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이제 이젤 회화는 죽었다”

1947년 1월 폴록의 네 번째 개인전이 열렸고, 그린버그는 그해 2월호 『네이션』지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잭슨 폴록이 ‘금세기 예술’ 화랑에서 가진 네 번째 전람회는 그의 첫 전람회 이래 가장 훌륭했다. 그것은 진전을 향해 커다란 한 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그는 폴록에 관해 장황하게 기술했지만 독자들은 그의 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형식주의 논리도 낯설었지만 사람들은 폴록의 그림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가 “폴록은 아마 이젤의 이면, 운동의 이면, 테 두른 그림, 벽화를 가리켰던 것 같으나 아마 그렇지 않았을른지도 모르겠다.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고 적은 부분에 대해서 독자들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린버그의 유명한 말 “이제 이젤 회화는 죽었다”는 이론이 그의 글에서 조금씩 시사되기 시작했다.
그는 폴록이 역사적인 힘으로서, 입체주의에 귀속되고마는 현대미술을 자유롭게 풀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칼 마르크스의 이론 중 ‘역사의 사필귀정’을 평론에 적용했다.
그는 현대회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네 이래로 미술의 진화는 환영주의를 점차 배제하는 데 있었음을 알아챘으며, 폴록의 근원적인 성취는 바로 입체주의의 창시자인 피카소와 브라크를 능가하는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의 자신감은 타당성이 있었다.
입체주의 예술가들은 공간을 평평하게 하면서도 형태들을 구별했지만 폴록은 캔버스를 전체로 구성하면서 형태들의 구별마저도 부수어버렸기 때문이다.

리가 폴록에게 이미지들이 나타날 때에 왜 그 이미지들을 그리는 것을 중단하느냐고 묻자 이미지들이 베일 안에 싸여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잭슨은 순수한 질로 그림을 분해하여 분명한 순수감각으로써 그것을 반복들의 축적으로 바꾸었는데 근래 감각에 대한 어떠한 근원적인 점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그린버그는 1948년에 『파티잔 리뷰』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린버그는 이차대전 후 평론 부문의 으뜸가는 이론가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1940년대의 평론은 동료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파티잔 리뷰』에서 그와 함께 편집위원으로 일했던 필립 라브(Philip Rahv)는 그린버그가 독선적이었으며 폴록을 치켜세우면서 평론가로서의 자신의 성공을 꾀했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델모어 슈워츠(Delmore Schwartz)는 그린버그의 이론을 의심했다.
그는 그린버그가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의 미학을 자신의 형식주의에 적용했지만 칸트의 책 앞부분 서른 장을 겨우 읽고서 칸트를 이해한 듯이 행세한다고 못마땅해 했다.

1947년 12월 『타임』지는 그린버그가 영국인들의 잡지 『호라이즌 Horizon』에서 폴록을 가리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화가”라고 기고한 글의 내용을 ‘가장 최고?’라는 제목으로 보도하면서 폴록의 그림 <열쇠 The Key>를 게재했다.
그 잡지에서 그만 그림을 거꾸로 싣는 실수를 범하기는 했지만(추상화는 앞뒤가 없는 전차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래서 폴록은 뒤샹에게 8인치를 잘라내도 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쨌든 폴록이 가장 최고임을 시사하는 기사였다.

이제 여러분은 폴록이 왜 그린버그를 만나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얌전해지는지를 납득했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누구에게도 당당하지만 자신을 칭찬하는 평론가에게는 아주 공손한 법이다.
그러다가도 평론가가 회의적인 글이라도 발표하면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분노하면서 이를 간다.
폴록은 그린버그를 만나고부터 그의 말투를 닮아갔으며 그의 이론에 힘입어 자신의 미학의 타당성을 주장하려고 했다.
구스턴이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게 되자 폴록도 그에게 방법을 물어 장학금을 신청했는데 당시 그가 제출했던 서류에도 그린버그의 영향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그는 “나는 이제 이젤 그림이 죽어가는 형태라고 믿고 있다.
현대의 느낌의 경향은 벽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나는 아직은 이젤로부터 벽화로 바뀌기에는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나 그린버그 같은 말투인가.

폴록은 고등학교를 중퇴했던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예술가였고 말주변이 아주 없었던 사내였다.
다만 그는 헨더슨 박사가 지적했던 대로 직관이 아주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예술가가 천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전에는 그래엄의 영향을 받아 그래엄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끔 달라지더니 이제는 그린버그의 영향을 받아 그린버그의 입으로 말하게 되었다.
어쨌든 폴록의 장학금 신청은 심사에서 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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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피에르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와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뒤샹: 약간의 관련은 있으나 사고의 형태로 말하면 같네.
분명하게 상이한 점은 힘있는 누드와 빠르게 움직이는 누드를 소개한 것일 테지.
아마 내가 미래주의 예술가들로부터 조금은 영향을 받았을 터인데 그때 난 미래주의 예술가들에 관해 알고 있었거든.
난 그들의 것을 왕과 왕후로 바꾸었네.
힘 있게 나타난 누드가 왕일세. 빠르게 움직이는 누드들을 십자형으로 움직이는 흔적처럼 남겼는데, 몸뚱어리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것은 전과 다름없네.

카반느: 제목을 the King and Queen Traversed by Nudes at High Speed로부터 왜 the King and Queen Traversed by Swift Nudes로 바꾸었습니까?

뒤샹: 문학적인 이유였어. ‘Swift’란 말을 스포츠에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은 그가 잘 뛰고 있다는 뜻이지.
그 말이 마음에 들더군.
Swift는 at High Speed에 비해 덜 문학적이지.

카반느: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 뒤에는 <파라다이스>가 아카데믹한 방법으로 그려져 있더군요.

뒤샹: 그것은 먼저 그린 그림이야.
1910년에 그린 것이네.

카반느: 1912년 봄부터 1913년까지 당신은 중요한 그림을 10여 점 그리셨더군요.
<두 누드: 힘 있는 것과 빠른 것>, <빠른 속력의 누드들에 의해 가로질러진 왕과 왕후>, <빠른 누드들에 의해 가로질러진 왕과 왕후>,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 <처녀 No.1>, <처녀 No.2>,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벌거벗겨진 신부>를 위한 습작, <독신자 기계>를 위한 습작, <큰 유리>를 위한 익살스러운 습작,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 그리고 <세 기본 정지들>과 <초콜릿 분쇄기>를 그리셨더군요.

뒤샹: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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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얼룩진 예술 Art Brut ’의 화가 장 뒤비페

장 뒤비페(Jean Dubuffet 1901~85)는 이차대전 이후 유럽에 출현한 몇몇 두드러진 예술가들 중 한 사람으로서 그의 영향은 유럽의 화가들뿐 아니라 미국 화가들에게도 미치고 있었다.
그는 교육을 받지 않은 아마추어 화가들, 어린아이, 정신병자, 정신박약아들의 그림을 연구했다.
그가 주로 영향을 받은 화가는 파울 클레였는데 클레는 이미 어린아이들과 정신박약아들의 그림들을 연구하고서 그들의 그림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들보다 더욱 훌륭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뒤비페는 1901년 2월 28일에 조르주 브라크와 라울 뒤피의 고향이며 조그만 항구가 있는 르 아브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포도주 상인이었다.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 그는 르 아브르에 있는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입학했고, 열일곱 살 때 파리로 가서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6개월 동안 재학한 후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이 형편없다고 불평하면서 자신의 화실을 열고 독학했다.
1930년에는 아버지가 유업으로 남겨준 사업을 더욱 확장하여 도매상으로 개업했다.
그의 사업적 아이디어는 적중했으므로 그는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1936년 그는 첫 아내와 이혼하고 같은 해에 에밀리 칼루(Emillie Carlu)를 만나 이듬해에 그녀와 결혼했다.

뒤비페는 어린아이들의 그림들을 유심히 관찰하고는 미친 듯 보이게 그리는 그들의 그림들을 자신은 미학적으로 순진하게 변형시켰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을 그는 ‘아르 브뤼(Art Brut: 얼룩진 예술)’라고 불렀다.
여러분은 아르 브뤼와 추상표현주의는 같은 것이지만 전자는 이미지를 조금 남기는 회화로서 프랑스인의 방법이라고만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뒤비페는 늘 인간의 여러 가지 상황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그림에 프래스터, 풀, 퍼티를 사용하면서 그 위에 갈겨 쓰듯이, 또 낡은 벽에 써 있는 낙서들처럼 서툴어 보이게 그렸다.
뒤비페는 아이들의 낙서에서 인간의 원천적인 표현방법을 발견했으며, 그래서 순진한 느낌을 주는 아이들의 그림에서 카타르시스적인 미학적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것들을 반개성적으로, 그것들이 일반적으로 나타난 모습들을 그려서 인간적 모습의 요소들이 되게 했다.
나는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어떤 기계적인 방법은 상상을 휘저었으며, 초상의 힘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는 기괴한 인간의 모습들이 야만적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문학적으로 복잡하여 마치 역사시대 이전의 모습들처럼 느껴지도록 그려냈다.
그가 회화적 기교들을 무시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들에서는 자아의식이 노출되었다.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방법, 즉 물감과 모래를 함께 사용하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우리는 전통주의와 단절하지 못했던 야수파와 입체주의를 이제 버림으로써 과거를 꼭 부수어버려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그림들이 뉴욕에서 소개되었고, 폴록도 그의 그림들을 보아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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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사이 나쁜 이웃사촌 해롤드 로젠버그

폴록 부부는 뉴욕에서 다시 스프링스로 돌아왔다.
폴록은 이듬해(1947년)에 열릴 네 번째 전람회를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마음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지난 번 전람회에 대한 평론가들의 무심함은 그에 대한 푸대접이었으나 전람회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페기를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것이 풋젤의 사망 이후 화랑의 운영이 더욱 나빠지자 그녀가 곧 화랑을 폐쇄하고 유럽으로 갈 궁리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폴록은 화랑이 폐쇄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전람회를 가지게 해달라고 페기에게 졸랐다.  

그녀는 1947년 1월 14일부터 2월 1일까지를 전시일정으로 잡아주었는데 이때는 크리스마스 직후라서 시기적으로 아주 나빴다.

폴록은 여전히 늦잠을 잤고, 아침 열한 시가 돼서야 일어나기 일쑤였으며,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카멜(Camel) 담배를 피우고나면 보통 열두 시가 되었다.
오후가 되면 그는 자전거를 타고 보세이(Bossey) 농장으로 가서 우유, 버터를 비롯해 그날 사용할 음식들을 사가지고 왔고, 그가 집(Gyp)이라고 부르는 강아지와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그는 동네에서 유일한 상점인 나이 많은 댄 밀러의 상점에 나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소일하곤 했다.
어느 날은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 찰리를 알게 되어 그와 동물에 관해 몇 시간이고 이야기했다.
다음날 찰리는 밀러에게 와서 폴록을 가리켜 “그 게을러빠진 시팔놈은 일도 안 하나봐. 넌 그가 일하는 걸 본 일이 있냐?”고 물었다.
며칠 후 폴록이 상점에 들렸을 때 밀러가 그 말을 전했는데 폴록은 오히려 좋아하면서 찰리와 더욱 가까워졌다고 밀러가 나중에 전했다.

그해 여름 해롤드 로젠버그가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스프링스로 이사 왔다.
폴록의 집 근처 모퉁이에 있는 집이었다.
그리하여 이제 두 부부는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이며 문학평론가로 알려진 로젠버그는 이제 미술평론가로도 낯설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30년대 말부터 『파티잔 리뷰』에 기고하고 있었고 그때부터 예술가들과 교류가 잦았다.
193㎝의 거구에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그는 말이 많았는데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다방면으로 지식이 많음을 곧 알 수 있었다.
로젠버그와 폴록은 잘 어울렸지만 두 사람 모두 고집이 보통 아니었으므로 자주 다투기도 했다.
폴록은 로젠버그가 평론가와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그를 빈정거렸고, 로젠버그는 폴록이 “원숭이처럼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평론가는 원숭이를 자주 방문했다.
두 사람이 만나면 평론가는 강의를 시작했고 원숭이는 말없이 듣기만 했는데 강의가 끝나면 폴록은 로젠버그가 회화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면서 “똥 같은 소리”만 지껄인다고 말했다.
폴록은 로젠버그를 화나게 하는 일을 즐겼다.

로젠버그의 아내 메이의 말로는 두 사람이 어느 날 차를 타고 바닷가로 가는 도중에 폴록이 지금 차를 세우지 않는다면 차에 오줌을 싸겠다고 그를 위협했고, 로젠버그는 “내가 차를 세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그런데 폴록은 그만 그의 차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
폴록의 오줌보는 유난히 작았는지 그에게는 오줌에 관한 에피소드가 많다.
언젠가는 로젠버그의 집에서 저녁식사 파티가 있었는데, 역시 폴록은 과음했고 말끝마다 로젠버그의 말에 대해 “개똥 같은 소리”라고 토를 달았다.
로젠버그는 그의 말을 무시하려고 했는데 폴록이 너무 같은 말을 반복하자 아버지가 아들을 타이르듯이 “네가 과음을 했구나. 여기에 앉아서 대화의 방해꾼이 되지 말고 윗층에 가서 잠이나 자거라”고 말했다.
폴록은 빙그레 웃으면서 윗층으로 향했다.

이렇게 소일만 하고 있는 폴록에게 리는 전람회를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자극하기 시작했다.
폴록은 창고를 화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일을 궁리하여 창고를 청소하는 데 온 여름을 보냈다.
창고에는 전 주인이 남겨두었던 쓸모없는 기계와 농기구들 그리고 갖은 잡동사니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선반과 장을 만들어 물감과 용기들을 넣었고, 창문을 눈높이로 개조하여 바깥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벽에 그림들까지 걸었더니 제법 화실 같아 보였다.
여름이 끝나고 화실은 완성되었으므로 그는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네 번째 전람회를 위해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였다.

그는 열다섯 점을 제작했는데 그중에는 <아카보낙 크릭(지류) Accabonac Creek>과 <초원의 소리들 Sounds in the Grass>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목과는 달리 그 그림들은 풍경화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이 그림들은 그가 이미지들을 베일로 감춘 듯이 그린 그림들보다는 진전된 것으로서 1947년에 그가 선보일, 물감을 떨어뜨리며 그린 그 유명한 그림을 위한 과도기적 그림들이었다.
특히 <초원의 소리들: 반짝이는 물질 Shimmering Substance>은 그의 과도기적 그림으로 단정하기에 충분한 그림이었다.
노란색과 흰색을 혼용하여 수백 개의 둥글고 작은 붓질을 가했던 그 그림은 작지만 밝게 빛났다.

그는 물감을 두텁게 사용하면서 버터와 같은 색조가 나타나도록 했다.
색조는 물감을 튜브에서 막 짜낸 듯이 보였다.
이제 그는 이미지를 베일로 더 덮어 감추었고 베일이 이미지를 대신하게 하여 완전한 추상화를 제작했다.
그가 그린 것들에는 <열기 속의 눈들 Eyes in the Heat>(71) <침울한 운동 Croaking Movement>, 그리고 <땅벌레들 Earth Worms>도 있었다.
그는 물감을 두텁게 고루 사용하여 그렸는데 그것은 그린버그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폴록은 비교적 작은 크기의 그림을 그렸다.
가장 컸던 <침울한 운동>도 그저 31×213㎝ 정도였고 <초원의 소리들>은 152×61㎝였다.
물감을 두텁게 사용하면서 완전추상을 추구하는 것이 폴록에게는 안성마춤이었다.
긴급한 느낌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캔버스에 쏟아 붇기에는 이보다 더 적절한 방법이 없었다.
그는 캔버스 전체를 하나의 구성으로 주제를 골고루 나누면서 이차원의 한계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폴록은 리에게 화실로 와서 그림들을 보라고 말했다.
리는 “크렘(클레멘트)이 좋아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녀의 판단은 적중했다.
그린버그는 당시 유럽에서 활약하고있던 장 뒤비페와 폴록을 견주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잭슨은 프랑스 예술가 뒤비페처럼 그의 캔버스를 전체적으로 고르게 했지만 지금 그의 그림은 뒤비페의 것보다 더욱 다양해 보인다.
그는 위험한 요소들, 실루엣과 창의적, 장식적인 주제들로 그림을 그리면서 어안이 벙벙하게 하는 요소들이 평평한 표면 위에서 전체적으로 합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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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라호그의 빈정대는 유머는 뒤샹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문학적인 제목과 그림에 나타난 유머 감각은 그가 좋아한 시인 줄 라호그의 영향이었다.
27세에 요절한 상징주의 시인 라호그는 뒤샹이 태어나던 해 사망했다.
라호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T. 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가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라호그의 니힐리즘, 아이러니, 그리고 빈정대는 유머는 뒤샹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라호그는 동음이의어를 거의 장난삼아 시어로 사용했으며, 두운법alliteration을 사용했고, 운율을 반복했으며, 두 낱말을 하나로 묶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요염한voluptuous’과 ‘결혼식nuptial’을 합쳐서 ‘요염한 결혼식voluptial’이란 말을 만들었고, ‘영원한eternal’과 ‘무nothing’를 합쳐서 ‘영원한 무eternullite’란 말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는 낭만적인 사랑, 결혼, 가족생활, 종교, 논리, 이성, 아름다움 등 어떤 전통적인 관념이라도 시를 통해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태양조차 우스꽝스럽게 묘사하여 태양은 병들고 “심장이 없는 별들의 웃음거리”라고 했다.

라호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뒤샹은 결혼에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1909년에 그린 드로잉 <일요일들>에서는 무뚝뚝한 남편이 유모차를 밀고 가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배가 남산만한 아내를 남편 옆에 그려 넣은 것은 라호그의 영향이었다.
라호그는 비탄스러운 결혼에 관한 시를 16편이나 썼다.
라호그는 뒤샹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 한 예로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는 본래 <가련한 젊은 남편 M Pauvre Jeune Homme M>이라는 제목이었다.
이 제목은 라호그의 작품 <비극Complaintes>의 소제목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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