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조르조네

베네치아 화가 조르조네Giorgione(또는 Barbarelli 또는 Giorgio da Castelfranco, 1477년경~1510)의 인생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몇 점의 작품이 그의 것들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타계하고 곧 그는 미술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했다.
그는 전염병으로 일찍 생을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미술사학자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회화에 새로운 개념을 유입시킨 것으로 공공 혹은 교회의 후원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보다는 개인의 주문을 받아 소장품으로 주로 제작한 초기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주제를 경시하고 회화적 분위기를 창출하는 데 더욱 주안점을 두었다.
바사리는 조르조네가 ‘큰 인물 조지 Big George’로 불리웠다면서 “신체적 조건과 도덕성 그리고 지성” 때문이었다고 적으면서 모던 회화의 창시자들 중 하나인 레오나르도에 견줄 만하다고 했다.
조르조네는 베네치아 북서쪽으로 30km가량 떨어진 카스텔프란코에서 태어났고 바사리에 의하면 조반니 벨리니로부터 수학했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의뢰를 받아 두 주요 공공작품을 제작했다.
1507~8년에 총독 궁정 내 알현실에 장식할 그림을 캔버스에 그렸는데, 현존하지 않는다.
1508년에는 티치아노의 도움을 받아 독일인의 창고 폰다코 데이 테데시Fondaco dei Tedeschi 바깥 벽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는데, 현존하지 않고 다만 파손된 부분과 잉그레이빙만 남아 있다.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들 가운데 그가 자신이 그렸음을 작품 뒤에 적은 것은 <로라 Laura>로 알려진 여자의 초상화로 자신이 1506년에 그렸음을 다음과 같이 서명했다.
‘Master Zorzi da Castelfranco'.
그의 작품으로 단정하는 주요 단서는 1525년과 1543년 사이 베네치아인 콜렉터터이자 미술품 감식가 마르칸토니오 미치엘Marcantonio Michiel의 노트북이다.
그는 다섯 점을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기록했는데, <폭풍 The Tempest>, <세 철학자 The Three Philosophers>, <잠든 베누스 Sleeping Venus>, <소년과 화살 Boy with an Arrow>,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Christ Carrying the Cross>이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이 그의 손으로 제작된 것만은 아니었고 그가 타계한 후에 완성된 것들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세 철학자>는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Sebastiano del Piombo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잠든 베누스>는 티치아노에 의해 완성되었다.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 초판(1550)에는 성 로코S. Rocco를 장식한 그림이 조르조네가 그린 것으로 적혀 있지만 재판(1568)에서는 조르조네와 티치아노가 함께 제작한 것으로 적혀 있다.
오늘 날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젊은 티치아노가 조수로 그를 도왔더라도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그 밖에도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카스텔프란코 마돈나 Castelfranco Madonna>로 고향 대성당을 장식한 것이다.
리돌피Ridolfi가 1648년에 처음으로 조르조네의 작품임을 기술한 이래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의 작품으로 믿고 있다.
모작으로 남아 있지만 자화상을 포함해 몇 점의 초상화가 그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그는 낭만적 분위기의 그림을 그려서 베네치아인의 호감을 받았으며 그 자신 잘생기고 친절한 성격이라서 사람들이 더욱 더 그를 좋아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활기를 되찾은 파리

1919년의 가을전을 위한 카탈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조르주 리베몽 데상느의 글이 실렸다.

만일 여러분이 그랑팔레 미술관에 가게 되면 계단 아래 그늘진 곳에는 가지 마십시오.
그곳에는 살아 있는 괴물처럼 생긴 것이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괴물이란 피카비아가 기계주의 방법으로 그린 그림을 의미했다.
피카비아는 가을전의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므로 임의로 그림을 그곳에 걸 수 있었다.
그의 기계그림은 뉴욕에서 이미 소개된 적이 있었지만 파리에서 소개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가을전은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14년 이후 처음 개최된 파리 미술계의 대대적인 첫 잔치였는데 그의 그림이 추문을 야기했다.
레제가 튜브처럼 생긴 그림을 그렸지만 완전히 기계처럼 생긴 것을 처음 그린 사람은 피카비아였다.

심사위원들 중 한 사람으로 『성자 중 성자Saint of Saints』의 저자이며 화가인 조르주 데바리에르는 피카비아에게 “아무튼 세계대전 기간중에 무엇을 하고 지냈느냐?”고 묻자 “난 지옥처럼 지루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고 대답했다.
피카비아는 탈영하여 여권도 없이 뉴욕을 들락날락 했고, 바르셀로나로 도망치기도 했다.
그가 정부로부터 탈영에 대해 용서를 받은 것은 퍽 후의 일이었다.

이 시기 피카비아는 콜라주를 실험했지만 대부분 자신의 상상에 의존하여 그렸다.
그는 풍경화를 그리는 데도 나무를 깎아 펜으로 사용하면서 가는 선을 그렸으며, 초상화를 그릴 때는 얼굴의 외곽선을 성냥개비를 사용해서 그리기도 했다.
<성녀>는 그렇게 해서 그려진 것들 중 하나였다.
그가 캔버스에 잉크를 쏟아 부었을 때 평론가는 그것을 “지성의 얼룩”이라고 적었다.

뒤샹은 가을전에 출품하지 않고 자크 비용과 함께 42세로 사망한 레이몽의 유작 19점을 가을전에 출품했다.
레이몽의 유작은 가을전의 최대 관심사로 사람들에게 부각되었다.
로댕의 영향을 받은 레이몽은 전통주의와 새로운 미학을 혼용한 작품을 제작했는데 브랑쿠시와 쌍벽을 이룰 만한 조각가로 알려졌다.
레이몽은 실제 운동을 힘 있게 나타내는 조각을 주로 제작했으며, 1914년에 제작한 <말>은 입체주의의 개념을 삼차원으로 시위한 것이었다.
그는 기계적 형태와 유기적 형태를 적절한 방법으로 혼용할 줄 알았는데 <말>은 19세기의 기념비적인 주제를 20세기의 성상으로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
패츠는 1914년에 마티스를 데리고 퓌토에 있는 레이몽의 화실로 그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마티스는 화실을 둘러보다가 <말>을 보더니 “투사물이군” 했다.
레이몽은 마티스의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투사물projectile이라면 날아다니는 물체의 한 가지 선을 의미하지만 레이몽은 걸어가는 말의 수없이 많은 운동을 집약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그가 한창 창작할 수 있는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군가전문 공학가로 선임된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는 1502년 로마에서 체사레 보르지아의 최후 군사전문 공학가로 선임되었다.
그의 나이 오십에 자신이 늘 꿈꿔오던 일을 맡게 된 것이다.
교황 알렉산더 6세와 로마의 고급 창녀 사이에 태어난 체사레 보르지아는 16살에 추기경이 되었고, 스물두 살 때 성직을 박탈당했다.
로마를 수호하는 일을 맡은 그는 독종으로 알려졌는데, 잔인했고, 속임수에 능란했으며, 신앙심이 없었고, 색욕이 강했으며, 근친상간을 했다.
그는 르네상스의 어두운 면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여동생 루크레지아와 간통했으며 여동생을 왕자들과 결혼하게 한 후 왕자들을 즉결 처형했으며 그중 한 명을 올가미로 씌워 단도로 찔러 죽였다.
자신의 남동생을 칼로 찔러 죽이기도 했다.
자신이 현혹시킬 수 없거나 부패하게 만들 수 없을 때는 죽이고 약탈했다.
그는 피에 굶주린 야만인과도 같았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성취했다.
그는 시민들을 탄압하는 전제 군주들을 공격하고 시민들에게 그들의 권익을 찾아줘 상당한 평화를 누리게 했으므로 특히 부르주아들이 그를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를 정복함으로써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더가 원했던 교회의 슬로건 아래 이탈리아가 하나로 통일되는 과업을 거의 달성하고 있었는데, 그의 27살 때였다.
나머지 지역에 대한 정복은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야 하는 것으로 좀더 시간을 두고 진행시켜야 할 과업이었다.

레오나르도가 처음 그를 만난 것은 1499년 밀라노였던 것 같으며 프랑스군이 롬바르디를 점령할 때 보르지아는 프랑스군과 행동을 함께 했다.
보르지아는 프랑스 왕 루이 12세로 하여금 교황이 원하는 대로 영국의 앤 공주와 결혼하도록 거들었다.
루이 12세는 그에게 작은 군대를 주었고, 수입원을 제공했으며, 직위를 주었는데, 프랑스 시민권과 발렌티노이스Valentinois의 공작에 임명했다.
성격이 강한 레오나르도와 보르지아 두 사람은 서로의 지성에 경의를 표하며 독특한 관계를 유지했다.
레오나르도는 보르지아의 거칠고 당당함에 매력을 느낀 것 같다.
작가미상의 그의 초상화를 보면 자신만만하고 사나운 것이 사자의 얼굴을 닮았는데, 그는 사자사냥을 이주 좋아했다.
레오나르도는 1502년 여름 그에 의해 군사전문 공학가의 직을 맡았다.
그는 그해 7월 토스카니 국경에 위치한 피옴비노Piombino에서 요새화와 습지의 수로에 관해 연구했다.
보르지아가 계략으로 쉽게 우르비노를 점령하자 레오나르도는 7월 말 그곳으로 가서 그를 만났다.
우르비노에서 레오나르도는 여행자들처럼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Francesco di Giorgio Martini가 디자인한 계단을 드로잉하고 계단의 치수를 적어 넣었으며 요새를 신속하게 스케치했다.
보르지아는 우르비노의 금과 예술적․문화적 보물들을 포획하여 노새에 싣고 보관소에 넣어두었다.
레오나르도는 우르비노로부터 아드리아 해에 있는 페사로로 갔다가 리미니로 가서 그곳 음악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며칠 후에는 로마냐의 수도 체세나로 갔다. 보르지아는 8월 18일 파비아에서 프랑스 왕과 책략을 꾀한 후 레오나르도에게 여권을 보내면서 자신이 그를 선임했음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켰다.
“이 서류를 읽는 모든 상관 대리, 성주, 통솔자, 용병 대장, 공무원, 군인,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이 패스를 소지한 훌륭하고 우리의 총애를 받는 건축가이자 공학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는 우리 나라의 요새와 곳곳을 살펴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그의 충고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을 보존할 것이므로 그와 그의 동료들(그때 레오나르도는 살라이와 제자들과 함께 동행한 것 같다)에게는 어떤 세금도 부과해서는 안 되며, 우호적으로 그를 환영하고, 그가 조사하고 측량하는 어떤 일에도 협조하라. 그가 작업을 하고자 할 때는 그가 원하는 인력을 제공해 주고 원하는 어떠한 도움이나 협력에 응하라. 우리 나라 내에서 집행되는 어떤 작업이라도 사전에 공학가는 레오나르도의 승락을 받도록 하라.”

레오나르도는 보르지아의 주문을 받고 로마냐를 요새화하는 일에 적극 가담했으며 특히 체세나와 포르토 체세나티코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로마냐에서는 공공 그리고 군사적 건물들을 건립하는 일을 주로 했고 나머지 두 군데서는 많은 일을 했으며 마을과 항구를 연결하는 운하를 만든 것이 특기할 만하다.
그는 바람에 의한 제분기를 고안했는데 50년 후에 생긴 네덜란드의 풍차칸처럼 생긴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로베르 들로네는 전쟁이 일어나자

로베르 들로네는 전쟁이 일어나자 동갑내기 아내인 예술가 소냐와 함께 리스본을 경유해서 마드리드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러시아 사람 디아길레프를 만났다. 디아길레프가 소냐에게 발레 <클레오파트라>를 위한 무대의상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하고, 들로네에게는 무대장식을 의뢰했다.
공연이 성공하여 들로네 부부는 한동안 러시아 발레단과 어울렸다.
소냐는 마드리드에 있는 리츠 호텔에서 의상발표회를 갖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소냐의 집이란 간판으로 의류점을 개업했다.
그녀는 1919년과 1920년에 극장 내부 장식과 의상을 디자인했으며, 전쟁의 소용돌이가 가신 후 이들 부부는 다다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들로네도 취리히에서 발간된 다다 잡지에 참여한 적이 있었고, 차라와 우정을 나누었다.

1914년 8월 2일에 징집된 페르낭 레제는 베르두 전선에서 가슴에 가스 화상을 입고 1916년 9월 비에핀트 병원으로 후송되어 왔다.
그는 말했다.
“전쟁은 나의 인생에 커다란 사건이었다.
전선은 시를 초월한 분위기였고 나를 흥분시켰다.
… 전쟁은 나를 땅바닥으로 내려놓았다.
… 나는 갑자기 프랑스 국민과 하나가 되었다.”

그는 병원에 1년 이상 입원한 후 1917년 말에 퇴원했다.
그는 전쟁을 통해 경험한 것을 캔버스에 생생하게 옮겼는데, 그의 그림에 대포와 포탄 등의 기계가 등장했다.
그는 유물론자였고, 기계문명을 찬양했으며, 부엌의 주전자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계를 회화의 요소로 사용했다.
그는 “아름다움은 어디에든 있다. … 자동차 쇼에 가 보아라. 그리고 항공 쇼에도 … 이런 쇼들은 세계 최고의 것들이다”라고 했다.
그가 1917년 병원에서 치료받을 때 그린 <카드 게임>은 전쟁이 그에게 보상한 작품이 되었다.
병원에서 상의군인들이 카드 게임하는 장면을 캔버스에 옮긴 그 그림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레제는 1919년에 장느 로이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해 <도시>를 그렸는데 가장 힘 있는 입체주의 구성의 그림이었다.
그는 그림에서 현대의 비자각적 정신과 서사시적 드로잉을 함께 보여주었다.
그는 초기의 조각적인 회화방법을 버렸고, 그림을 편평하게 그리면서 구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1920년에 건축가 르 코르뷔제를 만났는데 그는 그때 아메데 오장팡과 함께 잡지 『새 정신L'Espirit Nouveau』을 창간했다.
르 코르뷔제와 오장팡은 레제의 기계미학을 지지하면서 그의 그림을 『새 정신』에 수록했다.
이 시기 레제의 그림은 피카소가 빈정거린 대로 튜브처럼 나타났는데 그는 그런 식으로 모든 사물을 기계처럼 묘사하면서 인간적인 느낌을 일소했다.

그리는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국적을 가졌으므로 징집되지 않고 파리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칸바일러는 적이방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후 파리로부터 추방되었으며, 그리는 전쟁이 속히 끝나 자신의 그림을 팔아줄 그가 돌아오기만 고대했다.
칸바일러가 1920년에 파리로 돌아와 그와 재계약을 할 무렵 그리는 늑막염으로 매우 앓아 그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입체주의 그림을 그렸는데 분석입체주의를 구성적인 방법으로 진전시켜 실험적이기보다는 지성적으로 나타나도록 했다.
그는 시인들과 주로 어울렸으며, 특히 피에르 레베디와 레이몽 라디구에와 우정이 두터웠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입체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가장 시적이고 아름답게 나타났다.
그는 빛과 색을 입체주의에 부여한 첫 번째 예술가였으며, 콜라주의 회화적 유용함을 누구보다도 적절하게 시위할 줄 알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에서   
 
벨리니 가족: 야코포, 젠틸레, 조반니


벨리니 가족 삼부자는 15세기 중반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었다.

야코포 벨리니(1400년경~70/1)는 젠틸레와 조반니의 아버지였고 또한 만테냐의 장인이었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로부터 수학한 야코포는 스승과 함께 피렌체에서 작업했으며 일찍이 고향 베네치아와 그 외의 지역에서 명성을 쌓았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 현존하지 않지만 마돈나와 아기 그리스도를 묘사한 <성모자> 몇 작품이 남아 있어 그의 양식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후기 고딕의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 나타난 인물들은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고딕의 우아함은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당시 동시대 예술가들의 관심사인 고고학, 원근법, 해부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두 권의 스케치북이 현존하여 그의 개성적 성향을 살펴볼 수 있는데 230점 이상의 드로잉이 있으며 많은 드로잉에서 공간을 나타내기 위해 원근 효과를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스케치북은 루브르와 런던의 브리티시 뮤지엄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젠틸레 벨리니(1429?~1507)는 아버지의 스케치북을 물려받았고 작업장을 열고 사업을 시작했으므로 조반니의 형으로 추정된다. 아버지의 명성에 힘입어 그도 베네치아에서 주요 예술가로 활약했지만 많은 그의 작품들이 사라지고 현존하지 않는다.

그는 1479~81년 콘스탄티노플 궁정에서 작업하면서 술탄 메메트 2세Sultan Mehmet II의 후궁을 위해 에로틱한 장면들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지만 작품들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메메트의 초상은 현존하고 보존상태가 나빠 복원했으며 현재 런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다.

조반니 벨리니(1430?~1516)는 가족 중에서 가장 빼어난 예술가였으며 베네치아 미술을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지인 피렌체와 로마에 버금가는 곳으로 향상시켰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회화를 수학했지만 매제 만테냐로부터 주로 영향을 받았다.

두 사람이 1460년경에 그린 현재 런던 국립화랑에 소장되어 있는 동일한 제목의 그림 <예수의 고뇌 Agony in the Garden>를 보면 두 사람의 유사한 점과 상이한 점을 알 수 있으며 특히 풍경에 대한 묘사가 그러 하다.

만테냐의 작품은 구체적이며 분석적이고 날카로운 데 비해 조반니의 작품은 서정적이며 대기의 공간이 묘사되어 있다.

조반니는 만테냐 외에도 1475~6년 베네치아에 체류했던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의 영향을 받았다.

조반니는 안토넬로와 더불어서 당대 오일물감을 다루는 데 뛰어났다. 그는 장수했으며 늙어서도 끊임없이 배움을 추구했고 그가 타계하기 전에 그린 <거울 앞의 여인 Woman with a Mirror>에서는 조르조네Giorgione의 영향이 엿보인다.

조르조네는 조반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조반니의 창작력은 샘물처럼 솟아났고 1505~7년 베네치아를 방문한 뒤러는 조반니가 늙었지만 여전히 “최고의 화가”라고 극찬했다.

조반니의 초상화는 매우 훌륭했다. 그의 <성모자>는 빼어나 라파엘로만이 그와 재능을 겨눌 수 있었다. 베네치아 미술에 끼친 그의 영향은 대단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