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스티글리츠의 초상화를 카메라의 형태로
멕시코의 베라크루즈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데 자야는 드로잉하기를 좋아하여 아버지가 소유한 신문 두 곳과 멕시코시티의 주요 신문에 만화를 기고했다.
멕시코가 정치적·사회적으로 불안에 빠지자 데 자야 가족은 1907년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데 자야는 『이브닝 월드』에 취직되어 미술계와 관련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스티글리츠는 신문에서 그의 드로잉을 보고 291화랑에서 1909년과 1910년에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1910년 두 번째 전시회를 마치고 그는 파리로 가서 1년 동안 회화 수업을 하며 스타인과 아폴리네르를 만났다.
그가 1914년에 다시 파리를 방문했을 때는 스티글리츠의 의뢰로 피카소를 만났으며, 이를 인연으로 해서 피카소의 그림을 291화랑에 소개했다.
그는 1919년에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고 화랑을 운영했는데 피카비아가 뉴욕에 왔을 때는 잡지 『291』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피카비아는 7∼8월에 『291』을 통해 초상화를 여러 점 발표했다.
스티글리츠의 초상화를 카메라의 형태로, 아그네스 에른스트 메이어의 초상화를 전기를 충전시키는 스파크 플럭으로 묘사했으며, 자화상을 자동차의 경적소리를 내는 혼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데 자야는 피카비아의 그림에 관한 글을 잡지에 기고하면서 모더니즘의 정신을 찬양했다.
그는 『291』의 기능이 “자유, 개인주의, 자아표현”임을 잡지를 통해 홍보했다.
10월에는 스위스 태생 화가 장 크로티와 프랑스인 아내 이본느가 뉴욕으로 와서 거주하기 시작했고, 일주일 후에는 글레이즈가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 겸 뉴욕으로 왔다.
피카비아와 글레이즈는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일주일 만에 징집되었으나 피카비아 장인의 도움으로 글레이즈도 편한 보직을 가질 수 있었다.
피카비아의 장인 줄 로세는 신문사를 소유한 부자로 장관을 지낸 경력이 있었다.
뒤샹은 피카비아와 글레이즈를 뉴욕의 여러 곳으로 안내하면서 그리니치 빌리지와 차이나타운에 가기도 했다.
이튿날 저녁 뒤샹은 글레이즈 부부를 브레부르트에서 벌어진 만찬에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는 아렌스버그 부부, 스티글리츠, 조셉 스텔라, 만 레이, 루이스 노턴, 막스 베버 그리고 아렌스버그와 스티글리츠 서클에 속한 미국인 예술가들이 여러 명 있었다.
피카비아는 그곳에 없었는데, 스위스로부터 두 아이와 함께 막 도착한 아내 가브리엘이 그를 데리고 해군 함정에 승선했기 때문이다.
피카비아가 탈영할 것을 염려하여 그녀가 그를 승선하게 한 것으로 피카비아가 탈영하지 못하도록 그와 함께 쿠바로 갔다.
뒤샹이 글레이즈 부부에게 소개한 조셉 스텔라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나 1896년 19살 때 뉴욕으로 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학한 후 뉴욕 미술학교로 진학하여 윌리엄 메리트 체이스로부터 사사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도시의 장면을 주로 그리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캔버스에 재현했다.
1912년에 파리로 가서 유럽의 모더니즘을 직접 보고 야수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에 힘입어 자신의 회화에 변혁을 꾀하였으며 그의 그림은 그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화법으로 그린 세 점을 아모리 쇼에 출품했다.
그 후 그는 그룹전에 참여했고,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기 시작했으며, 뒤샹과 피카비아를 만날 무렵에는 뉴욕 미술계에서의 그의 위상은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유럽 미술에 관해 잘 아는 스텔라는 쉽게 뒤샹과 피카비아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뒤샹이 뉴욕에 온 것을 미국 언론이 아는 데는 두 달이 걸렸다.
먼저 『뉴욕 트리뷴』이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그린 예술가가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고 알렸고, 이어 다른 신문과 잡지들이 그가 뉴욕시를 활보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1915년 미국 이민국 서류에 기록된 뒤샹의 모습은 ‘5피트 10인치의 키에 적당한 피부색을 가지고 있으며 브라운 머리카락에 밤색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