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제임스 브룩스와의 해후

스프링스로 이주한 지 7개월 만에 폴록과 리는 뉴욕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전에 그들이 살던 아파트에 머물렀는데 그 아파트에는 미식축구 선수였던 폴록의 큰형 제이(Jay)가 살고 있었다.
불과 7개월 만이지만 폴록은 그 사이 뉴욕이 조금은 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계대전이 끝났으므로 유럽에서 왔던 예술가들이 돌아가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페기 또한 화랑을 폐쇄하고 그들을 따라서 유럽으로 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세계대전으로 한때 마비되었던 파리는 그러나 여전히 현대미술의 분수령이었다.
“파리에서의 어떠한 경향도 다른 지역에서는 결정적으로 진보된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그린버그는 1946년에 기술하고 있다.
폴록은 파리로 유학가는 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모두들 파리로 가거나 다녀왔다. 그들은 미국에서 그릴 수 없는 낡고 똥 같은 것들을 아이디어라고 가져올 것이다”라고 친구 루이스 번스(Louise Bunce)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폴록은 어느 날 아파트에서 30년대에 WPA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었던 친구 예술가 제임스 브룩스(James Brooks 1906~92)를 만났다.
그는 공교롭게도 형 제이의 아파트 건너편에 살고 있었다.
브룩스는 군대의 미술 관련 부서에서 3년간 근무하고 막 뉴욕으로 왔다고 했다.
두 사람은 매일 밤 술집에서 취하도록 마셨고, 처음에는 진지하게 토론하더니 나중에는 욕지거리를 하면서 다투기도 했다.
두 사람이 아파트에서도 계속 논쟁을 하면 제이는 자기는 시끄러운 것을 참을 수 없다면서 폴록을 진정시키곤 했다.

여러분은 브룩스가 누군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1942년부터 45년까지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뉴욕의 예술가들과는 교류가 없었고, 그래서 그의 이름은 낯설다.
그러나 그도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명단에 있으며, 이제서야 그들과 어울리면서 추상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전람회는 1950년에 가서야 가능했으므로 더러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빠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명단에 올리는 것은 필자의 소임이므로 그를 소개한다.

브룩스는 1945년 9월 뉴욕에 온 후 예술가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특히 브래들리 워커 탐린(Bradley Walker Tomlin)과 가까운 사이로서 두 사람은 1931년에 화실을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탐린 또한 동성연애자였다.
그가 팝아트의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인 로버트 라우셴버그와 염문이 있었으므로 라우셴버그의 아내는 이혼하고 그를 떠났다.
브룩스는 위에서 말한 대로 폴록을 우연히 다시 만났으며 필립 구스턴도 만났다.
변모한 뉴욕을 보고 그는 전에 그리던 사실주의 회화를 버렸으며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곧 그들과 유사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릴 때면 그는 교사처럼 말했는데 이는 그가 많은 미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그들의 대변자였다.

1947년 브룩스는 폴록이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붓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러한 방법을 실험했지만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콜라주나 다른 방법으로 고유한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1948년 그는 우연히 새로운 기교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캔버스의 뒷부분에 풀을 발라서 얼룩이 생기게 하는 것이었다.
물감이 젖어들다가도 풀을 바른 곳에서는 더 이상 젖어들지 못하므로 가장자리에 선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는 유령 같은 얼룩 형태들이 생기는 것에서 영감을 받아 그러한 기교를 사변적으로 더 많이 사용하면서 더욱 즉흥적인 회화를 추구하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종이에 그림을 그릴 때 오일과 과슈를 혼용하면 두 가지가 섞여 색다른 질을 남기며 붓자국이 종이에서 더욱 선명한 흔적을 남기는 것을 깨닫고 그러한 것들을 회화적 요소들로 사용했다.
그것은 동력주의의 효과로 나타났다.
그가 그림에 붙인 제목들과 그림의 형태들은 주제가 특별히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1985년부터는 더 이상 유화를 그리지 않았는데 이미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기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타계하던 1992년 3월까지 그는 종이에 드로잉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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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선불교 미학과 마크 토비

폴록은 윌라드(Willard) 화랑에서 마크 토비(Mark Tobey 1890~1976)의 <하얀 글씨 White Writing>를 본 적이 있었다.
토비는 폴록의 전 세대지만 그의 <하얀 글씨>가 나중에 알려진데다 일, 이차 대전 사이에 유럽과 중국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뉴욕파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40년대에 뉴욕에 자신을 알렸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서 보냈기 때문에 뉴욕의 예술가들과는 자연히 교류가 적었다.
그는 1942년에서 1955년 사이에 뉴욕에서 모두 스물다섯 차례에 걸쳐 자신의 그림을 소개했고, 그래서 늦게나마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명단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자주 사용한 하얀 선들은 동양의 글씨처럼 우아했다.
그는 폴록이 기대하던, 캔버스 전체를 구성하는 올 오버 화법을 벌써 실천했으며 폴록은 그의 그림에 감동했다.
그는 1918년에 인류는 하나라고 가르치는 종교 바하이(Bahai) 신앙을 받아들였고, 1923년에는 중국 회화를 연구했으며, 1934년에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가서 선불교를 직접 배웠다.
그의 미학은 바하이 교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서 1962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 종류의 종교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여러 종류의 이름들에 불과하며 오로지 하나의 종교가 있을 따름이다.
모든 종교의 뿌리는 바하이의 견지에서 본다면 세계와 인류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이론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사고는 그의 그림의 주제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회화적 구성에 관해 “나는 모든 부분들이 한 곳으로 집약되지 않고 그것들이 상호관련을 가지는 가치를 지니게 한다”고 말했다.
인류가 하나라는 그의 신앙은 무수한 작은 선들과의 상호연관성을 통해 시각화되었다.
폴록과 드 쿠닝 그리고 클라인이 온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팔을 크게 움직이면서 그림을 그렸다면 토비는 손목만을 움직이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하얀 글씨들은 1935년부터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모든 개인적인 요소들을 제거한 순수한 명상의 세계로 관람자들을 초대했다.

3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람과 풍경을 사실주의적 방법으로 설명하듯이 그렸다.
그러다가 1935~36년부터 추상에 관심을 가지고 힘있는 하얀 선들을 사용하여 알아볼 수 있는 형태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흐르는 듯하면서도 율동적인 선들은 그가 운동에 대해 연구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의 그림들은 더욱 추상화되었다.
남은 평생 동안 그는 캔버스를 삼차원의 공간처럼 운동들로 채우면서 빛과 율동들이 어울리는 우주적 세계를 펼쳤다.

1942년 토비가 그린 <형태는 남자를 따른다 Forms Follow Man>는 달라지고 있는 추상의 증거물로 충분한 작품이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언제까지 계속해서 이러한 흰색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이 방법은 소심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 긴장감을 주며, 너무 요구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가 1947년에 그린 <우리 세기의 섬광 Blaze of Our Century>에도 무수한 하얀 점들이 검은 종이 위에 전체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근래 도심의 빛나는 불빛 같기도 하고 이차대전 때의 붕괴되는 도시의 화염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얀 점들 안에 있는 몇 가지 형태로서 붉은 입술처럼 빛나는 형태 및 수평과 수직으로 구성한 기다란 파란 막대기들은 도시의 밤에 나타나는 형태들인지 전쟁에 살아남았던 잔존자들을 상징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유령처럼 보였다.

50년대에 그는 뉴욕에 거주하면서 도시의 긴장감과 쉼없는 동력주의를 표현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는 <명상 연작 Meditative Series>에서 온화하고 고요하며 시적인 우주적 차원의 그림들을 그리기도 했다.
그가 1957년에 그린 <세계 먼지 World Dust>(68)는 완전추상으로서 그의 거대한 세계와 미세한 세계의 상호관계를 시사했던 가장 적절한 예의 그림이라 하겠다.
그는 “나의 영감의 근저에는 고향 중서부의 것들로부터 미세한 세계의 내용들까지 포함된다.
나는 돌과 나무껍질에 새겨진 우주의 많은 것들을 발견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미세하게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클레의 그림들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클레는 미국 예술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선불교 미학을 받아들이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도 있었다.
“우리는 점차 일본인의 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몇몇 근래의 미국 예술가들이 선불교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며 선불교가 그들의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다.
화랑과 언론에서 그 점을 거론한 적도 있었다.”
선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예술가들 가운데 애드 라인하트가 있다.
토비가 1948년에 그린 <통로 Transit>(69)는 라인하트가 40년대 후반에 그린 그림과 관련이 있다.

1957년 3월과 4월에 토비는 50장에서 90장 가량의 드로잉을 검은 수미(Sumi) 잉크를 사용하여 흰 종이에 그렸다.
그의 드로잉들은 폴록이 50년대 초에 검정색과 흰색으로 그린 그림들과 아주 유사했고, 마더웰이 1965년에 연속적으로 그린 <서정적 조곡 Lyric Suite>(39)과도 흡사했다.
토비는 <하얀 글씨>가 “한 번에 성취해야 하기 때문에 ‘연기’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예술가들이 커다란 크기로 그림을 그리자 토비의 뉴욕 후원자 매리온 윌라드와 파리의 후원자 미셸 타피에는 그에게 커다란 캔버스에 그리라고 충고했다.
토비도 그래서 대형 그림을 그렸지만 여전히 작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때처럼 작은 붓놀림으로 커다란 공간을 채웠을 뿐이었다.
다른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처럼 그는 개인적으로 영웅적인 인간성을 나타내는 영상들을 추구하지 않았다.
1957년 7월 수미 드로잉들을 그린 며칠 후 “클라인과 폴록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나는 다른 음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1960년부터 그는 스위스의 바젤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 그림에만 더욱 전념했다.
이듬해에 그가 소개한 그림들인 <공간에서의 순간 Moment in Space> <공간 의식 Space Ritual>   <오리온의 할큄 The Claws of Orion>은 일흔이 넘은 대가의 완숙한 그림들로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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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유머와 애욕주의


뒤샹은 1912년에 콘스탄틴 브랑쿠시, 페르낭 레제와 함께 항공기 전시장에 갔다.
이날 일에 대해 레제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며 “뒤샹은 말없이 비행기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브랑쿠시에게 말했네. ‘회화는 끝났어. 누가 이 프로펠러보다 더 나은 것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라고 적고 있다.
이 편지에서 뒤샹이 이 시기 얼마나 운동에 관심을 두었으며 기계문명에 대해 얼마나 희망적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뒤샹은 1912년에 어디론가 가서 혼자 지내고 싶었다.
예술가는 반드시 혼자서 작업해야 하며 예술가는 자신을 표류하는 배처럼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오랜 여행을 대비하며 3등석 기차에 몸을 실었다.
뮌헨으로 가는 도중에 스위스의 바젤과 콘스탄스에 잠시 들러서 미술관들을 둘러보고, 6월 21일 뮌헨에 도착했다.
그가 프랑스 밖으로 여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막스 베르그만이 역으로 마중나와 그를 반겼다.
뒤샹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뮌헨으로 간 것은 파리에서 소cow 화가를 만났기 때문인데, 독일인으로 소를 아주 훌륭하게 그린 화가가 나더러 ‘뮌헨으로 가라’고 했다.
난 그곳에서 작은 방을 얻고 한동안 지냈다.
… 당시 뮌헨에는 많은 경향의 회화가 있었다.
난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으며, 잘 지냈다.”

그가 뮌헨에서 지낸 두 달 동안의 일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그곳에서의 일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그곳에서 그린 그림들이 누드였다는 것, 유머와 애욕적인 요소를 다분히 표출시켰다는 것, 그리고 평생 그런 방법으로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뒤샹은 “보지가 자지를 움켜쥐듯이 마음이 그렇게 움켜쥘 수 있는 것”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는데, 애욕적인 생각이 성행위 자체보다 힘이 있다고 본 것이며, 그런 생각이 성행위보다 훨씬 자유롭다고 보고 마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린 문제로 인식했다.

당시 그의 그림에서는 누드, 운동,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체스가 주제로 등장했다.
그는 1912년 5월 연필 드로잉으로 세 번에 걸친 습작 끝에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를 완성했다.
그는 <두 누드: 힘 있는 것과 빠른 것>, <빠른 속력의 누드들에 의해 가로질러진 왕과 왕후>, 그리고 <빠른 누드들에 의해 가로질러진 왕과 왕후>라는 제목들로 먼저 습작한 후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를 완성했다.
그가 그린 왕과 왕후는 체스에서의 왕과 왕후의 모습으로 그것들이 대각선으로 움직이면서 교합하도록 구성했다.
그는 관람자로 하여금 애욕적인 생각과 욕망을 가질 수 있도록 조작했으며, 관람자가 적극적으로 그림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이런 습작과정을 거친 후 그는 유화로 이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牘桓?누드들藍?왕과 왕후 주위에 구성하여 운동의 속력을 가속시키면서 빛나는 기계의 선들이 수없이 나타나도록 했는데, 신비스러우며 불길한 동력주의로 보여졌다.
어느 평론가는 그의 그림이 이 시기에 퓌토 그룹의 예술가들과 떨어져서 혼자 작업하던 레제의 것과 유사함을 발견하고 그가 레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그림이 보치오니의 <마음의 상태들>과 유사하므로 보치오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평론가도 있었다.
뒤샹은 그해 2월 베른하임 준 화랑에서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그림을 보았고, 보치오니의 그림도 보아서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았다.
수년 후 “나의 그림은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것들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그는 1910년에 이미 친구 두무세를 아담의 누드로 은유해서 <파라다이스>(1910-11)란 제목으로 그렸는데 그 그림 뒷면에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를 그렸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서 <파라다이스> 뒤에 그린 것이라고 했는데 그는 이 그림에서 왕과 왕후를 아담과 이브의 위치에 구성했다.
그는 “제목과 주제, 왕, 왕후, 누드들, 그리고 그것들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운동만을 나타낸 것은 나의 미학적 견지에 입각해서 유머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인상주의 이후 야수주의 시절 그림에 시적인 제목을 붙이는 것은 금물이었고, 당시 예술가들이 문학적인 요소를 경멸했음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훗날 말했다.
그는 이 시기 문학에서 주로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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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술로도 달랠 수 없는 번뇌

폴록의 세 번째 개인전이 1946년 3월에 열리기로 예정되었다.
폴록은 과슈로 그린 몇 점과 열한 점의 유화를 준비했다.
그것들은 시적이거나 전설적인 요소들이 있는 그림들로서 <곤궁에 처한 여왕 Troubled Queen> <작은 왕 The Little King> <하얀 천사 White Angel> <여 대사제 High Priestess> <달배 Moon Vessel>, 그리고 리가 붙인 제목인 <할례 Circumcision>(67)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노란 삼각형 Yellow Triangle>과 <열쇠 The Key>는 마티스가 즐겨 사용한 무지개색과 자신의 회화적 구성을 혼용하여 그린 그림이었는데 거기에서 폴록은 에너지가 분출되도록 그림의 동력주의를 고조시켰다.
동력주의란 빠른 붓놀림으로 이루어내는 색의 운동을 말한다.

전람회는 1946년 4월 2일부터 20일까지 열렸는데 두 번째 전람회보다 더욱 실망을 주었다.
평론가들은 아예 그의 그림들에 관해 언급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두 평론가가 언급했지만 그들 역시 폴록의 그림들을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린버그도 『네이션』에서 폴록의 그림에 실망했으며 어느 그림도 그가 먼저 그렸던 그림들에 뒤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평론가들에게 외면당하자 폴록은 술로 마음의 번뇌를 달래려고 했다.
여러분도 경험했겠지만 번뇌하면서 마시는 술은 폭음이 되는 게 보통이고 번뇌는 오히려 늘거나 마찬가지일지언정 줄지는 않게 마련이다.
그는 근처에 살고 있는 카디시와 함께 자주 술을 마셨다.
밤이면 폴록이 만취해 귀가할 때마다 그가 과음하는 것은 카디시가 동행하기 때문이라며 리는 카디시를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폴록이 그림을 그리지 않고 빈둥거리는 것도 카디시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리는 스텔라(폴록의 어머니)를 나무랐고 샌드를 나무랐으며 나를 나무랐다. 그녀는 잭슨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나무랐다”고 카디시가 투덜거렸다.
카디시에 대한 리의 미움이 얼마나 심했던지, 1956년 폴록의 장례식 때 그녀가 카디시를 참석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폴록의 가족들은 카디시가 참석하지 않으면 자기들이 장례식을 보이코트하겠다고 우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리는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하려고 했으며 동양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중간 무심의 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7월에 그린버그가 폴록을 방문했다. 그는 4년 전에 폴록을 만난 이래 줄곧 그를 찾고 있었다.
그는 미술세계에서의 자신의 역할이 “마치 여행자와도 같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린버그는 “회화의 내용은 저습지이다”, “회화는 회화이면서 회화이다”라고 말했으며, 지식이 오로지 경험의 확실한 자료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처럼 현상은 다른 현상들과의 고유한 관계 안에서 연구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세대는 모두 천재들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폴록의 화실에 들어섰을 때 그린버그는 폴록이 막 완성하여 말리려고 벽에 걸어놓은 <파란 무의식 Blue Unconscious>을 보았고, 바닥에 펼쳐놓고서 이제 막 그리기 시작한 <과거의 것들 Something of the Past>도 보았다.
그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한동안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으로 눈 언저리를 누르면서 그림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다.
그린버그는 바닥에 놓인 그림을 바라보면서 “저건 아주 흥미있군. 여보게, 저런 그림을 여덟 번이나 열 번쯤 더 그리게”라고 폴록에게 말했다.
폴록은 그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는데 과거에 그의 충고가 얼마나 효험이 있었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린버그는 순수추상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회화의 형태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며, 폴록이 전체적으로 구성하는 홀리스틱 화법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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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스프링스에 둥지를 틀다

1945년 8월 폴록 부부와 학교 친구 카디시 부부는 몇 주를 함께 보내기 위해 롱아일랜드의 이스트 햄프턴으로 갔다.
그때만 해도 그곳은 대부분의 집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수세식 변소도 없는 시골이었다.
그들은 롱아일랜드 동쪽 끝에 있는 작은 동네 아마간셋에 방이 둘 있는 집을 세냈다.
집은 비좁았고 지붕에서는 비가 샜으며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폴록에게는 들판을 바라보면서 아리조나 주의 광활한 평야를 상기할 수 있어 즐거운 휴가였다.

카디시 부부가 그 집을 세얻었던 이유는 그 동네에서 자신들이 살 집을 장만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폴록과 리는 두 사람을 따라다니며 복덕방 사람이 보여주는 집들을 구경했다.
넓은 들판이 있는 그곳에서 지내다보니 이런 곳에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리는 이런 곳에서 살게 된다면 자동차도 술집도 없으니 폴록이 술을 덜 마실테고 마음의 여유도 생겨서 두 사람 다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리가 은근히 폴록의 의중을 물었다.
처음에는 폴록이 “미쳤냐? 뉴욕을 떠나다니!”라고 했고
리는 “나도 모르겠어.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라고 대꾸했다.
그런데 며칠 후 폴록이 리에게 이 곳에서 살자고 제의해서 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폴록은 근본적으로 시골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로부터 떠나고 싶어 했고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고 스프링스에서 상점을 경영했던 댄 밀러는 전한다.

어쨌든 폴록과 리는 두 사람이 살 만한 집을 알아보았다.
리는 그곳의 4에이커(약 4,900평)나 되는 땅에 새로 잘 지은 집에서 살고 있는 로버트 마더웰에게 연락했고, 마더웰은 복덕방 사람 에드 쿡을 소개했다.
쿡이 보여준 집은 5에이커의 땅에 이층집이 딸린 백 년 된 농장으로 앞마당에는 오래된 나무와 헛간이 있었고 뒷마당에는 창고 몇 개가 있었다.
그 집에는 전기와 수도는 공급되었지만 목욕탕과 난방시설은 없었고 변소는 집 바깥에 있었다.
쿡은 월세가 40달러이고 집을 산다면 5,000달러인데 흥정할 생각은 아예 말라고 미리 단호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돈이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우선 6개월 동안은 월세로 살고 그동안에 같은 조건으로 집을 사겠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삽입하라고 했다.
6개월 후란 1946년 4월을 의미했다.

폴록과 리는 그동안 동거하고 있었는데 이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했다.
리는 시청에 가서 선서한 후 서류상으로 혼인신고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만 폴록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다면 아예 결혼하지 않겠다고 우겼다.
리는 유태인인 자신과 세례도 받지 않은 폴록의 결혼식을 주례할 목사를 찾기가 어려울 것만 같아 로젠버그의 아내 메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메이는 리와 함께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며 몇 군데 전화를 걸어봤지만 랍비(유태 공회당 당회장)조차 두 사람의 결혼식 집전을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알려진 네덜란드인들의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는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두 사람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혼인하지 않고 동거해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죄를 짓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라고 설득했다.
목사 찰스 프렌벡은 주례를 서겠다며 “하나님께서 이해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교인들이 아는 것을 원치 않아 “이 문제에 관해 조용히 하도록 하고 문제가 안 되게 하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결혼식에 양가 친척은 한 사람도 부르지 않기로 합의했고, 페기에게 증인으로 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그녀는 “왜 결혼하려고 해요? 당신은 충분히 결혼하지 않았어?”라하고는 누가 또 증인으로 오느냐고 물어 메이가 온다고 말하자 증인으로 참석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녀는 자기가 싫어하는 메이와 로젠버그의 아내 메이가 같은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이었다.

결혼식은 1945년 10월 25일 5번가에 있는 마블 콜리게잇 교회에서 폴록과 리, 메이 세 사람만이 참석한 가운데 올려졌다.
증인은 두 사람이어야 했으므로 교회에서 잡일을 하고 있던 어거스트 술즈가 본인은 원하지도 않던 증인석에 서게 되었다.
결혼식은 십 분밖에 안 걸렸다. “결혼식은 아주 좋았어요.
목사는 말을 잘 했지요.
그는 종교와 하나님에 관해서 말했고 아주 훌륭했어요”라고 리는 당시를 회상했다.

두 사람은 식을 마치고 아파트로 와서 이사 갈 준비를 서둘렀다.
결혼이란 이제 리가 좀더 주도권을 행사한다는 의미였다.
결혼 후에는 리가 폴록에게 명령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친구들이 있을 때는 폴록이 리에게 명령하지만 그건 그가 친구들에게 자신의 남성다움을 시위하려고 그러는 것뿐이었고 실제로 폴록은 리의 간섭범위 안에 있게 되었다.

이스트 햄프턴이 예술가들의 동네로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인 막스 에른스트, 장 에이옹, 시인 브르통과 입체주의 예술가 레제가 그곳에서 살면서부터였다.
역에 가서 택시 기사에게 “어디로 가면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습니까?”하고 물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카디시와 마더웰이 먼저 그곳에 집을 장만했고 이제 폴록이 그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폴록이 거주하는 곳은 이스트 햄프턴 남쪽에 있는 스프링스로서 가난한 어부와 농부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이스트 햄프턴에 사는 사람들은 스프링스 사람들을 가난하고 천한 시골뜨기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 지역 사람들은 근처 바닷가에서 조개와 패주를 잡았고 감자 농사를 지었다.
주민은 360명 가량 되었는데, 그들은 매주 빙고 게임을 하면서 함께 어울리곤 했다.

1945년 11월 첫째 월요일에 폴록과 리는 고기를 실어나르는 트럭으로 짐을 운반했다.
리는 스프링스를 좋아했다.
거기에는 술집이 없었고, 파티가 없었고, 페기가 없었으며, 동성연애자들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폴록 부부에 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이웃에 살던 엘윈 해리스가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전화번호 492- 002를 폴록과 함께 사용했는데 “잭슨은 항상 과음했고, 난 전화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가 뉴욕에 있는 작가들과 너무 빈번히 통화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리는 그때를 지옥과도 같았다고 회상한다.
기름도 더운 물도 없었으며, 화장실도 집 안에 없었다.
그들은 담요로 몸을 말고는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기온이 내려가면 화장실 변기가 자주 얼었고 폴록은 아침에 토치 남포를 가지고 가서 얼음을 녹여야 했다.
석탄은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래로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해야 했는데 나무값이 비싸서 마치 종이를 태우는 듯했다고 리는 말했다.
“폴록은 차를 사려고 은행에 융자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그는 이웃에게서 2달러에 자전거를 한 대 구입했다.
폴록은 자전거를 타고 물감을 사러 상점에 갔다가는 돌아오는 길에 맥주를 두어 상자씩 사가지고 오곤 했다.”

집을 살 수 있는 만기일이 다가왔으나 돈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리는 페기에게 가서 2,000달러를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페기는 거절하면서 샘 쿠츠(Sam Kootz)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러자 리는 쿠츠에게도 갔었다고 하면서 쿠츠가 2,000달러를 꾸어주는 조건으로 폴록이 그의 화랑으로 적을 옮겨야 한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그러자 페기는 “네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내가 죽거든 그때나 그에게 가라”고 화를 버럭 내면서 2,000달러를 꾸어주었다.
페기는 후에 이 일에 관해 “성가신 리와 더 이상 그 문제로 다투기 싫어서 꾸어주었다”고 했다.
나머지 3,000달러는 은행에서 집을 담보로 융자해주었으므로 두 사람은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당시 페기는 폴록에게 월급으로 300달러를 지급하고 있었는데 2,000달러에 대한 부분적 지불방법으로 매달 50달러씩 제하겠다고 말했고, 폴록의 그림 세 점을 담보로 요구했다.
그 요구에는 <파시패>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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