 주례할 목사를 찾기가 어려울 것만 같아 로젠버그의 아내 메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메이는 리와 함께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며 몇 군데 전화를 걸어봤지만 랍비(유태 공회당 당회장)조차 두 사람의 결혼식 집전을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알려진 네덜란드인들의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는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두 사람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혼인하지 않고 동거해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죄를 짓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라고 설득했다.
목사 찰스 프렌벡은 주례를 서겠다며 “하나님께서 이해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교인들이 아는 것을 원치 않아 “이 문제에 관해 조용히 하도록 하고 문제가 안 되게 하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결혼식에 양가 친척은 한 사람도 부르지 않기로 합의했고, 페기에게 증인으로 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그녀는 “왜 결혼하려고 해요? 당신은 충분히 결혼하지 않았어?”라하고는 누가 또 증인으로 오느냐고 물어 메이가 온다고 말하자 증인으로 참석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녀는 자기가 싫어하는 메이와 로젠버그의 아내 메이가 같은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이었다.
결혼식은 1945년 10월 25일 5번가에 있는 마블 콜리게잇 교회에서 폴록과 리, 메이 세 사람만이 참석한 가운데 올려졌다.
증인은 두 사람이어야 했으므로 교회에서 잡일을 하고 있던 어거스트 술즈가 본인은 원하지도 않던 증인석에 서게 되었다.
결혼식은 십 분밖에 안 걸렸다. “결혼식은 아주 좋았어요.
목사는 말을 잘 했지요.
그는 종교와 하나님에 관해서 말했고 아주 훌륭했어요”라고 리는 당시를 회상했다.
두 사람은 식을 마치고 아파트로 와서 이사 갈 준비를 서둘렀다.
결혼이란 이제 리가 좀더 주도권을 행사한다는 의미였다.
결혼 후에는 리가 폴록에게 명령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친구들이 있을 때는 폴록이 리에게 명령하지만 그건 그가 친구들에게 자신의 남성다움을 시위하려고 그러는 것뿐이었고 실제로 폴록은 리의 간섭범위 안에 있게 되었다.
이스트 햄프턴이 예술가들의 동네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인 막스 에른스트, 장 에이옹, 시인 브르통과 입체주의 예술가 레제가 그곳에서 살면서부터였다.
역에 가서 택시 기사에게 “어디로 가면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습니까?”하고 물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카디시와 마더웰이 먼저 그곳에 집을 장만했고 이제 폴록이 그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폴록이 거주하는 곳은 이스트 햄프턴 남쪽에 있는 스프링스로서 가난한 어부와 농부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이스트 햄프턴에 사는 사람들은 스프링스 사람들을 가난하고 천한 시골뜨기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 지역 사람들은 근처 바닷가에서 조개와 패주를 잡았고 감자 농사를 지었다.
주민은 360명 가량 되었는데, 그들은 매주 빙고 게임을 하면서 함께 어울리곤 했다.
1945년 11월 첫째 월요일에 폴록과 리는 고기를 실어나르는 트럭으로 짐을 운반했다.
리는 스프링스를 좋아했다.
거기에는 술집이 없었고, 파티가 없었고, 페기가 없었으며, 동성연애자들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폴록 부부에 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이웃에 살던 엘윈 해리스가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전화번호 492- 002를 폴록과 함께 사용했는데 “잭슨은 항상 과음했고, 난 전화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가 뉴욕에 있는 작가들과 너무 빈번히 통화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리는 그때를 지옥과도 같았다고 회상한다.
기름도 더운 물도 없었으며, 화장실도 집 안에 없었다.
그들은 담요로 몸을 말고는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기온이 내려가면 화장실 변기가 자주 얼었고 폴록은 아침에 토치 남포를 가지고 가서 얼음을 녹여야 했다.
석탄은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래로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해야 했는데 나무값이 비싸서 마치 종이를 태우는 듯했다고 리는 말했다.
“폴록은 차를 사려고 은행에 융자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그는 이웃에게서 2달러에 자전거를 한 대 구입했다.
폴록은 자전거를 타고 물감을 사러 상점에 갔다가는 돌아오는 길에 맥주를 두어 상자씩 사가지고 오곤 했다.”
집을 살 수 있는 만기일이 다가왔으나 돈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리는 페기에게 가서 2,000달러를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페기는 거절하면서 샘 쿠츠(Sam Kootz)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러자 리는 쿠츠에게도 갔었다고 하면서 쿠츠가 2,000달러를 꾸어주는 조건으로 폴록이 그의 화랑으로 적을 옮겨야 한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그러자 페기는 “네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내가 죽거든 그때나 그에게 가라”고 화를 버럭 내면서 2,000달러를 꾸어주었다.
페기는 후에 이 일에 관해 “성가신 리와 더 이상 그 문제로 다투기 싫어서 꾸어주었다”고 했다.
나머지 3,000달러는 은행에서 집을 담보로 융자해주었으므로 두 사람은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당시 페기는 폴록에게 월급으로 300달러를 지급하고 있었는데 2,000달러에 대한 부분적 지불방법으로 매달 50달러씩 제하겠다고 말했고, 폴록의 그림 세 점을 담보로 요구했다.
그 요구에는 <파시패>도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