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아홉 명의 입체주의 예술가들

뉴욕 나들이를 마친 피카비아는 4월에 파리로 돌아왔다.
당시 예술의 수도 파리에서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이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을 공연하고 있었다.
음악은 이고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하였으며, 안무는 바슬라브 니진스키가 맡았다.
디아길레프 발레단이 파리에 데뷔한 것은 1909년으로 파리 시민들은 그의 발레를 무척 좋아했다.
니진스키는 드뷔시의 <포온의 오후Afternoon of a Faun>에서 포온(목축의 신)을 자신이 창작한 안무로 소개하면서 몸에 완전히 밀착된 의상을 입고 춤을 추게 했으므로 감각적으로 드러난 근육의 운동이 파리 시민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폴리네르는 1913년 3월에 『입체주의 화가들the Cubist Painters』이란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며 아홉 명의 화가들에 관해 한 사람씩 상세히 언급했는데 피카소, 브라크, 메쳉제, 글레이즈, 로랑생, 그리, 레제, 피카비아, 그리고 뒤샹이었다.
뒤샹이 시인이 선정한 주요 입체주의 화가들의 자랑스러운 대열에 포함된 것은 마땅한 일이었지만 로랑생이 끼어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로랑생은 나머지 여덟 명의 예술가들과는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지 못하였다.
아폴리네르는 자신의 애인이었기 때문에 로랑생을 포함시켰던 것일까?
아폴리네르는 조각가로는 단 한 명만 언급했는데 그를 매료시킨 조각가는 레이몽이었다.

아폴리네르는 뒤샹을 아홉 명의 화가들 가운데 포함시키기는 했지만 그에 관한 충분한 이해가 없었음을 다음과 같은 글에서 알 수 있다.
“마르셀 뒤샹은 여전히 수적으로 적어, 그것들의 특성에 관하여 언급하거나 그의 재능을 판단해서 말하기에는 그림들이 각기 너무도 상이하다.”

그러면서 그는 “아마도 선입견을 가진 미학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 예술가의 과업일진데, 마르셀 뒤샹처럼 힘이 넘치는 예술가는 미술과 사람들을 화해시킨다”는 말로 마쳤다.
그가 언급한 내용에 뒤샹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미술과 사람들?
얼마나 웃기는 말인가?
이는 순전히 아폴리네르다운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당시 그룹의 예술가들 가운데 중요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아폴리네르는 스스로 “난 그에(뒤샹) 관해 약간만 언급하려는데 피카비아와의 우정에 관해 언급해야겠어”라고 했다.
그는 생각나는 대로 나에 관하여 쓴 것이다.

뒤샹은 1913년 4∼5월에 도서관에 근무했다.
그는 “아주 훌륭한 직장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과 오래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10시부터 12시까지 그리고 1시 30분부터 3시까지 근무하여 하루에 5프랑을 벌었다.
아버지가 돈을 송금해주셨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만한 돈이면 넉넉했다”고 했다.
상테 제네비에르 도서관에서 뒤샹은 철학서를 주로 읽었다.
그의 마음을 흔든 화가 엘리스 사람 피르로Pyrrho(365∼275 B.C.)는 회화를 포기하고 철학을 선택한 자로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를 부인하면서 절대적인 것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는 객관적인 진리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그 어느 것도 진리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류도 될 수 없으므로 무관심하게 태연한 자세로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피르로는 어떠한 것에 의견을 갖거나 판단하는 것을 금하라면서 매사에 경계하는 태도를 가질 것을 권유했는데, 요즈음 말로 그의 철학은 거지철학으로 무소유를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생활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었다.
뒤샹의 노트에 적혀 있던 ‘무관심의 아름다움’이란 말은 피르로의 영향이었다.

뒤샹은 피르로 외에 19세기 독일인 막스 스티르너Max Stirner를 좋아하였다.
스티르너의 저서 『이기심과 이기심의 것Der Einzige und sein Eigentum』은 1844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피카비아도 그의 철학을 좋아했으므로 그가 스티르너의 철학을 1912년 혹은 1913년에 뒤샹에게 소개한 것 같다.
스티르너는 “나의 관심사는 신성이나 인간적인 것에 있지 않다.
또한 옳거나 아름답거나 정의롭거나 자유롭거나 하는 것들에도 있지 않다.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나의 것이 무엇이며, 내가 독특한 것처럼 독특한 것들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내게는 나 자신보다 더 귀한 것이란 없다”고 했다.
뒤샹은 그의 저서를 대단히 훌륭한 책이라고 칭찬하면서 “스티르너는 누구에게도 이기심은 있다고 반복해서 말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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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시추에이션’회화의 주인공 프란츠 클라인

이 시기에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시다 술집에서 폴록과 술을 마시기도 했고, 그와 논쟁을 하다가 곧잘 욕설을 퍼부었으며, 힘으로나 말로나 미학적으로나 폴록에게 지지 않았던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프란츠 클라인(Franz Klein 1910~62)이었다.
폴록보다 두 살 많은 그는 폴록에게는 엄했던 편이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온화한 성품을 가진 그를 좋아했는데 드 쿠닝이 특히 그와 우정이 두터웠다.
1950년 이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후 뉴욕 화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그는 폴록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는 주량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클라인은 1910년에 펜실베니아 주의 윌크스-바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이고 어머니는 콘발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아버지가 1917년에 타계한 지 3년 후 어머니는 재혼했다.
그는 운동을 아주 좋아했으므로 1929년에 바시티(Varsity) 미식축구 팀의 주장이 되었다.
1931년부터 35년까지는 보스턴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며, 1937년 파리로 갔다가 다시 런던으로 가서 헤덜리(Heatherley)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런던에서 그는 엘리자베스 빈센트 파슨즈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새들러(Sadler)의 웰즈 발레단(Wells Ballet)에 속했던 무용수였다(웰즈 발레단은 나중에 로열 발레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38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버팔로에 있는 백화점에서 디자이너로 잠시 근무했다.

이듬해에 클라인은 뉴욕으로 와서 더러 그림들을 발표하곤 했는데 그가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자를 검정색으로 굵게 드로잉한 후 무료하여 돋보기를 가지고 그 그림을 살펴보다가 확대기 속에서 아주 인상적인 느낌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더 이상 사물들을 재현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추상화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50년 그는 이간 화랑에서 검정색과 흰색으로 그린 자신의 추상화 열한 점을 소개했고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그의 그림이 휘트니 미술관 연감에 수록되었고 1955년에는 모마에서 열렸던 ‘열두 명의 미국 화가와 조각가들’ 전람회에 초대받았다.
1957년에는 미국을 대표하여 상 파울로(San Paulo) 비엔날레에 참여하기도 했다.
모마에서는 1952년에 이미 그의 그림을 구입했고, 휘트니 미술관은 1955년에 그의 대표작 <마호닝 Mahoning>을 구입했다.

클라인의 그림들은 추상인 동시에 실존주의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시추에이션 situation’이라고 자주 말했다.
캔버스에 막 색을 칠하게 되면 시추에이션이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마음을 온전히 백지화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마치 동양의 선(禪) 사상을 가진 예술가와도 같은 태도였다.
그에게 그림은 그려지는 과정에서의 느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는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최종적인 그림에는 화가의 감정이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사풍자를 창조했던 예술가 오노레 도미에를 좋아했고 렘브란트와 고야의 그림들도 좋아했다.
1950년부터 그는 싸구려 상업용 페인트와 붓을 사용하여 단숨에 그리는 듯한 붓놀림 행위를 보여주었다.
과감히 단순화한 이미지와 색들을 검정색과 흰색으로 제한하여 그린 그의 그림들은 마치 동양의 붓글씨를 확대한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때로 내가 흰 캔버스에 검정색으로 어떤 부호 같은 것을 그린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검정색을 사용하듯이 흰색을 사용하며, 그만큼 흰색은 나에게 중요하다.”

그는 단숨에 그림을 그리면서 육체적 행위의 에너지와 붓의 운동을 나타냈고, 행위와 자세의 아이디어를 조직으로 완전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액션 페인팅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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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잔디밭에 타이어로 그린 그림


어느 날 로저 윌콕스는 폴록과 함께 조지카 로드를 지나다가 윌리엄 세리그손이라는 사람의 집 앞에서 멈추었다.
세리그손은 이스트 햄프턴에서 잘 알려진 부자 사업가로서 그의 집은 “10에이커(약 12,240평)나 되는 완전히 평평한 잔디”에 둘러싸인 저택이었다.
잔디 한 평이 카페트 한 평 값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10에이커를 카페트로 깔았다고 상상해보라.
콕스가 폴록에게 저런 대단한 잔디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빌어먹을 푸른 캔버스구만! 신이여, 나로 하여금 저 잔디 위에 그림을 그리게 하소서”라며 폴록은 기도인지 혼잣말인지, 아니면 그러고 싶다는 욕망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었다.

늦여름 비가 온 후 폴록은 창작의 욕망을 참지 못하고 차로 세리그손의 집을 향했다.
폴록은 깨끗하게 펼쳐진 푸른 캔버스 위에서 자신의 포드 스포츠차를 마구 운전하여 그 특유의 벽화와도 같은 그림을 타이어로 그렸다.
비가 막 그친 후라서 타이어가 파헤친 땅에는 빗물이 괴었다.
경찰관은 폴록을 파괴범으로 체포하여 집주인과 대면시켰다.
잭슨은 자신이 그렸던 것은 단순히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그림이었다고 말했다.

세리그손은 폴록이 망친 잔디를 보수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이 만 달러라고 주장하면서 폴록을 기소했다.
그 금액은 폴록이 장만했던 집값의 딱 두 배였다.
그렇지만 폴록은 자신의 행위가 예술작품의 창작이라고 주장했다.
세리그손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렇다면 네가 와서 작품에 서명을 한 후 돈을 지불하라”고 말했다.
나중에 세리그손은 폴록이 그만한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음을 알고는 기소를 취하하고 그를 용서해주었다.
리와 폴록의 어머니는 이 사건을 폴록의 자신감이 지나치게 커지는 불길한 징조로 이해했다.

미국은 나라가 아니라 대륙이라서 어느 예술가는 “미국에서는 9천만 명이 모두 좋아해야 유명해질 수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폴록이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라이프』사에 보내왔던 독자들의 편지에는 “잭슨 폴록이 생존하는 위대한 미국 화가입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 화가입니까?”, “왜 생존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합니까?” 등등이 적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어린애가 그림을 그려도 그보다는 잘 그릴 수 있다”고 적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차고 문을 추상으로 그린 적이 있었는데 폴록의 그림보다 나았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조카가 실수로 물감을 발로 걷어찼는데 폴록의 최고의 그림과 유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편지들을 읽고 폴록은 “음, 세상에는 지렁이들이 사람들처럼 행동하는구나”라고 말했다고 윌콕스는 전했다.

그러나 폴록을 괴롭혔던 것은 대중들이 아니라 그의 동료 예술가들이었다.
콘래드 마카 랠리에 의하면 “잭슨은 다른 작가들과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해 했다.” “잭슨은 예술가들이 그에게 시기심을 가지고 있거나 자신의 그림들을 싫어하며 자신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면서 동료 화가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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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아서 도브는 물질적인 요소보다는 정신적인 요소를

아서 도브도 1907년에 파리로 가서 일찌감치 모더니즘을 받아들인 예술가였다.
그가 1910년에 그린 <추상 No.1>은 빌딩과 풍경의 모습이 시사되었지만 칸딘스키의 사물의 묘사가 배제된 그림과 매우 유사했다.
그해 그린 <추상 No.2>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림에서 물질적인 요소보다는 정신적인 요소를 힘 있게 나타내려 하였다.
그는 1920년대에 많은 진보주의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르동과 미국 낭만주의 회화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피카비아가 뉴욕에 왔을 때 도브는 그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기계를 주제로 하여 1922년에 <기어>를 그렸다.
그는 1925년에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초상>과 <평론가>를 그렸는데 여러 가지 물질들을 조립한 후 색을 칠한 작품들이었다.
노란색을 선호한 그는 버려진 물질들을 조립하여 노란색을 칠하고 명랑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창출했다.

스티글리츠는 자신의 화랑에 소속된 예술가들과 작가들을 피카비아에게 소개했다.
대부분 파리로 유학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피카비아와 거침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피카비아는 유럽 모더니즘에 대한 뉴욕 예술가들의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활기찬 대도시 뉴욕의 동력주의가 마음에 들었으며, 밤의 황홀한 불빛과 아름다운 교량을 보고 감탄했다.
그가 4월에 뉴욕을 떠나자 스티글리츠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291화랑에 있는 모든 사람이 피카비아를 그리워한다네.
그와 그의 아내는 내가 평생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분명한 사람들이었네.
… 피카비아는 거의 매일 화랑에 오다시피 했는데 우리가 그를 보고 싶어 하듯 그도 이 작은 곳을 그리워할 줄 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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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은 누워서 작업하기도 했고

다음 주말에 나무스는 한 뭉치의 사진을 들고 폴록을 찾아왔다.
그것들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진 폴록은 “더 없느냐?”고 물었다.
나무스는 없지만 다음 주말에 다시 와서 또 찍겠다고 말했고, 다음 주말에도, 그리고 다음 주말에도 왔다.
1950년 여름 내내 주말이면 어김없이 나무스가 왔고, 그는 강아지가 주인을 따라다니듯이 폴록을 따라다니면서 “이리로 와서 서라” “저리로 가서 붓을 들고 서 있어라”는 등등 그를 주인공으로 열심히 연출했다.

허버트 매터는 자신이 두 해 전 여름에 알렉산더 캘더를 위해 사진을 찍을 때 폴록이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부러워하던 것을 상기했다.
“그때 잭슨은 사진에 찍히고 싶어 했다. 그는 캘더를 위한 촬영이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바라보면서 아주 흥분하고 있었다.”

나무스가 그의 화실로 가서 보면 폴록은 누워서 작업하기도 했고 그림 주위를 돌거나 무릎을 꿇고 작업하기도 했다.
나무스는 폴록의 창조적 과정을 역사적 기록으로 삼아 카메라에 담았다고 말했다.
그는 1/25의 속도와 1/50의 느린 속도로 약간 흐리게 찍는 기교도 사용했는데, 그러한 시도는 폴록을 마치 배우처럼 보이게 했다.
나무스는 “나는 그의 그림보다는 그의 얼굴을 더 좋아했다”고 나중에 기술했다.

폴록에게는 그해 여름이 분주한 나날들이었다.
1950년에 그가 그린 그림들은 모두 쉰다섯 점이었는데, 은 크기가 220×300㎝였으며 (101)은 274×549㎝나 되었다.
후자의 벽화는 검정색, 흰색, 그리고 황갈색이 파도처럼 굽이치면서 놀라울 정도로 전체가 조화로운 리듬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폴록은 제목을 붙이는 데 심히 혼돈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숫자들을 제목으로 사용했다.
그가 이라는 제목을 붙인 그림은 그린버그가 그림에 나타난 엷은 자주색이 마음에 든다면서 <라벤더 안개 Lavender Mist>(102)라고 부르라고 해서 나중에 제목을 고쳤다.
이 그림은 폴록이 좀더 커다란 크기로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작품이었다.
나무스가 폴록에게 보여준 사진들은 500장이 넘었다.
그중 많은 사진들이 사람들에게 소개되어 낯익은 사진들이 되었다.
그때 데이비드 스미스가 폴록을 방문했는데 폴록은 그에게 “보아라. 데이비드, 너는 최고의 조각가이고 나는 최고의 화가이다.
다른 화가들은 전부 개똥같고 나와 드 쿠닝만 대단하다”고 말했다.
베티의 말로는 폴록이 스미스와 드 쿠닝의 이름을 거론하기는 했지만 “그의 말 저변에는 모든 예술가들이 다 개똥같고 자신만이 대단하다는 의미가 깔려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잭슨은 자신을 항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첨언했다.

그처럼 폴록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그린버그에 따르면 폴록이 미술관에 가서 대가들의 예술품들을 더 이상 보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그들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린버그가 “잭슨에게 루벤스의 풍경화들을 프린트한 그림들을 보여주었더니 그는 그 그림들을 보고나서 “난 이 자보다 더 잘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폴록에게는 더 이상 루벤스나 피카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페기, 베티, 샘 쿠츠 같은 중개상들 따위의 도움조차도 필요하지 않았다.
폴록은 그들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으면 리를 통해서 말하도록 했다.
폴록은 자신이 위대하다는 망상에 완전히 홀려 있었다는 것이 그의 주위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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