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상단에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라고

이 시기 피카비아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다시피 했다.
워낙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라서 그가 아렌스버그의 그룹 예술가들과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중심으로 모이는 예술가들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피카비아는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어로 추상적인 시를 써서 스티글리츠 그룹의 아방가르드 잡지 『291』에 기고했다.
『291』은 나중에 『카메라 워크Camera Work』로 명칭을 바꾸었다.
피카비아는 이 시기에 기계주의를 찬양했다.
<스티글리츠의 초상>에서 기아가 달린 기계를 묘사했으며, <누드 상태의 젊은 미국인 소녀>는 시동을 걸기 위해 자동차에 사용하는 스파크 플럭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는 1915년에 <고통의 발작>과 <지상 위의 아주 귀한 그림>을 그렸으며, 그해 그린 <자야! 자야!>는 잡지 『291』 7~8호에 소개되었다.
그는 1916~18년에 <재빨리 도는 기계>를 그렸고 1917년에 그린 <미국인>은 잡지 『391』 7월호의 표지로 소개되었다.
기계를 찬양하는 그의 미학은 미국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모턴 리빙스턴 샴버그는 1916년에 <전화>를 그렸으며, 마리우스 데 자야는 1912년에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란 제목으로 스티글리츠의 초상화를 기계도면과 같은 모습으로 추상적으로 묘사했으며, 이듬해에는 같은 방법으로 <프란시스 피카비아의 초상>을 그렸는데 자야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이 피카비아로부터 기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뒤샹의 <초콜릿 분쇄기> 드로잉은 만 레이와 존 코버트, 찰스 실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코버트가 1919년에 제작한 <정확한>과 <브라스 밴드>는 뒤샹의 <초콜릿 분쇄기 No.2>로부터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이며, <브라스 밴드>의 경우 줄을 잡아당겨 두꺼운 종이에 풀로 붙였다.
스텔라도 뒤샹의 스튜디오를 방문한 후 유리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품이 뒤샹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 찰스 데머스조차도 1923년에 “뒤샹은 근래 나의 작품에 대단히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시기 뒤샹과 피카비아에 의해서 전통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이 미국의 예술가들에게 확산되었다.

글레이즈와 메쳉제는 공저 『입체주의에 관하여』를 예술가들의 모임에서 설명하면서 입체주의를 확산시키는 일에 전념했는데, 뒤샹과 피카비아의 입체주의에 대한 아이러니와 견줄 만했다. 프랑스인 젊은 작곡가 에드가 바레스가 1915년 말에 뉴욕으로 온 후 글레이즈의 아내 줄리엣의 소개로 아렌스버그 그룹에 가세했다. 그룹의 예술가들은 바레스가 들려주는 꾕과리소리, 사이렌소리 등 전자장치로 확대한 잡소리를 섞어서 작곡한 곡을 듣고 놀라워했다.

뒤샹은 1916년 가을 아렌스버그가 사는 건물에 침실이 하나 달린 아파트로 이사했다.
월세 58달러 33센트를 아렌스버그가 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에 대한 대가로 뒤샹은 <큰 유리>가 완성되는 대로 주기로 했다.
하지만 뒤샹은 서둘러서 그것을 완성할 의사가 없었다.
이 무렵 그는 레디 메이드를 선정하는 일에 관심을 두었으며 수잔느가 쓰레기로 취급하여 내다버린 <자전거 바퀴>를 다시 제작했다.
그는 사폴린 에나멜 페인트를 광고하는 포스터를 한 장 얻었는데, 어린 소녀가 나무로 된 침대를 에나멜페인트로 칠하는 장면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포스터 상단에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라고 친구 시인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는 하단에 ‘from Marcel Duchamp 1916~1917’이라고 적었으며 이는 수정assisted 레디 메이드 작품의 첫 번째 예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