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미켈란젤로의 <켄타우로스의 전투>


16살 미켈란젤로의 천부적 재능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작품이 <켄타우로스의 전투 Battle of the Centaurs>이다.
이 작품 또한 <계단에서의 마돈나>와 마찬가지로 1492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둘 다 대리석을 릴리프로 제작한 것으로 회화적 구성이다.
그가 일찍이 회화에도 관심이 많았음을 알게 해준다.

두 점은 주문을 받고 제작한 것들이 아니라서 미켈란젤로 자신이 평생 소장하고 있었고 현재 피렌체의 카사 부오나르로티(미켈란젤로의 집)에 소장되어 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조각가 도나텔로가 이런 릴리프 조각을 많이 제작했는데,
어린 미켈란젤로는 거장과 솜씨를 겨누기라도 하듯 일찍이 릴리프 조각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전투장면은 당시 흔한 주제로 베르톨도도 <기마병들의 전투 Battle of Horsemen>를 1475년경 제작했다.
베르톨도의 작품은 메디치 궁전에 있었으므로 미켈란젤로는 늘 봤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주제가 되는 인물이 따로 없고 작게 묘사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베르톨도는 1491년 12월에 타계했다.

미켈란젤로는 <켄타우로스의 전투>를 약간 볼록한 우유빛 대리석에 제작하면서 전투에 참전한 사람들 모두를 누드로 묘사했는데,
고대 미술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 보인다.
격렬한 전투에 주제가 되는 인물이 없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관람자에게 전하려고 했다기보다는 구성 자체에 관심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어디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가 참조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은 피렌체 화가 피에로 디 코지모가 묘사한 라피트족Lapiths의 공주 히포다메이아Hippodameia의 납치와 켄타우로스와 라피트족 사이의 전투이다.
페리토우스Perithous는 자신의 신부 히포다메이아를 구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테세우스Theseus는 격노한 켄타우로스에게 돌을 던지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인간과 켄타우로스 사이의 전투를 묘사한 이런 장면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현존하지 않고 문헌에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무기와 갑옷이 등장하는 전투장면을 그리지 않고 한가롭게 목욕을 즐기던 병사들이 경계신호를 듣고 허겁지겁 물에서 올라오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런 주제는 사전에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제작할 수 없다.
이런 장면이 기념비적인 벽화로 제작될 수 있었다는 데서 당시 피렌체인의 예술적 취향이 매우 다양하고 발달되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가파른 강둑을 병사들이 기어오르는 장면,
무릎을 꿇고 몸을 아래로 굽히는 장면,
용감하게 일어나 갑옷을 입는 장면,
앉은 채 서둘러 옷을 입는 장면,
외치거나 달려가는 장면 등
그는 다양한 병사들의 동작을 묘사하는 가운데 벌거벗은 신체들을 표현했다.

피렌체 예술가들 중 해부학에 능한 사람들은 즐겨 벌거벗은 남자들의 전투장면을 묘사했다.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는 이런 장면을 동판화로 두 점 제작했으며 베로키오는 집의 정면에 벌거벗은 전투자들을 장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의 작품과 비교하면 미켈란젤로의 작품에는 모든 동작이 새롭게 창안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토록 풍부한 움직임을 묘사할 수 있었던 건 그가 해부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최초로 해부학을 연구한 사람이 아니었고 레오나르도가 이 분야에서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켄타우로스의 전투>는 <계단에서의 마돈나>보다 크다.
당시 대리석은 비쌌고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누군가가 제공해준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그가 이런 크기의 대리석을 구했는지 궁금하다.
세로 84.5cm 가로 91cm라면 운반하기에 무거운 중량이다.
도나텔로의 많은 작품이 이보다 작다.
미켈란젤로는 <계단에서의 마돈나>에서와는 달리 공간의 깊이를 따로 창조하지 않고 사람들이 겹치는 가운데서 절로 공간의 깊이가 새겨나게 했다.
사람들을 가득 차게 새기면서 상단에는 빈 여백을 거친 대리석의 질로 그냥 남겨놓았다.
<계단에서의 마돈나>와 이 작품은 과거에도 그리고 미켈란젤로 동시대에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은 고대 석관을 닮아서 그가 특히 피사 근처에 있는 많은 석관을 보고 연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상단에 일부러 거칠게 남긴 부분은 의도적인 것으로 건축에서 미완성으로 남기는 요소를 사용한 듯 보인다.
이 작품의 주제에 관해서는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쓴 콘디비와 바사리 모두 잘못 보았는데,
콘디비는 <데자니라의 강간 Rape of Dejanira>이라고 잘못 보았고 바사리는 <헤라클레스와 켄타우로스 Hercules and the Centaurs>라고 적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작품을 <켄타우로스의 전투>로 본다.

이런 제목이 타당한지 아닌지는 말할 수 없더라도 이 릴리프는 사람들이 투쟁에 휩쓸려 혼잡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몸과 몸이 겹치고 겹쳐서 혼돈을 이룬다.
왼쪽 두 사람은 난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공세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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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다시 파리로 갔다

뒤샹은 1921년 6월 다시 파리로 갔다.
미국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기한이 6개월이었기 때문에 비자를 연기하든지 출국했다가 재입국해야 했다.
그는 연기신청서를 제출하는 대신 파리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는 루엥으로 가서 부모님과 함께 몇 날을 보낸 후 수잔느가 살던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본느를 방문했다.
뒤샹이 없을 때는 로세가 이본느와 섹스했지만 뒤샹이 돌아왔으므로 로세는 이본느가 그와 섹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카비아는 뒤샹을 매우 반기면서 그를 데리고 카페 세르타로 가서 그곳에 진을 친 다다 예술가들에게 소개했다.
그 그룹에는 차라, 브르통, 자크 리고, 루이 아라공, 엘뤼아르와 그의 아내 갈라, 테오도르 프랭켈, 그리고 필립 수포 등이 있었는데, 모두 시인이었고 피카비아도 이 시기에 그림보다는 시를 쓰는 일에 주력하고 있었다.
브르통은 뒤샹을 만나보고 그가 자기만큼이나 우수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뒤샹은 파리에서 다다 예술가들과 어울리면서 우정을 나누었지만 그들의 선언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다다 예술가들이 하는 짓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그들과 동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번 그들을 따라 한 적은 있었다.
피카비아가 자신의 그림 <눈 카코딜산염>에 50명의 친구들로 하여금 서명하도록 했으므로 뒤샹도 덩달아 서명했던 것이다.

파리의 다다는 차라가 1920년 1월 17일 취리히에서 파리로 도착하고 난 후 더욱 극성스럽기 시작했다.
브르통을 중심으로 모인 예술가들은 차라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차라와 피카비아는 브르통과 함께 다다 그룹의 예술가들을 리드했으며, 다다 선언문을 1월 23일에 발표했다.
다다 예술가들은 성적으로 자유로웠고, 매사에 충동적이었으며, 어떤 구속에서라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거리에서 가톨릭 신부를 만나면 조롱했고, 분수를 보면 벌거벗고 들어가 놀았으며, 극장에 몰려가 소란을 피워대며 무대를 향해 계란, 야채, 심지어는 소고기까지 던졌는데, 요즈음 말로 불랑배들 같았다.
뒤샹을 파리의 예술가들에게 소개한 사람은 피카비아였다.
피카비아는 뒤샹의 <로즈 셀라비>를 잡지 『391』에 소개하면서 여장으로 분장한 그를 <성녀> 혹은 다른 말로 <다다 그림>이라고 했다.

뒤샹은 45년이 지난 후 카반느의 질문에 대답했다.

카반느: 선생님은 1921년에 파리로 돌아가 8개월을 머물렀고 …

뒤샹: 나는 당시 여행자 비자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뉴욕에 6개월 이상 머물 수 없었네.
6개월이 지나면 비자를 연기해야 했지.
그때 만 레이가 1921년 7월에 파리로 왔길래 옆방 하녀들이 자는 방에 그를 묵도록 했지.
만 레이는 의상디자이너 폴 퐈르를 만나 좋은 조건으로 데뷔할 수 있었네.
퐈르가 그에게 패션 사진을 찍도록 하여 그는 사진으로 이내 돈을 벌 수 있었지.

카반느: 브르통이 1922년 10월에 『리테라투르』에 선생님에 관한 글을 발표했는데, 선생님을 찬양하는 글이었습니다.
그 글이 흥분할 만한 많은 일을 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뒤샹: 그렇소.
당시 우리 사이에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오갔지.
브르통은 매우 유쾌한 친구였어.
그는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아라공과 엘뤼아르를 능가하는 독보적인 존재로 그들이 브르통의 참모역할을 했네.
내가 그를 어디서 만났지 … 그때는 카페가 하도 많아서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나는 캄페인 프레미에르가에 있는 호텔 이스트리아에 묵고 있었는데 … 아주 형편없는 호텔이었지.
… 만 레이가 같은 층에 묵고 있었어.
그는 커다란 옆 건물 캄페인 프레미에르가 끝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지.
1922년과 23년 사이 그는 그곳에서 작업했고, 잠은 이스트리아에서 해결했네.
난 이스트리아에 늘 있었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거든.

카반느: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것입니까?

뒤샹: 결심한 것은 아니고 <큰 유리>가 그림이 아니듯이 난 그냥 그리지 않게 되었지.
나는 붓과 팔레트를 사용하고 그림에 관해 토론하는 전통적인 개념의 화가로부터 멀리 있었고, 그런 개념은 더 이상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네.

카반느: 그 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갈망이 전혀 생기지 않던가요?

뒤샹: 전혀.
미술관에 가도 그림 앞에서 대경실색하거나 흥미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어.
전혀 그렇지 않았어.
내 말은 옛 대가들 말일세. 낡은 것들 … 종교적인 말로 하면 난 성직을 빼앗긴 것이지.
그러나 스스로 성직을 버린 셈이지.
모든 것이 내게는 역겨웠어.

카반느: 붓이나 연필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까?

뒤샹: 그럼.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충동도 흥미도 없었어.
자네가 이해할려나.
그림은 죽는다네.
그림에 신선한 것이 사라지면서 40년이나 50년 후에는 그림이 죽네.
조각도 마찬가지로 죽어.
이것이 나의 작은 목마dada인데 아무도 동의하지 않지만 난 상관치 않네.
내 생각에 그림은 그것을 그린 사람과 마찬가지로 수년 후에는 죽는다네.
결국 미술의 역사라 부르게 되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시꺼멓게 된 오늘날의 모네의 그림과 60년 또는 80년 전에 그린 밝은 색의 모네의 그림은 대단히 다르다네.
이제 그것은 역사가 되어버렸지.
하지만 그것은 괜찮아.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는 상관이 없으니까.
인간은 유한하고 그림도 마찬가지야.
미술의 역사는 미학과는 매우 달라.
내게 미술의 역사는 미술관에 있는 한 시대인데, 가장 최고의 시대라고는 할 수 없고,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아마 시대의 평범함을 표현한 것일 게야.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들은 사라지고, 대중은 그것들을 보존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이것은 철학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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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미술문화) 중에서 
 
미켈란젤로의 첫 작품 계단의 마돈나

<계단의 마돈나 Madonna of the Stairs (Madonna della Scala)>는 미켈란젤로가 처음 제작한 작품이다.
1492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아직은 독창적이지 못하고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것이 분명하다.
일명 '밀어 넣은 릴리프 squashed relief'로 불리우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16살 혹은 그 이전에 제작했다는 데서 경이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6살의 소년이 제작했다는 데서 천부적 재능이 그에게 있었음을 시위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조각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의 솜씨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는다.
훗날 보완했거나 아니면 15살 이전에 그가 이미 돌깍는 기술을 연마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5살 이전에 기술을 익혔더라도 비싼 대리석을 마음대로 사용하기는 어려웠을 터인데 타고난 재능이 없고서야 이런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계단의 마돈나>는 기술적 문제만이 아니라 구성에서도 놀라운 솜씨를 엿볼 수 있다.
높이 55.9cm의 대리석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마돈나를 가득 차게 최대한으로 확대해서 구성시킨 것이다.
이런 점은 훗날 그의 조각에서 특허와도 같은 요소가 된다.
마돈나는 정방형 토대 위에 앉은 자세이고 그녀의 옷자락은 주름진 채 아름답게 돌 위에 흘러내린다.
옆모습은 가장 이상화된 고전의 모습으로 둥근 후광의 테두리 안에 있고,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주름진 천의 선이 코의 선과 평행을 이루어 후광을 더욱 강조한다.
우미하게 주름진 옷자락은 작은 폭포처럼 어깨로부터 흘러내려 팔을 감고 다리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 가장자리 프래임에 살짝 닿는다.

마돈나가 계단 위의 아이들과 가까이 있어 관람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는데,
원근을 회화적으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품에 안긴 아이는 젖 빨기를 그만두고 어머니의 젖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약간 떨어뜨린 상태다.
아이의 우람한 손이 옷자락 위에 올려져 있다.
근육으로 봐서 아이는 갓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성장했다.
마돈나의 오른발이 왼쪽 다리 안으로 비스듬히 빠져나와 미켈란젤로가 사변적으로 구성했음을 알게 해준다.

계단에 앉아 있는 마돈나의 주제는 생소한 것으로 도나텔로의 <해로드의 향연 Feast of Herod>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계단을 그가 인용한 것이 아닌가 짐작되며 또한 도나텔로의 <마돈나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Child>를 보고 둘을 합성해서 제작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두 작품은 메디치의 소장품이었던 걸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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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의 <왜 재채기하지 않느냐?>

 

캐서린의 여동생 도로시 드라이어는 뒤샹의 작품을 갖고 싶어 했다.
뒤샹은 조그만 새장을 사서 흰색으로 칠한 후 대리석을 자르는 상점에 가서 152개의 하얀 입방체 대리석을 주문했다.
대리석의 크기는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각설탕만 했다.
뒤샹은 152개의 대리석을 새장에 넣고, 체온계와 오징어껍질도 함께 넣었다.
그리고 새장 아래 <왜 로즈 셀라비는 재채기하지 않느냐?>란 제목을 적었다.
도로시는 약속대로 뒤샹에게 300달러를 주고 그것을 받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언니에게 팔았고, 캐서린도 마음에 들지 않아 아렌스버그에게 같은 금액으로 넘겼다.

뒤샹은 훗날 말했다.
<왜 재채기하지 않느냐?>는 캐서린의 여동생이 주문하여 제작한 것인데 그녀는 내 작품을 하나 갖고 싶어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난 그림 그리기를 원치 않았으므로 그녀에게 “좋다. 하지만 내가 제작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했다.
난 각설탕모양으로 생긴 작은 대리석들, 체온계, 그리고 오징어껍질 전부를 흰색으로 칠한 작은 새장 안에 넣었다.
그것을 그녀에게 300달러에 팔았다.
난 돈을 좀 벌었지!
그런데 가련한 여인이 그것을 받고는 아주 화가 났다.
그녀는 언니 캐서린에게 그것을 팔았고, 캐서린도 그것이 못마땅해서 같은 값에 아렌스버그에게 팔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어느 누구도 그것에 만족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아주 기분 좋게 만든 것이었는데. 난 각설탕을 대리석으로 만들어야 했다.
새장을 빼고는 모든 것이 레디 메이드랄 수 없었다.
<발랄한 과부>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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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체스에 모든 에너지를 소비했다


뒤샹은 이 시기에 영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캐서린은 무비 카메라가 시판되기 시작하자 뒤샹에게 선물했다. 무비 카메라의 대량생산은 영화제작을 독점한 헐리우드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했고, 보통사람도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뒤샹은 만 레이와 함께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바로네스 본 프레이탁 로링호벤이 자신의 머리를 깎는 장면을 필름에 담았다.
이런 주제의 영화는 반세기 후 앤디 워홀을 감동시켰으며, 워홀은 이와 유사한 주제로 많은 영화를 제작했다.
만 레이가 기술자 한 명을 뒤샹에게 소개했다.
뒤샹은 무비 카메라를 한 대 빌려 두 대의 무비 카메라를 병렬시킨 뒤 촬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제작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잠시뿐이었다.

뒤샹은 체스에 모든 에너지를 소비했다. 체스에 대한 관심이 무엇보다도 우선이었으며, 마샬 체스 클럽 대회에서 여덟 명의 선수를 뽑는 게임에 이겨 팀에 속하게 되자 더욱 체스에 몰두했고, 뉴욕의 다른 팀 선수들과도 경합을 벌였다.
마샬 체스 클럽을 설립한 프랭크 마샬은 1909년부터 1936년까지 미국의 체스 챔피언으로 살아 있는 전설의 인물이었고,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프랭크는 한 번에 12명과 체스를 두는 기량을 보이기도 했는데, 뒤샹은 12명 틈에 끼어 프랭크를 두 번이나 이긴 경험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뒤샹은 이제 부부가 된 장과 수잔느 크로티에게 보낸 편지에 “나의 체스 실력은 대단히 향상되었고, 노예처럼 연습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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