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뒤샹은 다시 파리로 갔다
뒤샹은 1921년 6월 다시 파리로 갔다.
미국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기한이 6개월이었기 때문에 비자를 연기하든지 출국했다가 재입국해야 했다.
그는 연기신청서를 제출하는 대신 파리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는 루엥으로 가서 부모님과 함께 몇 날을 보낸 후 수잔느가 살던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본느를 방문했다.
뒤샹이 없을 때는 로세가 이본느와 섹스했지만 뒤샹이 돌아왔으므로 로세는 이본느가 그와 섹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카비아는 뒤샹을 매우 반기면서 그를 데리고 카페 세르타로 가서 그곳에 진을 친 다다 예술가들에게 소개했다.
그 그룹에는 차라, 브르통, 자크 리고, 루이 아라공, 엘뤼아르와 그의 아내 갈라, 테오도르 프랭켈, 그리고 필립 수포 등이 있었는데, 모두 시인이었고 피카비아도 이 시기에 그림보다는 시를 쓰는 일에 주력하고 있었다.
브르통은 뒤샹을 만나보고 그가 자기만큼이나 우수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뒤샹은 파리에서 다다 예술가들과 어울리면서 우정을 나누었지만 그들의 선언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다다 예술가들이 하는 짓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그들과 동조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번 그들을 따라 한 적은 있었다.
피카비아가 자신의 그림 <눈 카코딜산염>에 50명의 친구들로 하여금 서명하도록 했으므로 뒤샹도 덩달아 서명했던 것이다.
파리의 다다는 차라가 1920년 1월 17일 취리히에서 파리로 도착하고 난 후 더욱 극성스럽기 시작했다.
브르통을 중심으로 모인 예술가들은 차라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차라와 피카비아는 브르통과 함께 다다 그룹의 예술가들을 리드했으며, 다다 선언문을 1월 23일에 발표했다.
다다 예술가들은 성적으로 자유로웠고, 매사에 충동적이었으며, 어떤 구속에서라도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거리에서 가톨릭 신부를 만나면 조롱했고, 분수를 보면 벌거벗고 들어가 놀았으며, 극장에 몰려가 소란을 피워대며 무대를 향해 계란, 야채, 심지어는 소고기까지 던졌는데, 요즈음 말로 불랑배들 같았다.
뒤샹을 파리의 예술가들에게 소개한 사람은 피카비아였다.
피카비아는 뒤샹의 <로즈 셀라비>를 잡지 『391』에 소개하면서 여장으로 분장한 그를 <성녀> 혹은 다른 말로 <다다 그림>이라고 했다.
뒤샹은 45년이 지난 후 카반느의 질문에 대답했다.
카반느: 선생님은 1921년에 파리로 돌아가 8개월을 머물렀고 …
뒤샹: 나는 당시 여행자 비자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뉴욕에 6개월 이상 머물 수 없었네.
6개월이 지나면 비자를 연기해야 했지.
그때 만 레이가 1921년 7월에 파리로 왔길래 옆방 하녀들이 자는 방에 그를 묵도록 했지.
만 레이는 의상디자이너 폴 퐈르를 만나 좋은 조건으로 데뷔할 수 있었네.
퐈르가 그에게 패션 사진을 찍도록 하여 그는 사진으로 이내 돈을 벌 수 있었지.
카반느: 브르통이 1922년 10월에 『리테라투르』에 선생님에 관한 글을 발표했는데, 선생님을 찬양하는 글이었습니다.
그 글이 흥분할 만한 많은 일을 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뒤샹: 그렇소.
당시 우리 사이에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오갔지.
브르통은 매우 유쾌한 친구였어.
그는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아라공과 엘뤼아르를 능가하는 독보적인 존재로 그들이 브르통의 참모역할을 했네.
내가 그를 어디서 만났지 … 그때는 카페가 하도 많아서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네.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나는 캄페인 프레미에르가에 있는 호텔 이스트리아에 묵고 있었는데 … 아주 형편없는 호텔이었지.
… 만 레이가 같은 층에 묵고 있었어.
그는 커다란 옆 건물 캄페인 프레미에르가 끝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지.
1922년과 23년 사이 그는 그곳에서 작업했고, 잠은 이스트리아에서 해결했네.
난 이스트리아에 늘 있었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거든.
카반느: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것입니까?
뒤샹: 결심한 것은 아니고 <큰 유리>가 그림이 아니듯이 난 그냥 그리지 않게 되었지.
나는 붓과 팔레트를 사용하고 그림에 관해 토론하는 전통적인 개념의 화가로부터 멀리 있었고, 그런 개념은 더 이상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네.
카반느: 그 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갈망이 전혀 생기지 않던가요?
뒤샹: 전혀.
미술관에 가도 그림 앞에서 대경실색하거나 흥미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어.
전혀 그렇지 않았어.
내 말은 옛 대가들 말일세. 낡은 것들 … 종교적인 말로 하면 난 성직을 빼앗긴 것이지.
그러나 스스로 성직을 버린 셈이지.
모든 것이 내게는 역겨웠어.
카반느: 붓이나 연필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까?
뒤샹: 그럼.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충동도 흥미도 없었어.
자네가 이해할려나.
그림은 죽는다네.
그림에 신선한 것이 사라지면서 40년이나 50년 후에는 그림이 죽네.
조각도 마찬가지로 죽어.
이것이 나의 작은 목마dada인데 아무도 동의하지 않지만 난 상관치 않네.
내 생각에 그림은 그것을 그린 사람과 마찬가지로 수년 후에는 죽는다네.
결국 미술의 역사라 부르게 되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시꺼멓게 된 오늘날의 모네의 그림과 60년 또는 80년 전에 그린 밝은 색의 모네의 그림은 대단히 다르다네.
이제 그것은 역사가 되어버렸지.
하지만 그것은 괜찮아.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는 상관이 없으니까.
인간은 유한하고 그림도 마찬가지야.
미술의 역사는 미학과는 매우 달라.
내게 미술의 역사는 미술관에 있는 한 시대인데, 가장 최고의 시대라고는 할 수 없고,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아마 시대의 평범함을 표현한 것일 게야.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들은 사라지고, 대중은 그것들을 보존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이것은 철학이지 …