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시추에이션’회화의 주인공 프란츠 클라인
이 시기에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시다 술집에서 폴록과 술을 마시기도 했고, 그와 논쟁을 하다가 곧잘 욕설을 퍼부었으며, 힘으로나 말로나 미학적으로나 폴록에게 지지 않았던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프란츠 클라인(Franz Klein 1910~62)이었다.
폴록보다 두 살 많은 그는 폴록에게는 엄했던 편이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온화한 성품을 가진 그를 좋아했는데 드 쿠닝이 특히 그와 우정이 두터웠다.
1950년 이간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후 뉴욕 화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그는 폴록과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는 주량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클라인은 1910년에 펜실베니아 주의 윌크스-바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이고 어머니는 콘발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아버지가 1917년에 타계한 지 3년 후 어머니는 재혼했다.
그는 운동을 아주 좋아했으므로 1929년에 바시티(Varsity) 미식축구 팀의 주장이 되었다.
1931년부터 35년까지는 보스턴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며, 1937년 파리로 갔다가 다시 런던으로 가서 헤덜리(Heatherley)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런던에서 그는 엘리자베스 빈센트 파슨즈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새들러(Sadler)의 웰즈 발레단(Wells Ballet)에 속했던 무용수였다(웰즈 발레단은 나중에 로열 발레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38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버팔로에 있는 백화점에서 디자이너로 잠시 근무했다.
이듬해에 클라인은 뉴욕으로 와서 더러 그림들을 발표하곤 했는데 그가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자를 검정색으로 굵게 드로잉한 후 무료하여 돋보기를 가지고 그 그림을 살펴보다가 확대기 속에서 아주 인상적인 느낌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더 이상 사물들을 재현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추상화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950년 그는 이간 화랑에서 검정색과 흰색으로 그린 자신의 추상화 열한 점을 소개했고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그의 그림이 휘트니 미술관 연감에 수록되었고 1955년에는 모마에서 열렸던 ‘열두 명의 미국 화가와 조각가들’ 전람회에 초대받았다.
1957년에는 미국을 대표하여 상 파울로(San Paulo) 비엔날레에 참여하기도 했다.
모마에서는 1952년에 이미 그의 그림을 구입했고, 휘트니 미술관은 1955년에 그의 대표작 <마호닝 Mahoning>을 구입했다.
클라인의 그림들은 추상인 동시에 실존주의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시추에이션 situation’이라고 자주 말했다.
캔버스에 막 색을 칠하게 되면 시추에이션이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마음을 온전히 백지화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마치 동양의 선(禪) 사상을 가진 예술가와도 같은 태도였다.
그에게 그림은 그려지는 과정에서의 느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는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최종적인 그림에는 화가의 감정이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사풍자를 창조했던 예술가 오노레 도미에를 좋아했고 렘브란트와 고야의 그림들도 좋아했다.
1950년부터 그는 싸구려 상업용 페인트와 붓을 사용하여 단숨에 그리는 듯한 붓놀림 행위를 보여주었다.
과감히 단순화한 이미지와 색들을 검정색과 흰색으로 제한하여 그린 그의 그림들은 마치 동양의 붓글씨를 확대한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때로 내가 흰 캔버스에 검정색으로 어떤 부호 같은 것을 그린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검정색을 사용하듯이 흰색을 사용하며, 그만큼 흰색은 나에게 중요하다.”
그는 단숨에 그림을 그리면서 육체적 행위의 에너지와 붓의 운동을 나타냈고, 행위와 자세의 아이디어를 조직으로 완전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액션 페인팅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