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취리히 다다

세계대전은 무고한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고, 남은 이들에게 허탈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예술가들은 무차별한 살육장으로부터 안전한 중립국 스위스의 취리히로 피신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야만적인 행위와 부조리를 조장한다고 자소하면서 이성 자체에 거세게 반발했는데, 이 같은 자연발생적 혁명은 따지고 보면 앙리 루소의 그림에서 그리고 상징주의 작가들의 우상과도 같았던 알프레드 재리의 작품에 등장한 기괴한 장면과 허세에서 이미 조짐이 나타난 적이 있었고, 데 키리코와 샤갈의 잠재의식의 세계에서 시각적인 환상들로 분출된 적이 있었다.
환상주의 혹은 형이상학의 예술가들로 알려진 데 키리코와 샤갈은 이성이 인간이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사고와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욕망과 꿈을 성취하기를 바랐다.
이 같은 경향이 파리의 미술계에 널리 알려질 무렵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취리히 다다를 결성한 예술가들 중 한 사람인 독일인 후고 발은 어린아이들의 자연발생적이고 무책임한 요소를 환영하면서 이런 요소가 새 예술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1916년 일기에 적었으며 그해 취리히에서 다다가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이성에 대한 이 같은 반발을 발은 다다로 명명했다.
프랑스어 dada의 뜻은 아이들의 장난감 ‘목마’이다.
이 말은 발과 리하르트 휠젠벡이 사전에서 닥치는 대로 페이지를 열어 발견한 낱말이었다고 휠젠벡이 말했다.

취리히로 도피한 예술가들은 정신적으로 새 힘을 얻어 본능에 근거한 예술가의 자유를 구가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자연발생적인 것들, 환상들, 그리고 발명의 고유한 자유를 최대한으로 만끽했고 파괴야말로 창조라는 역설을 표어로 삼았다.
발을 중심으로 작가이자 나중에 정신과 의사가 된 휠젠벡과 루마니아인 시인 트리스탄 차라, 차라와 같은 나라 사람 마르셀 얀코, 독일인 화가이면서 조각가 장 아르프와 미래의 아내 소피 타우버가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모였다.
발은 자신의 볼테르 카바레에 전쟁으로 불만투성인 사람들을 초대하여 용기를 가지고 새 정신으로 무장하는 연합을 결성하자고 종용하면서 “전쟁과 민족주의의 이면에서 상이한 꿈을 가지고 살고 있는 독자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전 세계에 알리자!”고 외쳤다.

그들은 처음이자 유일한 잡지 『카바레 볼테르』를 6월에 간행했다.
발은 서문에서 다다란 말을 사용했는데, 다다란 말이 프린트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잡지에는 아폴리네르, 아르프, 발의 오랜 여자친구 에미 헤닝스, 얀코, 칸딘스키, 마리네티, 휠젠벡, 모딜리아니, 피카소, 데 키리코, 에른스트, 피카비아, 마르크, 오스카 코코슈카, 그리고 차라의 글과 그림이 실렸다.
이 잡지는 1916년 11월에 뉴욕에 도착했으며, 데 자야는 11월 16일 차라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난 이제 막 9월 30일자로 쓴 자네의 편지와 10권의 흥미 있는 다다 간행물을 받았네.
… 그것들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네.
뉴욕의 서점에서 자네의 간행물을 팔 수 있도록 알아봐야겠네.”

차라는 그룹의 미학적 대변인이었으며, 7월에 『미스터 소화기의 첫 하늘 모험La premiere aventure celeste de Monsieur Antipyrine』을 출판했으며, 컬러 목판화를 얀코가 제작했다.
차라는 저서에서 다다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다다는 우리의 맹렬함이다.
다다는 독일 아기의 수마트라인 머리를 이치에 맞지 않는 총검들로 장치한다.
다다는 양탄자 슬리퍼나 유사한 물건들이 없는 인생이다.
다다는 통일을 원하면서 또한 통일에 적대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분명히 적대한다.
… 다다는 훈련이나 도덕이 없는 가혹한 요구이며, 우리는 인간성에 침을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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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무 노구치


미국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1904~88)는 1904년 11월 1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일본인 시인 요네지로 노구치Yonejiro (Yone) Noguchi와 미국인 작가 레오니 길무어Leonie Gilmour 사이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가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1918년 14살 때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경험이 훗날 그의 작품에 나타났다.
그는 아버지의 유업을 받들어 동양 문화 특히 일본 문화를 서양에 알리는 데 주력했다.
1922년 여름 짧은 기간 동안 컨네티커트 주에 거주하던 조각가 굿존 보글럼Gutzon Borglum으로부터 수학했고 1922~4년 컬럼비아 대학 예비 의과 과정을 수료한 후 어머니의 권유로 뉴욕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술학교의 교장인 오노리오 루오톨로Onorio Ruotolo의 조수가 되었으며 루오톨로는 노구치의 재능을 인정하고 3개월 후 첫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이때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노구치는 1926년 뉴욕의 브럼머 화랑Brummer Gallery에서 열린 콘스탄틴 브란쿠시 전시회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1927년 존 시몬 구겐하임 재단 연구지원금을 받아 3월 30일 파리에 도착한 후 브란쿠시에게로 가서 그의 조수가 되어 6개월 동안 지도를 받았으며 밤에는 미술 아카데미에 가서 드로잉을 배웠다.
브란쿠시로부터 배운 것은 장인 정신에 의한 자연적 물질의 특성을 부각시키는 것과 유기적 추상으로 이는 그의 조각에 결정적인 영향이었다.
런던과 아시아를 여행한 후 연구지원금이 더 이상 제공되지 않자 1929년 뉴욕으로 돌아왔고 금속판으로 추상 작업을 하기 시작하여 1940년까지 지속했는데, 브란쿠시의 영향으로 유기적 형상을 주로 제작했다.
그는 카네기 홀에 작업실을 정하고 초상 조각을 제작하여 생활했으며 1930년 파리로 갔고 모스크바를 거쳐 북경으로 가 몇 달 체류하면서 먹으로 인물화를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
1931년에는 일본으로 갔으며 처음으로 선불교 정원을 보고 감동했으며 유명한 도예가 진맛수 우노Jinmatsu Uno로부터 도기 만드는 법을 배워 동경에서 도기조각을 전시했다.
1932년 그는 북경에서 먹으로 그린 그림과 도자기 조각을 두 화랑에서 전시했다.
1930년대에는 연방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1935~36년 멕시코시티에서 몇 달 체류하면서 채색 시멘트를 이용한 커다란 벽면 조각 <멕시코 역사 History Mexico>를 제작했는데 첫 환경조형물이다.

노구치의 작품에 나타난 유기적 형상은 브란쿠시의 영향 외에도 아르프와 미로의 영향이었으며 이를 1945년작 <쿠로스 Kouros>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체 내부의 기관을 닮았기 때문에 유기적 형상이라고 말하지만 실재의 형태를 유추할 수 없는 추상이다.
여기서 우리는 추상이 어떻게 시작되어 진전되어 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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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상단에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라고

이 시기 피카비아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다시피 했다.
워낙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라서 그가 아렌스버그의 그룹 예술가들과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중심으로 모이는 예술가들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피카비아는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어로 추상적인 시를 써서 스티글리츠 그룹의 아방가르드 잡지 『291』에 기고했다.
『291』은 나중에 『카메라 워크Camera Work』로 명칭을 바꾸었다.
피카비아는 이 시기에 기계주의를 찬양했다.
<스티글리츠의 초상>에서 기아가 달린 기계를 묘사했으며, <누드 상태의 젊은 미국인 소녀>는 시동을 걸기 위해 자동차에 사용하는 스파크 플럭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는 1915년에 <고통의 발작>과 <지상 위의 아주 귀한 그림>을 그렸으며, 그해 그린 <자야! 자야!>는 잡지 『291』 7~8호에 소개되었다.
그는 1916~18년에 <재빨리 도는 기계>를 그렸고 1917년에 그린 <미국인>은 잡지 『391』 7월호의 표지로 소개되었다.
기계를 찬양하는 그의 미학은 미국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모턴 리빙스턴 샴버그는 1916년에 <전화>를 그렸으며, 마리우스 데 자야는 1912년에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란 제목으로 스티글리츠의 초상화를 기계도면과 같은 모습으로 추상적으로 묘사했으며, 이듬해에는 같은 방법으로 <프란시스 피카비아의 초상>을 그렸는데 자야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이 피카비아로부터 기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뒤샹의 <초콜릿 분쇄기> 드로잉은 만 레이와 존 코버트, 찰스 실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코버트가 1919년에 제작한 <정확한>과 <브라스 밴드>는 뒤샹의 <초콜릿 분쇄기 No.2>로부터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이며, <브라스 밴드>의 경우 줄을 잡아당겨 두꺼운 종이에 풀로 붙였다.
스텔라도 뒤샹의 스튜디오를 방문한 후 유리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품이 뒤샹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 찰스 데머스조차도 1923년에 “뒤샹은 근래 나의 작품에 대단히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시기 뒤샹과 피카비아에 의해서 전통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이 미국의 예술가들에게 확산되었다.

글레이즈와 메쳉제는 공저 『입체주의에 관하여』를 예술가들의 모임에서 설명하면서 입체주의를 확산시키는 일에 전념했는데, 뒤샹과 피카비아의 입체주의에 대한 아이러니와 견줄 만했다. 프랑스인 젊은 작곡가 에드가 바레스가 1915년 말에 뉴욕으로 온 후 글레이즈의 아내 줄리엣의 소개로 아렌스버그 그룹에 가세했다. 그룹의 예술가들은 바레스가 들려주는 꾕과리소리, 사이렌소리 등 전자장치로 확대한 잡소리를 섞어서 작곡한 곡을 듣고 놀라워했다.

뒤샹은 1916년 가을 아렌스버그가 사는 건물에 침실이 하나 달린 아파트로 이사했다.
월세 58달러 33센트를 아렌스버그가 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에 대한 대가로 뒤샹은 <큰 유리>가 완성되는 대로 주기로 했다.
하지만 뒤샹은 서둘러서 그것을 완성할 의사가 없었다.
이 무렵 그는 레디 메이드를 선정하는 일에 관심을 두었으며 수잔느가 쓰레기로 취급하여 내다버린 <자전거 바퀴>를 다시 제작했다.
그는 사폴린 에나멜 페인트를 광고하는 포스터를 한 장 얻었는데, 어린 소녀가 나무로 된 침대를 에나멜페인트로 칠하는 장면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포스터 상단에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라고 친구 시인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는 하단에 ‘from Marcel Duchamp 1916~1917’이라고 적었으며 이는 수정assisted 레디 메이드 작품의 첫 번째 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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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콘스탄틴 브란쿠시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란쿠시Constantin Brancusi(1876~1957)는 1904년 파리로 갔고 그곳에서 53년을 살았다.
그는 1907년 1월부터 3월까지 메동Meudon에 있는 오귀스트 로댕의 작업장에서 일했으며 그곳에는 많은 조각가와 조수들이 로댕을 돕고 있었다.
그는 그곳을 떠나면서 “큰 나무 아래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 nothing can grow under big trees”고 했다.
그 해 여름 그는 네 점을 살롱 데 보자르에서 소개했는데, 모두 로댕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들로 특히 표면의 처리가 그러 했다.
로댕은 표면을 부드럽게 갈고 딱지 않고 거칠게 남겨둠으로써 강렬하고 긴장감이 생기게 했으며 조명을 사용할 경우 인상주의자의 회화처럼 표면에서 동력주의를 느낄 수 있게 했다.
브란쿠시는 로댕의 이런 점을 받아들였다. 로댕이 전시장에 나타나자 브란쿠시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한 마디 해달라고 청했다.
로댕이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라고 중얼거리자 브란쿠시는 “선생님, 그런 정도는 누구나 말할 수 있습니다” 하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자 로댕이 말했다.
“음, 그렇다면 말하겠네. 너무 서둘러 작품을 제작하지 말게.”

브란쿠시는 로댕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인내하면서 좀더 성숙한 작품을 제작했는데 단순히 천천히 작업했다는 말이 아니라 주제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04년 파리로 온 후 브란쿠시는 그리스 철학에 심취했고 특히 플라톤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그는 플라톤의 저서를 통해 형상 혹은 이데아 이론을 알고는 모든 생물체와 광물체가 궁극적인 모델 혹은 이데아에 대한 불완전한 모방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의 형태를 불완전한 것으로 보았으므로 궁극적인 원형의 모델에 가까운 형상을 생각하게 되었고 상상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나타내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자신의 조각을 “플라톤의 철학”으로 정의한 브란쿠시는 1907~8년 돌조각에 전념하면서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두 종류의 <키스 The Kiss>를 제작했다.
그는 같은 제목으로 1945년까지 여러 점을 약간 다른 형태의 조각을 제작했지만 관념적으로는 일치하는 것들이었다.

브란쿠시의 대표적인 작품 몇 점을 통해 그가 어떻게 추상화했고 그런 과정에서 어디에 중점을 두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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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아렌스버그를 중심으로 모이는

피카비아와 가브리엘이 1916년 초 쿠바에서 뉴욕으로 왔다.
이들 부부는 뒤샹이 뉴욕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
피카비아는 뒤샹에게 여학생들에게 사랑을 어떻게 가르치느냐고 물었다.
가브리엘은 “모든 여학생들은 자연히 그의 품에 안기고 말 거예요”라고 했는데 어째 자신의 느낌을 말한 것처럼 들렸다.
가브리엘은 뉴욕에서 만난 뒤샹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마르셀은 부끄러움을 잘 타고 여자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려워했는데,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적절하게 처신할 만큼 충분한 경험을 갖추었더군요.
여자를 이용하거나 여자로부터 도망칠 줄 안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그는 더 이상 지난날의 마르셀이 아니라 … 달라졌으며, 아주 매혹적으로 변했어요.

뒤샹이 뉴요커가 된 것이다.
여자를 다루는 데 자신감이 생긴 것은 뉴요커 친구들로부터 배운 것이며, 그도 뉴요커가 되어 독한 술을 마셨고, 취중에 여자와 대화하는 일이 잦았다.
“사무실에서, 레스토랑에서, 그리고 집에서 여자들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독한 술을 마시더군요”라고 가브리엘이 말했다.
가브리엘은 술에 취한 여자가 남자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화장실로 가는 장면을 보고 경악했다.
뉴욕은 파리와는 전혀 다른 도시였고, 뒤샹은 뉴욕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뒤샹보다 여섯 살 많은 글레이즈는 뒤샹의 보호자인 양 행세했는데 그는 위스키와 칵테일에 맛을 들인 뒤샹을 종종 나무랐다.
글레이즈의 아내 줄리엣은 뒤샹이 그런 남편에게 한 말을 기억했다.
“사랑하는 글레이즈 선생,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오래 전에 자살했을 겁니다.”

뒤샹은 뉴욕생활에 적응하느라고 남모르는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술을 마신 것 같다.
술은 그에게 극복의 처방이었다.

뒤샹은 아렌스버그를 중심으로 모이는 예술가들 그룹에서 스타로 부상했다.
그들은 일주일에 서너 번 67번가 웨스트 33번지에 있는 아렌스버그의 집에서 만났는데 뒤샹의 프랑스식 위트와 아이러니를 모두들 좋아했다.
그들은 저녁식사를 한 후 보통 9시부터 자정까지 대화했다.
아렌스버그의 그룹에 속한 예술가들은 찰스 실러, 조셉 스텔라, 찰스 데머스, 모턴 리빙스턴 샴버그, 존 코버트(아렌스버그의 사촌), 만 레이였고, 시인과 작가들로는 윌리엄 카로스 윌리엄스, 왈라스 스티븐스, 알프레드 크레임부르그, 월터 패츠, 맥스웰 보덴하임, 알렌과 루이스 노턴 부부, 칼 반 베흐텐과 반 베흐텐의 잘생긴 아내이자 영화배우인 파니아 마리노프, 그리고 아렌스버그의 하버드대학 동창생 어네스트 사우타드였는데, 사우타드는 심리학 박사로 보스턴 정신병원의 책임자였다.
사우타드는 뉴욕에 올 때마다 그룹에 참석했는데 그룹의 예술가들은 그를 만나면 꿈에 관해 대화하기를 즐겨했다.
그들은 만나면 천장이 높은 커다란 방에서 체스를 두었는데 아렌스버그와 사우타드는 하버드대학 체스팀에 속한 적도 있었으며, 크레임부르그는 직업 체스 대회에 출전한 경험이 있었다.
체스를 좋아하는 뒤샹은 거의 매일 밤 체스에 몰두했고, 질 때보다는 이기는 경우가 조금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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