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스티글리츠의 초상화를 카메라의 형태로

멕시코의 베라크루즈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데 자야는 드로잉하기를 좋아하여 아버지가 소유한 신문 두 곳과 멕시코시티의 주요 신문에 만화를 기고했다.
멕시코가 정치적·사회적으로 불안에 빠지자 데 자야 가족은 1907년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데 자야는 『이브닝 월드』에 취직되어 미술계와 관련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스티글리츠는 신문에서 그의 드로잉을 보고 291화랑에서 1909년과 1910년에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1910년 두 번째 전시회를 마치고 그는 파리로 가서 1년 동안 회화 수업을 하며 스타인과 아폴리네르를 만났다.
그가 1914년에 다시 파리를 방문했을 때는 스티글리츠의 의뢰로 피카소를 만났으며, 이를 인연으로 해서 피카소의 그림을 291화랑에 소개했다.
그는 1919년에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고 화랑을 운영했는데 피카비아가 뉴욕에 왔을 때는 잡지 『291』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피카비아는 7∼8월에 『291』을 통해 초상화를 여러 점 발표했다.
스티글리츠의 초상화를 카메라의 형태로, 아그네스 에른스트 메이어의 초상화를 전기를 충전시키는 스파크 플럭으로 묘사했으며, 자화상을 자동차의 경적소리를 내는 혼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데 자야는 피카비아의 그림에 관한 글을 잡지에 기고하면서 모더니즘의 정신을 찬양했다.
그는 『291』의 기능이 “자유, 개인주의, 자아표현”임을 잡지를 통해 홍보했다.

10월에는 스위스 태생 화가 장 크로티와 프랑스인 아내 이본느가 뉴욕으로 와서 거주하기 시작했고, 일주일 후에는 글레이즈가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 겸 뉴욕으로 왔다.
피카비아와 글레이즈는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일주일 만에 징집되었으나 피카비아 장인의 도움으로 글레이즈도 편한 보직을 가질 수 있었다.
피카비아의 장인 줄 로세는 신문사를 소유한 부자로 장관을 지낸 경력이 있었다.
뒤샹은 피카비아와 글레이즈를 뉴욕의 여러 곳으로 안내하면서 그리니치 빌리지와 차이나타운에 가기도 했다.

이튿날 저녁 뒤샹은 글레이즈 부부를 브레부르트에서 벌어진 만찬에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는 아렌스버그 부부, 스티글리츠, 조셉 스텔라, 만 레이, 루이스 노턴, 막스 베버 그리고 아렌스버그와 스티글리츠 서클에 속한 미국인 예술가들이 여러 명 있었다.
피카비아는 그곳에 없었는데, 스위스로부터 두 아이와 함께 막 도착한 아내 가브리엘이 그를 데리고 해군 함정에 승선했기 때문이다.
피카비아가 탈영할 것을 염려하여 그녀가 그를 승선하게 한 것으로 피카비아가 탈영하지 못하도록 그와 함께 쿠바로 갔다.

뒤샹이 글레이즈 부부에게 소개한 조셉 스텔라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나 1896년 19살 때 뉴욕으로 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학한 후 뉴욕 미술학교로 진학하여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로부터 사사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도시의 장면을 주로 그리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캔버스에 재현했다.
1912년에 파리로 가서 유럽의 모더니즘을 직접 보고 야수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에 힘입어 자신의 회화에 변혁을 꾀하였으며 그의 그림은 그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화법으로 그린 세 점을 아모리 쇼에 출품했다.
그 후 그는 그룹전에 참여했고,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기 시작했으며, 뒤샹과 피카비아를 만날 무렵에는 뉴욕 미술계에서의 그의 위상은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유럽 미술에 관해 잘 아는 스텔라는 쉽게 뒤샹과 피카비아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뒤샹이 뉴욕에 온 것을 미국 언론이 아는 데는 두 달이 걸렸다.
먼저 『뉴욕 트리뷴』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린 예술가가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고 알렸고, 이어 다른 신문과 잡지들이 그가 뉴욕시를 활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1915년 미국 이민국 서류에 기록된 뒤샹의 모습은 ‘5피트 10인치의 키에 적당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으며 브라운 머리카락에 밤색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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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오리에의 호평에 대한 빈센트의 반응>


시인이자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는 1890년 1월 상징주의 예술가들의 잡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 첫 번재 호에 '소외된 사람, 빈센트 반 고흐'란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으므로 빈센트의 이름은 이제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빈센트가 이 글을 읽고 동생에게 피력한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순진하고 진정한 화가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소개한다.

다음은 오리에의 평이다.

빈센트 작품의 특성은 대체로 넘쳐나는 힘, 넘쳐나는 신경과민, 과도한 표현 등으로 정의된다.
사물에 대한 맹목적 단정, 종종 발견되는 과감하게 단순화한 형태, 태양을 정면으로 대하는 오만함, 스케치와 채색에 나타나는 격정적 열정, 가장 사소한 부분에서도 드러나는 강렬한 형상, 이런 것들은 남성적이며 과감하고 거의 야수성을 지니고 있지만 매우 섬세하다.
이처럼 자연주의자의 예술 저변에 베어있는 진정 이상적인 경향을 부정해버린다면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작품의 큰 부분은 도저히 이해되지 못한 채로 남게 될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경우 농부들의 모습을 어떻게 그처럼 당당하고 수선스러우며 야성적일 정도로 빛나는 이마를 가진 사람들로 묘사할 수 있을까?
빈센트는 늘 그들의 외모, 몸짓, 노동에 매혹되어 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석양 무렵의 불그스레한 하늘 아래서, 때론 활활 타오르는 정오의 황금빛 대지 한가운데 있는 그들의 모습을 쉬지 않고 그리게 한 것이다.
우둔하고 산업지상주의에 젖은 우리의 속성이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고정관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씨 뿌리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섬세하면서도 영광스러운 태양신화와 관련된 이야기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그의 집착을 이해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둥그런 태양, 그가 쉴새없이 반복해서 편집광적으로 그려낸 화려한 해바라기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빈센트는 오리에의 호평을 읽고 소감을 테오에게 적었다.

네가 보내준 오리에가 쓴 평론을 읽고 깜짝 놀랐다.
내 작품이 그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 글을 통해 앞으로 내가 어떻게 그려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평론은 정정해야 할 결함을 아주 잘 지적했다.
그래서 필자가 나뿐 아니라 모든 인상파 화가들이 올바른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썼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나는 물론이려니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는 공동의 이상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토록 불완전한 내 작품 여기저기에서도 장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격려하는 말이어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며 기회가 되면 사의를 꼭 ㅍㅅ허고 싶구나.
하지만 그 과업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내 등이 넓지 않다는 걸 확실히 밝혀두어야겠다.
그가 내 그림을 중심으로 썼으므로 감언이설을 듣는 것 같더구나.
(1890년 2월 2일 테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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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영어를 거의 몰랐고

아렌스버그의 아파트에 당도했을 때 뒤샹은 마치 파리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화랑처럼 커다란 방에는 피카소, 브라크, 브랑쿠시 등과 퓌토의 예술가들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글레이즈와 형 자크 비용의 그림이 벽에 걸린 것을 보았다.
벽난로 위에 걸려 있는 마티스의 <이본느 랜스베르그의 초상화>는 아렌스버그가 몽트로스 화랑에서 구입한 것인데, 패츠가 그곳에서 마티스를 위한 전시회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아렌스버그는 휴가를 마치고 뉴욕으로 와서 뒤샹을 만났다.
이내 그는 뒤샹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데, 이는 패츠로부터 뒤샹에 관한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렌스버그의 친구는 “뒤샹이 그의 엔진을 가동하게 만들었다”고 술회했다.
아렌스버그는 그날의 만남 이후 뒤샹의 친구이자 경제적 후원자가 되었다.
뒤샹은 뉴욕으로 와서 지낸 수개월을 여든 살이 된 말년에도 여전히 즐거웠던 시절로 회상했다.

뒤샹은 영어를 거의 몰랐고, 패츠와 아렌스버그가 안내하는 대로 뉴욕의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하루는 패츠의 안내로 그리니치 빌리지에 갔는데 그는 “빌리지는 정말 보헤미아 같았다.
그곳이 유쾌한 곳이었던 이유는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최소한 마약이라도 복용하지만 … ” 하고 회상했다.
빌리지에는 예술가와 과격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주로 살았는데, 그들이 빌리지에 모여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집세가 싸고, 질 좋은 저녁식사와 포도주 한 잔을 1달러 미만에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패츠와 아렌스버그는 뒤샹을 만나면 프랑스어로 말했는데, 아렌스버그는 “우리 세 사람이 프랑스어로 말할 때면 마치 참새들이 연못 주위에서 조잘거리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뒤샹은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좀더 영어를 쉽게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돈도 벌 수 있는 수지맞는 일이 생겼다.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시간당 2달러를 벌게 된 것이다.
패츠와 아렌스버그가 소개한 사람들과 그들의 친구들이 뒤샹의 학생이 되었는데 그 중 존 퀸은 최고의 학생이었다.
변호사로 미술품을 수집하는 그는 수업이 끝나면 뒤샹을 데리고 주로 레스토랑과 극장으로 갔다.
당시 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미술품들에 부과하던 세금을 철폐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기 때문에 돈 잘 버는 퀸은 유럽 예술가들의 작품을 더욱 수집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작가친구와 시인친구들이 많았으며 래디 그레고리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도 우정을 나누었다.
그는 주로 조지 러셀 그리고 잭과 존 버틀러 예이츠로부터 미술품을 구입했다.
잭과 존은 시인 예이츠의 형과 아버지였다.
퀸은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 예술가들의 그림을 수집했으며, 마티스, 피카소, 브랑쿠시, 그리고 레이몽 뒤샹 비용의 조각도 가지고 있었다.
패츠가 그를 뒤샹에게 소개했는데 뒤샹이 뉴욕에 온 지 한 달이 지난 7월이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1>을 포함하여 뒤샹의 그림도 여러 점 구입하였다.
퀸은 뒤샹을 『이브닝 선』의 미술평론가 프레데릭 제임스 그렉과 예술가 발트 쿤 그리고 장느 로버트 포스터에게 소개했다.
장느는 당시 퀸의 애인이었고, 평생 독신이었던 퀸에게는 예쁜 여자친구들이 많았다.

뒤샹이 미국인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할 무렵 피카비아는 장인의 친구 되는 장군의 도움으로 편한 보직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군대에서 사용할 설탕과 당밀을 구입하는 임무를 띠고 쿠바로 가던 중 그가 탄 해군 소속 배가 뉴욕 항에 잠시 정박하게 되자 곧장 브레부르트 호텔로 가서 스티글리츠와 2년 전 아모리 쇼를 참관하기 위해 왔을 때 사귄 친구들을 만났다.
그는 데 자야와 협력하여 아방가르드 잡지 『291』의 제2호를 발간했는데 『291』은 스티글리츠 화랑의 주소를 따서 간행하기 시작한 잡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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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리와의 불화

8월 말 리는 차를 몰고 와인스콧에 있는 존 마콴드의 집에 가서는 폴록이 술에 취했을 때 그에게 주었던 드로잉 한 점에 대한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난 멀리 감자밭에서부터 먼지를 날리면서 차가 오는 것을 보았다.
차에서 리 크래스너가 내렸는데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나를 보자 ‘자, 당신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죠? 우리도 돈이 있어야 장을 볼 수 있다는 걸 알지 않나요?’라고 하길래 난 ‘리, 당신 말이 맞아요’하고는 수표를 써서 그녀에게 주었다”고 마콴드가 술회했다.

폴록은 무료할 때 드 쿠닝과 클라인을 방문하려 했지만 리가 막았다.
어느 날 작은 화랑을 가지고 있는 마사 잭슨(Martha Jackson)이 스프링스로 폴록을 찾아왔다.
마사는 새로운 그림들을 구입하려고 계획하던 차에 폴록의 그림들을 사려고 온 것이었다.
그녀는 폴록과 그림값을 흥정하다가 자신이 타고온 차를 가리키며 “이 그림들을 저 차와 바꾸자”고 제안했다.
폴록은 얼른 ‘예스’라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폴록은 기아를 수동식으로 변속해야 하는 포드에 싫증이 나 있었고, 캐딜락은 차사고로 폐차된 지 오래여서 다시 자동으로 기아가 변속되는 차를 갖고 싶었던 터였다.
마사가 타고온 차는 진한 푸른색의 1950년 올드스 모빌 컨버터블이었는데 그의 그림 두 점과 교환되었다.

11월 말에 폴록의 어머니 스텔라는 심장마비를 세 번이나 일으켰다.
1954년 추수감사절 오후에 피터 스콧의 집에서 저녁식사 파티가 있었으므로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폴록도 그곳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폴록은 소식을 듣고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리는 스콧에게 폴록이 목이 마르다고 하면 우유를 주라고 말했다.
몇 분 후 밖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나서 모두 밖으로 나가보니 폴록이 차로 스콧의 담장을 들이받고 있었다.
그는 담장을 받았다가는 다시 차를 뒤로 물려 또 담장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저 놀라워하며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는데 폴록은 그들을 향해 “시팔놈들!”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집안으로 들어가자 리는 “난 단지 그에게 우유를 주라고만 말했을 뿐인데 …”라며 쑥스러워했다.
스콧이 폴록에게 우유 대신 술을 권했더라면 멀쩡한 담장이 무너질 까닭이 없었다.

어느 날 콜렉터 벤 헬러가 폴록의 화실을 방문했다.
그는 의류 제조업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취향대로 미술작품들을 수집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선뜻 폴록의 그림 한 점을 8,000달러에 구입했다.
그것은 여태까지 폴록이 팔았던 그림들 가운데 가장 고액이었다.
그 후 헬러는 아내와 함께 폴록을 자주 방문하여 폴록과 함께 음악을 듣거나 바닷가로 갔다.
이 시기에 폴록은 어머니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형이 “어머니가 이제 여든 살인데 건강도 좋지 않은 분이 변덕스러운 너를 보살피느라고 시달릴 이유가 없다”며 스프링스로 가는 것을 막았다.
폴록은 친구들이 만나기를 꺼려하여 이집 저집 기웃거리는 ‘버림받은 아이’처럼 이웃을 순찰하면서 방문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리는 이웃들에게 폴록이 술을 마시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당부해두었다.

폴록과 리는 여전히 대적하는, 지칠 줄 모르는 두 마리의 사자 같은 관계였다.
리가 폴록에게 무엇을 명령하던지 폴록은 반대로 행동했다.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기 때문이었다.
여름에 폴록과 리가 뉴욕에 갔을 때에도 모마 앞 주차장에서 폴록은 누구를 만나야 한다고 하면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리는 결국 폴록을 뉴욕에 남겨두고 돌아와야 했다.
리가 프린스턴 대학 교수인 미술사학자 샘 헌터 부부에게 저녁식사 초대를 받고 폴록에게 시간을 맞추어오라고 단단히 당부했을 때에도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잭슨은 그저 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고 헌터의 아내가 말했다.
다음날 폴록은 리와 동행하지 않고 혼자 난초를 들고 가서 헌터 부부에게 정중히 어제의 일을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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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폴록, “내가 드로잉할 줄 알았다면 … ”

전람회를 자축하는 파티에서 폴록은 술을 마셨고, 건넌방에 있는 드 쿠닝에게 소리를 질렀다.
“빌, 너는 배신했다. 넌 사물들을 그렸고, 여전히 그 빌어먹을 것들을 그리고 있다. 넌 사물을 그리는 화가로서의 입장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드 쿠닝은 “넌 무엇을 하는데, 잭슨?”이라고 대꾸했는데 그것은 2년 전부터 폴록의 그림에서도 사물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해서 한 말이었다. 
 

폴록은 그곳을 빠져나와 술집으로 향했다.
폴록은 술집에 들어서더니 어느 사내와 눈을 흘기다가 격투를 벌이고는 술집을 나와 길모퉁이에 잠시 서 있더니 달려오는 차 앞을 획 지나갔다.  

차는 불과 몇 센티미터 간격을 두고 그에게 다가왔으나 그는 무사했다.

이 시기에 폴록은 중요한 그림들을 그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진전 없는 그림들이었다.
그는 리더러 화실로 오라고 한 후 “이게 그림이냐?”고 자신이 막 그리다 만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폴록은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으며 자신감도 상실했다.
그는 자살에 관해 몇 차례 말한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술을 마셔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는 또 이스트 햄프턴 경찰서에 자주 끌려갔다.
하지만 그가 잘 알려진 예술가임을 아는 경찰관들은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경찰서 기록에는 폴록이 차로 반대편 노선을 침범한 후 길가에 주차한 채 보도에 인사불성으로 누워 있었다고 되어 있다.

폴록은 개성이 강하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그에게도 여인의 품에서 위로받고 싶은 여린 마음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사 삼손도 데릴라의 품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았는가보다.
폴록은 술을 마시고나면 고독감에 몸부림쳤고, 자신의 무력감을 느끼고 울고만 싶어졌다.
어느 날 밤 그는 근래에 이웃으로 이주해온 실 로드라는 예술가에게 저녁식사 초대를 받고 갔다가 술을 마신 후 그만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늙었어!”라고 폴록은 반복해 말했고 그녀는 따뜻한 손으로 폴록의 머리를 감싸며 그를 위로했다.
폴록은 다른 좌석에서 자신은 무능하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은 드로잉도 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며 괴로워했다.

어느 날 셀덴 로드만이라는 작가가 방문하여 폴록에 관한 책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로드만과 그의 아내 마이아가 폴록에게 그림을 보여달라고 하자 그들을 화실로 안내했는데 화실 문은 잠겨 있었다.
폴록은 창문을 두 개 부순 후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열었다.
얼마 후 로드만은 집안으로 갔고 화실에는 폴록과 마이아만 있었는데 폴록이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폴록이 엉엉 울면서 자제하지 못하자 마이아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주었다.
폴록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폴록은 벽에 기대어 있는 그림들을 가리키면서 “내가 드로잉할 줄 알았다면 이 따위 형편없는 그림들을 그렸겠어요?”라고 말한 뒤 다시 울었다.
폴록은 솔직한 예술가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상실되자 부쩍 더 자신은 “위대한 예술가”라고 반복한 것이었다.

어느 날 밤 자정이 넘은 시간에 그는 포드 자동차를 타고 로젠버그의 집으로 갔다.
그는 정원에 선 채 집을 향해 “시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다!”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로젠버그는 창을 통해 그를 보았다.

이 시기에 드 쿠닝은 이스트 햄프턴의 제리코 거리에 있는 레오 카스텔리의 커다란 집 한켠에 화실을 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카스텔리가 그를 후원했기 때문이었다.
드 쿠닝을 찾는 방문객들 가운데에는 로젠버그를 비롯하여 콘래드 마카-랠리, 필립 페이비어, 윌프리드 족바움, 클라인, 마더웰, 그리고 젊은 작가들이 있었다.
폴록이 조용한 여름을 지내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1953년 여름 폴록은 세 점을 그렸는데 개인적인 감성을 나타내느라고 주로 회색을 사용하여 그림의 분위기가 음침하고 애수적이었다.
그는 <회색빛 대양 Ocean Greyness>(111)에서 많은 눈동자들과 가면 같은 색의 섬을 묘사했다.
늘 그를 방문했던 사람들은 존 리틀 부부, 오소리오 등이었으며 이따금 낯선 사람들이 폴록을 찾아왔다.

8월에 재니스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그림에 더 이상 번호를 매기지 말고 전처럼 제목을 붙이라고 말했다. 부채가 늘어가고 있었으므로 그림을 팔기 위해서라도 그는 재니스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름에 몇 차례 친구들의 방문도 있었다.
드 쿠닝, 클라인, 필립 페이비어가 그들이었는데, 리는 그들이 잭슨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했다.
어떤 때는 리가 현관에서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폴록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리는 그들을 “뉴욕의 갱들”이라고 불렀다.
리가 집에 없을 때면 폴록은 그들을 오라고 해서 함께 술도 마시고 포커 게임도 하면서 다음날까지 지냈다.

어느 날 폴록은 만취한 채 레오 카스텔리의 화랑으로 가서 드 쿠닝이 어디에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잭슨이 그럴 때면 우리 모두는 공포감을 느꼈다”고 카스텔리가 상기했다.
카스텔리의 아내는 폴록이 들어서자 부서지기 쉬운 물건들을 감추었으며 드 쿠닝은 몰래 달아나기도 했다.
폴록은 하마터면 카스텔리가 의뢰하여 래리 리버스가 제작한 콘크리트 조각을 부술 뻔하기도 했다.
1953년 가을 폴록은 유난히 외로움을 느끼면서 방문객들에게 자살에 관해 말했으며, 정신과 의사 웨인 베이커를 몇 차례 방문하면서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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