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과 로젠버그 그리고 그린버그

 

1952년 재니스 화랑에서의 전람회로 좋은 평을 받았던 폴록이 12월호 『아트 뉴스』를 보니 이웃에 사는 로젠버그가 쓴 글이 ‘미국 행위예술가들’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실려 있었다.

“캔버스에서 미국 화가 한 사람 또 한 사람에 의해서 계속 운동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행위로서 … 캔버스에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들은 그림들이 아니라 사건들이다.
화가는 더 이상 마음속에 있는 이미지를 이젤에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다.”

특정한 예술가의 이름을 지칭하여 그렇게 기술한 것은 아니었지만 폴록은 그가 자신의 그림을 적절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이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다기보다는 어떤 행위를 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오던 터였다.
이렇게 로젠버그에 의해서 미술사에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말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폴록을 포함하여 드 쿠닝, 클라인의 그림이 그러한 용어 아래 자연스럽게 분류되었다.

좋은 평에도 불구하고 재니스 화랑에서의 전람회에서 그림이 한 점밖에 안 팔렸으므로 폴록은 의기소침해졌고 술을 마시면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탓했다.
1953년 1월 이간 화랑에서는 구스턴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폴록은 거기 벽에 걸린 그의 그림들을 찢는 해프닝을 저질렀다.
폴록은 구스턴이 추상을 버리고 사물의 모습들을 그리는 것에 아주 분개했다.
니콜라스 카론은 “구스턴은 추상회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성공하기에 급급했다”고 말했다.

폴록은 시다에 자주 갔으며 술집이 문 닫을 시각에야 그곳을 나오기 예사였다.
리는 로젠버그가 의도적으로 폴록을 비인간적으로 대했으며 그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하여 바보 행세를 하게 했다고 분개했다.
그녀는 “당신이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잭슨은 유명한 사람인데 당신은 마치 그를 보통사람 대하듯 한다”며 로젠버그에게 고함을 질렀다.
로젠버그는 193㎝의 거구를 세우면서 “내게 누가 유명한지 말하지 마라!”고 목청을 높였으며 “만일 여기에 유명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건 술 취한 사내가 아니라 바로 나다!”라고 대꾸하였다.
주위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사람들은 깔깔거리며 좋아했는데 리만 여전히 고함을 질렀다.

로젠버그는 그린버그와 쌍벽을 이루는 평론가로 부상했으므로 그는 폴록을 가리켜 감히 ‘주정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시인 앙드레 브르통을 만난 후 브르통이 자신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라고도 말했다.
로젠버그는 이차대전 이전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가 전쟁 후에 반공산주의로 돌아섰지만 근본사상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한 예술가가 독자적으로 어떻게 대중적인 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을까 하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이러한 태도는 마더웰의 사고와도 상통했다.
마더웰 역시 “예술가의 문제는 무엇을 가지고 자신을 나타낼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인식했으며, 1944년에 이미 실존주의 철학에서 자신의 답을 구하고 있었다.
마더웰은 철학박사로서 당시 성행하던 실존주의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회화는 그러므로 작가가 색과 공간 안에서 인식하는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로젠버그는 마더웰과는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공통 관심사를 함께 글로 발표한 적도 있었다.
로젠버그는 “예술가는 자신의 경험이라는 재료로 직접 작품을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마더웰의 미학과 상통했으며 마르크스의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는 “예술가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새로운 자아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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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의 전시회에 침묵한 그린버그


재니스 화랑에서 열렸던 폴록의 첫 전람회에 관해 의당 입을 열어야 했건만 그린버그는 침묵을 지켰다.
비록 많은 평론가들이 폴록을 칭찬했지만 그린버그는 “나쁘지는 않지만 맥빠진 그림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린버그는 누구보다도 폴록을 잘 알았고, 따라서 그 그림들이 폴록이 과거에 그렸던 그림들에 비해 뒤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폴록과의 우정을 생각하여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지는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폴록에게만 소감을 알렸다.

재니스 화랑에서 전람회가 열리고 일 주일 후(1952년 11월 17일~30일), 언론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폴록을 위한 첫 회고전이 그린버그의 주최로 버몬트에 있는 베닝턴 대학에서 열렸다.
그린버그는 자신이 폴록의 최고의 그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1943년과 1951년 사이에 그렸던 여덟 점을 선별하여 전람회를 열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파시패>(53) <토템 II> <열쇠> <가을 리듬> <울림 Echo>이었다.

11월 16일 폴록과 리는 알퐁소 오소리오의 스테이션 왜곤을 타고 베닝턴 대학으로 갔다.
전람회장에는 폴 필리를 포함한 대학교수들과 그린버그, 그리고 헬렌 프랭큰타일러가 있었다.
그때 낯선 사람이 폴록에게 무심코 술을 권하자 그린버그가 “잭슨, 마시지 마라”고 간섭했다.
폴록은 그에게 심하다고 말한 후 조금 있더니 “멍청한 사람 You're a fool ”이라고 말했다. 그린버그는 폴록이 그런 말을 하자 아주 화가 나서 2년 동안 그를 만나지 않았다.
『뉴욕 타임즈』는 폴록을 칸딘스키와 비교하면서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그림들은 “여태까지 보았던 것들에 비해 좀더 암시적이었다”라고 보도했다.
로버트 굿나우는 그의 그림들을 “애태우게 하며 환희적이었다”고 칭찬하면서 “그림들이 화랑을 에너지로 가득 채웠다”고 적었다.
『아트 다이제스트』는 “아주 대단한 새 캔버스들”이라고 기술했다.
그리고 로버트 코우츠는 『뉴요커』에서 “항상 느끼지만 폴록의 그림 표면 아래에는 아이디어들의 공식 안에서 조심스럽게 숙고한 힘 있는 긴장감이 나타나 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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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장밋빛 작은 새우'


현대미술의 문을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연 폴 고갱은 빈센트에 관한 산문을 몇 점 남겼다.
다음의 글에서 고갱의 문장력을 볼 수 있으며 또한 빈센트의 인간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이다.
자네에게 흰 수의를 빌려주지.
내 말은 그저 눈을 뜻한다.
가난뱅이는 고생하지만 부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헌데 12월 그 날,
내가 좋아하는 도시 파리의 루픽 가에서는 보행자들의 걸음걸이가 한가로운 기색이 없고 여느 때보다 분주했다.
기묘한 옷을 입은 추위에 떠는 한 사내가 행인들 틈으로 바깥쪽 큰 길로 가려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염소가죽으로 몸을 싸고, 분명, 토끼가죽으로 만들었을 모피 모자를 쓰고,
붉은 턱수염이 곤두서 있다.
소 치는 사람의 모습이다.

춥더라도 어정쩡하게 관찰하지 말고 균형을 갖춘 손과 매우 해맑은 어린 아이 같은 푸른 눈을 잘 보고 지나쳤으면 한다.
이 사람이 바로 그 가련한 부랑인이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는 고철 부스러기와 유화를 헐값에 파는 고물상으로 급히 들어간다.
가련한 예술가!
자넨 팔려고 하는 작품에 혼의 한 면을 그려넣었던 것이지.
그것은 작은 정물화로 장밋빛 색종이에 그린 <장밋빛 작은 새우>이다.

"이 작품을 줄테니 돈을 주지 않겠소?
집세를 내야 하기 때문이오."

"아이고 나으리, 손님들이 까다로워졌답니다.
밀레의 작품을 싸게 달라고 하는 형편이랍니다.
게다가 ..."

장사꾼은 말을 잇는다.

"선생의 작품은 별로 밝지 못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르네상스가 가로수에 나뒹굴고 있으니 말이죠.
그래도 소문에 의하면 선생은 상당한 실력자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잘해 드려야지요.
여기에 5프랑 있습니다."

5프랑 화폐가 계산대 위에서 땡그랑 소리를 내고 빈센트는 말 없이 그 돈을 집어들고 장사꾼에게 인사하고 그곳을 나섰다.
간신히 루픽 가(빈센트가 동생 테오와 함께 지내던 파리의 아파트가 있는 거리)로 돌아와 집 근처에 다달았을 때 보호소에서 나온 가련한 여인이 화사한 미소를 디우며 그에게 동냥을 청했다.
깨끗한 흰 손이 외투에서 나왔다.
빈센트는 독서가였다.
그는 <아가씨 엘리자>(1878년 에드몽 드 공쿠르의 소설로서 '불행한 엘리자 la Fille Elisa에 관한 이야기)를 머리에 떠올렸다.
그래서 그의 5프랑은 가련한 여인의 몫이 되었다.
여인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 듯 주린 배를 안고 급히 도망쳤다.

(그 후)

그 날은 올 것이다.
난 그 날이 도래한 것처럼 볼 수 있다.
나는 경매장 제9호실로 들어간다.
경매자가 작품을 팔고 있다.

"<장밋빛 작은 새우>, 400프랑, 450프랑, 500프랑!
여러분, 여기를 보십시요.
이것은 더욱 값진 것입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장밋빛 작은 새우>는 이렇게 낙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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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 반드시 프랑스를 떠나야 한다고 난 결심했습니다

전쟁 중이었지만 유럽의 예술가들을 위한 전시회를 미국에서 개최하기 위해 월터 패츠가 여름에 파리로 왔다.
아모리 쇼가 성공하자 그는 유럽 미술을 좀더 미국에 소개하고 싶어 했다.
그는 레이몽과 우정이 두터웠는데 레이몽은 그때 군인병원에서 의무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패츠는 존 퀸의 후원으로 캐롤 화랑에서 열린 세 차례에 걸친 근래 프랑스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관람한 후 캐롤 화랑에서 작품들을 구입했고, 마티스와 세잔의 그림들도 구입했다.
패츠는 재혼한 독일 태생 예술가 아내와 함께 파리를 활보했지만 프랑스 공무원들의 반독일 감정으로부터 불편한 일을 당한 적은 없었는데, 루wm벨트 대통령이 써준 추천서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는 뒤샹과 오랫동안 대화한 후 뉴욕으로 갈 것을 그에게 권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징집되어 파리 시가는 텅 빈 느낌이었다.
자크 비용은 1914년 10월에 징집되어 전선에 배치되었고, 피카비아, 레제, 브라크, 글레이즈, 메쳉제, 그리고 그 밖의 예술가들도 전선으로 향했다.
브라크와 레제는 부상병이 되어 후송되었는데 브라크는 머리를 다쳤고, 레제는 가슴에 화상을 입었다.
아폴리네르는 이탈리아 국적을 가졌지만 프랑스 시민권을 신청한 상태였으므로 자원해야 했고, 그도 머리에 부상당해 후송되었다.
뒤샹의 친구 두무세와 트리부는 군의관으로 복무했으며, 뒤샹의 형수인 가비와 이본느, 그리고 동생 수잔느는 간호병으로 복무했다.

뒤샹은 1915년 1월에 징집통지서를 받았지만 신체검사 때 심장에서 약간 설렁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판정을 받아 면제되었다.
실제로는 그의 건강에 이상이 없었으므로 다행스러운 판정이었다.
그는 면제판정을 받은 사실을 뉴욕으로 떠난 패츠에게 편지로 알리며 “그들은 내가 군인이 되기에 병이 너무 심하다고 합니다. 그들의 결정을 섭섭하게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음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패츠는 답장을 보내면서 퀸이 캐롤 화랑에서 그의 그림을 두 점 구입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뒤샹은 4월에 패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레이몽의 조각들과 자신의 그림 세 점을 그에게 발송했다고 알렸다.
그가 보낸 세 점의 작품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1>, <처녀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길>, 그리고 <종이에 그린 커다란 드로잉>이었다. <종이에 그린 커다란 드로잉>은 <큰 유리>를 위한 첫 드로잉이었는데 현존하지 않는다.
뒤샹이 패츠에게 보낸 4월 2일자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반드시 프랑스를 떠나야 한다고 난 결심했습니다.
지난 11월에 당신에게 말한 대로 뉴욕에 거주할 생각인데, 이는 생활비를 내가 벌 수 있을 경우에 한해서입니다.
몇 가지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첫째, 당신은 내가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서관이나 연구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웃지 마십시오.
난 문학학사 학위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영어를 할 줄 모릅니다.
그렇지만 도서관에서 견습원으로 2년 동안 일한 적은 있습니다.
둘째, 5월 말에야 떠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때가 적당합니까?
아니면 9월까지 기다렸다가 떠나야 합니까.
나의 이런 계획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해서 당신이 편지에 당신의 생각을 따로 적어 보내주기 바라며, 내 계획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형들에게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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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재니스 화랑에서의 폴록의 첫 전람회

 

리는 폴록과의 “타이틀 쟁탈전”에서 자신이 도저히 챔피언이 될 수는 없음을 알고서 폴록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낳은 자식입니다. 와서 그를 보살피세요.”

류마티즘으로 고생하던 스텔라는 며느리의 청을 받고 10월 중순에 스프링스로 왔다.
스텔라는 아들과 며느리 모두가 지쳐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온 후로 폴록은 술을 마시지 않고 화실로 가서 종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1월 10일에 열릴 전람회를 목전에 두고 그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그림들을 그릴 수가 없었다.
폴록은 컬러를 사용했으며 홀리스틱 방법으로 그림들을 그렸다.
그는 검정색으로 그렸던 그림에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그리고 흰색을 칠하면서 <수렴현상 Convergence>을 그렸다.
또 그는 40년대 말에 사용한 물감 떨어뜨리기 기교를 사용했다.
그렇게 해서 모두 열두 점을 그렸는데 그것은 지난 해에 그렸던 그림들의 반도 안 되는 숫자였다.

여기서 폴록의 유명한 그림 <파란 막대기들 Blue Poles>(109)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 그림은 폴록이 토니, 뉴먼과 함께 그림을 망친 적이 있었던 후에 그리기 시작한 작품인데,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낮에 바라보니 기괴한 모습이므로 폴록은 그 그림을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없애려니 213㎝ 높이에 549㎝ 길이의 그림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캔버스는 벨기에에서 생산된 린넨으로서 50달러에 해당하는 비싼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캔버스를 구제해보려는 의도로 그 위에 색들을 더 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는 수주 동안 최소한 여섯 차례에 걸쳐 다른 색을 칠했으며, 리에게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폴록은 해결방법으로 여덟 개의 막대기들을 수직으로 더욱 힘 있게, 고른 간격으로 이미지화했다.
그림은 완성되었고 폴록은 친구들과 함께 그것을 포함한 열두 점을 전람회 전날 재니스 화랑으로 운반했다.
친구들이 그림을 벽에 거느라고 분주한 틈에 폴록이 사라졌고,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술에 취해 망치질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그림들을 모두 벽에 걸 수 있었다.
전람회 첫날 클라인이 와서 “잭슨, 한잔하러 가자”고 말했는데 두 사람은 그날 돌아오지 않았다.

평론가들은 전람회에 와서 그림들을 둘러본 후 일제히 포문을 열었는데 칭찬이 자자했다.
『네이션』 『뉴욕 타임즈』 『뉴요커』 그리고 미술잡지들이 칭찬했다.
『아트 뉴스』는 1952년의 개인전들 중 폴록의 전람회를 두 번째로 꼽았는데 첫 번째는 미로의 전람회였으므로 미국 작가들의 전람회 가운데서는 가장 우수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폴록은 “오, 빌어먹을 놈들. 그 시팔놈들이 뭘 알아!”라고 화를 내었다는데 정말 폴록은 미로까지 능가하려고 했을까?

평론가들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폴록은 재니스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그림이 팔렸느냐고 물었고, 재니스는 한두 사람이 관심을 나타냈다고만 말했다.
볼티모어에서 온 미술품 수집가 한 사람이 그림을 한 점 사서 거실에 걸려고 했으나 그의 그림이 4인치가 더 길다고 사지 않았다.
전람회가 끝났고, 한 점이 팔렸을 뿐이었다.
그 그림은 작았고, 수수료를 제하고 폴록의 손에 들어온 돈은 1,000달러였다.
폴록은 그림을 더 팔아보려고 베티를 떨치고 나온 것이었는데, 이제서야 그의 그림이 팔리지 않은 것은 베티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었음을 알 것 같았다.
아무도 폴록의 그림을 팔 수 없었다.

<파란 막대기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다.
전람회가 끝나고 재니스는 그 그림을 프레임에서 떼어 돌돌 만 후 그림들을 보관하는 곳에 넣어두었다.
일 년이 지나도록 그 그림은 팔리지 않은 채 자물쇠도 없는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리가 재니스에게 그림을 그렇게 보관하면 그림에 상처가 생긴다고 투덜거리자 그는 프레임에 붙여서 보관할 넓은 장소가 없다면서 그 그림을 스프링스로 돌려보냈다.

1954년 1월 <파란 막대기들>은 다시 재니스 화랑으로 운반되어 ‘오늘날의 아홉 미국 예술가들’ 전람회에서 다시 소개되었을 때 팔렸다.
미술품 수집가 프레드 올센이 토니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것을 6,000달러에 구입한 것이었다.
토니는 코네티컷 주에 있는 올센의 집을 디자인해준 적이 있었으므로 그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재니스에게는 2,000달러의 수수료가 생겼고 폴록은 4,000달러를 받았다.
2년 후 프레드는 그 그림을 다른 수집가 벤 헬러에게 3만 2천 달러에 팔았으며 헬러는 1973년에 그 그림을 캔베라에 있는 오스트리아 국립 화랑에 200만 달러에 팔았다.
당시 그 금액은 미국 화가들의 그림 중 최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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