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파리에 온 미국인

1912년 11월 미국으로부터 세 사람이 파리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화랑과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미술품 소장가들을 열흘 동안 분주히 찾아다니며 최근의 작품들을 수집하였다.
이들 중 한 사람이 발트 쿤으로 아모리 쇼를 기획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쿤은 파리로 오기 전 콜로뉴에서 근래 독일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관람하고 헤이그, 베를린, 뮌헨에서 열린 전시회들도 관람했다.
파리로 와서 그는 미국인 아서 데이비스를 만났는데 데이비스는 입체주의, 야수주의, 음율주의 등 과격한 경향의 작품들에 관심이 많았다.
두 사람은 유럽의 모던 아트를 뉴욕에 소개하는 국제전시회를 개최하는 문제에 관하여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성사시킬 만한 사람으로 미국인이면서 화가이자 작가인 월터 패츠를 적격자라고 생각했다.
패츠는 1907년부터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쿤과 데이비스에게 브랑쿠시, 르동, 마티스, 들로네, 글레이즈, 레제, 피카비아 등과 그 외의 몇몇 예술가들을 소개했다.
또한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을 소개했는데, 스타인은 벌써부터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의 작품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패츠는 그들을 퓌토로 데리고 가서 그곳 예술가들에게 소개했다.
패츠는 자크와 레이몽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 했으며, 레이몽의 조각에 관하여 나중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막내동생 마르셀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황금 섹션 전시회에서 그림을 본 후 관심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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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작품제목 붙이기

폴록은 한동안 화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그림 그리기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그 그림에 붙일 제목들이 마땅하지 않았다.
추상화의 제목이라는 게 어떤 특정한 주제를 늘 지적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제로 남겨서 전혀 작가의 인도 없이 관람자들의 자유로운 이해에 의존하게 한다는 것은 때로 작가들의 이기심이 허락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서 가능한 한 화가들은 제목을 붙여서 관람자들의 판단에 조금이나마 간섭하려 한다.

폴록은 제목들을 민주주의 방식으로 선택하려고 이웃의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그들을 헛간으로 불렀다.
이웃의 메리 만하임이라는 여인은 아주 적극적으로 폴록의 그림과 어울릴 만한 제목들을 제시했다.
그녀는 프랑스와 독일 문학작품들을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양복에 어울리는 넥타이를 고르듯이 제목들을 그림에 적용하고서는 곰곰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녀가 제시한 것들 중 폴록이 마음에 들어 했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매혹적인 숲 Enchanted Forest>

<샛별 Lucifer>

<혜성 Comet>

<인광 Phosphorescene>

<마술적 환등기 Magic Lantern>  

<달라지는 바다 Sea Change>

<모든 길 다섯 Full Fathom Five>(85)

<연금술 Alchemy>

<물길들 Watery Paths>.

과연 문학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제목들인데 여러분이 이러한 제목의 그림들을 볼 기회가 있다면 메리 만하임의 노고를 기억해주기 바란다.

<달라지는 바다>와 <꽉 찬 6피트 5>는 그녀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로부터 구한 제목이었다.
폴록은 뒤로 물러서서는 양팔을 낀 채 이웃 사람들이 추천하는 제목들을 생각하면서 어떤 때는 투표로 결정하기도 했다.
<인광> <마술적 환등기> <샛별> <혜성>은 그가 알루미늄 페인트를 사용하여 그린 그림들에 붙인 제목들이었다.
그의 그림들에 대해 어머니 스텔라는 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잭은 금년에 아주 부풀린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그러나 화랑을 방문한 사람들은 폴록의 어머니와는 달리 그의 그림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들은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그림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평론가 로버트 코우츠는 『뉴요커』에서 폴록의 그림에 관해 “대화가 완전히 단절된 시간이 그곳에 있다”며 애통함을 표시했다.
헤다 스턴은 전람회를 둘러본 후 “모든 그림들이 광란적이었다”고 말했으며, 조 글래스코는 “과격하다, 과격하다, 과격하다”고만 말했다.
그린버그를 제외한 평론가들은 폴록에 대한 칭찬을 아꼈는데 어떤 사람은 “마크 토비의 훌륭한 <하얀 글씨>의 메아리”라고 적었고, “에너지의 충돌”이라고 기술한 평론가도 있었다.
어느 평론가는 “단조로운 격렬”이라는 시적인 말을 사용했다.
코우츠는 『뉴요커』에서 “단지 산발적 에너지의 정돈되지 않은 폭발들이므로 무의미하다”고 혹평함으로써 폴록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파커 타일러가 이미 그의 그림을 “구운 마카로니와 같다”고 말한 것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과연 폴록의 그림은 센세이셔널해서 평론가들의 시각을 자극하고 말았다.
그들은 그 그림을 잘 정돈된 도서관 같은 그들의 머리 속에 어떻게 정리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 점을 간파한 그린버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잭슨의 새 그림들은 오로지 근래 회화를 진지하게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알쏭달쏭하게 여겨질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잭슨은 존 마린과 다투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미국 화가가 될 것이다.
다른 미국 작가로서 이러한 경우가 아직 없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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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타임』이 선정한 미국 최고의 세 예술가

『타임』지는 미국 최고의 세 예술가로 폴록과 한스 호프만, 그리고 데이비드 스미스를 꼽았다.
스미스는 조각에 전념했고, 호프만은 독일에서 온 유럽 예술가였으므로 폴록만이 유일한 미국화가인 셈인데 그러고보면 그린버그의 예언은 틀림이 없었다.
여기서 폴록과 함께 미국 최고의 예술가로 소개된 스미스(David Smith 1906~65)가 누구인지를 여러분에게 알린다.

스미스는 원래 화가로서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에 활약했으며, 그래엄과 가까이 지내면서 모더니즘을 받아들였다.
그는 1931년에 조각에 관심이 생겨 전념했지만 그림도 계속 그렸는데, 그의 동력주의 그림들은 액션 페인팅 화가들의 그림들과 흡사했다.

그는 1906년에 인디애나 주의 디캐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화국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는데 아주 개성이 강하고 엄격한 도덕주의자였다.
스미스는 독립심이 강하여 스스로 돈을 벌면서 공부했다.
1924년에는 오하이오 대학에 입학했으며 여름에는 자동차 제조공장에서 일했는데 그는 그때 산업형태에 대한 느낌과 공장에서 사용하는 연장과 기계장치들에 대한 지식이 생겼다고 한다.
그는 뉴욕으로 와서 미래의 아내 도로시를 만났고 그녀의 충고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하여 5년 동안 재학했다.
그래엄은 피카소의 친구인 조각가 훌리오 곤잘레스를 그에게 소개했다.
20세기 철 조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곤잘레스는 그에게 쇠를 용접하여 조각을 제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스미스 부부는 1935년에 파리를 방문하고 그곳에 있던 그래엄과 동행하여 소련을 방문했다.
40년대 중반에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가로 알려졌다.
그가 브론즈로 제작한 작품 <강간 The Rape>(87)은 바퀴 달린 대포로 여인을 협박하는 작품이었는데 대포가 상징하는 바는 공격적인 성(性)과 전쟁이었다.

스미스는 그래엄 외에도 고키, 고틀립, 드 쿠닝, 마더웰, 폴록과 어울렸다.
1961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화가들의 그룹에 속한다.
나의 초기의 친구들은 모두 화가들로서 우리는 함께 회화를 수학했다.
나는 나 자신을 화가가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내 작품들은 표면, 색, 그리고 물체를 표면에 적용하는 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953년에 한 그의 말을 통해 그가 추상표현주의 미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피는 에너지이다. 공간도 에너지이다. 에너지가 아닌 것은 없다.
어떤 면적과 패턴을 지칭하는 것은 에너지의 알림이고, 조각적인 것을 조각이 되게 하는 것이다.
나는 하루도 나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보내지는 않는다.
나의 작품들은 나의 존재를 기록하는 것이다.“

그는 “나는 조각들을 드로잉처럼 자유롭게 만든다”고 말할 정도로 화가·조각가의 미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각을 제작하기 전에 드로잉을 수없이 그리면서 거의 매일 드로잉으로 자신의 창작의도를 찾았다.
그는 드로잉을 진실한 자아에 가장 직접적이고 근사한 것으로 보았으며 조각을 위한 청사진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의 조각들은 부피와 깊이보다는 선과 형태에서 두드러졌고, 그는 그것들을 “공간에 드로잉한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조각들은 내가 분필로 시멘트 바닥에 드로잉한 후 쇠조각들을 산소용접하여 연결시킨다”고 말했는데 마치 재단사가 종이에 그림을 그린 후 천조각들을 잘라서 삼차원적으로 꿰매는 방법과 유사했다는 생각이 든다.
193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 그가 조각을 위해 드로잉한 그림들은 40권의 스케치북에 가득했다.

1957년에 그의 개인전이 모마에서 열렸고, 그에 관한 기사가 언론에서 자주 보도되었다.
그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출현하여 인터뷰하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에는 스케치북에 드로잉하는 경우가 줄었으며 대신 커다란 종이에 독립된 그림으로 잉크와 붓을 사용하여 그렸다.
그러한 드로잉은 각각 하나의 그림으로 존재하면서 더 이상 조각을 위한 단순한 스케치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계란 흰자에 잉크를 섞어 사용하기도 하면서 드로잉의 질을 높였으므로 그것이 조각을 위한 청사진 이상의 것임이 분명해졌다.
1957~58년에 그가 그린 드로잉은 400장이 넘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드로잉 <△∑32-12-57>(89)을 보면 그의 서예적인 붓놀림이 액션 페인팅 화가들의 동력주의의 붓놀림과 근사하며 그가 동양화에도 관심이 컸음을 동시에 알 수 있다.

1960년대에 스테인레스 스틸을 사용하여 제작한 조각들을 보면 그가 삼차원의 공간을 이차원적인 느낌이 나도록 드로잉과 같은 형태로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차츰 나의 그림들은 나의 조각에서 근본이 되었다. … 나는 어디에서부터 회화가 끝나며, 어디에서부터 조각이 시작되는지 그 한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스미스는 1965년 5월에 자신의 트럭에 치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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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자신과 가브리엘과의 관계를 

 

일찍이 뒤샹은 1912년 6월 뮌헨으로 떠나기 전 가브리엘에게 전화를 걸어 뮌헨에 가면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그녀는 영국에 있는 별장 히테로 가서 지낼 예정이었으므로 그곳으로 편지를 보내라고 했다.
가브리엘은 두 아이와 함께 히테에서 지냈으며, 피카비아는 7월에 그곳에 없었다.
그녀는 뒤샹으로부터 “아주 아름다운 편지” 두 통을 받았다.
한 통의 편지에서 뒤샹은 자신과 가브리엘과의 관계를 앙드레 지드가 쓴 『좁은 문Strait is the Gate』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상적인 연인관계에 비유했다.
가브리엘은 “전 마르셀의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랐답니다.
은밀하게 그의 편지를 받는 것이 저를 곤란하게 만들었지만 다정한 태도가 저를 감동시켰어요”라고 했다.
늦여름 두 사람은 은밀히 만났다.
그때 그녀는 에티발에 있는 어머니의 집에 아이들과 함께 묵고 있었는데, 뒤샹에게 주라에 있는 안델로 기차 정거장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다.
그곳은 에티발로부터 파리로 가기 위해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정거장이었다.
가브리엘은 아이들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파리로 가면서 그 정거장에서 한 시간 남짓 파리행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뒤샹을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가브리엘은 그때 뒤샹이 뮌헨으로부터 그곳까지 올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다고 훗날 말했다.

안델로 정거장에 내린 가브리엘은 두리번거리면서 뒤샹을 찾았다.
뒤샹은 미리 도착해서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동안 파리행 기차가 정차했지만 그녀는 기차를 그대로 보냈다.

가브리엘은 그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파리로 가는 기차가 새벽 2시에 있었고, 다음 기차는 더 늦게 있었어요.
전 첫 번째 기차를 타지 않고 두 번째 기차를 탔어요.
우리는 대합실의 나무의자에 앉아 밤새도록 대화했지요.
전 마르셀보다 먼저 파리로 가는 기차에 올랐답니다. 그날 일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워요.
전 젊었으므로 마음이 심하게 동요되었지요.
그가 뮌헨으로부터 주라로 와서 저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는 것은 백치 같은 광적인 일이었답니다.
관능적인 욕망을 가졌으면서도 몸을 만지지 않고 나란히 앉아서 대화만 했다는 것은 아주 비인간적인 일이었어요."

두 사람이 나눈 대화에 관해서는 두 사람이 함구하였으므로 그들이 밤새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때 두 사람만의 비밀이 생겼고, 훗날 두 사람의 관계는 성적 파트너로 진전되었다.
피카비아와 아폴리네르를 따라서 10월에 에티발로 간 뒤샹은 그곳에서 다시 가브리엘을 만났지만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그가 그런 분위기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말이 없었고, 어서 파리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가브리엘과 주라에서 헤어진 후 뮌헨으로 돌아온 뒤샹은 <큰 유리>에 관해 처음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뮌헨에서 나는 <큰 유리>에 관한 아이디어를 가지게 되었다”면서 말했다.
“나는 운동을 나타내는 그림을 유화물감을 사용하여 입체주의 방법으로 완성하였다.
회화 경향에는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십 년 동안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그리는 일이 지루해졌는데, 사실 그림을 마칠 때마다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림에서 근원적인 만족을 구할 수 없었다.
… 아무튼 1912년부터 직업화가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개인적인 일을 찾게 되었는데 누구도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뒤샹은 예술가들을 만나기 꺼려했고 다른 일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뒤샹이 일자리를 구하자 피카비아가 아저씨 모리스 다반느를 소개했다.
다반느는 파리의 권위있는 연구기관인 상테 제네비에브 도서관의 책임자였는데 그가 뒤샹이 도서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뒤샹에게는 독서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마련되었다.
뒤샹은 아마추어 화가로서 자유롭기를 원했다.
그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예술가들이 있다. 하나는 사회가 원하는 일을 하는 예술가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사회가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뒤샹은 후자에 속하는 예술가가 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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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이 술에 취했을 때 발견한 방법

폴록은 이제 물감을 사용하는 데 능숙해져서 우연을 조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막대기보다는 붓이 물감을 좀더 많이 머금었다가 동그라미들을 두 개 또는 세 개로 만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선의 홍수가 범람케 했는데 그것은 고의적인 구성이었다.
그가 신명이 나도록 붓을 흔들어대면 강줄기는 비로 변했다.
그는 비를 소나기와 가랑비로 구별할 줄도 알았다.
막대기는 아라베스크 선을 만들 때, 묽은 물감은 이슬을 만들 때 적당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선들은 거미집처럼 얽히고 설켜 장관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림에서 담뱃재와 죽은 벌이 발견된 것은 작품에 대한 신선한 느낌을 감소시켰다. 어째서 그런 것들이 그림에 남았느냐고 인터뷰에서 지적하자 폴록은 화를 냈다.

이런 방법으로 그린 그림들이 파슨즈 화랑에서 사람들에게 소개되자 동료 화가들과 평론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론가들은 무엇이 그리고 왜 그가 이러한 그림들을 그리게 했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추측들은 서로 상이했다.
어떤 사람은 펜에 묻은 잉크가 종이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러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으리라고 짐작했고 더러는 달리 짐작했지만, 거의 그가 우연히 그러한 방법을 발견했을 거라고들 했다.
그가 술에 취했을 때 발견한 방법이라는 설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같았다.

화가들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이미 그들의 어깨 너머로부터 물감을 뿌린 적이 있었다고 말했으며, 에른스트는 물동이로 물감을 뿌렸다고 말했고, 마송은 물감에 풀을 섞어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고 했다.
어떤 미술사학자는 폴록보다 먼저 물감을 흘려서 사용했던 예술가들로 바지오츠, 드 쿠닝, 밀턴 레스닉, 캄로우스키, 그리고 고키를 들었다.
“모든 예술가들의 물감흘리기 기교는 고키로부터 비롯되었다”라고 필립 페이비어는 주장했다.
조각가 데이비드 스미스는 폴록의 전람회를 관람한 후 “나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호프만은 20년대에 자신도 뮌헨에서 그러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소문에는 폴록이 호프만의 기교를 40년대 초에 훔친 것이라고들 했다.

이처럼 많은 평론가들과 미술사학자들이 글을 통해 폴록의 기교에 관해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폴록에게 직접적으로 그러한 기교를 보여주었던 사람은 멕시코인 시쿠에이로스였다.
1936년 폴록이 자청하여 뉴욕에서 작업하던 그를 도우면서 시쿠에이로스가 물감을 흘려서 사용하는 것을 보고 그러한 기교를 실험했던 일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열거한대로 위의 작가들이 모두 같은 기교를 사용했더라도 그들은 부분적으로 사용했지만 폴록은 캔버스 전체를 그러한 방법으로 뒤덮었으므로 사람들의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린버그는 “잭슨이 1946~50년에 사용한 물감 흘리기 기법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남긴 분석입체주의 그림들로부터 구한 것”이라고 기술했다.
그의 기교에 관한 설이 구구할수록 그의 명성은 높아만 갔다.

1949년에 있었던 인터뷰에서 폴록은 “난 회화기법에 관해서 어떠한 이론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기법은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 절로 생기지만 기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회화는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다. 모든 훌륭한 예술가들은 그들 자신을 그림으로 나타낸다”고도 말했는데 자신의 그림에 관해서는 결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조르주 브라크의 말을 상기하게 했다.
브라크는 “사람들이 늘 모자를 손에 들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모자걸이가 발명된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못에 건다”고 말한 적이 있다.

폴록이 물감을 흘려서 그린 초기 그림 중 한 점인 <은하 Galaxy>에는 그가 물감을 부은 그 아래에 이미지를 유추할 수 있는 형태가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그후에 그린 <물길들 Watery Paths>과 <마술적 환등기 Magic Lantern>에서는 그림이 복잡해지고 밀도가 조밀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미지들은 그때부터 사라졌으며 그의 기교는 이미지를 감추기 위해 사용되지 않았고 기교 자체가 이미지가 되었다.

그는 윌콕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눈을 크게 뜨면 갑자기 소용돌이치는 얽힘들이 내 눈앞에 전개되었다.”
그린버그가 전한 폴록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나의 그림들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들은 그저 그려질 뿐이다.”

그의 회화방법에 호기심이 있는 한 여인이 “당신은 언제 당신의 그림이 완성되는지 알 수 있나요?”하고 묻자 폴록은 “당신은 언제 당신의 섹스가 완성되는지 알 수 있소?”라고 여인에게 반문했다.
당시 “너는 언제 너의 그림이 완성되는지를 알 수 있느냐?”는 추상화가들에게 자주 던져진 질문이었다.
마더웰이 드 쿠닝에게 그렇게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은 그러한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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