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의 첫 현대미술관


뒤샹이 뉴욕에 돌아온 것은 1920년 1월 6일이었다.
그는 아렌스버그의 집이 더 이상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집합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에게서 빌린 돈을 갚지 않아 그의 재정이 어려운 상태였다.
아렌스버그는 미술품을 구입할 형편이 못되어 많은 시간을 남몰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집에 연구소를 차리고 몇 사람을 고용하여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작품들이 실제로는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저술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뒤샹은 73번가 웨스트 246번지 아래층에 아파트를 얻고 마샬 체스 클럽에 회원으로 등록하여 본격적으로 체스를 연구하기로 결심한 후 무엇보다도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프랑스어를 배우려는 신입생들을 모집했다.
아렌스버그 부부는 다른 예술가들과는 어울리기를 꺼려했지만 뒤샹과는 자주 만났고, 세 사람이 함께 캘리포니아 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가브리엘이 2월 말에 뉴욕으로 왔다.
뒤샹은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에 묵게 했다. 가브리엘은 이혼녀가 되었는데 피카비아는 제르마이느와 재혼했고, 제르마이느는 나중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가브리엘은 뉴욕에 석 달 머물 때 뒤샹과 계속해서 성관계를 가졌다고 회상했다.
두 사람의 그런 관계는 그 후 3년 더 지속되었다.

이 시기 캐서린은 유럽의 뮤지엄, 화랑,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두루 방문하고 돌아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뉴욕에 최초의 현대미술관을 건립하고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미술이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캐서린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들로 미술관을 건립할 수 있다고 보고 뒤샹에게 도움을 청했다.
구체적인 사항들을 의논하기 위해 그녀는 3월에 뒤샹을 아파트로 초대했다.
뒤샹은 만 레이와 함께 나타났다.
캐서린이 구상한 미술관은 비영리 미술관으로 교육이 중심을 이루고 전시회, 강의, 간행물 발행, 그리고 미술품 대여 등의 사업이 포함되었다.
뒤샹과 함께 이 일에 참여한 만 레이가 미술관의 명칭으로 자신이 프랑스 잡지에서 본 ‘무명사회Societe Anonyme’란 말을 제안하자 뒤샹이 그 말은 영어로 주식회사란 뜻이라고 했다.
캐서린이 생각한 명칭은 아주 촌스러웠는데 ‘현대 방주―개인 미술관’이었다.
만 레이와 뒤샹이 ‘무명사회’가 적당하다고 우기자 그렇게 하기로 하고 캐서린은 뉴욕 주정부에 미술관을 등록했다.
주정부 공무원은 주식회사Inc.를 끝에 붙여서 Societe Anonyme, Inc.라고 기록했다.
캐서린에 의해서 뉴욕에 처음으로 현대미술관이 탄생되었다.

캐서린은 무명사회 주식회사의 사장으로 뒤샹을 임명했고, 서기로는 만 레이를 임명했으며, 자신은 재정담당 이사가 되었다.
화랑은 47번가 이스트 19번지의 건물 위층을 빌려 뒤샹이 내부를 보수하고 만 레이가 전등을 달았다.
그리고 5피트 길이의 미술관 깃발을 47번가쪽으로 늘어지게 매달았다.
체스의 기사knight 이미지를 미술관 로고로 정했는데 그것은 뒤샹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디자인한 것이었다.
신문기자와 인터뷰하는 가운데 뒤샹은 미술관을 개관한 목적을 “사람들이 현대미술이 처음 미국에 착륙했을 때 지나치게 진지한 태도로 받아들인 이유는 우리가 매우 진지하게 작업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바는 즐겁자는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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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문 
 

근대Modern의 문을 연 것은 과학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예술가이면서 과학자였는데 과학의 발달이 전통주의 사고에 의심을 가져다주었다.
레오나르도 이래 과학은 꾸준히 발전했고 따라서 전통의 위협은 비례적으로 커졌다.
갈릴레오의 일련의 과학적 성과는 철학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특히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가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거의 2천 년 동안 서양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맹종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17세기에도 무너뜨릴 수 없는 장벽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은 신이었다.
태양과 별들은 그에게 신이나 다름 없었다.
그가 시사한 신들의 수는 47개 혹은 55개로 알려졌다.
이를 당구대에 놓인 당구알들에 비유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당구알 하나가 어떤 당구알을 쳐서 운동을 만들어냈고 그 당구알이 다른 당구알을 치는 것으로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47 혹은 55개의 당구알이 서로가 서로에게 운동을 제공하며 우주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최초에 당구알을 친 신의 당구실력은 놀라워서 우주의 운동은 매우 짜임새 있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천체학이다.

이런 그의 천체학은 과학의 발달로 위협을 받았다.
과학은 신이 아니라 물질 자체가 스스로 태초에 운동을 일으킨 이래 운동력이 조금씩 떨어지지만 지금도 유사한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호나경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인식은 천체학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에도 적용되었다.
물리학뿐 아니라 철학에서도 중요한 문제들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는데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이란 없다는 인식이었다.

뉴턴에게는 공간이란 포인트들points의 집합이었으며, 시간은 사건들의 집합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을 두 사건의 관계라고 정의했는데 뉴턴의 시간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이같은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철학에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철학의 재생은 과학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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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그 여자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

뒤샹은 파리에서 할 일이 없다고 생각되자 뉴욕으로 돌아가겠다고 아렌스버그에게 편지를 쓴 후 12월 말 뉴욕으로 떠나는 배를 예약했다.
그는 파리를 떠나기 전 새로운 작품 세 점을 제작했다.
그들 중 하나는 레디 메이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수표를 약 두 배로 확대했다.
수표에는 ‘The Teeth's Loan and Trust Company, Consolidated, 2 Wall Street, New York’이라고 적혀 있고, 금액은 115달러였다.
그는 수표 뒤에 고무도장으로 ‘theteeth'sloanandtrustcompany consolidated’라는 글자를 반복해서 찍었다.
이것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가을 어느 날 뒤샹은 리볼리 거리를 걷다가 <모나리자>를 프린트한 싸구려 그림엽서 한 장을 샀다.
그는 모나리자의 얼굴에 검정색 연필로 수염을 그려 넣고, 아래에 대문자로 L.H.O.O.Q.라고 적었다.
그 글자를 볼 때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프랑스어로 발음하게 되면elle a chaud au cul이 되어 ‘그 여자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란 뜻이 된다.
르네상스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작에 감히 수염을 그려 넣고 지독한 농담을 보탠 것은 그야말로 극도의 다다주의 방법이었다.
1919년은 레오나르도가 타계한 지 400주년이 되는 해라서 파리 시민은 새삼 레오나르도를 상기하면서 그가 서양미술에 끼친 영향을 높이 받들고 있었는데 뒤샹이 이 대가를 우스꽝스럽게 만든 것이다.
피카비아가 뒤샹의 <모나리자>를 잡지 『391』에 소개했을 때 로베르 레베가 그것에 관해 적었다.

모든 근래 예술가들 가운데 마르셀 뒤샹이 레오나르도를 가장 제어할 수 없게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그가 그저 위대한 화가임을 거부했다.

뒤샹이 카반느에게 말했다.

뒤샹: 1919년 10월이었네. <모나리자>를 어떻게 했느냐구?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저 수염을 그렸을 뿐이었지.
그것이 전부였어.
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네.

카반느: 당신의 친구들도 몰랐단 말입니까?

뒤샹: 브르통이 아마 보았을 게야.
그때 석 장 내지는 넉 장을 그렇게 만들어 그것들을 피카비아에게 가지고 갔지.
브르통이 그곳에서 그것들을 보았어.

카반느: 제 생각에는 <모나리자>가 피카비아의 집에 있었어요.
피카비아는 그것을 1920년 3월 『391』에 소개했습니다.

뒤샹: 일이 그렇게 된 게 아냐.
난 <모나리자>를 도로 가져와 짐 속에 넣었네.
피카비아가 처음 그것을 『391』에 소개했는데 그것은 그가 재현한 것이지.
그가 수염을 그려 넣었는데 염소수염을 깜빡 잊었던 게야.
그것이 (내 것과) 다른 점이지.
피카비아는 내가 한 것처럼 재현했네.
그리고는 ‘마르셀 뒤샹이 그린 다다 그림’이라고 소개했네.

카반느: L.H.O.O.Q.는 단순한 유머 말고 특별히 다른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뒤샹: 아냐. 의미는 음으로 읽는 것일세.

카반느: 그저 음성상의 게임이었단 말입니까?

뒤샹: 그렇다네.
난 이런 게임을 매우 좋아하는데 자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을 내가 발견한 것뿐이라네.
그저 프랑스 발음으로 읽기만 하면 되는데 어떤 언어로 읽더라도 경이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일세.

카반느: 당신은 1919년 말이나 1920년 초에 뉴욕으로 돌아올 때 <모나리자>를 가져왔단 말이죠?

뒤샹: 그렇다니까.

뒤샹은 루엥에서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이틀 후 12월 27일 르 아브르에서 뉴욕으로 가는 배에 승선했다.
그는 승선하기 전에 브로메 거리에 있는 약국으로 가서 종처럼 생긴 1회분 주사약이 든 병을 샀다.
그는 약사더러 병 끝을 잘라달라고 주문하여 병에 든 약을 버리고 병을 봉했다.
그는 그것을 아렌스버그 부부에게 줄 선물로 가방에 넣었고, 그것에 <파리의 공기 50cc>란 제목을 붙여 파리에서 선정한 세 번째 레디 메이드 작품이 되게 했다.
아렌스버그 부부는 돈이 많아 모든 것을 갖춘 상태였으므로 그가 그들에게 줄 선물이라고는 <파리의 공기>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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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치마부에

피렌체 화가 치마부에Cimabue(Cenni di Pepp, 1240년경~1302년경)의 별명은 ‘황소 대가리 Ox-head’였다.
치마부에는 중세를 대표하는 마지막 화가로서 단테가 <신곡>(purg. xi. 94-6)에서 그의 제자 조토가 스승을 능가한다고 비판했으므로 명성이 제자에 의해 가리워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보다는 조토의 스승으로 더 알려졌다.
그리스 양식 특히 비잔틴 양식으로 작업하다가 점차 사실주의에 전념했으며 이는 르네상스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이 피사 대성당에 모자이크로 장식한 <성 요한 St. John>(1302)이다.
13세기 말에 제작한 많은 그의 작품이 뛰어났으며 현재 우피치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산타 트리니타의 마돈나 Madonna of Sta Trinita>가 그것들 중 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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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로세를 1년 만에 만난 것이다


앙리 피에르 로세가 1919년 가을 뉴욕에서 파리로 와서 가브리엘의 아파트에서 뒤샹과 만났다.
뒤샹은 로세를 1년 만에 만난 것이다. 캐서린도 독일에 있는 친척들을 만난 후 파리로 왔으므로 세 사람은 함께 화랑과 극장을 돌아다니며 점심과 저녁식사를 고급 레스토랑에서 해결했는데 모든 비용을 캐서린이 지불했다.
세 사람은 스타인의 저녁식사에 초대받았다. 식사를 마친 후 스타인과 캐서린은 논쟁을 하느라고 얼굴이 푸르락거렸다.
스타인이 독일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토로하자 캐서린은 “내가 독일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들도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자 스타인은 “그래야지. 야수 같은 놈들”이라고 대꾸했다.
캐서린의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자 뒤샹은 서둘러 캐서린을 데리고 스타인의 집을 나왔다.
뒤샹은 브랑쿠시가 초대한 파티에도 캐서린과 함께 갔다.
그날 로세는 작곡가 에릭 새티와 함께 그곳에 왔는데 파티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브랑쿠시는 새티를 처음 만났다. 브랑쿠시는 거위요리와 포도주를 잔뜩 제공했지만 예술가들은 술을 더 가져오라고 성화였다.
그들은 전쟁중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를 묻고 대답하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댔다.

뒤샹은 캐서린을 데리고 루엥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는데 캐서린은 프랑스인의 가정을 방문한 것에 매우 흥분했다.
그는 그녀를 퓌토로 데리고 가서 자크와 형수 가비에게도 소개했으며, 로세도 그곳으로 와서 함께 자크 비용의 최근 그림들을 보았다.
로세가 보니 캐서린은 자꾸 뒤샹의 팔짱을 끼려고 하고, 뒤샹은 은근히 그녀를 멀리하려고 했는데, 뒤샹과 연상의 몸집이 큰 금발의 미국 여인은 과연 어떤 관계인지 로세로서는 알 수 없었다.
로세와 뒤샹은 같은 시기에 이본느와 섹스를 했다. 로세는 뒤샹과 함께 지낸 시간이 많았지만 뒤샹이 자신의 일에 관해서는 말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러나 로세는 뒤샹의 사생활이 복잡하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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