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일레인은 드 쿠닝의 <여인>에 관해

일레인은 드 쿠닝의 <여인>에 관해 “그가 그린 흉포한 여인은 그와 동거중인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 살 때부터 그에게 생긴 이미지였다”고 하면서 드 쿠닝이 어머니를 그림에서 사나운 여인으로 묘사했음을 암시했다.
일레인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의 여인들은 네덜란드인이기보다는 미국인처럼 보였다.
여인이 신고 있는 구두, 드레스, 립스틱, 그리고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들이 그 점을 시사했다.
토마스 헤스는 <여인>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시끄러운 파티에서 소녀처럼 … 그저 앉아 있거나 그냥 그곳에 있거나 또는 웃는 모습인데 이것은 미국에서 흔한 일이다.”

드 쿠닝은 “나는 단지 나의 생각대로 그렸을 뿐이다”라고 말했는데 <여인>은 그의 무의식 세계에 있던 이미지가 돌출한 것이었다.
1950년대에 그는 사람들에게 동성연애자처럼 보였는데 그도 그 사실을 알고 “내가 만일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다면 그 그림이 나를 동성연애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드 쿠닝은 그림에서 다양한 색을 사용했는데 색채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긴 것은 아이스크림을 제조하는 하워드 존슨즈 레스토랑에서였다.
그는 스물여덟 가지나 되는 아이스크림이 물감처럼 보이더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사람들이 자신의 미학을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나는 화가들이 특별히 대단한 아이디어를 가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몬드리안은 대단한 예술가이다.
그의 신조형주의적 착상을 보면서 당신은 순수조형성을 보겠지만 난 그것들이 웃긴다고 생각한다.
… 
나는 마음속에 미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나는 나를 매료시키는 어떠한 것들을 보게 된다.
그것들은 그림에서 나의 내용들이 된다.”

그는 지성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비지성적 행위들의 타당성을 시위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지성인들의 인식에 변화를 주려고 했다.
그는 “회화는 항상 죽어 있지만 난 그것을 염려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으며, “당신이 만일 하나를 이해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다른 것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작업방법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드 쿠닝이 1963년에 헤스와 인터뷰한 내용이 『로케이션 Location』 잡지에 보도되었다.
“그림의 내용들은 얼핏 보는 것이며 마치 섬광과도 같다. 그것들은 아주 작고도 작은 내용들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림을 처음 대할 때 그림의 내용이나 의미는 관람하는 사람들의 순간적 인식과 같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그것을 섬광에 비유했다.
폴록보다 늦게 인정을 받은 그는 그래서 늦게까지 빈곤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일레인과는 애정이 있었으므로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빈곤 속에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웠는데 오히려 돈이 생기자 별거하게 되었다.
일레인은 “지독한 가난은 우리가 동거하는 데 중요했다”고 하며 “가난은 윌렘이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1954년에야 물러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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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드 쿠닝, 예술은 결코 나를 평화롭게

드 쿠닝은 “예술은 결코 나를 평화롭게 또는 순수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그는 여인의 이미지들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여인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이미지들은 그가 신인간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는, 폴록과 같이 완전추상을 추구하는 이들의 비난을 자초했다.
폴록이 그에게 심술을 부렸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드 쿠닝은 예술가 개인의 자유를 주장했고, 미국 대중문화의 수준 높은 예술성을 나타내려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미학을 나중에 앤디 워홀이 성취했다.
드 쿠닝은 팝아트의 가능성을 벌써 시사했고, 그러한 점을 간파했던 작가들이 뉴욕파 2세인 로버트 라우셴버그와 재스퍼 존스였다.
드 쿠닝의 여인 연작은 워홀로 하여금 기계적인 방법으로 성(性)의 상징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그리게 했다.
라우셴버그와 존스는 그러니까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한 예술가들이며 팝아트의 선구자들이었다고 말해도 된다.

이간 화랑에서의 전람회는 성공적이었으며, 드 쿠닝이 뉴욕의 진보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분명히 했다.
“오늘날 오직 확실한 것은 자아의식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는 1950년부터 <여인 I Woman I>(90)을 출발로 계속해서 여인의 이미지들을 그의 특허와도 같은 주제로 삼았다.
그림을 고치고 또 고치는 그의 습관은 이미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1950년 6월부터 <여인 I>을 최소한 50번이나 고치고 또 고쳤다.
그가 더 이상 고칠 수 없었던 것은 그 그림이 트럭에 실려 화랑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드 쿠닝은 “내가 여인에 대한 주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유화물감보다는 잘 흐르는 아크릴릭을 선호했으며, 유화물감에 물이나 솔벤트를 섞어 사용함으로써 마르는 시간을 더디게 하여 고칠 수 있는 시간을 벌기도 했다.

드 쿠닝은 여섯 살 어린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1910~62)과 교통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가 클라인에게 영향을 받아 그린 그림들 가운데에는 <루스의 조위 Ruth's Zowie> <하바나의 변두리 Suburb in Havana> <강으로 통하는 문 Door to the River>이 있다.
그가 1959년에 <검고 하얀 방 Black and White Room>을 클라인의 그림 <마호닝 Mahoning>과 비교해보면 그가 클라인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음이 역력해진다.
한편 클라인이 타계하기 전에 그린 마지막 그림 <스쿠데라 Scudera>는 드 쿠닝의 <나폴리의 나무 한 그루 A Tree (Grows) in Naples>에서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1958년 드 쿠닝은 20×18㎝의 작은 그림을 그렸는데,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예술가 오스카 코코슈카는 작은 그림보다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한 적이 있다.
드 쿠닝도 나중에 예술가들의 동네 이스트 햄프턴으로 이주했다.
그곳에 안주하면서부터 그는 밀실공포증을 느끼게 하는 그림들보다는 색과 형태들을 편안하게 구사하면서 광대한 들 풍경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폴록이 자신을 후원해줄 사람을 찾고 있을 때 드 쿠닝은 여인들을 주제로 그림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 일레인과 처제를 모델로 그리거나 신문, 잡지에 소개된 여인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 운동경기에서 응원하는 소녀들이 점프하여 허공에 몸을 띄우는 모습을 이그러진 형태로 그리기도 했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을 두텁게 바르면서 평평하고 넓게 칠했는데 그러한 기교는 러시아인 샤임 수틴의 영향인 것 같다.
드 쿠닝은 1950년 모마에서 소개된 수틴의 그림들을 직접 관람하면서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수틴을 선택할 것이며 … 항상 그의 모든 그림들에 매료되고 말았다. 수틴은 그림의 표면을 재료처럼 그리고 물질처럼 보이도록 구성했다. 그의 그림에는 어떤 피부 같고 변모하는 것들이 있었다. … 난 반스(Barnes)가 소장한 그의 그림들을 보았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가 “수틴의 모든 그림들”이라고 말한 것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도 포함되었을 터이고, 따라서 그가 그린 여인의 초상화에는 수틴의 화법이 다분히 응용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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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과 아모리 쇼
 

1913년 2월 17일 뉴욕의 렉싱턴 애비뉴 25번가 305번지에 소재한 제69 기병대의 병기창에서 아모리 쇼Armory Show로 불리는 국제 현대미술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미술의 황무지 미국에서 처음으로 유럽의 모더니즘이 대거 소개되는 전시회였다.
쿤, 데이비스, 패츠 세 사람이 뉴욕의 ‘화가와 조각가들의 연합회’로부터 협력을 받아 돈을 주고 병기창을 한 달 동안 빌려 개최한 것이다.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가 병기창을 전시장으로 장식했는데, 휘트니는 훗날 휘트니 뮤지엄을 개관한 예술가이다.
아모리 쇼는 3월 15일까지 열렸으며,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아모리 쇼에는 앵그르, 도미에, 쿠르베, 코로, 마네와 대부분의 후기인상주의 예술가들인 고갱, 반 고흐, 세잔, 쇠라 그리고 루소, 드랭, 파생, 스공작, 마티스의 작품들이 소개되었고, 입체주의 예술가들로는 피카소, 브라크, 레제, 글레이즈, 피카비아, 뒤샹 삼형제의 작품이 소개되었으며, 상징주의 예술가들인 퓌비 드 샤반, 르동, 예언자the Nabis 그룹 예술가들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아모리 쇼는 프랑스 미술에 대해서는 잘 소개했지만 독일 표현주의에 대해서는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고, 에른스트 루드빅 키르히너의 풍경화 한 점과 칸딘스키의 <즉흥> 한 점만을 소개했을 뿐이다.
시인 아폴리네르가 오르피즘으로 분류한 들로네와 쿠프카의 그림과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은 소개되지 못했다.

조각부문에서는 로댕, 마이욜, 브랑쿠시, 그리고 렘브러크의 작품이 전시장 중앙에 전시되었다.
미국 예술가들의 작품도 수백 점 소개되었는데 아모리 쇼에 소개된 작품은 모두 1,650점이 넘었다.
카탈로그에 적힌 작품만도 1,046점이었고, 카탈로그에 적히지 않은 작품이 600점 이상이었다.
아모리 쇼는 많은 전설을 낳았다.
루wm벨트 대통령도 전시회를 다녀갔는데, 진보주의 사고를 가진 루스벨트는 전시장을 둘러본 후 마티스의 그림 앞에 서서 예술가는 사물을 보는 그대로 그려야지 일그러뜨려서는 안 되며 색을 통해서만 표현해야 한다는 진부한 소감을 밝혔다.
파리의 언론은 아모리 쇼에 관해 침묵하였다.
뒤샹은 “아모리 쇼는 파리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론 언론이 그 전시회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것 같고, 몇 줄만 언급했던 것 같다”고 상기했다.
파리의 언론은 미치광이 미국 사람과 러시아 사람들만이 마티스와 피카소의 그림을 사려 한다고 빈정거렸다.
『뉴욕 타임즈』에서도 아모리 쇼에 참여한 예술가들을 “무정부주의자들의 사촌들”이라고 논평했다.
비록 언론과 예술가들 연합의 간행물 『미술과 성장』이 비판의 글을 보도했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꺾지는 못해 관람자의 수가 십만여 명에 달했다.
아모리 쇼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뉴욕에는 사설 화랑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연일 사람들이 피카비아의 <우물가의 춤들>과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앞에 운집할 정도로 두 그림이 특히 미국인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무려 30∼40분 동안이나 뒤샹의 그림 앞에 서서 움직일 줄 몰랐다.
루wm벨트는 뒤샹의 그림을 관람한 후 인디언들이 사용하는 나바조Navajo 담요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언론은 뒤샹의 그림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는데, 『이브닝 선』지에서는 “출퇴근 시간에 전철역의 계단을 내려가는 교양 없는 사람들”이라고 적었다.
미국 사람은 미술에서 누드가 계단을 내려간다는 것을 상식 밖의 일로 여겼다.
뒤샹의 그림은 입체주의만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더니즘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들려는 것처럼 평론가들에게 비쳐졌다.
아모리 쇼는 보스턴과 시카고를 순회했으며, 시카고의 미술학교 학생들은 마티스의 그림을 관람한 후 “추한 사도”라고 부르면서 그가 모더니즘의 나쁜 영향을 퍼뜨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유럽의 모더니즘에 호의를 나타낸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전시회에 소개된 작품들 가운데 3분의 1이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들이었고 판매된 174점 가운데 123점이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인 것으로 보아 미국 사람이 모더니즘에 경의를 표했음을 알 수 있다.
전시회를 기획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변호사 존 퀸은 법적인 문제를 무료로 봉사했으며, 드랭, 파생, 르동, 스공작, 자크, 레이몽, 그리고 그 밖의 유럽과 미국 예술가들의 작품을 5,808달러 75센트를 주고 구입했다.
두 번째로 많은 그림을 구입한 사람의 직업도 역시 변호사였는데, 아서 제롬 에디는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와서 작품들을 구입하면서 뒤샹이 출품한 네 점 가운데 <체스두는 사람들>과 <빠른 누드들에 에워싸인 왕과 왕후>를 구입했다.
레이몽은 네 점의 조각을 출품했는데 세 점이 팔렸고 자크 비용은 아홉 점을 출품했는데 모두 팔렸다.

뒤샹의 나머지 두 점도 곧 팔렸는데 젊은 화가 마니에르 도손이 <기차를 탄 슬픈 젊은이>를 구입했다.
전시회가 거의 끝날 무렵 샌프란시스코의 골동품상 프레데릭 토리가 전시회를 관람한 후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뉴멕시코 주의 알부쿼크 역에 내려 월터 패츠에게 전보를 쳤다.

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사겠음. 보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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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드 쿠닝의 ‘인간’이미지 탐구

드 쿠닝의 첫 개인전이 1948년 이간(Egan) 화랑에서 열렸다.
그의 전람회는 성공적이었고, 평론가들은 “열정과 기교의 유일한 집중 … 무서운 에너지, 묘기, 요염 …”이라며 그의 그림들을 칭찬했다.
드 쿠닝만이 홀로 폴록의 위대한 적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전람회가 열리고 며칠 후 모마에서는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으며 사람들은 그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드 쿠닝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폴록은 의기소침해졌고 드 쿠닝에 대한 시기심도 그만큼 커졌다.

드 쿠닝의 개인전이 끝나고 8번가에 있는 잭 레스토랑에서 그를 위한 파티가 열렸을 때 폴록은 “대포처럼 들어왔다”, “잭슨은 모든 사람들에게 마구 빈정거렸고 아무도 그의 기분을 전환시킬 수 없었다.
그는 가까운 친구들에게까지도 빈정거렸는데 그가 그렇게 심했던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무엇이든 집어들어 누구에게 던져버릴지 알 수 없었다”고 바지오츠는 전했다.
폴록은 다시 고키에게로 다가갔는데 그때 고키는 벽에 기댄 채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칼로 연필을 뾰족하게 깎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면서 아주 위험한 순간에까지 이르렀는데 고키의 눈총은 ‘너 조심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고키는 결국 “미안하다. 폴록, 너와 나는 다른 종류의 예술가이다”라고 말했다.
“이때의 장면은 무대에서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고 바지오츠는 상세하게 기억했다.
바지오츠는 여러 사람들 속에서 커다란 소리로 “잭슨, 빌어먹을, 그만두지 못해!”라고 소리쳤고 폴록은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고 첨언했다.

드 쿠닝은 사람을 주제로 그림들을 그렸다.
그는 “한때 나는 사람의 모습을 붉은색이나 파란색으로 그리면서 그러한 그림들이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사람들을 살색으로 칠할 때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미술은 어떤 한 가지 방법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난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이지 웃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렇게 안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의 회화를 항상 부분적으로 르네상스와 연계해서 생각했다.
회화의 상스러움과 다육질의 요소들은 특히 서양적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우리는 지금 서양문명을 타고 세계를 두루 여행하고 있다고 했으며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난 내가 동양예술에 관해서 조금밖에 모른다고 시인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내가 찾고 또 말하려고 하는 것들을 동양예술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동양의 아름다움에 대한 아이디어는 ‘여기에는 없다’이다.
여기 이 상태 안에는 부재한다.
부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훌륭한 것이다.
내가 절대주의와 순수주의(purism), 그리고 사물의 모습들이 전혀 없는 추상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1947년부터 드 쿠닝은 고키처럼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개인적인 합성을 시도했다.
또 그는 분석입체주의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색을 제거하는 작업에 열중했다.
그는 단순한 검정색과 흰색으로 사람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인간적인 점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의 그림에서 꽉 찬 형태는 루벤스와 렘브란트의 화법을 응용한 것이었다.
<발굴 Excavation>(94)은 그의 복잡하고 조밀한 방법을 잘 설명해준다.
이 작품은 195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소개되었다.
그때 비엔날레에서는 유럽 예술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최우수상은 앙리 마티스가 수상했다.
그가 흰색으로 드로잉하고 검정색으로 그린 동력주의 추상화는 1950~51년에 그린 <나이트 스퀘어 Night Square>였다.
드 쿠닝은 다른 예술가와는 달리 새로운 회화방법을 찾아내어 그러한 방법으로 새로운 표현주의를 창조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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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그린버그가 잭슨 폴록을 칭찬했다지만

사실 그린버그가 폴록을 칭찬했다지만 그는 자신의 “이제 이젤 페인팅은 사망했다”는 논리를 합리화하는 데 더욱 급급해 있었다.
그가 폴록의 새 기교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네이션』 잡지에서 “몬드리안 이래 누구도 이젤 페인팅을 그 한계 밖으로 끌어내지는 못했고, 잭슨이 완전히 성취한 것도 아니었다.
이 시대에 회화는 이젤을 부인하고 벽을 동경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적었다.
전람회에서 팔린 폴록의 그림은 세 점뿐이었는데 한 점은 페기의 친구가 샀다.
폴록의 친구들은 전람회에 와서 그에게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그림을 살 돈은 없었다.

폴록과 같은 시기에 전람회를 열고 있던 조각가 허버트 퍼버가 폴록에게 와서 그의 그림 한 점과 자신의 조각 한 점을 교환하자고 제의하자 폴록은 “O.K. 아무 거나 한 점 가져가라”고 말했다.
퍼버는 작은 그림 <소용돌이 Vortex>를 가져갔는데 그는 “내가 꼭 그의 그림을 갖고 싶어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지 않아 작은 그림을 가졌다”고 나중에 말했다.

폴록은 미학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으므로 연료비를 아끼기 위해 리와 함께 윗층을 폐쇄하고 아랫층에만 불을 지피며 겨울을 날 준비를 했다.
그때 스프링스에 있는 댄 밀러의 상점에 폴록은 56달러의 빚이 있었지만 돈이 없어 그림 한 점으로 빚을 청산했다.
밀러가 일을 마치고 그 그림을 들고 집에 가서 외상값 대신 가져온 그림이라고 말하자 밀러의 아내는 화를 내면서 그 그림을 집으로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밀러는 하는 수 없이 그 그림을 상점 안에 걸었다.
상점에 오는 고객들은 그 그림을 보고 웃었고, 어떤 사람은 자기 같으면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에 걸겠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소문에는 폴록이 그 그림을 빗자루로 그렸다고도 했다.
폴록이 타계한 후 밀러는 그 그림을 1만 7천 달러에 팔아 그 돈으로 작은 비행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밀러가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은 아주 잘 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밀러와 같지는 않아 폴록에게 받을 돈이 있었던 사람들은 빚 대신 그의 그림으로 계산을 마치려고 하지 않았다.
기름장사 윌리엄 코린스는 폴록이 그를 화실로 초대하자 폴록이 기름값 대신 그림으로 갚겠다는 제의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초대에 응할 정도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겨울은 더욱 추운 법이다.
리와 폴록 역시 난로 두 개와 벽난로 하나로 겨울을 나자니 여간 괴롭지 않았다.
폴록은 일자리를 구하러 나섰다.
페기로부터 매달 300달러씩 받던 계약이 끝났으므로 이제 그에게는 고정수입이 없었던 것이다.

폴록은 줄리앙 레비에게 가서 그에게 가르치는 일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으나 폴록의 성격을 잘 아는 레비는 그에게 직장을 소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쿠퍼 유니온(Cooper Union)에서 가르치던 부사를 찾아갔으나 부사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부사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잭슨은 강의실로 나를 찾아와서는 가르치기를 원한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학생들을 둘러보았는데 그들은 잭슨의 회화와는 전혀 다른 그림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잭슨에게 ‘빌어먹을 네가 여기에서 가르칠 게 뭐가 있겠어, 잭?’이라고 했는데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내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티가 폴록에게 수백 달러를 빌려주었고, 밀러가 외상을 주었으므로 폴록은 직장을 구하지 않아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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