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사이 나쁜 이웃사촌 해롤드 로젠버그
폴록 부부는 뉴욕에서 다시 스프링스로 돌아왔다.
폴록은 이듬해(1947년)에 열릴 네 번째 전람회를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마음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지난 번 전람회에 대한 평론가들의 무심함은 그에 대한 푸대접이었으나 전람회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페기를 나무랄 수만은 없는 것이 풋젤의 사망 이후 화랑의 운영이 더욱 나빠지자 그녀가 곧 화랑을 폐쇄하고 유럽으로 갈 궁리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폴록은 화랑이 폐쇄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전람회를 가지게 해달라고 페기에게 졸랐다.
그녀는 1947년 1월 14일부터 2월 1일까지를 전시일정으로 잡아주었는데 이때는 크리스마스 직후라서 시기적으로 아주 나빴다.
폴록은 여전히 늦잠을 잤고, 아침 열한 시가 돼서야 일어나기 일쑤였으며,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카멜(Camel) 담배를 피우고나면 보통 열두 시가 되었다.
오후가 되면 그는 자전거를 타고 보세이(Bossey) 농장으로 가서 우유, 버터를 비롯해 그날 사용할 음식들을 사가지고 왔고, 그가 집(Gyp)이라고 부르는 강아지와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그는 동네에서 유일한 상점인 나이 많은 댄 밀러의 상점에 나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소일하곤 했다.
어느 날은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 찰리를 알게 되어 그와 동물에 관해 몇 시간이고 이야기했다.
다음날 찰리는 밀러에게 와서 폴록을 가리켜 “그 게을러빠진 시팔놈은 일도 안 하나봐. 넌 그가 일하는 걸 본 일이 있냐?”고 물었다.
며칠 후 폴록이 상점에 들렸을 때 밀러가 그 말을 전했는데 폴록은 오히려 좋아하면서 찰리와 더욱 가까워졌다고 밀러가 나중에 전했다.
그해 여름 해롤드 로젠버그가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스프링스로 이사 왔다.
폴록의 집 근처 모퉁이에 있는 집이었다.
그리하여 이제 두 부부는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이며 문학평론가로 알려진 로젠버그는 이제 미술평론가로도 낯설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30년대 말부터 『파티잔 리뷰』에 기고하고 있었고 그때부터 예술가들과 교류가 잦았다.
193㎝의 거구에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그는 말이 많았는데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다방면으로 지식이 많음을 곧 알 수 있었다.
로젠버그와 폴록은 잘 어울렸지만 두 사람 모두 고집이 보통 아니었으므로 자주 다투기도 했다.
폴록은 로젠버그가 평론가와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 그를 빈정거렸고, 로젠버그는 폴록이 “원숭이처럼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평론가는 원숭이를 자주 방문했다.
두 사람이 만나면 평론가는 강의를 시작했고 원숭이는 말없이 듣기만 했는데 강의가 끝나면 폴록은 로젠버그가 회화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면서 “똥 같은 소리”만 지껄인다고 말했다.
폴록은 로젠버그를 화나게 하는 일을 즐겼다.
로젠버그의 아내 메이의 말로는 두 사람이 어느 날 차를 타고 바닷가로 가는 도중에 폴록이 지금 차를 세우지 않는다면 차에 오줌을 싸겠다고 그를 위협했고, 로젠버그는 “내가 차를 세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그런데 폴록은 그만 그의 차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
폴록의 오줌보는 유난히 작았는지 그에게는 오줌에 관한 에피소드가 많다.
언젠가는 로젠버그의 집에서 저녁식사 파티가 있었는데, 역시 폴록은 과음했고 말끝마다 로젠버그의 말에 대해 “개똥 같은 소리”라고 토를 달았다.
로젠버그는 그의 말을 무시하려고 했는데 폴록이 너무 같은 말을 반복하자 아버지가 아들을 타이르듯이 “네가 과음을 했구나. 여기에 앉아서 대화의 방해꾼이 되지 말고 윗층에 가서 잠이나 자거라”고 말했다.
폴록은 빙그레 웃으면서 윗층으로 향했다.
이렇게 소일만 하고 있는 폴록에게 리는 전람회를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자극하기 시작했다.
폴록은 창고를 화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일을 궁리하여 창고를 청소하는 데 온 여름을 보냈다.
창고에는 전 주인이 남겨두었던 쓸모없는 기계와 농기구들 그리고 갖은 잡동사니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선반과 장을 만들어 물감과 용기들을 넣었고, 창문을 눈높이로 개조하여 바깥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벽에 그림들까지 걸었더니 제법 화실 같아 보였다.
여름이 끝나고 화실은 완성되었으므로 그는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네 번째 전람회를 위해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였다.
그는 열다섯 점을 제작했는데 그중에는 <아카보낙 크릭(지류) Accabonac Creek>과 <초원의 소리들 Sounds in the Grass>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목과는 달리 그 그림들은 풍경화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이 그림들은 그가 이미지들을 베일로 감춘 듯이 그린 그림들보다는 진전된 것으로서 1947년에 그가 선보일, 물감을 떨어뜨리며 그린 그 유명한 그림을 위한 과도기적 그림들이었다.
특히 <초원의 소리들: 반짝이는 물질 Shimmering Substance>은 그의 과도기적 그림으로 단정하기에 충분한 그림이었다.
노란색과 흰색을 혼용하여 수백 개의 둥글고 작은 붓질을 가했던 그 그림은 작지만 밝게 빛났다.
그는 물감을 두텁게 사용하면서 버터와 같은 색조가 나타나도록 했다.
색조는 물감을 튜브에서 막 짜낸 듯이 보였다.
이제 그는 이미지를 베일로 더 덮어 감추었고 베일이 이미지를 대신하게 하여 완전한 추상화를 제작했다.
그가 그린 것들에는 <열기 속의 눈들 Eyes in the Heat>(71) <침울한 운동 Croaking Movement>, 그리고 <땅벌레들 Earth Worms>도 있었다.
그는 물감을 두텁게 고루 사용하여 그렸는데 그것은 그린버그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폴록은 비교적 작은 크기의 그림을 그렸다.
가장 컸던 <침울한 운동>도 그저 31×213㎝ 정도였고 <초원의 소리들>은 152×61㎝였다.
물감을 두텁게 사용하면서 완전추상을 추구하는 것이 폴록에게는 안성마춤이었다.
긴급한 느낌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캔버스에 쏟아 붇기에는 이보다 더 적절한 방법이 없었다.
그는 캔버스 전체를 하나의 구성으로 주제를 골고루 나누면서 이차원의 한계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폴록은 리에게 화실로 와서 그림들을 보라고 말했다.
리는 “크렘(클레멘트)이 좋아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녀의 판단은 적중했다.
그린버그는 당시 유럽에서 활약하고있던 장 뒤비페와 폴록을 견주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잭슨은 프랑스 예술가 뒤비페처럼 그의 캔버스를 전체적으로 고르게 했지만 지금 그의 그림은 뒤비페의 것보다 더욱 다양해 보인다.
그는 위험한 요소들, 실루엣과 창의적, 장식적인 주제들로 그림을 그리면서 어안이 벙벙하게 하는 요소들이 평평한 표면 위에서 전체적으로 합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