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파리로 간 뒤샹

뒤샹은 1919년 6월 프랑스행 배에 올랐다.
그는 파리에서 패츠에게 보낸 편지에 “불쌍한 레이몽이 없는 퓌토로 돌아가는 것이 겁이 납니다”라고 적었다.
배는 한 달을 항해하여 런던에 사흘 정박한 후 이어서 르 아브르로 출발했다.
프랑스에 도착한 뒤샹은 곧장 루엥으로 부모를 방문했다.
누이동생들은 오빠를 보고 그동안 비쩍 마른 오빠가 딱하게 생각되었다.
또 짧은 머리카락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 4년 만에 그가 파리로 간 것인데 그동안 파리는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같은 사람이 같은 아파트에 여전히 살고 있었고, “먼지조차 그대로였다.” 하지만 피카비아는 변해 있었다.
애인 제르마이느 에버링과 함께 에밀 오지에르 블바드에 살고 있었으며, 가브리엘은 세 아이와 함께 찰스 플로크 애비뉴에 살고 있었다.
두 여인이 그때 피카비아에 의해 모두 임신 중이었는데 피카비아는 자신을 돈주앙으로 착각한 듯했다.
가브리엘은 임신 8개월이었으며, 제르마이느는 1월이 해산 예정 달이었다.
뒤샹이 머물 만한 곳이 없는 줄 알고 가브리엘은 뒤샹이 원하는 기간 동안에 자신과 함께 지낼 것을 제의했다.
뒤샹은 가브리엘의 집에 묵었다.
1달 후 새벽 3시 30분 가브리엘은 피카비아의 넷째 아들을 출산했다.
피카비아는 제르마이느와 함께 와서 아들을 보고 어린애처럼 몹시 좋아한 후 돌아갔다.

파리의 미술계는 전쟁 중에 워낙 많은 예술가가 전선에서 죽거나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쉽사리 복원되지 못하였다.
약 2백만 명의 프랑스인이 전쟁으로 사망했으며,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아직 군복을 입고 있었다.
아폴리네르는 1916년 중반에 머리에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온 후 군복을 벗었다.
반공호에서 근래에 출간된 프랑스 잡지 『머큐리』를 읽고 있다가 총알이 그의 헬멧을 관통한 것이었다.
그는 군복차림에 머리를 붕대로 칭칭 감은 모습으로 카페 드 플로르에 들어왔다.
카페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있었는데 앙드레 브르통과 폴 데르메도 있었다.
그들은 전쟁 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아폴리네르는 전과 달리 기운이 없어 보였는데 1918년 가을 파리를 강타한 지독한 유행성 감기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닷새 후 11월 9일 사망했다.
파리의 미술계에 ‘새로운 정신’을 고취시킨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사망을 애도했다.
특히 피카소가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피 울었다.

피카비아는 전쟁 중에 뉴욕과 취리히를 오갔으므로 파리로 돌아왔을 때는 다다가 그와 더불어서 파리로 온 셈이었다.
그는 스위스의 벡스 온천에서 신경쇠약 증세를 물리치료로 다스리는 동안 트리스탄 차라와는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1919년 초 피카비아는 가브리엘과 함께 취리히로 가서 차라를 만나 그곳에 3주 동안 머물렀는데 차라는 그때 잡지 『다다』에 ‘장수하는 피카비아, 적화가antipainter 뉴욕으로부터 오다’라고 보도했다.
차라는 피카비아가 막 창간한 잡지 『391』에 글을 발표했으며, 피카비아는 다다의 잡지 『앤솔로지 다다』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간행물의 겉표지를 디자인했다.
피카비아는 차라에게 파리로 올 것을 권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정녀와 아기 예수 그리고 성 앤>

이사벨라의 측근의 말로는 1501년 4월 레오나르도는 세르비테 가족이 주문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바사리의 기록에는 레오나르도가 <동정녀와 아기 예수 그리고 성 앤>을 그리고 있을 때 그것을 보러 온 모든 화가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했다.
바사리는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가 이틀 동안이나 몰려와서 마치 축제라도 열린 것처럼 보였다고 전한다.
바사리는 모든 사람이 ꡒ작품의 완전함에 망연해 했다ꡓ고 적었다.
이 작품을 위한 습작 드로잉을 보면 동정녀는 어머니 앤의 무릎 위에 앉아서 양에 올라타려고 하는 아기 예수를 오른팔로 안고 있고 앤은 딸의 팔을 잡으려고 몸을 동정녀에게 약간 기대고 있다.
양은 희생제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을 상징한다.
세 사람은 산을 배경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일체를 이룬다.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가 이 작품에서 모성애를 찬양하고 있다면서 동정녀와 앤이 비슷한 나이의 모습으로 일체가 되게 묘사했음을 지적했으며, ꡒ레오나르도가 아기 예수에게 어머니로서의 행복에 도취되어 축복의 미소를 짓는 우아한 두 어머니를 부여했다ꡓ고 적었다.
더러 학자들은 동정녀와 앤 그리고 아기 예수를 레오나르도와 그의 친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첫 번째 아내와 연관시켜 말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가 두 여인을 그림을 통해 한 데 어우러지게 했다는 해석이다.

동정녀와 앤 그리고 아기 예수를 그리는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있었던 일로 마사초와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Benozzo di Lese, 1421년경~97) 등 몇몇 화가들이 이런 주제로 그린 적이 있다.
외경에는 동정녀와 앤 그리고 그리스도를 삼위일체로 언급하고 있고 동정녀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제3의 인물로 동정녀의 어머니가 등장하게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세 사람을 피라미드와 같은 구성으로 화면 아래에 다리가 셋이 보이도록 했고 세 사람이 겹겹이 한 덩이가 되게 했다.
그는 신학적 사고도 고려하여 양을 통해서 아기 예수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십자가에 처형되는 희생이 정해져 있음을 표현했다.
런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는 드로잉의 경우 레오나르도는 양 대신 아기 예수가 세례 요한과 놀고 있는 모습으로 내용을 달리 했다.
하지만 이는 원래 의도한 바가 아니라서 다시금 양으로 고쳐 그렸다.
동정녀는 우수에 젖은 얼굴로 상징적인 이 동물과 노는 아기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으려고 하고 앤은 이미 예정되어 있어 피할 수 없는 희생임을 알고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앤은 부동한 채 미소를 짓고 있다.
이 작품은 미완성이다.
그가 9년이나 걸려 그렸으면서도 배경의 풍경과 동정녀의 파란색 겉옷을 완성시키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불안한 균형>

캐서린 드라이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잠시 왔다.
그녀는 1919년 4월 뉴욕으로 돌아오면서 뒤샹이 그곳에서 제작한 작품 두 점을 가지고 왔다.
하나는 광학적 실험 작품으로 제목이 <손으로 보는 입체경>인데 한 쌍의 바다풍경 사진으로 그 위에 뒤샹이 같은 형태의 다양한 면이 있는 피라미드를 그려 넣은 것이었다.
입체경으로 사진을 보면 피라미드는 마치 물 위에 둥둥 떠가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하나는 유리에 습작한 것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고 그가 곧 작업에 착수한 것이었다.
하단 오른쪽 부분은 나중에 <큰 유리>의 일부분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큰 유리>와 무관했으며, 끝이 뾰족한 수직으로 세운 나무토막은 확대경을 받치고 있는데 뒤샹이 실제 확대경을 풀로 붙인 것이었다.
그 위에 피라미드를 그리면서 그는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을 사용하여 많은 수평선을 그었다.
그것은 수수께끼 같은 작품인데다 제목마저 <한 눈으로 가까이서 거의 한 시간 동안 (유리 뒤에서) 바라볼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제목을 부쳤다.
캐서린은 뒤샹의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안한 균형>으로 고쳤다.
뒤샹은 그녀가 제멋대로 제목을 고친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수용하였다.
불평은 그의 기본 미학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선정한 레디 메이드 작품은 파리의 수잔느와 장 크로티가 주문하여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1919년 4월 14일에 결혼했는데 뒤샹은 결혼선물로 그들에게 기하에 관한 책 한 권을 끈에 달아 발코니에 매달도록 주문하면서 “바람으로 하여금 책장을 넘기며 절로 문제를 선택하게 한 후 페이지를 찢게 하라”고 지시했다.
뒤샹은 이것을 ‘불행한 레디 메이드’라고 했다.
결혼선물로는 달갑지 않았지만 수잔느와 크로티는 뒤샹의 지시대로 책을 매달고 바람이 책장을 절로 넘기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수잔느는 후에 사진을 그림으로 그린 후 <마르셀의 레디 메이드 불행>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뒤샹은 “행복과 불행의 개념을 레디 메이드에 부여하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재미있었다.
비와 바람이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흥미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뒤샹은 자신의 말대로 체스에 미쳐버렸다.
그는 아렌스버그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나는 체스에 미쳐버렸네.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기사Knight나 왕후처럼 보이고, 그것들이 변화를 일으켜 게임에 이기거나 지는 것밖에는 다른 어떤 관심도 내게는 없다네.”

그가 얼마나 체스에 몰두했는지는 미나 로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한 지 한 달 혹은 그 이상이 지났는데도 그녀를 만나지 않은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미나는 아서 크라반을 따라 멕시코로 갔다. 크라반은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미국을 도망쳐 나와 두 사람은 멕시코 시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크라반은 피카비아가 뒤샹에게 소개한 사내였다.
피카비아가 바르셀로나에서 크라반을 만났을 때 그에게 뉴욕으로 갈 것을 권유했고, 그는 피카비아의 말대로 뉴욕으로 왔다.
“나는 문명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 크라반은 잘생기고 건장한 청년으로 싸움을 좋아했으며, 스스로 오스카 와일드의 조카라고 했다.
그는 1911년에 자신이 창간한 잡지 『오늘날』에서 파리의 대부분 예술가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오늘날』은 1913년에 폐간되었다.
그는 징병을 피해 중립지대인 바르셀로나로 가서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권투선수 잭 존슨에게 도전했는데, 존슨도 미국으로부터 그곳에 도망쳐 와 있었다.
크라반이 존슨에게 도전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웃기는 일이라고 했다.
크라반은 프랑스에서 아마추어 라이트헤비급 타이틀을 딴 적은 있었지만 감히 프로 헤비급에 도전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예상대로 존슨은 그를 6회전에서 쓰러뜨렸는데 크라반은 그때 번 돈으로 뉴욕으로 올 수 있었다.
그와 함께 그때 뉴욕으로 온 사람은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스키였다.
트로츠스키는 크라반에 관해 “그는 자신의 갈비뼈가 독일인에 의해 부서지기보다는 고상한 운동으로 양키 신사의 턱을 부서뜨리는 것을 더욱 원했다”고 했다.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1916년에 <바르셀로나 권투 포스터(아서 크라반 대 잭 존슨)>를 만든 것으로 미루어 당시 존슨에 대한 크라반의 도전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나는 뒤샹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가 딴 여자에게 관심을 두자 “그는 내 코 앞에서 말처럼 생긴 여자와 섹스를 했다”고 투덜거렸다.
미나가 뒤샹과 함께 있는 크라반을 사랑의 파트너로 선정한 것은 뒤샹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었다.
그녀는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설계하지 않은 채 크라반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리고는 그를 따라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크라반에게는 말도 없이 한동안 사라지는 버릇이 있었는데 결혼식을 올린 후에도 그 버릇은 사라지지 않았고, 미나는 참다못해 혼자 영국으로 가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끈질긴 이사벨라'

1500년 초 레오나르도는 베네치아로 갔다.
이때 스페인군은 나폴리를 놓고 프랑스군과 싸웠고 나중에는 롬바르디를 두고 프랑스와 겨루었다.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을 내모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쫓겨났다.
이탈리아가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서 통일을 이룩한 후였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존경심을 표했지만 그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바사리의 말로는 레오나르도의 ꡒ부드럽고 어두운 muted and darkꡓ 양식을 젊은 조르조네Giorgione(Giorgio Barbarelli 혹은 Giorgio da Castelfranco, 1477년경~1510)가 매우 좋아했으며 평생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유화에 폭넓게 사용했다고 한다.
바사리에 의하면 팔마 베키오Palma Vecchio 역시 레오나르도의 영향을 받았다.

레오나르도는 1500년 4월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 48이었다.
그는 아버지 세르 피에로를 만났는데, 피에로는 이른네 살의 노인이 되었다.
피에르는 비아 기벨리나의 새집에서 네 번째 아내 공증인의 딸 루크레지아 디 구글리엘모와 열한 자녀들과 살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아버지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쓴 것 같았는데, 한 통만 남아 있다.
그 편지는 아버지의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피에로도 종종 아들에게 편지를 썼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사벨라는 레오나르도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지만 소식이 없지 매우 궁금해 했다.
1501년 3월 그녀는 피렌체인 신부 프라 피에트로 다 노벨라라에게 편지를 보내 레오나르도의 안부를 물으면서 그가 자신의 초상을 그리고 있는지 또 피렌체에는 얼마나 머물게 될 것인지 등을 알아봐달라고 했다.
그를 만나게 되면 자신의 아파트를 장식할 그림의 주제와 언제 그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그리고 작은 크기로 마돈나를 그려줄 수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했다.
레오나르도를 만난 후 신부가 1501년 4월 8일 이사벨라에게 보낸 편지에는 ꡒ레오나르도의 생활은 불안정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처럼ꡓ 보인다고 적혀 있다.
그 편지에는 신부의 청탁으로 레오나르도가 그린 그림에 대한 언급과 함께 스케치가 있는데,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그린 것으로 짐작되는 <동정녀와 아기 예수 그리고 성 앤 Virgin and Child with Saint Anne>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서 신부는 레오나르도는 그 밖의 어떤 작업도 하지 않고 있으며 ꡒ간간이 초상화에 붓질을 하지만 그의 제자 두 사람이 그리고 있다ꡓ고 적었다.
이사벨라는 일단 마음을 먹으면 관철시키는 성격이라서 신부는 4월 14일에도 편지를 보내 레오나르도의 근황을 알렸는데, 레오나르도가 프랑스 왕에 총애하는 플로리몽 로베르테를 위해 작은 그림 <마돈나와 실패를 돌리는 아기 Madonna with a Yarn-Winder>를 그리고 있으며 그것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다른 작업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그녀는 사람을 시켜서 몇 차례 더 레오나르도에게 약속한 그림을 그려줄 것을 청했고, 1504년 5월 14일에는 안젤로 델 토바글리아a라는 사람을 시켜서 돈을 많이 주겠다고 제안했으며, 동시에 손수 편지를 써서 마지막으로 제안했다.

“마스터 레오나르도 선생, 피렌체에 안주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희는 저희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다는 점을 알려드렸으며 … 선생이 저희들에게 오셨을 때 초크로 저희의 초상을 드로잉한 걸 보여주면서 언젠가 채색을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선생이 이곳으로 돌아와야만 약속을 이행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선생이 약속하신 그림을 그려주는 대신 12살 가량의 아기 그리스도의 그림, 말하자면 성전에서 성서학자들과 함께 계신 모습을 선생 예술의 특징이 되는 매력적이고 온화한 분위기로 그려주셨으면 합니다. 선생이 저희가 원하는 그림과 선생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될 우리가 제안한 돈에 만족해 하신다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이사벨라는 1504년 10월 30일에 레오나르도에게 한 번 더 편지를 보냈다.
그녀의 집념은 대단했으며 1506년에는 레오나르도가 1505년 봄 피솔레에서 다시금 만난 세르 피에로의 첫 번째 아내의 남동생 카논 알레산드로 데글리 아마도리에게 자신을 위해 레오나르도를 설득해줄 것을 청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페루지노, 라파엘로, 티치아노를 설득해 결국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달랐다.
그녀가 마음을 끄는 제안과 더불어 친절한 태도를 보였지만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지나친 간섭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페루지노에게 보낸 편지에 ꡒ이 그림에서 선생의 어떠한 발명도 보태는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ꡓ라고 적었다.
레오나르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매우 소심성을 보였는데, 다음과 같이 적었다.
ꡒ제 생각에 선생에게 몇 마디 드려야 할 것 갑습니다.ꡓ
그렇지만 레오나르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예 답장조차 보내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이 체스에 전념한 사실은

뒤샹이 체스에 전념한 사실은 이원론적인 그의 정신세계를 잘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프랑스 지성인이 르네 데카르트와 앙리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아 이원론적 세계를 추구한 것처럼 그도 두 세계에 병존하고 있었다.
그는 미술에 관한 어떤 개념에도 회의를 일으켰는데 다음과 같은 말에서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나는 내가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모색했는데 이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줄곧 과거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거의 수학적으로 정밀한 방법으로 새로운 것을 찾았음을 여태까지 그가 추구한 미술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체스는 수학적 정밀함을 필요로 하므로 그의 취향에 맞았던 것이다. 그는 말했다.
“체스는 놀라울 정도로 데카르트적이다.
… 체스두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조화를 창조하는데,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볼 수 없겠지만 결국에는 신비한 것이 아닌 줄을 알게 된다.
체스는 순수논리의 결과다.
미술은 이와는 전혀 상이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뒤샹은 미술과 체스가 좀더 유사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1952년 뉴욕 주 체스 연합대회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많은 예술가와 체스 두는 사람들을 만난 결과 나는 모든 예술가들이 체스 두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모든 체스 두는 사람들은 예술가들이란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뒤샹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고 얼마 후 <체스알>을 레디 메이드로 선정했다.    

그가 지나치게 체스에 열중하자 이본느는 마침내 뒤샹에게 화를 내고 짐을 싸서 프랑스로 가버렸다.
뒤샹은 크로티에게 보낸 편지에 “난 이본느에게 떠나지 말라고 수차례 말했지만 그녀의 의지와 나의 욕망은 제대로 타협되지 않아, 결국 그녀는 나를 떠나버렸네”라고 적었다.
그러나 향후 10년 동안 두 사람은 계속해서 만났고, 이본느가 영국인과 결혼해서 런던으로 가기 전까지 뒤샹과는 계속해서 섹스를 했다.
이본느는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피터 리옹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피터는 뒤샹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
뒤샹에 대해 피터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어머니는 그분에 관해 별로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지만 나는 늘 마르셀이 어머니가 평생토록 사랑하신 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