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로베르 들로네는 전쟁이 일어나자

로베르 들로네는 전쟁이 일어나자 동갑내기 아내인 예술가 소냐와 함께 리스본을 경유해서 마드리드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러시아 사람 디아길레프를 만났다. 디아길레프가 소냐에게 발레 <클레오파트라>를 위한 무대의상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하고, 들로네에게는 무대장식을 의뢰했다.
공연이 성공하여 들로네 부부는 한동안 러시아 발레단과 어울렸다.
소냐는 마드리드에 있는 리츠 호텔에서 의상발표회를 갖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소냐의 집이란 간판으로 의류점을 개업했다.
그녀는 1919년과 1920년에 극장 내부 장식과 의상을 디자인했으며, 전쟁의 소용돌이가 가신 후 이들 부부는 다다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들로네도 취리히에서 발간된 다다 잡지에 참여한 적이 있었고, 차라와 우정을 나누었다.

1914년 8월 2일에 징집된 페르낭 레제는 베르두 전선에서 가슴에 가스 화상을 입고 1916년 9월 비에핀트 병원으로 후송되어 왔다.
그는 말했다.
“전쟁은 나의 인생에 커다란 사건이었다.
전선은 시를 초월한 분위기였고 나를 흥분시켰다.
… 전쟁은 나를 땅바닥으로 내려놓았다.
… 나는 갑자기 프랑스 국민과 하나가 되었다.”

그는 병원에 1년 이상 입원한 후 1917년 말에 퇴원했다.
그는 전쟁을 통해 경험한 것을 캔버스에 생생하게 옮겼는데, 그의 그림에 대포와 포탄 등의 기계가 등장했다.
그는 유물론자였고, 기계문명을 찬양했으며, 부엌의 주전자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계를 회화의 요소로 사용했다.
그는 “아름다움은 어디에든 있다. … 자동차 쇼에 가 보아라. 그리고 항공 쇼에도 … 이런 쇼들은 세계 최고의 것들이다”라고 했다.
그가 1917년 병원에서 치료받을 때 그린 <카드 게임>은 전쟁이 그에게 보상한 작품이 되었다.
병원에서 상의군인들이 카드 게임하는 장면을 캔버스에 옮긴 그 그림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레제는 1919년에 장느 로이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해 <도시>를 그렸는데 가장 힘 있는 입체주의 구성의 그림이었다.
그는 그림에서 현대의 비자각적 정신과 서사시적 드로잉을 함께 보여주었다.
그는 초기의 조각적인 회화방법을 버렸고, 그림을 편평하게 그리면서 구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1920년에 건축가 르 코르뷔제를 만났는데 그는 그때 아메데 오장팡과 함께 잡지 『새 정신L'Espirit Nouveau』을 창간했다.
르 코르뷔제와 오장팡은 레제의 기계미학을 지지하면서 그의 그림을 『새 정신』에 수록했다.
이 시기 레제의 그림은 피카소가 빈정거린 대로 튜브처럼 나타났는데 그는 그런 식으로 모든 사물을 기계처럼 묘사하면서 인간적인 느낌을 일소했다.

그리는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국적을 가졌으므로 징집되지 않고 파리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칸바일러는 적이방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후 파리로부터 추방되었으며, 그리는 전쟁이 속히 끝나 자신의 그림을 팔아줄 그가 돌아오기만 고대했다.
칸바일러가 1920년에 파리로 돌아와 그와 재계약을 할 무렵 그리는 늑막염으로 매우 앓아 그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입체주의 그림을 그렸는데 분석입체주의를 구성적인 방법으로 진전시켜 실험적이기보다는 지성적으로 나타나도록 했다.
그는 시인들과 주로 어울렸으며, 특히 피에르 레베디와 레이몽 라디구에와 우정이 두터웠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입체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가장 시적이고 아름답게 나타났다.
그는 빛과 색을 입체주의에 부여한 첫 번째 예술가였으며, 콜라주의 회화적 유용함을 누구보다도 적절하게 시위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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