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뮌헨의 분위기
뒤샹이 뮌헨에 도착하기 수개월 전 칸딘스키와 그를 중심으로 한 예술가들은 신미술가협회를 탈퇴하고 청기사란 새 그룹을 결성했다.
신미술가협회는 1909년 1월에 결성된 그룹으로 칸딘스키와 애인 가브리엘 뮌터 외에도 러시아 사람 알렉세이 야울렌스키, 알렉산더 카놀트, 아돌프 에르보슬뢰, 그리고 마리안느 본 베레프킨이 주요 멤버로 참여했다.
이들은 판화가 헤르만 슬리트겐에게 그룹의 대표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멤버로도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칸딘스키가 그룹을 리드했다.
그해 예술가들이 그룹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는 파울 바움, 칼 호퍼, 블라디미르 베흐테예프, 에르마 보시, 모이세이 코간, 그리고 무용수 알렉산더 사차로프가 있었고, 프랑스인 피에르 지리엥과 앙리 르 호코니에가 가세한 것은 이듬해였다.
그들의 첫 전시회는 1909년 2월 뮌헨의 탄호이저 화랑에서 열려 독일의 여러 도시를 순회했다.
두 번째 전시회에는 많은 초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초대 작가들 가운데는 브라크, 피카소, 조르주 루오, 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 키스 반 동겐, 러시아의 다비드 부를류크와 블라디미르 부를류크 형제, 그리고 알프레드 쿠빈이 있었고, 조각가들 중에는 헤르만 할러, 베른하드 호트거, 그리고 에드윈 샤르프가 있었다.
그들이 두 번째 전시회를 위해 만든 카탈로그에는 르 호코니에와 오딜롱 르동의 글 외에도 칸딘스키의 글이 실렸는데, 칸딘스키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미술의 언어, 초인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전시회에 특별히 관심을 나타낸 예술가는 아우구스트 막케와 프란츠 마르크였다.
마르크는 1911년 2월에 그룹에 가세했는데 이때는 그룹에 막 금이 생길 무렵이었다.
칸딘스키는 1910년 11월 뮌터에게 편지를 보내며 “난 네게 솔직히 말하고 싶다. 난 그룹의 예술가들과 함께 어울리는 데서 어떤 즐거움도 찾을 수 없으며, 그들에게서 떠나기를 바란다”고 적었는데 바로 이듬해 1월 그룹의 대표직을 사임했다.
후임으로는 아돌프 에르보슬뢰가 선출되었다.
에르보슬뢰는 1904년 루드비히 헤르테리히의 문하에서 수학하기 위해 칼스루헤로부터 뮌헨에 와 있었다.
신미술가협회의 세번째 전시회는 1911년 11월에 열릴 예정이었다.
칸딘스키는 그때 커다란 크기의 그림을 소개하려고 했는데 그룹의 규칙에 의하면 멤버들은 두 점까지 크기가 43스퀘어피트 미만일 경우 심사를 거치지 않고 출품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추상화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칸딘스키의 그림이 너무 커서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칸딘스키는 그들의 태도에 환멸을 느끼고 그룹을 아예 탈퇴했으며, 그가 탈퇴하자 뮌터와 마르크도 덩달아 탈퇴했다.
칸딘스키는 탄호이저 화랑측에 따로 화랑을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화랑 측에서는 1911년 12월 18일에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허락했다.
칸딘스키는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회의 타이틀을 ‘제1회 청기사 편집위원회의 전시회’라고 했는데, 한 지붕 아래에서 신미술가협회 예술가들과 함께 각 방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이다.
전시회에는 칸딘스키, 뮌터, 마르크 외에도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모두 43점이 소개되었다.
전시회에 참여한 예술가들 중에는 막케, 들로네, 캄펜동크, 루소, 카흘러, 그리고 작곡가 쉰베르그가 포함되었다.
전시회는 1912년 1월 3일까지 계속되었으며, 독일의 여러 도시를 순회했다.
칸딘스키와 마르크는 1912년 5월에 청기사의 주서 『알마나크Almanac』를 발행했는데 칸딘스키는 겉표지를 검정색 배경에 파란색으로 승마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디자인했다.
칸딘스키는 “마르크와 나는 모두 파란색을 좋아한다. 마르크는 말을 사랑하고, 난 승마를 즐긴다. 그래서 청기사란 말이 절로 생긴 것이다”라고 했다.
미학에 관한 연구를 위해 주서에는 바바리안 농부들의 미술이 소개되었고, 원시미술, 고딕 조각, 중세 초기의 판화, 그리고 엘 그레코의 그림이 수록되었다.
또한 세잔, 루소, 반 고흐, 들로네, 브라크, 피카소의 그림들도 소개되었다.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주도 아래 청기사에는 마르크의 가까운 친구 막케와 캄펜동크가 1911년에 동조했으며, 이듬해 파울 클레가 『알마나크』에 작은 그림 한 점을 소개했다.
칸딘스키는 1910~13년에 <즉흥 25(사랑의 정원 No.1)를 위한 습작)>과 <즉흥 34(오리엔트 No.2)를 위한 습작)>를 포함하여 여러 점의 추상화를 즉석에서 수채화로 그렸다.
유화로 그릴 때도 물감을 엷고 투명하게 사용하여 수채화의 효과를 유도하였다.
세계대전의 기운이 감돌고 정치적·사회적으로 어수선하여 청기사 그룹은 2년밖에 활동하지 못했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그룹의 예술가들은 많은 책자를 발행했으며,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개최했고, 미학이론도 자주 발표하여 20세기 미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입체주의의 기하적인 화법과 들로네와 야수주의 예술가들이 주로 사용한 무지개 색에 그들 특유의 튜튼 기질인 원초적인 감성주의와 엄격한 정신을 보탰다.
이탈리아 미래주의 예술가들이 한창 기계문명과 현대 도시생활에 힘입어 인간의 감성적 환상을 무시하는 표현주의 미술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독일 예술가들은 인간의 영감을 좀 더 원시주의 자연과 동물적 신비주의에서 찾으려고 했다.
마르크는 동물을 은유적인 주제로 그리면서 “더러운 남자와 여자들이 나의 주위에 있으며 … 그들은 나의 실제 느낌을 일으키지 못하게 한다. 삶에 대한 자연적인 느낌은 동물들에게서 발견되고, 그것들의 동작은 모두 내게 만족스럽기만 하다”고 했다.
뒤샹은 뮌헨에서 청기사 그룹의 작품들을 보았지만, 그가 그곳에서 그린 그림들에는 그들의 영향이 발견되지 않는다.
20세기 미술의 대발견으로 칸딘스키가 추구한 완전추상은 뒤샹에게는 큰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는 완전추상을 반대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무관심하였다.
그의 대표작 <큰 유리>의 윗부분은 완전추상에 가깝지만 아랫부분은 전혀 추상이 아니다.
그는 칸딘스키의 미학이론을 읽었을 테지만 그를 만나지 않았고, 그를 만난 것은 퍽 후의 일이었다.
그는 막스 베르그만과도 자주 만나지 않았는데 베르그만은 뒤샹이 뮌헨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뮌헨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하임하우젠으로 가서 그곳 예술가들과 더불어 작업했다.
뒤샹은 기차로 그곳에 가서 그와 그곳 예술가들을 만났고, 1910년에 연필로 드로잉한 것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드로잉은 남자와 여자가 포옹하는 모습이었는데 여자는 장느 세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