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활기를 되찾은 파리
1919년의 가을전을 위한 카탈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조르주 리베몽 데상느의 글이 실렸다.
만일 여러분이 그랑팔레 미술관에 가게 되면 계단 아래 그늘진 곳에는 가지 마십시오.
그곳에는 살아 있는 괴물처럼 생긴 것이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괴물이란 피카비아가 기계주의 방법으로 그린 그림을 의미했다.
피카비아는 가을전의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므로 임의로 그림을 그곳에 걸 수 있었다.
그의 기계그림은 뉴욕에서 이미 소개된 적이 있었지만 파리에서 소개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가을전은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14년 이후 처음 개최된 파리 미술계의 대대적인 첫 잔치였는데 그의 그림이 추문을 야기했다.
레제가 튜브처럼 생긴 그림을 그렸지만 완전히 기계처럼 생긴 것을 처음 그린 사람은 피카비아였다.
심사위원들 중 한 사람으로 『성자 중 성자Saint of Saints』의 저자이며 화가인 조르주 데바리에르는 피카비아에게 “아무튼 세계대전 기간중에 무엇을 하고 지냈느냐?”고 묻자 “난 지옥처럼 지루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고 대답했다.
피카비아는 탈영하여 여권도 없이 뉴욕을 들락날락 했고, 바르셀로나로 도망치기도 했다.
그가 정부로부터 탈영에 대해 용서를 받은 것은 퍽 후의 일이었다.
이 시기 피카비아는 콜라주를 실험했지만 대부분 자신의 상상에 의존하여 그렸다.
그는 풍경화를 그리는 데도 나무를 깎아 펜으로 사용하면서 가는 선을 그렸으며, 초상화를 그릴 때는 얼굴의 외곽선을 성냥개비를 사용해서 그리기도 했다.
<성녀>는 그렇게 해서 그려진 것들 중 하나였다.
그가 캔버스에 잉크를 쏟아 부었을 때 평론가는 그것을 “지성의 얼룩”이라고 적었다.
뒤샹은 가을전에 출품하지 않고 자크 비용과 함께 42세로 사망한 레이몽의 유작 19점을 가을전에 출품했다.
레이몽의 유작은 가을전의 최대 관심사로 사람들에게 부각되었다.
로댕의 영향을 받은 레이몽은 전통주의와 새로운 미학을 혼용한 작품을 제작했는데 브랑쿠시와 쌍벽을 이룰 만한 조각가로 알려졌다.
레이몽은 실제 운동을 힘 있게 나타내는 조각을 주로 제작했으며, 1914년에 제작한 <말>은 입체주의의 개념을 삼차원으로 시위한 것이었다.
그는 기계적 형태와 유기적 형태를 적절한 방법으로 혼용할 줄 알았는데 <말>은 19세기의 기념비적인 주제를 20세기의 성상으로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
패츠는 1914년에 마티스를 데리고 퓌토에 있는 레이몽의 화실로 그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마티스는 화실을 둘러보다가 <말>을 보더니 “투사물이군” 했다.
레이몽은 마티스의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투사물projectile이라면 날아다니는 물체의 한 가지 선을 의미하지만 레이몽은 걸어가는 말의 수없이 많은 운동을 집약하여 제작한 것이었다.
그가 한창 창작할 수 있는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