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


뒤샹은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조차 벌거벗겨진 신부>(줄여서 <큰 유리>라고 부른다)를 그렸는데 <커피 분쇄기>와 유사한 모양으로 나타났다.
기계 이미지는 문명예찬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뒤샹 외에도 레제, 피카비아, 레이몽, 그리고 몇몇 예술가가 기계의 이미지들을 탐험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계 이미지에 비해 뒤샹의 것은 덜 현대적으로, <커피 분쇄기>의 경우 손으로 갈아야 하는 구식 기계의 모습이다.
그는 <처녀Virgin>란 제목으로 기계의 몸체를 습작했으며, 젖가슴과 들어 올린 무릎으로 여성을 상징했다.

1912년 7월 말에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을 그렸는데 그가 그릴 <큰 유리>의 부분적인 실험이었다.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은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처녀에서 신부로 변화하는 마음과 육체의 운동이었다.
처녀로부터 신부로 변화하는 데 무슨 운동이 필요할까?
문화사학자 제롤드 사이겔은 “처녀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여인 또는 아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신부가 되는 것은 처녀성을 잃어버리기 전의 준비상태이다”라고 설명했다.
신부가 되는 것은 불확실한 육체적 축복을 기대하는 환희의 짧은 기간에 도달하는 것이다.
뒤샹은 누드의 운동을 그리면서 입체주의 예술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땅의 색들인 브라운색, 황토색, 노란색, 그리고 검정색을 사용했다.
그의 그림에서 제목이 시사하는 신부의 미혼남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가는 선과 아주 가는 기다란 직사각형들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을 그린 후 8월에는 <신부>를 그렸다.
그는 어느 날 술집에서 취하도록 맥주를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신부’가 딱정벌레처럼 나타나 날개로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고 했다.
그의 꿈은 카프카의 『변신Transfiguration』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꿈을 꾼 후에 그린 <신부>는 그의 다른 그림들과 더불어 매우 신비스러운 그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작품도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과 마찬가지로 입체주의 방법으로 운동을 묘사한 것이다.
그는 미술관에 가서 19세기 스위스인 아르놀트 뵈클린과 16세기 독일인 루카스 크라나흐의 누드 그림을 발견하고 대단히 감동을 받고 “난 크라나흐의 그림을 대단히 좋아한다. 키가 큰 누드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그는 장미색, 복숭아색, 그리고 푸른 빛나는 회색을 서로 어우러지게 사용하여 그의 말대로 보지가 자지를 움켜쥐듯 관람자가 그림을 보면서 마음으로 에로틱함을 움켜쥐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진지한 그림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신부>를 완성한 후 뮌헨을 떠나 비엔나,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 등을 돌며 주요 미술관에 들러 대가들의 작품들을 관람했다.
베를린에서는 피카소를 위시한 프랑스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보았는데, 뒤샹은 입체주의가 독일 예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독일 예술가들은 인상주의에 반발하면서 자신들 나름대로 원초적인 감성의 표현을 힘 있게 나타내는 표현주의 회화에 전념하는 것을 보았다.
베를린에서 형들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입체주의 그림을 본 지 오래되었는데 다시 입체주의 그림을 보니 매우 유쾌하더군요”라고 적었고, 같은 편지에 <처녀 No.1>에 관해 언급하면서 파리로 보내 가을전을 통해 소개할 생각이라고 적었다.
그는 “친구가(막스 베르그만일 것이다) 다음 주 초에 내게로 와서 베를린의 밤의 인생을 보여줄 예정입니다”라는 말로 편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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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베티 파슨즈

1900년에 태어난 베티 파슨즈는 1921년에 결혼생활을 청산한 후 제2의 인생을 살 것을 결심하고 파리로 가서 조각을 배웠다.
그때 알베르토 자코메티와도 함께 수학하면서 우정을 나누었다.
미국 사람들은 파리에 가면 먼저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류작가 거투르트 스타인(Gertrude Stein)을 찾아가 그녀의 그룹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게 보통이었므로 베티도 그 그룹에서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그때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라 머피(Sara Murphy), 알렉산더 칼더, 화가이며 사진작가인 만 레이, 일본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사무 노구치, 다다(Dada)의 정신적인 대변인이었던 시인 트리스탄 차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33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캘리포니아 주에 거주하면서 러시아인 예술가 나움 가보의 친구가 되었으며, 마를렌느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등 유명 배우들과 교제했다.
고향 뉴욕으로 돌아온 후에는 유명한 무용가 마사 그래엄(Marth Graham)을 만났다.  

그녀는 폴록의 그림들을 좋아했지만 “아무도 폴록의 그림을 소개하는 위험한 투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페기가 그를 나의 무릎에 버렸다”고 말했다.
베티는 스위니에게 폴록과 페기 두 사람이 무슨 엉뚱한 짓을 할지 모르니 자신을 위해 두 사람을 경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1947년 5월 31일 화랑 ‘금세기 예술’의 문은 굳게 닫혔다. 페기의 화랑의 폐쇄는 일시적으로 뉴욕에 일식현상을 가져다준 듯이 보였다.
페기는 곧 유럽으로 갔으며 베니스에 안주하여 그곳에 미술관을 개관했다.
그녀는 시간이 나는 대로 그녀가 구입한 곤돌라를 타고 그랜드 캐널을 유람했으며 칼더가 디자인해준, 은으로 된 침대에서 잠을 잤다.
베니스 사람들은 그녀를 “최후의 여공작(Last Duchess)”이라고 불렀다.
어쨌거나 뉴욕은 “경제적 천사”를 잃고 말았다.
브르통도 페기와 마찬가지로 뉴욕 생활에 실망한 채 파리로 돌아갔는데 그가 유럽에 돌아와 보니 초현실주의는 사망하고 대신 실존주의가 성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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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페기는 폴록을 베티의 무릎에 버렸다”

페기는 화랑을 폐쇄한 후 6년 동안의 뉴욕 생활을 청산하고 유럽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뉴욕에 온 뒤로 그녀에게는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남편 에른스트가 그녀를 버리고 그 빌어먹을 초현실주의 예술가 도로티아 타닝과 함께 아리조나 주로 가버렸고, 열정적으로 그녀를 도왔던 풋젤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으며, 화랑의 운영은 나빠졌다.
또 개인전을 열어주며 후원했던 마더웰과 바지오츠는 다른 화랑으로 가버렸으며, 공들여 키우고 있는 폴록의 평판은 아직 미정이었다.
그녀는 뉴욕 생활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폴록의 위치는 최고의 예술가가 아니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예술가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던지 모마는 1946년에 ‘열네 명의 미국 예술가들’이라는 명제로 대규모 전람회를 개최하면서 폴록을 제외시켰다.

페기는 미처 팔지 못한 폴록의 많은 그림들을 여전히 소장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유럽으로 운반한들 유럽 사람들이 그것을 살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림들 일부를 예일 대학과 아이오와 대학을 포함한 몇몇 대학에 기증했는데 그들조차도 그것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몇 년 후 폴록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페기는 아이오와 대학에 기증했던 폴록의 벽화(페기의 아파트를 위해 그린)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며 대신 브라크의 콜라주 그림을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대학 당국이 이를 사절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이래저래 페기는 뉴욕에서 손해를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재산에 비하면 그녀의 손해는 여러분이 동정해주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이제 그녀는 뉴욕을 떠나면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계약서에 의하면 그녀가 앞으로도 폴록에게 매달 300달러씩 일 년을 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페기는 그녀 대신에 어린아이 같은 폴록을 돌볼 보모를 찾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페기는 샘 쿠츠에게 그녀를 대신해서 폴록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쿠츠는 그의 그림들에 관심이 없다면서 자신은 알코올 중독자를 위해 일할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쿠츠가 그런 말을 할 만도 했다.
몇 주 전 토요일 오후에 폴록이 만취상태로 그의 화랑에 와서는 “내가 여기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그린 시팔놈들보다 낫다!”고 소리를 질렀고 쿠츠는 그에게 제발 화랑을 떠나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피에르 마티스와 커트 발렌틴은 폴록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줄리앙 레비는 화랑을 폐쇄한 상태였다.

쿠츠가 폴록에게 대단히 실망한 이상 페기가 찾아갈 곳은 여자 중개상 베티 파슨즈의 화랑뿐이었다.
베티는 “난  잭슨에게 반했다”면서 그렇지만 자신은 폴록을 책임질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고 말했었으므로 페기는 그녀를 만나면 흥정 끝에 무슨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파슨즈는 이 시기에 마크 로드코, 바넷 뉴먼, 그리고 클리포드 스틸을 자신의 화랑에 전속시키고 있었다.
이 세 예술가는 뉴욕 화단의 주역들이었고 베티는 작가를 선택할 줄 알았다.
페기는 파슨즈 화랑을 찾아갔다.
그녀의 화랑은 복도를 가운데로 하고 쿠츠의 화랑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베티는 작은 엉덩이에 파란 눈, 짧은 회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으며 광대뼈가 나와 팔자가 세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다 빈치처럼 앞이마가 튀어나온 그녀의 얼굴은 장식예술품처럼 보였다고 어떤 사람은 기술했다.
“베티를 쳐다보노라면 스핑크스, 나움 가보의 조각을 멀리에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고 솔 스타인버그는 말했다.

그녀는 1940년대 초에 웨익필드(Wakefield) 책방 지하실에서 처음으로 중개상 일을 시작했는데 화랑 ‘금세기 예술’이 폐쇄되기 전에 화랑을 개업한 것이 아주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페기는 베티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베티가 폴록을 위해 1947~48년 시즌에 전람회를 열어주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팔리지 않은 폴록의 그림들에 대하여 중개 매매자의 역할을 해준다면 커미션을 줄 것이며, 자신은 계약대로 폴록에게 만기일인 1948년 2월 5일까지 매달 300달러를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제안치고는 불리할 게 없었다.
그러나 베티는 폴록의 음주벽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남편의 동성애와 음주벽 때문에 이혼하고 지금 혼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는 폴록이 이제는 ‘안정상태’라고 베티에게 말하면서 그녀의 결심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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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뮌헨의 분위기

 

뒤샹이 뮌헨에 도착하기 수개월 전 칸딘스키와 그를 중심으로 한 예술가들은 신미술가협회를 탈퇴하고 청기사란 새 그룹을 결성했다.
신미술가협회는 1909년 1월에 결성된 그룹으로 칸딘스키와 애인 가브리엘 뮌터 외에도 러시아 사람 알렉세이 야울렌스키, 알렉산더 카놀트, 아돌프 에르보슬뢰, 그리고 마리안느 본 베레프킨이 주요 멤버로 참여했다.
이들은 판화가 헤르만 슬리트겐에게 그룹의 대표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멤버로도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칸딘스키가 그룹을 리드했다.
그해 예술가들이 그룹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는 파울 바움, 칼 호퍼, 블라디미르 베흐테예프, 에르마 보시, 모이세이 코간, 그리고 무용수 알렉산더 사차로프가 있었고, 프랑스인 피에르 지리엥과 앙리 르 호코니에가 가세한 것은 이듬해였다.
그들의 첫 전시회는 1909년 2월 뮌헨의 탄호이저 화랑에서 열려 독일의 여러 도시를 순회했다.

두 번째 전시회에는 많은 초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초대 작가들 가운데는 브라크, 피카소, 조르주 루오, 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 키스 반 동겐, 러시아의 다비드 부를류크와 블라디미르 부를류크 형제, 그리고 알프레드 쿠빈이 있었고, 조각가들 중에는 헤르만 할러, 베른하드 호트거, 그리고 에드윈 샤르프가 있었다.
그들이 두 번째 전시회를 위해 만든 카탈로그에는 르 호코니에와 오딜롱 르동의 글 외에도 칸딘스키의 글이 실렸는데, 칸딘스키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미술의 언어, 초인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전시회에 특별히 관심을 나타낸 예술가는 아우구스트 막케와 프란츠 마르크였다.
마르크는 1911년 2월에 그룹에 가세했는데 이때는 그룹에 막 금이 생길 무렵이었다.

칸딘스키는 1910년 11월 뮌터에게 편지를 보내며 “난 네게 솔직히 말하고 싶다. 난 그룹의 예술가들과 함께 어울리는 데서 어떤 즐거움도 찾을 수 없으며, 그들에게서 떠나기를 바란다”고 적었는데 바로 이듬해 1월 그룹의 대표직을 사임했다.
후임으로는 아돌프 에르보슬뢰가 선출되었다.
에르보슬뢰는 1904년 루드비히 헤르테리히의 문하에서 수학하기 위해 칼스루헤로부터 뮌헨에 와 있었다.

신미술가협회의 세번째 전시회는 1911년 11월에 열릴 예정이었다.
칸딘스키는 그때 커다란 크기의 그림을 소개하려고 했는데 그룹의 규칙에 의하면 멤버들은 두 점까지 크기가 43스퀘어피트 미만일 경우 심사를 거치지 않고 출품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추상화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칸딘스키의 그림이 너무 커서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칸딘스키는 그들의 태도에 환멸을 느끼고 그룹을 아예 탈퇴했으며, 그가 탈퇴하자 뮌터와 마르크도 덩달아 탈퇴했다.

칸딘스키는 탄호이저 화랑측에 따로 화랑을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화랑 측에서는 1911년 12월 18일에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허락했다.
칸딘스키는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회의 타이틀을 ‘제1회 청기사 편집위원회의 전시회’라고 했는데, 한 지붕 아래에서 신미술가협회 예술가들과 함께 각 방에서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이다.
전시회에는 칸딘스키, 뮌터, 마르크 외에도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모두 43점이 소개되었다.
전시회에 참여한 예술가들 중에는 막케, 들로네, 캄펜동크, 루소, 카흘러, 그리고 작곡가 쉰베르그가 포함되었다.
전시회는 1912년 1월 3일까지 계속되었으며, 독일의 여러 도시를 순회했다.

칸딘스키와 마르크는 1912년 5월에 청기사의 주서 『알마나크Almanac』를 발행했는데 칸딘스키는 겉표지를 검정색 배경에 파란색으로 승마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디자인했다.
칸딘스키는 “마르크와 나는 모두 파란색을 좋아한다. 마르크는 말을 사랑하고, 난 승마를 즐긴다. 그래서 청기사란 말이 절로 생긴 것이다”라고 했다.
미학에 관한 연구를 위해 주서에는 바바리안 농부들의 미술이 소개되었고, 원시미술, 고딕 조각, 중세 초기의 판화, 그리고 엘 그레코의 그림이 수록되었다.
또한 세잔, 루소, 반 고흐, 들로네, 브라크, 피카소의 그림들도 소개되었다.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주도 아래 청기사에는 마르크의 가까운 친구 막케와 캄펜동크가 1911년에 동조했으며, 이듬해 파울 클레가 『알마나크』에 작은 그림 한 점을 소개했다.

칸딘스키는 1910~13년에 <즉흥 25(사랑의 정원 No.1)를 위한 습작)>과 <즉흥 34(오리엔트 No.2)를 위한 습작)>를 포함하여 여러 점의 추상화를 즉석에서 수채화로 그렸다.
유화로 그릴 때도 물감을 엷고 투명하게 사용하여 수채화의 효과를 유도하였다.

세계대전의 기운이 감돌고 정치적·사회적으로 어수선하여 청기사 그룹은 2년밖에 활동하지 못했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그룹의 예술가들은 많은 책자를 발행했으며,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개최했고, 미학이론도 자주 발표하여 20세기 미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입체주의의 기하적인 화법과 들로네와 야수주의 예술가들이 주로 사용한 무지개 색에 그들 특유의 튜튼 기질인 원초적인 감성주의와 엄격한 정신을 보탰다.
이탈리아 미래주의 예술가들이 한창 기계문명과 현대 도시생활에 힘입어 인간의 감성적 환상을 무시하는 표현주의 미술을 추구한 것과는 달리 독일 예술가들은 인간의 영감을 좀 더 원시주의 자연과 동물적 신비주의에서 찾으려고 했다.
마르크는 동물을 은유적인 주제로 그리면서 “더러운 남자와 여자들이 나의 주위에 있으며 … 그들은 나의 실제 느낌을 일으키지 못하게 한다. 삶에 대한 자연적인 느낌은 동물들에게서 발견되고, 그것들의 동작은 모두 내게 만족스럽기만 하다”고 했다.

뒤샹은 뮌헨에서 청기사 그룹의 작품들을 보았지만, 그가 그곳에서 그린 그림들에는 그들의 영향이 발견되지 않는다.
20세기 미술의 대발견으로 칸딘스키가 추구한 완전추상은 뒤샹에게는 큰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는 완전추상을 반대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무관심하였다.
그의 대표작 <큰 유리>의 윗부분은 완전추상에 가깝지만 아랫부분은 전혀 추상이 아니다.
그는 칸딘스키의 미학이론을 읽었을 테지만 그를 만나지 않았고, 그를 만난 것은 퍽 후의 일이었다.
그는 막스 베르그만과도 자주 만나지 않았는데 베르그만은 뒤샹이 뮌헨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뮌헨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하임하우젠으로 가서 그곳 예술가들과 더불어 작업했다.
뒤샹은 기차로 그곳에 가서 그와 그곳 예술가들을 만났고, 1910년에 연필로 드로잉한 것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드로잉은 남자와 여자가 포옹하는 모습이었는데 여자는 장느 세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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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리의 질투심

시골에 거주하면서 함께 술을 마실 동지가 필요하던 차에 폴록은 고맙게도 적당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전에 두 번 만난 적이 있는 로저 윌콕스였다.
그는 키가 컸고 사냥개처럼 생겼으며 폴록과 마찬가지로 개성이 강했다.
소유욕이 강한 아내로부터의 탈출을 기도했던 점도 폴록과 상통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봉착한 문제들을 털어놓고 서로를 위로하기에 아주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폴록에게 그는 신비로운 인물로 나타났다. 그는 직업이 없었고 과거에도 일한 적이 없어 보였으나 경제적으로는 폴록보다 나은 편이었다.
폴록이 그 까닭을 물으니까 그는 기계를 두 개 특허내어 그것들에서 수입이 생긴다고 주장하면서 “난 매달 우편함에서 수표를 집어온다”고 말했다.

폴록보다 열 살이 많았지만 그는 몇 시간을 떠들어도 지칠 줄 모르는 건강한 사내였다.
그는 한때 자신도 예술가로서 활약한 적이 있었다면서 그 6개월 동안 교통했던 작가들의 이름을 거론했는데 폴록은 그 숫자가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술가들의 수보다 더 많아 놀랐다.
윌콕스의 아내는 남편의 친구에게 친절했고, 리는 그가 제2의 카디시가 되어 폴록을 술독에 묻지나 않을까 하고 저으기 염려했다. 
 

이 무렵 폴록이 리에게서 탈출하여 다른 여자와 함께 아예 먼 곳으로 달아날 계획이라는 유머가 떠돌고 있었고, 리는 그런 돼먹지 않은 년이 누구인지를 찾아내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리는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폴록이 마더웰의 아내와 함께 마더웰의 고급 승용차 MG 컨버터블(지붕이 위로 열리는 스포츠카)을 타고 드라이브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리는 질투심이 불길처럼 솟아올랐다. 마더웰의 아내 마리아(Maria)는 스페인 여인으로서 전에 댄서였던 만큼 정열적이고 육감적으로 생긴 여인이었다.
마더웰이 여름이면 멕시코를 방문하더니 스페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폴록은 마리아와 함께 차로 장을 보러 자주 갔고 때로는 레스토랑에 가서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둘만이 알 터이지만 리의 의심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윌콕스는 폴록의 편에 섰던 사람으로서 이렇게 말했다.
“마리아는 잘생겼으며 어느 누구하고라도 연애할 수 있는 여인이다.” 
 

그의 말은 폴록이 그녀와 연애를 했다는 말 같기도 했고, 그가 연애를 했다 치더라도 그것은 폴록의 잘못이 아니라 마리아의 잘못이라는 말 같기도 했는데 도무지 폴록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말이었다.
폴록은 리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리는 다시는 그들의 인생에 마더웰 부부가 나타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얼마 후 마더웰이 폴록을 방문했을 때 폴록은 집 밖으로 나와서 그에게 사과하듯이 “리가 나더러 다시는 너를 만나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고 말하자 마더웰은 차를 타고 가버렸다.
폴록은 나중에 자신은 마더웰의 그림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고, 다른 예술가들을 대하듯이 그를 ‘시팔놈’이라고 불렀다.
아무튼 그후 여인들이 폴록을 찾아오면 그는 현관 앞에서 그들을 냉대하면서 리에게 잃어버린 신용을 되찾으려고 노력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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