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간 뒤샹

뒤샹이 전쟁 중에 안전지대인 스페인이나 스위스로 가지 않고 왜 아르헨티나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인터뷰에서 친구의 아버지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창녀촌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는데 사실인 것 같지 않다.
그가 파리를 떠나려는 목적으로 뉴욕으로 왔던 것처럼 뉴욕을 떠나려는 목적으로 그곳으로 향했던 것 같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나기 전 1918년 8월 플로린에게 <플로린에게 안녕>이란 제목으로 뉴욕으로부터 미지의 세계 아르헨티나로 항해하는 그림을 지도 위에 그려주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의문부호가 그려져 있어 그 자신 호기심을 가지고 그곳으로 떠났음을 짐작하게 했다.

뒤샹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온 지 3주 만에 수잔느의 전보를 받았다.
레이몽이 사망했다는 비보였다. 워낙 건강하지 못하던 레이몽은 파리 시외 샴페인 근처에 있는 군인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1916년 늦게 장티푸스에 걸려 고열로 고생하고 있었다.
게다가 부상당한 군인환자로부터 악성 연쇄상구균에 감염되었다.
레이몽은 칸느에 있는 병원에서 1년 이상 치료받으면서 18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았지만 균을 제거하지 못해 건강이 악화된 가운데 1918년 10월 7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뒤샹과 이본느는 알시나 1743번지의 작은 아파트를 얻었다.
전쟁은 거의 끝났지만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아파트에서 몇 블럭 떨어진 사르미엔토 1507번지에 방을 얻어 작업실로 사용했다.
그는 <큰 유리>에 관하여 여전히 생각했으며, 그것에 관한 모든 메모를 아르헨티나로 가지고 왔다.
그는 10월에 크로티에게 보낸 편지에 “난 어떤 결과가 될 것인지를 실험하기 위해서 작은 유리에 작업했고, 그것을 뉴욕으로 돌아갈 때 <큰 유리>에 적용하려고 하네”라고 적었다.
그는 또 “졸리운 검은 얼굴들을 깨우기 위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모던 아트를 소개할 계획으로 뉴욕에 있는 프랑스 친구 앙리 마틴 바르주에게 입체주의 예술가들의 그림 30점을 위탁판매 형식으로 보내달라고 주문했으며, 파리에 있는 크로티에게는 입체주의에 관한 책들을 보내달라면서 제목들을 적었다.
아폴리네르의 『입체주의 예술가들the Cubist Painters』, 글레이즈와 메쳉제의 『입체주의에 관하여』, 잡지 『파리의 이브닝』, 그리고 말라르메의 시집 네 권이 그것이다.
그는 아렌스버그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정한 방침에 의거하여 난 아무것도 전시하지 않을 것이요”라고 적었다.
그러나 바르주는 뒤샹을 실망시켰다.
그는 그림을 보내지 않았다.

뒤샹은 크리스마스 몇 주 전 에티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존재하지 않아요. 멋도 모르는 부자들이 사는 커다란 시골 동네에 불과하지.
그들은 모든 것들, 집을 짓는 데 필요한 돌까지도 유럽으로부터 구입하고 있구려.
여기서 제작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 난 뉴욕에서 까마득하게 잊었던 프랑스 치약을 여기서 발견했다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난 이곳에서 완전히 다른 인생을 발견하고 매우 행복하다오. 하는 일이 즐겁기만 하구려 …”라고 적었다.
그가 말한 ‘하는 일’이란 체스를 두는 것을 뜻했다.

그는 이전에 아렌스버그의 집에서 그리고 1916년에 회원으로 등록한 마샬 체스 클럽에서 체스에 몰두했는데 여러 날 밤을 새벽 3시까지 둔 적도 있었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체스를 함께 둘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여 서점에서 체스에 관한 잡지를 구입했다.
잡지에는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가 쓴 40가지의 게임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는 잡지를 통해 체스를 연구했다. 1919년 봄에는 동네에 있는 체스 클럽에 회원으로 등록하여 유명한 사람으로부터 체스를 배웠다.
그는 아렌스버그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늘 체스를 두며 지낸다네.
이곳 체스 클럽에 등록했는데 아주 잘 두는 사람들도 있네.
아직 그 반에 속하지는 못했지만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등급에 속한 반의 사람들과 체스를 두는데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네”라고 적었다.
그는 스테타이머 자매에게 보낸 편지에 회화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난 밤낮으로 체스만 두고 있소.
이것 말고는 내게 흥미 있는 일이 없구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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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아르헨티나로 떠나기 전

뒤샹은 뉴욕을 떠나고 싶어 했다.
크로티에게 보낸 편지에 어쩌면 이본느와 함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갈 것 같다면서 적었다.

“자네가 아는 대로 많은 이유로 뉴욕을 떠나고 싶은데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네.
그저 A(아렌스버그를 말함)와 함께 지내는 것이 피곤해서일세.
병든 사람들이 아마도 이런 식으로 일들을 처리하겠지.”

그는 아렌스버그와 그의 아내와의 갈등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듯하다.
그러면서 그는 적었다.
“이곳의 분위기는 아주 달라졌네.
자네가 여기 온 후로 유리작업을 하지 않았는데 작업할 만한 충동이 생기지 않아.
다른 나라에라도 가게 되면 어쩌면 새로운 에너지가 생길지도 모르겠어.”

한때 뒤샹의 학생이었던 에티 스테타이머는 7월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뒤샹이 다음 달에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날 예정인데 그가 왜 떠나려는지 난 알 수 없다.
그는 이곳에서 더 이상 행복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나더러 함께 가자고 세 번이나 말했다!
그가 뭐라고 하더라도 난 그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는 그곳에 친구도 없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난 그에게 병이 나거나 무일푼이 되면 연락하라고 말해주었지만 그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가련하고 작은 떠돌이 원자atom, 낯선 소년. 하지만 사랑스러운 이.

스테타이머 세 자매 가운데 에티가 유일하게 뒤샹에게 일방적으로 로맨틱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에티는 뒤샹에게만 그런 감정을 품은 것이 아니라 프랑스 태생 미국 조각가 엘리 나델만에게도 연정을 품었다.
그녀와 나델만과의 관계는 알 수 없는데 에티가 자신의 기록을 나중에 면도칼로 난도질했기 때문이다.
뒤샹이 정말로 에티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떠나고 싶어 함께 가자고 했을까?
그는 이미 이본느와 함께 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뒤샹은 아르헨티나로 떠나기 전 작업하다 중단한 <큰 유리>를 아렌스버그의 아파트 창고로 옮겨놓았다.
그는 1918년 8월 11일 아렌스버그에게 “잘 있게나 친구여, 최소한 이 년 후에나 만나게 될 걸세”하고 메모를 남겼다.
뒤샹은 8월 13일 스위스 벡스에 있는 온천에서 신경쇠약증으로 요양하고 있는 피카비아에게 보낸 편지에 아르헨티나로 오라고 권하면서 “자네와 다시 체스를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네”라고 적었다.
그는 이본느와 함께 27일이나 걸려서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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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형태가 변하는 조각 <텀>


캐서린은 뒤샹에게 서재에 걸 그림을 그려줄 것을 요청하면서 책장 위 가늘고 기다란 직사각형의 공간에 뒤샹의 그림을 걸고 싶다고 했다.
뒤샹은 1914년에 <초콜릿 분쇄기>를 그린 후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적이 없었다.
그는 주말에만 그림을 조금씩 그려 6개월 후에야 완성했는데 그 작품은 그의 대표작들 중 하나로 꼽히는 <텀>이었다.
그러나 뒤샹 자신은 그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텀>에는 세 가지 물체의 그림자가 있는데 자전거 바퀴, 모자걸이, 그리고 병따개였다.
뒤샹은 “난 환등기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사용해서 그림자를 잘 그릴 수 있었다.
나는 하나씩 캔버스에 영상을 비춘 후 손으로 그림자를 따라 드로잉했다”고 했다.
그가 파리에서 그린 <세 기본 정지들>에 나타난 선들이 <텀>의 하단 왼쪽과 오른쪽에 나타났으며, 왼쪽 모서리로부터 중앙에는 밝은 노란색으로부터 아주 밝은 회색까지 마름모꼴의 색비교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는 색비교판이 끝나는 곳에 캔버스가 찢어진 것처럼 묘사한 후 실제 안전핀 두 개를 사용하여 찢어진 부분을 연결시킨 것처럼 만들었고, 실제 병을 닦는 데 사용하는 붓을 위장한 찢어진 부분에서 23인치 가량 불쑥 나오게 부착했다.
그리고 하단 약간 왼쪽으로 병따개 앞에 오른쪽을 가리키는 손을 그려넣었다.
그는 직업적으로 간판을 그리는 사람에게 손을 그릴 것을 의뢰하면서 그 아래에 그의 이름 A. Klang을 적어 넣게 했다.

뒤샹은 <텀>을 그린 후 “그림이 이력서처럼 나타났다”고 투덜거리면서 “그것은 아주 매력적인 행위의 형태가 아니었으며, 서재를 장식하겠다고 주문했기 때문에 중요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난 그 그림을 좋아한 적이 없다”고 부언했다.
제목 <텀>은 관람자가 알아서 제목을 부쳐도 된다는 뜻인데, 프랑스말 tu m'은 동사를 붙여 완성되는 발음에 지나지 않는다.
Tu m'은 보통 m'emmerdes와 함께 사용되고, 그렇게 되면 ‘네가 나를 지루하게 만든다’란 뜻이 된다.
뒤샹은 캐서린의 주문을 짜증스럽게 느꼈고, 그림 그리는 일에도 짜증을 느꼈던 것 같다.
<텀>은 그가 캔버스에 그린 마지막 그림이 되었다.

뒤샹은 곧 <여행을 위한 조각>을 제작했는데 새 레디 메이드 작품이었다.
그는 1918년 7월 수영할 때 착용하는 고무로 된 모자를 색색으로 여러 개 산 후 그것들을 기다란 모양으로 잘라 각 끝에 끈을 달았고, 그것들을 마구 섞어 색들이 섞여 있는 채로 보이도록 했으며, 하나씩 못으로 벽에 부착시켰다.
그는 파리로 간 크로티에게 보낸 편지에 이것을 ‘다색의 거미집 같다’고 묘사했다.
그는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재료인 타자기 커버를 사용하여 <여행자 소품>을 제작했는데 그것은 확실한 형태가 아닌 마음대로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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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피카비아는 뒤샹과 술을 많이 마시고

피카비아는 88번가 웨스트 110번지로 이사했는데 그 집은 루이스 노턴의 부모가 소유한 집이었다.
루이스와 알렌 노턴이 별거한 후 그 집 아래층을 피카비아에게 빌려주었고, 위층은 글레이즈 부부에게 빌려주었다.
어느 날 밤 피카비아는 뒤샹과 술을 많이 마시고 대화를 오래 하다 보니 배가 고팠다.
두 사람은 요리를 하려고 냉장고에서 양다리를 꺼냈는데, 그것은 글레이즈가 자신의 냉장고가 작아 그곳에 임시로 넣어둔 것이었다.
양다리에는 ‘글레이즈 부부는 당신의 행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뉴욕 다다의 익살과도 같았다.

가브리엘은 피카비아의 지나친 음주와 바람기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9월 중순에 아이들이 있는 스위스로 떠났다.
피카비아는 얼마 후 알코올 중독으로 신경쇠약증에 걸려 의사로부터 정신질환을 치료받았는데, 계속 치료받기에 유럽이 나을 것 같아 그도 뉴욕을 떠났다.

뒤샹은 가을에 프랑스어를 배우겠다는 두 학생을 만났다.
한 사람은 잘생긴 여배우 진 액커였고, 다른 한 명은 캐서린 소피 드라이어로서 그녀는 뒤샹보다 열 살이 많았으며 돈이 많아 그의 작품을 수집할 만한 능력을 갖춘 여인이었다.
캐서린은 결혼한 적이 있었지만 그 남자가 유부남이었으므로 그녀의 결혼은 이내 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결혼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아렌스버그의 사촌 존 코버트가 1916년에 캐서린을 초대하여 무명사회의 재정을 담당하도록 했는데 그때 캐서린이 뒤샹을 만났다.
그녀는 뒤샹에게 매료되었는데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로 많은 여자가 뒤샹을 만난 후 캐서린과 같은 증세를 나타냈다.

뒤샹이 무명사회 위원직을 사임할 때 캐서린은 책임자 윌리엄 글랙큰스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뒤샹의 개성과 총명함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며, 또한 그를 좇아서 사임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단히 솔직하며 … 나로 하여금 늘 그의 말을 경청하게 만듭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들 자신의 방법으로 미술을 진전시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캐서린은 열 명의 위원회 심사에서 <샘>을 배척하는 편에 섰는데, 그녀는 뒤샹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것에는 어떤 고유성도 없기 때문에” 배척했다면서 사임을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뒤샹의 태도가 단호하자 캐서린은 앙데팡당전의 강의실에 <샘>을 놓고 ‘레디 메이드’에 관해 강의할 것을 요청했는데 뒤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캐서린은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화요일 저녁 뒤샹의 스튜디오로 갈 때 동생 메리를 데리고 갔다.
캐서린은 말했다.
“한 사람에 1달러 50센트였고, 추가되는 사람의 한 차례 강의료는 2달러였어요.
우리는 매우 흥미진진한 프랑스 소설을 읽었고 … 그는 매우 유머가 있었으며, 완전한 프랑스어를 구사하였지요.”

캐서린이 뒤샹에게 호감을 가진 만큼 뒤샹은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캐서린은 12월에 새로운 사실을 알고 몹시 기분이 상했다.
뒤샹이 자신의 여동생이라고 소개한 젊고 예쁜 프랑스 여인 막들렌느 뒤샹과 뒤샹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여인은 막들렌느 뒤샹이 아니라 루엥으로부터 한 달 전에 온 막들렌느 투르반으로 뒤샹과 동거하고 있던 여인이었다.

1918년 1월 장과 이본느 크로티가 1년 만에 파리에서 뉴욕으로 돌아왔는데, 두 사람은 뉴욕으로 오기 한 달 전에 이혼했다.
장은 뒤샹의 동생 수잔느와 염문이 있었다.
뒤샹이 군인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동생을 장에게 소개한 적이 있었다.
한편 뒤샹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이본느는 뉴욕으로 돌아와 뒤샹을 속히 만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막들렌느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몹시 실망했다.
일주일 후 막들렌느는 뉴욕을 떠났고, 이본느는 곧 뒤샹과 섹스를 했다.
이본느는 로세와도 섹스를 했고, 로세는 아렌스버그의 아내 루이스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는 몇 여자들과 동시에 섹스를 했다.
뒤샹의 말대로 그들에게는 사랑과 섹스가 별개였다.
그들의 이성 관계는 복잡했지만 공통적인 점은 그들 모두 우정에는 변함이 없었으며, 아렌스버그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만났고, 뒤샹은 모임에서 늘 가장 귀한 손님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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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세라가 추구한 면, 색, 공간, 비균형


(질문): 당신은 한때 면, 색, 그리고 공간으로 열린 회화와 조각을 합성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고무조각을 사용한 작품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폴록의 영향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답): 1960년부터 그림을 그리면서 일 년 동안 물감을 ‘발견한 오브제found object’로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색의 물감 서른 깡통을 바닥에 뿌린 적이 있습니다.
한 손에는 시간측정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붓을 들고 일 분 동안에 서른 깡통을 닥치는 대로 붓는 작업을 했어요.
그림을 초보의 단계로까지 가감시키려고 한 것이지요.
구성과 회화적 평면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우연을 실험한 것은 버로우스Burroughs와 존 케이지John Cage의 영향이었으며 죽음의 끝에 이르는 것이었어요.
같은 방법으로 뒤샹과 존스가 날 죽음의 끝에 도달케 했습니다.
살아 있는 동물과 동물인형, 발견한 오브제를 사용하여 자생지habitats를 만들면서 환상과 실재의 개념을 실험했습니다.
(그는 이런 작품을 1963-64년 이탈리아에서 소개했다.)
1966년에 우연히 고무조각을 수천 톤 발견했어요.
이것들을 사용하여 벽에 거는 작품을 제작했어요.
중력과 드로잉을 나타낸 작품이었습니다.
열한 다발을 벽에 걸었는데 폴록의 <아이오와 주 벽화 Iowa State Mural>로부터 받은 영향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색을 칠한 연결된 공간의 요소들로 색, 면, 높은 릴리프의 선 등을 실험했습니다.
그것은 내게 비어 있는 느낌이었는데 나는 늘 생각하기를 릴리프란 정면과 경사로 나타나도록 벽의 면으로 자른 혼합물 그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지요.
폴록의 그림이 내포하는 것은 비구성적 오버올over-all로서 오픈 필드open field입니다.
그러나 오픈 필드는 그림의 틀에 의해서 한정되어 있지요.
<벨트>가 폴록의 작품과 다른 점은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11다발의 고무조각이 연속적이지 않음을 말함.)
벽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면 오픈 필드에는 다른 가능성이 있을 것이란 점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뿔뿔이 흩어놓는 작품, 찢어놓는 작품, 뿌려놓는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으며 릴리프에는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질문): 당신 작품의 주요 개념은 비균형인 것 같으며 이것은 로버트 스미스슨Robert Smithson(1938~73)의 엔트로피entropy(균질성) 개념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답): 엔트로피에 대한 스미스슨의 관심은 우주적 의식을 표현하려는 시도인데 반해 나의 관심은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데 있었습니다.
나의 받침대 작품들은 (단단히 매는 고리가 없이) 평형과 균형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불확실한 상태에서의 내 작품의 형상은 운반할 수 있는 오브제의 관념, 스스로 참조할 만한 것을 전복시키는 것, 스스로 옳음을 내세우는 권위의 관념, 그리고 오브제의 영원성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받침대의 일시적 존재는 실제적이라기보다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는데 이런 외고집은 스미스슨과 관련이 있어요.
우리는 외고집으로부터 대단한 만족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질문): 당신의 작품이 실내에 놓여 있을 때와 실외에 놓여 있을 때 어떻게 다릅니까?
조각뿐 아니라 드로잉도 관련시켜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답): 내 작품 대부분(드로잉과 조각)은 (작품이 놓여질) 부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부지가 나로 하여금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시내든, 시외든, 방이든, 어떤 건축적 공간 속이든 먼저 부지에 관해 충분히 안 후 부지에 어울리는 작품을 제작하지요.
어떤 경우에는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부지에서 작업합니다.
어떤 작품들은 작업실에서 제작합니다.
실제 부지에 대한 확고한 관념을 갖고 작업한 것이 커다란 모래상자에 스틸을 건립한 것입니다.
이것은 부지에서 실제로 실험을 통해 제작한 것입니다.
난 조각을 위해 드로잉이나 스케치를 한 적이 없습니다.
미리 이미지를 생각하고 작업하지는 않지요.
드로잉, 묘사, 삽화를 갖고 작업하는 조각가들은 재료와 구성의 작업과정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드로잉에 관해 말하면 나는 작업실을 드로잉의 표면처럼 생각합니다.
설치 장소 안에서 드로잉하면서 부지에 적합한 공간, 부피, 무게를 정합니다.

(질문): 피카소가 조각에 색을 입혔습니다. 색이 어떻게 당신의 조각에 통합되었는지 말해 주시겠습니까?

(답): 재료의 색이 내 작품의 색이 됩니다.
난 조각의 표면을 미화시키려고 닦거나 색을 칠하지는 않습니다.
색을 칠하게 되면 재료의 내면적 질을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틸에 색을 칠하게 되면 산화를 방지하는 것으로 이는 스틸의 속성을 부정하는 셈이지요.
조각에 색을 칠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몇몇 조각가들이 색을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했는데 쟈코메티Giacometti는 빛이 닿지 않는 면에 광택을 나게 하려고 색을 사용했지요.
작은 조각에 칠한 색이 지각할 수 있는 공간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질문): 조각을 제작하는 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답): (한참 침묵하다가) 일생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인생이 작품의 경향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되며 ...
나 자신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무엇이라도 만들어서 그것이 열린 채 있도록 하며, 내게 활력이 되고, 도전하게 하며, 내가 작업하는 방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조각을 제작하는 행위는 다른 활동과 구별하게 하지요.

(질문): 어떻게 구별하지요?

(답): 조각을 제작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 먼저 조각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질문): 그걸 지금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답): 나의 관심사는 내가 사용하는 요소를 통해 물리적 조직을 규정하는 것으로 한 공간과 한 장소의 구조, 내용, 성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근래 나는 스틸을 사용하여 안쪽과 바깥쪽의 공간을 열어놓거나 닫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질문): 뉴욕 에이스Ace 화랑에서 발표한 <묘사용 기구 Delineator>는 당신의 과격한 작품들 중 하나인데 왜 <묘사용 기구>라고 불렀지요?

(답): 왜 그렇게 불렀느냐 ... 음, 기본적으로 그것은 평편하게 늘인 쇠판 하나를 바닥에 놓고 다른 하나를 천정에 매달아서 두 개가 한 쌍이 되게 한 것입니다.
천정의 것은 13.5피드 높이에 매단 것으로 둘 다 가로 세로 10피드 26피드의 사이즈입니다.
천정에 매단 것은 약 음 .... 2.5톤이고 ... 그 조각은 방 내부를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질문): 어떻게?

(답): 두 개의 스틸 판은 안과 밖, 열려 있는 것과 가리키는 것, 위, 아래, 오른쪽, 왼쪽 공간의 용적을 발생하는 열린 십자형을 형성하고, 관람자가 그것들의 공간을 통과해서 걸어갈 때 관람자의 몸을 조절합니다.
내 말을 난해하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음, ... 나의 결론은 철학과 과학은 설명되어지지만 예술과 종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질문): 그것은 실험적 작품이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묘사용 기구>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화랑에 가서 직접 물리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며, 그 장소에서의 경험은 공간 바깥에서나 당신이 있는 이곳 공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실제 경험에는 전혀 미칠 수가 없어요.

(질문): 음, 난 어느 누구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설명은 확실히 경험 자체와는 같을 수 없지요.
그건 다른 종류의 행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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