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티 파슨즈
1900년에 태어난 베티 파슨즈는 1921년에 결혼생활을 청산한 후 제2의 인생을 살 것을 결심하고 파리로 가서 조각을 배웠다.
그때 알베르토 자코메티와도 함께 수학하면서 우정을 나누었다.
미국 사람들은 파리에 가면 먼저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류작가 거투르트 스타인(Gertrude Stein)을 찾아가 그녀의 그룹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게 보통이었므로 베티도 그 그룹에서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그때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라 머피(Sara Murphy), 알렉산더 칼더, 화가이며 사진작가인 만 레이, 일본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사무 노구치, 다다(Dada)의 정신적인 대변인이었던 시인 트리스탄 차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33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캘리포니아 주에 거주하면서 러시아인 예술가 나움 가보의 친구가 되었으며, 마를렌느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등 유명 배우들과 교제했다.
고향 뉴욕으로 돌아온 후에는 유명한 무용가 마사 그래엄(Marth Graham)을 만났다.
그녀는 폴록의 그림들을 좋아했지만 “아무도 폴록의 그림을 소개하는 위험한 투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페기가 그를 나의 무릎에 버렸다”고 말했다.
베티는 스위니에게 폴록과 페기 두 사람이 무슨 엉뚱한 짓을 할지 모르니 자신을 위해 두 사람을 경계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1947년 5월 31일 화랑 ‘금세기 예술’의 문은 굳게 닫혔다. 페기의 화랑의 폐쇄는 일시적으로 뉴욕에 일식현상을 가져다준 듯이 보였다.
페기는 곧 유럽으로 갔으며 베니스에 안주하여 그곳에 미술관을 개관했다.
그녀는 시간이 나는 대로 그녀가 구입한 곤돌라를 타고 그랜드 캐널을 유람했으며 칼더가 디자인해준, 은으로 된 침대에서 잠을 잤다.
베니스 사람들은 그녀를 “최후의 여공작(Last Duchess)”이라고 불렀다.
어쨌거나 뉴욕은 “경제적 천사”를 잃고 말았다.
브르통도 페기와 마찬가지로 뉴욕 생활에 실망한 채 파리로 돌아갔는데 그가 유럽에 돌아와 보니 초현실주의는 사망하고 대신 실존주의가 성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